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혁명론 : On Revolution
한나 아렌트 / 한길사 / 2004.6.5
새로운 시작이란 의미에서 변동이 발생하는 곳, 완전히 상이한 정부 형태를 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곳, 즉 새로운 정치체를 형성하고자 폭력을 사용하는 곳, 억압에서 해방되는 궁극적인 목적을 적어도 자유의 확립으로 상정하는 곳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혁명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미국 혁명의 방향은 자유의 확립과 지속적인 제도들의 설립에 집중되었다. 시민법의 영역 밖에 있는 어느 것도 이러한 방향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거의 초기부터 고통의 직접성 때문에 이러한 형성과정에서 이탈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혁명 과정은 전제정에서부터 해방이 아닌 필연성에서 해방이란 절박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의 목적이 자유의 확립이고 반란의 목적이 해방이라는 것을 괘념한다면, 정치학자는 훨씬 조용하게 진행되는 혁명과 헌법 제정에 손상을 입혀가면서 제1단계의 갑작스런 반란과 해방운동, 전제정에 대한 봉기를 강조하는 역사가의 함정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에 대해 최소한 알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작과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혁명’의 의미를 반추하는 책
혁명 과정에서의 해방, 자유의 확립, 그리고 자유의 제도화 실현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제시했다.
저자는 혁명 참가자들의 행적에 담긴 의미를 현대의 인간관계망과 해석망으로 끌어들인다. 정치적 비극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자 한 그녀의 혁명송은, 우리의 과거를 공평하게 평가하고 현실 정치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나아가 폭력을 미화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고통을 야기했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혁명정신을 지속적으로 발현시키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목차
‘새로운 시작’과 자유를 기리는 혁명송 / 홍원표
서론 : 전쟁과 평화
1. 혁명의 의미
2. 사회의 문제
3. 행복의 추구
4. 건국I : 자유의 확립
5. 건국II : 새로운 세속적 정치질서
6. 혁명 전통과 상실된 보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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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보냈는데, 이때 어머니를 통해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조숙하고 명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했지만,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 마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하이데거에게 수학하지만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1929)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9년 스테른(Gunter Stern, 1936년 이혼)과 결혼하여 베를린에 정착한다. 이후 아렌트는 정치적 억압과 유대인 박해가 첨차 심해지던 독일에서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뒤, 1933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 후 발터 벤야민 등 많은 지식인을 만나 유대인 운동을 하던 아렌트는 다시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0년에,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명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들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준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세의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렌트는 1951년에 이르러서야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는데,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완전한 교수직에 지명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경험한 18년간의 무국적자 경험을 바탕으로 첫 번째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을 출간하고, 더불어 정치이론가로서 정치현상의 근본적 의미를 밝히는 데 전념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사상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라헬 바른하겐 : 유대인 여성의 삶』(Rahel Varnhagen : The Life of a Jewish Woman, 1958),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196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 『혁명론』(On Revolution, 196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Men in Dark Times, 1968),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Lying in Politics, 1969), 『시민적 불복종』(Civil Disobedience, 1969), 『폭력의 세기』(On Violence, 1969) 등 중요 저작들을 연이어 출간한다. 이 가운데 『혁명론』에는 아렌트의 최종적인 ‘정치’ 사상이 담겨 있는데, 그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계기로 혁명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프린스턴 대학 세미나에서 「미국과 혁명정신」이란 주제로 강연한 것을 정리해서 완결지은 것이다. 『혁명론』은 ‘새로운 시작’ 과 자유를 기리는 혁명송이자, 정치학도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귀중한 교과서로서 의미 있는 저작이다.
