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횔덜린 시 전집 세트 전2권
프리드리히 횔덜린 / 책세상 / 2017.1.30
- 원형 그대로의 횔덜린을 읽다 : 한국내 최초 횔덜린 시 전집 완역
“횔덜린의 시는 우리에게 일종의 역사적 운명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반생을 정신 착란 가운데 외롭고 불우하게 살아야 했지만 헤겔과 함께 독일 이상주의 철학에 기초를 놓고 헤르만 헤세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독일 현대문학의 거장들을 시인의 길로 인도한, 절망 속에서도 구원을 꿈꾼 광기의 천재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olderlin, 1770 ~ 1843).
현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국내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횔덜린의 시 전 작품이 국내 최초로 책세상에서 2권의 전집으로 출간되었다.
횔덜린이 15세에 처음으로 쓴 「사은의 시」부터 1843년 6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전망」에 이르기까지 3백 편에 달하는 그의 모든 시는 물론 시작 (時作)을 위한 메모, 착상, 단편을 시 세계의 발전 단계에 맞춰 시기별로 구분해 두 권의 책에 빠짐없이 담았다.
그간 한국내에서 횔덜린의 시편 일부가 번역, 출간되거나 현대 문학과 철학에 그가 미친 영향을 다룬 연구서들이 발표되긴 했으나 그의 작품 세계와 사상의 전모를 일별할 수 있는 시 전집이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횔덜린 시 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장영태 홍익대 명예교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을 번역하며 비교적 최근에 발행되어 판독상의 학술적 논란을 정리한 도이처 클라시커 (Deutscher Klassiker) 사의 『횔덜린 시 전집』을 저본으로 삼아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석과 해설을 첨가함으로써 최근 국제 학계의 횔덜린 연구 동향을 반영했다.
이 전집을 통해 그의 시 세계 만큼이나 극적이었던 횔덜린의 삶과 사명을 띤 시인으로서의 고뇌, 사색가로서의 면모 모두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전 그리스문학 번역가로서, 지상에서의 소명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정신병의 그늘에서 고통받은 한 인간으로서 극한의 정신에서 이루어낸 그의 문학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현대적이며 가장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독일 현대문학의 선구자이자 독일 정신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인물로 생애와 작품 전체가 신화가 된, 거장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의 정수를 온전히 음미해볼 기회다.

○ 목차
역자 서문_횔덜린 시 전집 한국어 주석본을 내면서
Ⅰ. 1784~1788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 학창시절
- 1권
Ⅱ. 1788~1793 튀빙겐 신학교 재학시절
Ⅲ. 1794~1795 발터스하우젠-예나-뉘르팅겐
Ⅳ. 1796~1798 프랑크푸르트 시절
Ⅴ. 1798~1800 첫 홈부르크 체재기
주해
찾아보기
- 2권
Ⅵ 1800~1805 슈바벤, 남프랑스, 뉘르팅겐, 두 번째 홈부르크 체재기
Ⅶ 1793~1806 초안들, 비교적 규모가 큰 단편들과 스케치
Ⅷ 구상, 단편, 메모들
Ⅸ 1806~1843 최후기의 시
Ⅹ부록
주해
해설_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횔덜린, 그의 시 세계
프리드리히 횔덜린 연보
찾아보기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lich Holderlin)
독일의 시인. 뷔르템베르크 주 라우펜에서 수도원 관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1788년 튀빙겐 대학 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신학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 (時作) 등에 심취하여 헤겔, 셀링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 시인으로서의 천직을 자각하여 출세의 길을 과감히 내던지고 가정교사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 은행가 곤타르트 가의 가정교사가 되어 일하던 중, 희랍의 미 (美)와 기품 있는 교양을 지닌 곤타르트 부인 주제테에게 뜨거운 플라토닉한 사랑을 느낀 횔덜린은, 그녀를 ‘디오티마’로 부르며 『히페리온』 등 모든 작품에서 그의 이상적인 여인으로 찬미한다.
