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황무지
T. S. 엘리엇 / 민음사 / 2017.3.20
모더니스트 시인 T. S. 엘리엇을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가지다. 낭만적 서정 시인이자 이상적 혁명주의자.
그의 대표작을 묶은 이 시선집 『황무지』는 꿈같은 환상의 세계, 강렬한 주관적 색채, 그리고 사회 정의 구현과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록들로 요약할 수 있다.
○ 목차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전주곡들 PRELUDES
우는 처녀 LA FIGLIA CHE PIANGE
황무지 THE WASTE LAND
1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2 체스 놀이 A GAME OF CHESS
3 불의 설교 THE FIRE SERMON
4 수사(水死) DEATH BY WATER
5 천둥이 한 말 WHAT THE THUNDER SAID
작가 연보
작품에 대하여: 모더니즘과 새로운 시의 탄생 (황동규)
○ 저자소개 : T. S. 엘리엇
저자 T. S. 엘리엇은 시인이자 극작가, 문학 평론가다.
1888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과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고 프랑스 소르본대학교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유럽 문학을 더 깊이 공부했다.
1914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에즈라 파운드를 만나 이듬해 등단한 이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17년 첫 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을, 1922년에는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대표작 「황무지」를 발표하며 전 세계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연극적인 요소를 가진 극시와 평론 등 다양한 장르와 새로운 기법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극시들은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특히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캐츠」는 1981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로 꼽힌다.
현대 영미 문학에 큰 영향을 준 공로로 1948년 메리트훈장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역자: 황동규
역자 황동규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비가』, 『몰운대행』,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겨울밤 0시 5분』, 『연옥의 봄』 등의 시집을 펴냈다. 옮긴 책으로 바이런의 『순례』, 예이츠의 『1916년 부활절』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 책 속으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 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황무지」에서(41쪽)
나는 늙어 간다…… 늙어 간다……
바짓자락을 접어 입을까 보다.
머리 뒤로 가르마를 탈까? 감히 복숭아를 먹어 볼까?
나는 하얀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을 테다.
나는 인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 서로서로에게.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 주리라곤 생각 안 해.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서(23쪽)
겨울 저녁이 통로(通路)마다
비프스테이크 냄새와 함께 자리 잡는다.
여섯 시.
연기 피운 하루들의 타 버린 동강이들.
그리고 지금 돌풍 소나기가
너의 발치의 시든 잎새들과
공터에서 온 신문지의
검댕이 낀 조각들을 싼다.
소나기는 쪼개진 차양(遮陽)과
굴뚝 토관(土管)을 때린다.
그리고 거리 구석에선
외로운 마차 말이 몸에서 김을 내며 발을 구른다. ―「전주곡들」에서(27쪽)
○ 출판사 서평
미숙한 시인들은 모방한다. 완숙한 시인들은 훔친다. 나쁜 시인들은 훔쳐 온 것을 흉하게 만들고 좋은 시인들은 더 낫게 만든다. 더 낫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훔쳐 온 것과 다르게는 만든다. ― T. S. 엘리엇
“영어로 쓰인 최초의 현대시” ― 에즈라 파운드
“지옥 같은 상상력의 절정” ― 노스롭 프라이
- 모더니즘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20세기 거장 T. S. 엘리엇
엘리엇을 이해하는 데는 모더니즘을 20세기 전반의 문학 조류의 하나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또 하나의 입장, 즉 서구 문학이 칸트 이래로 추구해 온 하나의 목표, 즉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autotelic) 생각의 정점에 「황무지」가 서 있다는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의 흐름 속에서 괴테를 비롯해 플로베르, 보들레르, 조이스, 토마스 만 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황동규, 「해설: 모더니즘과 새로운 시의 탄생」에서
모더니스트 시인 T. S. 엘리엇을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가지다. 낭만적 서정 시인이자 이상적 혁명주의자. 그의 대표작을 묶은 이 시선집 『황무지(The Waste Land)』는 꿈같은 환상의 세계, 강렬한 주관적 색채, 그리고 사회 정의 구현과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록들로 요약할 수 있다.
1948년 T. S. 엘리엇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것은 대단한 영예이자, 선정 위원회가 모더니즘을 인정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첫 노벨 문학상이 수여된 1901년 이후 반세기 동안 심사위원들이 보여 준 취향은 확실히 낡아 있었다. 때문에 1923년 수상자 W. B. 예이츠를 제외하고는, 엘리엇 이전 수상자들은 사실상 모두가 지금은 대체로 잊혔다. 그러나 엘리엇은 1948년 노벨 문학상 선정으로 국제적 명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그는 난해하고 시종일관 혁신적인 다섯 편의 시를 하나의 제목으로 묶은 『황무지』(1922)로 처음 명성을 얻었다.
