서적소개
헨리 4세 : 역사와 문학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의 비평론
함정인 / 한국학술정보 / 2008.4.21

– Henry Ⅳ를 통한 Shakespeare의 사극 연구 경향, 지배세력의 담론, 전복의 가능성과 주변 담론 등을 논하다
Henry Ⅳ연구, 셰익스피어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는 지배 권력의 운명처럼 늘 전도될 수 있는 양면성과 이중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이라는 두 문학비평이론 역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의 단면을 공유한 비평임을 단 한 권의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알아보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텍스트 분석이 독자들에게 역사와 문학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셰익스피어 작품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명저라 불리는 정전의 현실적 의미를 재평가하는 계기 마련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이 책을 쓴 것이다.
○ 목차
序 言
槪 論
I 서 론
Ⅱ Shakespeare 사극의 연구 경향
Ⅲ 지배세력의 담론
Ⅳ 전복의 가능성과 주변 담론
Ⅴ 결 론
참고문헌
○ 저자소개 : 함정인
충남 서산 출생 (1955. 9. 16)으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졸업하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영어교육), 한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영문학) 학위를 받았다. 중등교사 명퇴에 이어 현재 대학 강사 및 프리랜서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논저로는 「셰익스피어 사극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한국영어영문학회),「콘라드의 모호성 :『어둠의 한가운데』에 구현된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21세기 영어영문학회)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Henry Ⅳ연구, 셰익스피어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는 지배 권력의 운명처럼 늘 전도될 수 있는 양면성과 이중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이라는 두 문학비평이론 역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의 단면을 공유한 비평임을 단 한 권의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알아보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텍스트 분석이 독자들에게 역사와 문학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셰익스피어 작품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명저라 불리는 정전의 현실적 의미를 재평가하는 계기 마련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이 책을 쓴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르네상스 영국 연극의 대표적 극작가로서, 사극, 희극, 비극, 희비극 등 연극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는 창작의 범위와 당대 사회의 각계각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관객층에의 호소력으로,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존 웹스터 등 동시대의 탁월한 극작가 모두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었다. 특히 유럽 본토에 비해 다소 늦게 시작된 영국 문예부흥운동과 종교개혁의 교차적 흐름 속에서 그가 그려낸 비극적 인물들은 인간 해방이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사상의 가장 심오한 극적 구현으로 간주된다.
1580년대 말로의 주인공들이 중세적 가치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상승적 에너지의 영웅적 면모를 구현하고 있고, 1610년대 웹스터의 주인공들이 인문주의적 가치의 이면에 놓인 어두운 본능의 세계에 함몰되는 추락의 인간상을 대변한다면, 1590∼1600년대에 등장한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은 중세적 속박과 르네상스적 해방이 가장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과도기의 산물로서, 그러한 상승과 추락의 변증법을 극명하게 체현하고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가 초시대성을 획득하는 극소수 작가 반열에 드는 것은 특정한 시대정신의 명징한 관념적 표상이 아니라 무한한 모순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롭게 통합된 존재가 아니라 분열적으로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와 문예를 혁신하는 원동력이었다면, 그러한 인식의 비등점을 이룬 낭만주의, 모더니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활발히 탐구되고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고전임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 잉글랜드의 왕 • 랭커스터 가문의 창시자이자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 헨리 4세 (Henry Ⅳ, 1366 ~ 1413) 개관
헨리 4세 (Henry Ⅳ, 1366년 4월 3일 ~ 1413년 3월 20일)는 잉글랜드의 왕이다. 랭커스터 가문의 창시자이자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으로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며 존 곤트의 아들이다.
1398년 사촌인 리처드 2세에게 쫓겨나기도 하였지만 후에 의회의 지지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랭커스터 왕가를 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헨리 4세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귀족 가운데 왕위를 노리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음모와 반란이 계획되어 이를 막기 위해 몹시 고생하였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친동생 라이오넬 앤트워프의 외손들이 살아있어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헨리 4세는 자신이 헨리 3세의 아들 꼽추 에드먼드의 후손인 점을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반란 외에도 웨일스의 분리독립 봉기가 발생, 이를 진압하였다.

– 헨리 4세 (Henry IV)
.이름: 휘볼링브로크의 헨리 플랜태저넷 (Henry Plantagenet of Bolingbroke)
.출생: 1367년 4월 15일, 잉글랜드 링컨셔 볼링브로크 성
.사망: 1413년 3월 20일,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궁
.매장지: 켄터베리 대성당
.왕조: 플랜태저넷
.가문: 랭커스터
.부모: 부) 곤트의 존, 모) 랭커스터의 블란체
.배우자: 마리 드 보헌, 나바라 왕녀 호아나
.자녀: 헨리 5세, 클래런스 공작 토머스, 베드퍼드 공작 존,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 팔츠 선제후비 블랑슈, 덴마크 왕비 필리파
.형제자매: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 Joan Beaufort, Countess of Westmorland 등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재위: 1399년 9월 30일 ~ 1413년 3월 20일
.대관식: 1399년 10월 13일
.전임: 리처드 2세 / 후임: 헨리 5세
아키텐 공작
.재위: 1399–1400
.전임: 존 2세 / 후임: 헨리 5세
랭커스터 공작
.재위: 1399년
.전임: 곤트의 존 / 후임: 몬머스의 헨리
노샘프턴 백작
.재위: 1384년–1399년
.전임: 험프리 드 보헌 / 후임: 스태퍼드 백작부인 글로체스터의 앤
잉글랜드의 최고궁내경
.재위: 1399년
.전임: 곤트의 존 / 후임: 랭커스터의 토머스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블랜치의 삼남이다.
사촌동생 리처드 2세로부터 해리퍼드 공작, 더비 백작에 봉해졌는데 아버지 곤트의 존이 실권을 쥐고 있을 때는 별 행동을 하지 않았다.
1386년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로 원정을 떠나자 헨리 4세는 정계에 입문해 리처드 2세에게 반대했다.
그는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 함께 청원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왕에게 이를 강요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격노했고 이에 1390년 헨리 4세는 화를 피할 겸 리투아니아와 프로이센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으나, 리처드 2세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1398년 리처드 2세는 헨리 4세와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의 불화를 구실로 국외로 추방해 버렸다.

– 왕위 찬탈과 즉위
1399년 곤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 4세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런데 아직 정국이 안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아일랜드 방문을 강행했고 이 틈을 타 헨리 4세는 잉글랜드를 침략해 뒤늦게 돌아온 리처드 2세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퇴위시켰다.
이어 헨리 4세로 즉위했으며 자신이 헨리 3세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 점을 이용해 왕위 찬탈을 정당화시켰다.
– 귀족들의 위협과 죽음
하지만 결국 찬탈자였기에 몇몇 귀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위협했다.
1400년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이 꾸민 음모를 막아내고, 연달아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며 상당히 고생스럽게 왕위를 유지했다.
헨리 4세의 건강이 나빠지자 헨리 4세의 이복동생이자 곤트의 존의 사생아 가문인 보퍼트 가문과 그의 후계자 몬머스의 헨리와의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에 헨리 4세와 몬머스의 헨리의 사이가 나빠졌으나, 몇 개월 후 헨리 4세가 죽으면서 몬머스의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