그 후 횔덜린은 가정교사로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지내다가, 정신착란으로 인해 튀빙겐으로 돌아와 목수 일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생을 보낸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한 뛰어난 표현 양식과 서정성, 이상주의적 정신으로 독일 문학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주요 작품으로는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시 「디오티마를 애도하는 메논의 탄식」, 「빵과 포도주」, 「게르마니아」, 「라인강」, 「하이델베르크」 등이 있다.
– 역자 : 장영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동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뮌헨대학에서 수학했고 고려대학교에서 「횔덜린의 시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홍익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9년 8월에 정년퇴임했다.
저서로 『횔덜린 생애와 문학 사상』,『지상에 척도는 있는가 – 횔덜린의 후기 문학』이 있다. 역서로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문학연구의 방법론』,『문학의 논리』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시대의 고통과 희망을 온몸으로 체험한 광기의 천재 시인
“시인들은 또한 정신적인 자들로서 세속적이어야만 하리라.” _ 횔덜린의 시 「유일자 Der Einzige」에서
횔덜린은 1770년 독일 남부의 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서 헤겔, 셸링 등과 교유하며 학창 시절부터 철학 공부와 시 창작에 매진했다. 이 시기 독일 문학은 크게 괴테와 실러로 대표되는 고전주의와 슐레겔 형제로 대표되는 낭만주의로 양분되어 있었다. 횔덜린은 괴테와 실러, 낭만주의자들과 두루 교류했지만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대학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등 당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상가들을 광범위하게 공부하고 헤겔 및 셸링과 지적 교류를 쌓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졸업 후에는 목사가 되는 대신 자유문필가의 길을 택해 독일 각지를 방랑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다. 또한 졸업 후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고 자력으로 칸트와 피히테의 사상을 학습했고 1795년에는 직접 예나로 가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횔덜린의 비가와 송가, 찬가, 에피그램 (경구), 각운시는 이 같은 깊고 탄탄한 지적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 공타르 가문의 여주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지고 1802년 주제테가 서른셋의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이하자 그때부터 정신 착란 징후를 보여 1806년 튀빙겐 아우텐리트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843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내내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횔덜린은 끝까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시인으로서의 그의 열정과 의지는 300편에 가까운 방대한 시 작품이라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 시대를 가로질러 현대를 앞서 살았던 횔덜린의 독보적 시 세계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그러나 시인들은 성스러운 밤에 이 나라 저 나라로 나아가는 바쿠스의 성스러운 사제 같다고 그대는 말한다.” _ 횔덜린의 시 「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에서
국내 독자에게 횔덜린은 다소 낯선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에는 동시대인에게 이해받지 못했고, 작품을 제대로 인정받기도 전인 33세 이후 정신 질환으로 30여 년간을 소위 ‘횔덜린 옥탑’이라 불리는 병상에서 은거하다 비극적 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작품의 우수성이 독일인에 수용되기까지 근 한 세기의 세월이 필요했다.
횔덜린은 독일 문학사에서 독보적이면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대 독일 문학계의 주류 사조였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직접 체험했고, 괴테와 실러,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후에는 그와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그는 고전주의의 인도주의적 이상이나 그 예술관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조화, 엄격한 형식의 틀에 만족하지 않았다. 횔덜린은 천재나 시인의 정신활동에 의해 보편적인 것, 절대적인 것, 이상적인 것이 현세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 즉 타락한 인간 사회에는 순수한 시인을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이와 같은 비극적 세계관에 따라 확장 개방된 내용의 새로운 시어를 구사하여 동시대의 현실 밖에서 이상향을 탐구했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와 친근성이 있지만, 인간 삶을 다루는 진지성,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의지가 낭만주의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고독한 시인의 운명을 따랐다.