1922년에도 무명은 아니었다. 두 권의 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과 『시들 (Poems)』 (1920)이 독자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환멸을 깨는 선언적 시구들 덕분에 다른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시집이 많이 팔렸다.
나는 늙어 간다…… 늙어 간다……
바짓자락을 접어 입을까 보다.
머리 뒤로 가르마를 탈까? 감히 복숭아를 먹어 볼까?
나는 하얀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을 테다.
나는 인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 서로서로에게.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 주리라곤 생각 안 해.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서(23쪽)
그러나 엘리엇을 국제적인 문학 명사로 만든 것은 바로 『황무지』였다. 세계대전의 공포가 엘리엇이 『황무지』에 크나큰 절망을 표현할 만큼 크지 않았더라도, 엘리엇은 자신이 자란 건전한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 반항심을 품고 성장했다. 그는 부르주아 문화가 둔감하고 자기만족적이며 진정한 시에 해롭기 때문에 풍자할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엘리엇은 사실상 모더니스트 운동에 무심코 가담한 셈이다.
그는 1888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부유하고 독실한 유니테리언 교파 가문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마땅한 스승이 없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만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시인데, 영국에는 그런 시가 없다. 프랑스에만 있다.” 그는 미국에서 접할 수 있는 시들이 깊은 의미도 없고 얻을 것도 전혀 없다고 했다. “1909년과 1910년은 젊은 시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체되어 있었다.” 이 비판적인 회고에 등장한 해들은 그에게 의미가 컸다. 하버드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거의 필사적으로 시의 길을 찾던 그가 막 졸업하던 해였다.
그러나 1909년 엘리엇은 이미 자기 해방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있었다. 1908년 말 그는 10년 전 출판된 아서 시먼스의 논문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운동」을 읽게 되었다. 그 논문은 프랑스 모더니스트 시인들인 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를 높이 평가했다. 이 프랑스 작가들은 미국이나 영국의 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주제를 다루었다. 산문시를 시도했고, 이상 세계를 상세히 묘사하려 했고, 검증되지 않은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고, 외설스러운 연애시를 썼고, 사상을 감정으로 구체화하였다. 간단히 말해 독창적으로 시인의 내적 세계를 탐구하고, 앞에서 말한 모더니즘의 필수 구성 요소인 주관성을 획득하려 했다. 그 작품들이 충격적일 만큼 참신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20세기를 대표하는 시 하나를 고르라면 「황무지」
개인의 기호에 관계없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 한 편만을 고르라면 「황무지」가 뽑힐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1922년 출판되자 곧 ‘새로운 시’의 보통명사가 되었고, 그 새로운 시에 ‘모더니즘’이라는 팻말이 붙은 후에는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고 다른 모든 문화 현상과 마찬가지로 명성의 오르내림을 겪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한창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헤게모니를 상당히 빼앗긴 지금에 와서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최초의 뛰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이 생길 정도인 것이다. ―황동규, 「해설: 모더니즘과 새로운 시의 탄생」에서
엘리엇은 프랑스 문단의 삐딱한 반부르주아 아웃사이더들을 스승 삼아, 현대시에 이제껏 탐구된 적이 없는 어법, 운율, 주제를 도입하였다. 특히 『황무지』를 통해 새로 터득한 기법을 능수능란히 구사하게 되었다. 엘리엇이 에즈라 파운드에게 시의 초고를 보여 주자 이 친한 친구이자 없어서는 안 될 기획자, 시인, 번역가는 『황무지』의 원고를 가차 없이 잘라 냈고, 엘리엇을 설득하여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엘리엇에게는 독자의 뇌리에 남을 적절한 언어를 찾는 재능이 있었다. 『황무지』는 그의 언어적 허세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인용을 하거나 일부를 골라 고쳐 쓰는 것은 물론이고 압운시든 자유시든, 행이 길든 짧든, 노동 계급 여성의 언어든 교양층 신사의 언어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민중 영어든 모두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 존경하는 모더니스트의 아버지 보들레르의 문장까지 써먹었다.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You! hypocrite lecteur! mon semblable,mon frere!)”