아렌트는 1973년 에버딘 대학에서 ‘정신의 삶―사유’라는 주제로 기퍼드 강의를 요청받은 후 사유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이듬해 ‘정신의 삶―의지’라는 주제로 다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 연구를 진행했다. ‘정신의 삶―판단’이라는 주제로 정신의 삶 3부작의 마지막 연구를 진행하던 중 1975년 12월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쳤으며, 남편이 오랫동안 강의한 뉴욕주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Annandale-on-Hudson, New York)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혔다. 그녀의 사후 『정신의 삶―사유』와 『정신의 삶―의지』가 1978년 출간되었으며, 완성되지 않은 3부에 해당하는 「판단」 부분은 유고집으로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1982년 출간되었다. 그후 이미 발표된 글들 및 미발표 원고 등을 주제별로 편집하여 『이해에 대한 에세이』(1994), 『책임과 판단』(2003), 『정치의 약속』(2005), 『유대적 저술』(2007), 『문학과 문화에 대한 성찰』(2007) 등이 출간되었다.
.역: 홍원표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고전적 합리주의의 현대적 해석: 스트라우스, 보에글린, 아렌트>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부터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언어외교학부에 재직하고 있으며 미네르바교양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무처장, 한국정치학회 편집이사?총무이사?부회장을 역임했고, 한나아렌트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현대 정치철학의 지형》(2002), 《아렌트: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다》(2011),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 행위, 전통, 인물》(2013), 《비극의 서사》(2018) 이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역서로는 《정신의 삶: 사유》(2004), 《혁명론》(2004), 《한나 아렌트 전기: 세계사랑을 위하여》(2007),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2010), 《이해의 에세이》(공역, 2012)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근대의 혁명들은 로마 역사의 정권 변동 또는 그리스 도시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내란과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한 정부 형태에서 다른 정부 형태로의 의사 자연적 변혁, 즉 플라톤의 변동을 혁명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또는 항상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인간사 때문에 이를 제약하는 일정한 반복적 주기, 즉 폴리비우스의 정치 순환을 혁명과 동일시할 수 도 없다. 고대는 정치변동과 이에 병행하는 폭력에 매우 친숙했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현시키지는 않았다. 변동은 근대가 역사라 부른 것의 과정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역사는 새로운 것으로 시작하기는 커녕 그 순환의 다른 단계로 복귀하고, 인간사의 본질 자체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 따라서 역사는 자체로 불변하는 과정을 규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p.85
– 출판사 서평
20세기의 가장 주목 받는 정치 사상가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의 1963년 작 <On Revolution>의 한국어 번역판이다. 이 책은 전체주의를 ‘반(反)정치’로 규정하며, 인간의 삶에서 개개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정치 공동체의 실현을 중요한 요건으로 보는 아렌트의 전작에서 논의를 좁혀 주변적 정치 현상인 폭력을 논의의 주제로 삼았다.
<혁명론>에서는 정치적 삶이 처참한 저주가 될 수도, 커다란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하며 축복의 정치를 성취하지 못하면 저주의 정치를 피하기 어려움을 통찰한 이전의 논의들을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구체화했다. 혁명을 ‘새로운 시작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라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며, 자유에 대한 일상적 경험을 정치화하고 이를 정치 영역에서 표출하는 것을 혁명의 실현으로 보는 아렌트의 시각이 담겨있다.
전반적으로 전작 <인간의 조건>에서 다루어진 중심 주제인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심화된 통찰을 담고 있다. 아렌트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개인윤리와 공공의 윤리의 차이를 근거로 대비시키며, 진정한 유대를 가능케 하는 공공 영역의 예를 혁명의 역사 속에서 찾는다.
– 독자의 평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제목이 워낙 눈길을 끌어서 읽게 되었다. 제목은 ‘혁명론’이기는 하지만 내용은 어떻게 혁명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해주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내용이었다면 당장 불온서적으로 찍혀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않았을까?