횔덜린은 핀다로스, 클롭프슈토크, 실러의 영향을 받아 고대 그리스적인 형식에 독일적인 내용과 리듬의 조화를 추구했다. 송가 형식으로 우정, 사랑, 미, 조화, 청춘, 자유를 찬미한 초기 찬가들은 실러의 사상시를 본받은 것으로,「방랑자」「인간」「봄에 부쳐」 등이 있다. 소외와 고립의 홈부르크 시절 서정시에는 잃어버린 그리스적 생활에 대한 동경이 시대를 초월한 신화적인 것으로 변모해가는 한편 장중하며 엄숙하고 격조 높은 송가, 비가에는 조국적인 소재가 시화되었다. 특히 이 시절에 역사적?신화적 회상이라는 주제를 상상 속 방랑이라는 모티브와 결합한, 서정적으로도 아름다운 시가 많이 쓰였다. 이때 쓰인 「하이델베르크」, 「고향」, 「마인 강」 등은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의 시로 손꼽힌다. 1800년 이후의 시는 환상적, 예언적, 종교적이다. 송가 「독일인들에게」는 조국의 마음속으로 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을 담고 있으며 비가 「빵과 포도주」에는 사라졌지만 다시 다가오는 옛 신들의 시대에 관한 신화를 담았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횔덜린 시작의 절정기로 꼽히는 약 5년간의 찬가는 자유운율 형식으로 쓰였다.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환상과 감수성을 모두 담아내기에 기존의 운율 규칙은 지나치게 단조롭고 협소했기 때문이다. 반면 최후기 찬가의 문체는 간소하고 암시적이며 표현이 완곡하고 음조는 고독하다.
이처럼 그의 시를 이루는 숭고하고 내밀한 언어, 궁핍한 시대의 암울한 고통을 담아낸 시의 내용 등은 지평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당대를 벗어난 세계관을 격식과 의미, 내용이 다른 시로 표현한 횔덜린이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이유도, 독일의 시인들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 끝없는 불화와 절망 속에서도 화해와 구원을 꿈꾼 궁핍한 시대의 시인
“신화와 영적인 삶 사이의 관계를 다룬 후대 시들의 원형이 있다면, 그것은 횔덜린의 작품이다.” _ 발터 벤야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가리켜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왜 시가 시원으로 향하는 언어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으로서 시인 중의 시인”이라 칭했고 낭만주의 작가 아힘 폰 아르님은 횔덜린을 독일의 가장 위대한 비가悲歌시인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현대 사상가이자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횔덜린의 시적 사명을 이어받아 “신과 인간 사이의 공백의 자리, 신성하고 순수한 공간, 양극 사이의 자리, 시간과 시간 사이의 유예의 시간인 분열의 자리를 순수하게 텅 빈 채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시대를 가로질러 현대를 앞서 살았던 시인이라는 평처럼, 횔덜린의 문학은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울 첼란 등 독일의 내로라하는 후대 문학가뿐 아니라 하이데거와 니체, 벤야민 등 사상가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찍이 국내 문인들도 횔덜린의 시에 주목한 바 있다. 시인 김지하는 “횔덜린을 읽으며 / 운다”라는 시구가 등장하는 「횔덜린」이라는 시를 발표했고 황지우 시인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서 횔덜린을 언급한다. 인문학자 김우창은 횔덜린의 시구인 ‘지상의 척도尺度’,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자신의 평론집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표현했다. 최고의 원리로서 ‘신’은 사라졌고, 기나긴 ‘밤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그의 시대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빈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말년의 횔덜린을 사로잡았던 절망과 죽음으로부터 초년의 찬란한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그의 시에서 지금 여기의 삶과 문학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생동감 넘치는 비유를 발견한다. ‘신의 성스러운 사제’로서 신의 귀향을 안내했던 예언자, 끝 모를 불화와 절망 속에서도 화해와 구원을 꿈꾼 시인. 그를 통해 우리는 잃어버렸던, 혹은 잊고 있었던 이상의 빛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