그러나 『황무지』의 화려한 문체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조차 다섯 편의 시의 통일성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엘리엇은 곳곳에 섬뜩하고 기억에 남아 잊히지 않을 행들을 심어 놓았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놀라운 첫 행은 말할 것도 없고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와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와 같은 행들이 있다. 그 시에는 비밀스러운 인유와 알 수 없는 화자들, 동양어 (‘샨티’, 그 시의 마지막 단어로 두 번 반복된다. 엘리엇은 해설에서 그 단어가 산스크리트어이며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축복의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독일어나 프랑스어 행이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처럼 의미 없이 불쑥 삽입된 것 같은 행들 때문에 독자들은 더 당혹스럽다. 엘리엇의 전기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는 이렇게 간파했다. “그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너무도 급진적인 것처럼 보였고 급진주의자들에게는 너무 보수적으로 보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많은 독자들에게 그 시는 모더니즘의 악몽이었다. 그 시를 이해하지 못해 등을 돌려 버린 사람들을 보고 수많은 평론가들이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은 『황무지』가 주는 바로 그 당혹감 때문에 그 시에 찬사를 보냈다. 소설가 겸 시인인 콘래드 에이컨은 엘리엇과의 오랜 친분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평가를 내렸다. “『황무지』가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계획성이 아니라 비일관성, 명확한 의미가 아니라 모호성 덕분이다.”라고 주장했다.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해석이었다. 가장 경제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은 평론가 노스롭 프라이의 해석일 것이다. 그는 그 시가 “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유럽, 주로 런던의 모습이며 엘리엇의 ‘지옥 같은’ 상상력의 절정이다.”라고 했다. 프라이가 ‘지옥 같은’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대단히 적절했다. 엘리엇은 영국의 문명이 지옥에 빠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지옥 이미지가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공감하는 독자들조차 그가 시에서 ‘천벌’을 자주 언급하면서도 ‘구원’에 대해서는 거의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기질상 모더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주관적인 요소를 부가해야 프라이의 해석이 더 완전한 것이 된다.) 엘리엇은 전쟁 전에도 현대 세계에 대해 경멸감을 확연하게 표현했다. 독자들이 『황무지』에서무엇을 얻었든, 엘리엇의 문학적 급진주의는 너무도 확실했다. 그는 곧 모더니스트 시인 중의 시인이 되었다.
○ 황무지 (The Waste Land) 해설 (개요)
유명한 시 구절들인
첫,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고, 기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시들한 뿌리를 깨운다.”(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 Memory and desire, stirring /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그리고,
“한 줌의 손안에 든 먼지만큼이나 공포를 보여주마”(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마지막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문인,
“샨띠 샨띠 샨띠”(Shantih shantih shantih)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황폐한 모습을 상징적인 소재와 구성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모더니즘 시인인 T. S. 엘리어트가 1922년 출간한 434 줄의 시이다.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Bennett, Alan (12 July 2009). “Margate’s shrine to Eliot’s muse”. The Guardian. Retrieved 1 September 2009.]
이 시는 난해한 시로, 문화와 문학에서 넓고, 부조화스럽게 나타나는 풍자와 예언의 전환, 그 분열과 화자의 알려지지 않은 변화들, 위치와 시간, 애수적이지만, 으르는 호출 등이 나타나는 시이다.
이 시는 현대 문학의 시금석이 되었다.
엘리엇은 원래 이 시의 제목을 ‘그는 다른 목소리들로 정탐을 한다 (He Do the Police in Different Voices)’라고 지으려고 했다. 스위스에서 가져왔던 시 편에서 시의 처음 두 부분 ‘죽은 자의 매장’과 ‘체스게임’에 이 제목이 있었다. 이 이상한 구절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모두의 친구 (Our Mutual Friend)》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과부인 베티 히그던은 양자인 슬로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You mightn’t think it, but Sloppy is a beautiful reader of a newspaper. He do the Police in different voices.” – From Our Mutual Friend by Charles Dickens
그러나 이 제목은 거부를 당하고 결국 선택한 제목이 바로 ‘황무지 (The Waste Land)’이다.
