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현상학과 예술
모리스 메를로 퐁티 / 서광사 / 1989.2.28

.현대 미학에 관한 미학적 사고를 고찰하는 현상학을 다룬 인문서
현상학의 정의와 개요를 분석하고,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미학이론과 예술에 대한 존재론적 사고 등을 다루었다.
– 목차
1.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2. 지각의 기본성과 그 철학적 제귀결
3. 언어의 현상학에 관해서
4.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5. 세잔느의 회의
6. 형이상학과 소설
7.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
8. 종교,역사,철학
9. 눈과 마음

– 저자소개 : 모리스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Ponty)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현상학적 운동의 두 기념비적 저작을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의 로쉬포르 쉬르 메르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사르트르를 만나 현상학자로서의 길을 함께 걸었으나 나중에 정치적 적대자로 돌아서게 된다.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한 후 여러 국립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 예컨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레이몽 아롱, 조르주 바타유, 자크 라캉, 에릭 베이유, 시몬느 드 보부아르, 알렉산더 코제브 등과 교유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1930년대 말에 후설의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평생 철학 사상의 기본 방향과 틀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여러 국립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행동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1942)를 저술했고, 그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지하 운동 시절에 『지각의 현상학』(1945)을 준비했다. 현상학의 두 대표 저작이 나온 이후 소르본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죽기 마지막 10년은 베르그송을 거쳐 라벨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프랑스 대학 철학 교수로 활동했다.
마지막 저술이자 논문은 『눈과 마음LOeil et l’esprit』(1961)이고, 후기 사상을 담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Le Visible et l’invisible』(1964)은 제자 클로드 르포Claude Lefort에 의해 편집되어 유고작으로 발행되었다.
.역자: 오병남

– 책 속으로
그렇다면 영화가 의미하는 것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모든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일정한 인물들을 포함하는 일정한 사건들의 얘기이며 그리고 그들 사건들은 사실상 영화가 기초하고 있는 시나리오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산문으로 들려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주로 대화가 압도적으로 되고 있는 발성영화는 이러한 환상을 완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활동 사진은 종종 시각적이고 음성적인 재현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즉 문학은 다만 말로써 환기시킬 수밖에 없되 영화가 나타나 다행히도 촬영할 수 있는 어떤 희곡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재현해 놓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 p.258

– 독자의 평
수업 때문에 메를로 퐁티의 <눈과 마음>을 읽는다. 이 논문이 번역되어 있는 <현상학과 예술>은 구입한지 오래 되었지만, 거기에 실려 있는 글들을 다 읽어보지 못했다. 여기에 실려 있는 글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현상학이나 메를로 퐁티의 글 자체를 본 적이 너무 오래 되었다. 김형효 교수로부터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배웠을 때 그래도 퐁티의 저술이나 퐁티에 관한 저술들을 복사해 놓는다고 복사해 놓았지만, 누락된 것이 많다. <행동의 구조>도 복사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없다.
예술에 대한 퐁티의 글을 번역한 오병남 교수의 역자 서문은 다른 번역책에서도 그가 했듯이 다양한 미학서적들에 대한 번역을 자신이 시도하는 연유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하나에만 굳어지는 편향되고 편협한 사고를 갖는 대신에 현대미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들을 소개한다는 것이다.
오병남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철학적 풍토에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서로 갈라져 있고, 서양철학 속에서도 영미철학과 현대 유럽철학이 갈라져 있고, 또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에 대한 취향으로 서로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나아가 시대적으로 서로 갈라져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이 점은 예술철학의 경우에는 더 심할 것처럼 생각된다. 속해 있는 철학적 경향에 따라 예술철학에 대한 개념은 물론이고 그 철학 하는 방법조차 사뭇 다르다.
이미 오병남 교수에 대한 어떤 논평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오병남 교수가 생각하는 예술철학의 개념은 독특하다. 그는 예술철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주장이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예술은 일종의 인식이어야 한다. 둘째 존재와 진리에 대한 인식은 과학적 인식과 달라야 한다. 예술철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주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그에게서 메를로 퐁티는 아마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체계적인 예술철학의 한 가능한 근거>를 메를로 퐁티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오병남 교수는 메를로 퐁티의 예술철학과 딕키의 제도론의 유사성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씌어진 죠지 딕키의 <미학입문>이나 <현대미학>은 예술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접근과 일치 혹은 접목의 관계까지는 아니라 해도 양자 간에 어떤 관계 설정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 딕키가 말하는 일종의 사회제도로서의 예술계의 존재에 대한 분석과 메를로-퐁티에게서 시사되고 있는 제도적 본질로서 예술의 개념 간의 관계가 그러한 한 사례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오병남 교수의 희망이 단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딕키가 말하는 예술계는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마련된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장치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메를로 뽕티의 예술철학이 보여주는 어떤 존재론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메를로 퐁티가 관심을 갖는 것은 딕키와 같은 분석철학자들이 시도하는 예술 개념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활동으로서 예술의 본성을 밝히려는 노력이다.
메를로 퐁티와 딕키와의 유사성을 찾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병남 교수는 올드리치와 메를로 퐁티의 유사성도 찾고 있다. 공교롭게 올드리치는 그의 작은 책 <예술철학>에서 자신의 작업을 <예술 현상학>이라고 명명한다. 물론 이러한 예술 현상학이 메를로 퐁티가 속해있는 현상학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럼에도 오병남 교수는 올드리치가 <말하는 현상과 지각의 개념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현상과 지각의 개념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특수한 방식의 지각의 현상을 말하고, 그 기술로서의 예술 현상학을 말하고 있는 공식적인 어법에는 많은 유사성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더우기 올드치가 감지(prehension)라고 말하는 있는 특수한 지각의 개념을 잘 검토해 보면 그가 그 개념들을 통해 말하고자 의도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만은 비슷한 점이 눈에 많이 띄고 있다.>
오병남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올드리치와 메를로 퐁티의 유사성도 지나치게 과장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올드리치가 말하는 감지는 바로 미적 지각의 객관성을 의미한다. 미적 판단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과 오병남 교수나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예술이 실재에 대한 일종의 인식이라는 주장은 서로 다른 주장이다.
중요하게도 나는 오병남 교수가 주장하는 저 두 가지 주장이 있어야만 비로소 예술철학이 성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철학이라는 용어를 다소 자유롭게 사용한다.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술에 대한 몇몇 철학적 문제들과 그 답변을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이 인식이 아니며, 나아가 과학과 다른 존재나 진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예술철학이라는 철학의 한 분과가 성립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