한나 아렌트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미국 (독립이 아닌)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과 자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혁명을 지배받는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복시키는 행위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을 혁명의 한 요소정도로 혹은 어쩔 수 없이 표출되는 폭력적 행위로서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과 함께 그 과정을 완성시키는 제도와 입법 그리고 새로운 권력과 권위의 창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입장에 있고,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베버나 기타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학자로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혁명론’에서 다룬 논의에 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녀의 논의에 호응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는데, 그녀는 미국 혁명이 혁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호의적이었지만 그 제도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애매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제도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인 고착화를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미에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판은 그러한 제도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연 그 법과 제도가 적절하고 공정하게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당장 1960년대 말까지 미국 내에서 있었던 인종차별과 그 외의 성적 소수자 및 여성차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적절한 제도와 법이 있다면 알아서 모든 것은 굴러간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논의를 보다 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쩌면 제도화를 통해서 하나의 순간의 혹은 사건으로서의 혁명이 지속성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종의 영구 혁명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정치제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만 근대사회의 다른 축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도 않고 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에 대해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부분적으로 혹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맑스(마르크스)주의와는 일정부분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해관계 없이 근대 사회의 혁명을 말하기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논의는 폭이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 말고도 아쉬운 부분은 그녀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홀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시각들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일 수 있기도 하겠고, 그녀가 독일과 유럽에서 경험했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가 인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독재와 공포정치가 있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으로 이어졌고, 상대적으로 다원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상호협조적인) 양당제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전반적으로 그녀는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옹호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제도적인 부분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혁명세력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정치적인 혹은 제도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민중들의 불만을 대신해서 표출하는 것에 급급했고,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의 독재가 이뤄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많으며 이후의 혁명들도 미국 혁명에서 본받는 것인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서만 무언가를 본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의견이 많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비판으로 인해서 미국 혁명을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 대해서 조금은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례로 하워드 진과 같이 미국의 정치와 혁명이 기본적으로 가진자들의(즉,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일어난 것일 뿐이며 전혀 일반인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의 입장으로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의견은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논의에서는 동조하기는 힘들었지만 부분적인 혹은 분석적인 부분에서는 꽤나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많은 논의였다. 자유라는 것을 소극적 / 적극적 자유로 나눠서 보다 폭 넓게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폭력과 혁명에 대해서 풍부하게 논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고, 로베스피에르, 마키아벨리, 토마스 제퍼슨 등 역사적 중요 인물들의 정치적 선택을 보다 잘 알고 있지 못하여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어려움을 느끼며 읽게 되었다.
아마도 위의 인물들과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알고 있다면 보다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내용을 모르는 부분에서는 읽는데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어떤 과정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는지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일부 지식만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읽는데 꽤나 힘겨웠다.
다수성과 대표성 그리고 평등 등 다양한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 혁명에 대해서 그녀가 갖고 있는 이상할 정도로의 편애는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또한 기본적으로 그녀의 논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읽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대 로마와 초기 기독교 사회에 대한 혁명세력들의 지속적인 관심의 이유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분석을 해주었기 때문에 조금은 당시의 시대를 생각하도록 만들고는 있다.
한나 아렌트는 책의 말미에서 자코뱅과 레닌의 볼셰비키의 예를 들며 혁명 결사들의 혁명 이전에 보여주었던 개방성과 함께 권력을 획득 한 이후의 폐쇄성과 독재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아마도 혁명을 꿈꾸는 혹은 진보적인 정치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 부분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현재의 정당제는 결국 과두정이고 엘리트 정치인들로 운영되어 일반인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결국 정당은 투표일에만 인민들을 대표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녀는 맑스와 레닌이 혁명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평의회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평의회에 대해서 혹은 최대한 직접적인 의사표시가 가능한 방식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녀의 논의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본인도 말을 했듯이 일종의 피라미드 형의 구조를 갖고 있고, 지극히 낙관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밑으로부터의 의견을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있으면서도 대표성을 잃지 않는… 일정 수준 이상의 평등성도 보장된, 과연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 정치를 할 수 있는 대안이 평의회일지 혹은 새로운 무엇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 없이 읽다가 조금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Ps : 혁명이라는 말이 원래는 ‘복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지극히 언어학적인 그녀의 설명에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