제목이 ‘그는 다른 목소리들로 정탐을 한다 (He do the Police in Different Voices)’ 에서 ‘황무지 (The Waste Land)’로 바뀌었듯이 이 시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첫 행도 원래 “처음에 우리는 저 아래 톰의 가게에서 필러를 두 잔 마셨지”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장이었다고 한다. 1921년 엘리엇이 쓴 시는 난폭한 아일랜드 몇 사람이 보스턴 시내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에즈라 파운드라는 명민한 편집자가 적극 개입하면서 매혹적인 첫 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은 1971년 엘리엇의 미망인 발레리가 이 시의 최초 타자 원고를 갖고 학술적인 주석판을 펴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에즈라 파운드 / Ezra Loomis Pound, 1885 ~ 1972, 미국의 시인. 이미지즘과 그 밖의 신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어 엘리엇, 조이스를 소개하였다.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면서 T. S. 엘리엇과 사귀면서 시 《황무지》를 과감하게 편집하고 수정했다. 《피산 캔토스》(1948)로 보링겐상을 받았다. 이백의 영역《The Ta Hio》등 다방면의 우수한 번역을 남겼다.]
이 시는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Satyricon)에서 온 라틴어와 그리스어 묘비명으로 시작된다.
이 묘비명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이태리어가 섞여있다. 의미는,
“그런데 ‘쿠마에 (Cumae, 나폴리 북서부) 시빌 (sibyl, 신녀)’이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걸 난 정말 직접 보았어.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라고.” [sibyl은 고대 희랍어 sibylla에서 유래된 말로, 각 지역의 신전을 주재하던 무녀 혹은 여사제.]
“Nam Sibyllam quidem Cumis ego ipse oculis meis vidi in ampulla pendere, et cum illi pueri dicerent:
Sibylla ti theleis; respondebat illa: apothanein thelo.”
“죽고 싶다”는 위의 제사 (題詞)로 시작하여, “평화, 평화, 평화 (Shantih, shantih, shantih, 샨띠, 샨띠, 샨띠)”로 끝맺는다.
‘죽고 싶다’와 ‘평화’는 어떤 관계로 맺어졌을까?
고대 희랍어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만남,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은 이 시에 단 자주 (自註)에서,『우파니샤드』를 끝맺는 만트라, 즉 진언 (眞言)인 ‘샨띠’는 신약 성서 『빌립보서』의 “인간의 사고를 초월한 하나님의 평화”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파니샤드: 인도의 정통 브라만 철학의 연원으로서,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 (典據)가 되었다. 근본 사상은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 (Brahman: 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 (Ā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 (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자’인 성령의 위로를 받는다. 위로를 받으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
새는 ‘울다’고 하고 ‘노래한다’고도 한다.
비둘기는 ‘구욱 구욱’ 울면서 평화를 노래한다.
이 시는 영국인들도 무슨 말인지 모를 서양 고전어들인 라틴어와 헬라어로 처음의 인용문 즉, 제사 (題辭) 에서 시작하여 동양 고전어인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끝맺는다.
위의 제사는 『쿼바디스』에서 네로의 문학 선생으로 등장하는 로마 문필가 페트로니우스의 『사튀리콘』에서 인용한, 로마의 유명한 여자 예언자 시빌(Sibyl)의 이야기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아폴로 신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줄 터이니 말해 보라고 하자, 그녀는 마침 한 움큼 쥐고 있던 모래를 가리키면서 이 모래알 수만큼 오래 살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원한 청춘을 달라는 말은 잊었기 때문에 그녀는 늙고 늙어 쪼그라들어 주먹만한 ‘작은 노인’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를 새장 속에 가두어 길거리에 매달아 놓았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시빌, 뭘 원하니?”하고 물으면, “죽고 싶어”라고 대답한다는 이야기다.
‘작은 노인’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작은 ‘소인’이다. 시인이 『황무지』의 서론 격으로 넣으려 했던 「게론티온 (Gerontion)」도 헬라어로 ‘작은 노인’이라는 뜻이다. ‘노인’은 영어로 ‘old man’이다. 성서 『로마서』에서는 원죄로 타락한 인류를 ‘old man’이라 부르고 이것이 ‘옛 사람’으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도 ‘노인’은 집에나 처박혀 있으라며 ‘극보수 타락한 인류’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다.
‘old’를 ‘옛’으로 번역할 때는 생각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황무지』가 ‘현대 세계의 비판’이라는 비평가들의 평가에 대하여 “나에게 이 시는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아주 하찮은 불평이며, 리드미컬한 투덜거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아주 하찮은’은 ‘old’의 다른 표현일 수 있으나, 불평이나 투덜거림은 ‘old’하게 늙어온 세월의 삶에 대한 아픔의 표현이다.
그 세월의 시각 (時刻)들은 삶의 시각 (視角)들을 반영한다. 그 시각들은 욕망의 시각과 기억의 시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3부에서 관객으로 등장하는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도 남녀 등장인물들의 시각을 통합하는 시인 자신이다. 이 시 『황무지』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이다. 시인은 첫 부인 비비엔과의 불행한 결혼이 “『황무지』를 태어나게 한 심리 상태를 가져다주었다”고 회고했다.
이 시는 황무지에 대한 객관적 묘사거나 비판이라기 보다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엘리엇은 열네 살 때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Fitzgerald)가 번역한 『오마르카얌의 루바이얏』을 읽었다. 이 시 세계에 들어가 본 ‘압도적인’ 경험은 어린 소년에게 ‘종교적 귀의’와 같았다. 이 시를 읽고 시인이 되는 꿈을 꾼다.
이 시는 술로 인생무상을 달래자는 ‘찰나주의’ 철학을 담고 있다. 술은 “과거의 한과 미래의 공포를 씻어준다.” 그리고 “달력에서 죽은 어제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일들을 지워버린다.” 미래의 공포는 희망에서 나온다. [찰나주의 (刹那主義): <인생의 참(眞)은 찰나 (1/75초)적인 행위에만 있다고 하여> 과거 (過去)를 돌보거나 미래 (未來)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현재 (現在)의 순간 (瞬間)에 있어서의 최대 (最大)의 쾌락을 구 (求)하려고 하는 사고방식 (思考方式).]
희망이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희망에는 언제나 공포나 걱정이 따른다. 정신을 과거의 한에 반쯤 빼앗기고, 미래의 공포에 반쯤 빼앗기면 현재에 집중할 수 없다. 사는 것은 현재에 사는 것인데 현재에 집중할 수 없으면 삶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무상하다.
그러나 술 또한 사라진 현재를 찾아 줄 수 없었다. 현재는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는 강물의 한 점이므로, 과거와 미래를 끊어버리면 현재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 구도자는 다시 대학원 석사 과정에 다니던 중 다른 스승 베르그송을 찾아 이역만리 파리 소르본느대학으로 떠난다. 새 스승은 무의식적인 순수 기억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준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베르그송의 무의식적 기억을 통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고 했다. ‘마드렌느’를 보리수 꽃 띄운 차에 담글 때 풍기는 향기를 맡는 순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마르셀 프루스트가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쓴 일곱 권의 장편 소설이다. 작품의 길이와 ‘마들렌의 에피소드’로 유명한 ‘비자발적인 기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의식의 흐름을 쫓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 집요할 정도로 정밀하게 인간 내면과 시대상을 담아낸 현대 문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20세기 기념비적인 소설. ‘마들렌의 에피소드’란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을 먹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연들이 떠오르는 장면에서 비롯되었는데, 특정한 맛이나 냄새 (odour-evoked)로 인해 추억이 떠오르는 경험, 곧 ‘프루스트 현상 (The Proust Phenomenon)’을 말한다. 프루스트 현상은 심리학자들이 프랑스 심리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1871 ~ 1922)의 이 에피소드에서 이름한 것으로 “잠재된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ence) 혹은 “기억의 부활”이라고도 말한다.]
시인은 한때 베르그송의 철학에 심취하여 “일시적으로 귀의한다.” 그러나 그의 영향을 받아 지은 「바람 부는 밤의 광상곡 (Rhapsody)」에서 달빛이 풀어놓은 베르그송의 무의식적 기억은 아름다운 현재가 아니라 여전히 비뚤어진 영상만이 출몰하는 살벌한 황무지 풍경이다. 영원한 기억의 바닷물에 정화되지 못한 과거의 더러운 무의식적 기억의 강물이 현재와 미래를 오염시킨 것이다.
시인은 다시 세 번째 스승 브래들리 (F. H. Bradley)를 찾아 영국으로 건너가 그의 철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까지 쓴다. 브래들리는 『현상과 실재』에서 “세상과 열반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가르친 ‘나가르쥬나 (龍樹)’의 영향을 받아, 현상이 실재가 된다고 설파하고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비실재적인 모든 현상적 시간계열들은 실재인 절대자 속에서 ‘변화되어’ 조화와 통일을 이룬다. [나가르쥬나: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한 제2의 불타 (부처)다. 기원후 2세기경 남인도에서 출생하여 인도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중관학파를 창시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본질과 현상은 둘이 아니라 서로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극미 원자 하나라도 조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인과법칙은 되돌릴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의 공 (空)사상은 천 년 이상이나 중국, 티벳, 한국, 일본을 풍미하였다. 선불교는 공사상과 중도의 기둥 위에 서있고 그 사상은 열띤 학술적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엘리엇은 대학원에서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소승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변하여 열반이 된다고 생각했으나, 나가르쥬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변해야 이 무상한 세상이 열반적정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그러나 브래들리 선생은 ‘허망한’ ‘현상’의 시간들이 ‘실재’인 절대자에서 ‘어떻게’ 통일되는지 보여주지 못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다시 신앙과 예술을 찾아 1927년에 영국 국교로 개종하고 예술에 귀의한다. 『황무지』는 개종하기 전에 쓴 것이나 이미 믿음의 씨앗이 그의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신비적 근본 경험과, 개인적 감정들이 예술 감정으로 변하는 과정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절대자는 맑고 밝은 거룩한 생명수 소용돌이 속이며 빛의 핵심이다. 이 생명의 원천은 원의 중심과 같다. 이 영원한 생명의 바닷물과 빛의 핵심에 들어가는 것이 ‘집중 (集中)’이다. 그러나 바다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지려면 믿음, 즉 ‘믿음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 순종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정신을 “수동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거나 명상할 때 눈을 감는다. 집중하면 욕망과 교만으로 흐려졌던 내 눈이 맑고 밝은 눈으로 변한다. 이것은 병든 조가비가 깊은 바닷물에 ‘정화 (淨化)’되어 진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주인공의 기억에 자꾸 떠오르는 “저것은 내 눈이었던 진주야!”라는 공기 요정의 노래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예술 창작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내 감정들 (emotions)이 느낌들 (feelings)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수동적으로 집중·통일·정화되어 예술 감정으로 변화된다. 이것이 ‘탈개성’이다. 이 예술 감정을 형상화한 것이 ‘객관적 상관물’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개인적 감정이 “그의 깊은 바다 밑 속에서 바닷물을 흠뻑 먹어 비너스 여신처럼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내 감정들은 타락의 원인이었던 옛 사람의 욕망이다. 느낌들의 소용돌이는 바다 밑 기억이 떠올린 것이다. 욕망에서 나온 내 감정들이 추억이 떠올린 느낌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화되거나 ‘부화 (孵化)’되어 순수한 예술 감정으로 변한다. 욕망을 기억에 ‘섞는 것’은 집중·통일·정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욕망이 영원한 중심에 집중되어 정화되듯, 과거의 한과 미래의 공포도 영원한 현재의 중심에서 풀리고 사라진다. 기억과 욕망을 ‘섞는’ 것은 무질서하게 ‘뒤섞는’ 것과는 정반대다.
T. S. 엘리엇은 시인이자 평론가인데, 한때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이 시 『황무지』에는 그런 경험을 녹아 있어서 금융과 무역업자에 대한 언급이 간혹 나온다. 그래서 이 시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있다는 평론이 많지만 엘리엇 자신은 개인적으로 무의미한 인생에 대한 불평이라고 했다. 또 제5부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여러 대도시의 붕괴를 언급해서 정신적 황폐의 문제가 동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장들이 있다.
1)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2)체스 게임 (A Game of Chess)
3)불의 설교 (The Fire Sermon)
4)익사 (Death by Water)
5)천둥이 한 말
〈죽은 자의 매장〉이란 신의 죽음과 그 매장이 부활을 위하여 필요한 일임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1차 세계대전 뒤의 황폐한 유럽이 강하게 의식되어 있다.
〈체스놀이〉에서는 생명의 거부로 읊어져 있고, 사람들은 신을 피하여 육욕 속에서 밤낮을 보내고 있다.
〈불의 설교〉에서는 부처가 가야산에서 1천 명의 제자들을 앞에 놓고 인간의 오욕을 불에다 비유하여,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이 행복에의 길임을 설파한다.
〈익사〉는 베네치아 사람 플레버스의 죽음을 읊은 것으로, 현대인의 삶을 불의 현실로 바로 볼 수 없는 나머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천둥이 한 말〉은 끝맺음으로,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을 했다. / 메마른 벌판을 등뒤로 두고 /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정돈해 볼까? / 런던 다리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 언제나 이 몸은 제비가 되랴- 오, 제비여, 제비여. / 내 아들 아퀴테느는 폐허의 탑 속에 있지. / 이 단편들로 나는 나의 파멸을 지탱해 왔다. / 나 같은 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겠죠, 히에로니모가 다시금 미쳤어. /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 / 샨티 샨티 샨티.”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