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후쿠자와 유키치 : 일본을 제국주의로 몰고 간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을 외치다
정일성 / 지식산업사 / 2012.6.25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청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 개화파를 지원해서 그들이 스스로 조선의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후쿠자와는 당시 조선의 조정이 외세를 끌어들여가며 체제 유지에 급급하는 것은 잘못이며, 흥선대원군 일파의 폐쇄성과 잔인성 역시 배격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을 전력을 다해 지원하고 조언해주었다. 그러나 1884년 청국 간섭에 의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는 크게 좌절, 낙담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관련자들에 대한 연좌제, 능지처참 등의 사건 이후 후쿠자와는 유명한 ‘탈아론’을 발표하였다. 탈아론에서 그는 조선 조정의 부패와 잔인성을 극도로 비판하였다.
탈아론에서 후쿠자와는 유럽과 미국등 구미의 열강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그러했듯 일본 정부가 동아시아에 대한 급속한 세력 확대와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식민지화 기도에 맞서 조선 개화인들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근대화하지 못하는 국가, 민족 혹은 근대화를 할 능력이 없는 국가와 민족은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의 근대화에 적극 앞장서고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스스로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주변 국가와 민족이 있다면 그러한 국가, 민족은 일본의 식민 지배 압박에 의해 과감하게 포기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구미 열강의 대열에 끼도록 국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청나라나 조선도 지금 현재 구미 열강이 일본을 대하듯이 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청나라와 러시아 등과의 전쟁도 필요하다면 불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탈아론을 주장해 일본의 뿌리깊은 아시아 멸시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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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개정판을 내면서
머리말
제1장 탈아론이란
발상과 논리
탈아론이 나오기까지
- 후쿠자와의 시대 인식 / 2. 후쿠자와와 갑신정변
탈아론 이후 - 조선정략론朝鮮政略論 / 2. 김옥균 암살
-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 4. 조선의 내정개혁
- 문야文野 전쟁론 / 6.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 조선 지식인과 후쿠자와
제2장 사건으로 본 후쿠자와의 조선관
강화도사건과 후쿠자와
임오군란과 후쿠자와
제물포조약과 후쿠자와
명성황후 시해와 후쿠자와
대한제국 성립, 의화단사건과 후쿠자와
제3장 후쿠자와의 생애 I
성장과정
- 하급 무사의 아들 / 2. 나가사키 유학
- 오가타주쿠?方塾 / 4. 네덜란드어에서 영어로
미국 여행
유렵 견학
제4장 후쿠자와의 생애 II
패도佩刀를 버리고
《서양사정》과 그 영향
《학문의 권유》
탈아론의 원전原典 -《문명론의 개략》
메이지 14년 정변과 후쿠자와
민권론자民權論者에서 국가주의자가 되기까지
문명론자의 겉과 속
맺음말 – 후쿠자와와 일본 우익
부록
후쿠자와 유키치 연보
인물소개
참고문헌
○ 저자소개 : 정일성
순천사범학교 졸업
고흥 과역초등학교 교사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서울신문 기자
문화부, 생활특집부 차장, 뉴스피플 부장, 경인지역 취재본부장 겸 인천지사장 역임
일본 게이오대慶應大 객원연구원으로 메이지 유신 연구
한국미디어센터 강사
《서울신문 100년사》 편찬위원
2018년 현재 한일 근현대 관계사 집필 활동 중임
주요 저서
《황국사관의 실체 – 일본 군국주의는 되살아나는가》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脫亞論을 어떻게 펼쳤는가》
《이토 히로부미 –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인물로 본 일제 조선지배 40년》
《일본을 제국주의로 몰고 간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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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 유키지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4년 12월 12일 (양력 1835년 1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버지 후쿠자와 햐쿠스케 (福澤百助)는 나카쓰 번 (中津藩, 오늘날의 규슈 오이타 [大分] 현)의 하급무사로서 유키치가 태어날 당시 오사카의 나카쓰 번 구라야시키 (藏屋敷)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유키치는 1836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온 가족과 함께 나카쓰 번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47년부터 한학 (漢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1854년에는 형의 권유로 나가사키에 유학하여 난학자 오가타 고안 (緖方洪庵)의 데키주쿠 (適塾)에서 난학 (蘭學)을 배웠다. 1858년 에도의 쓰키지 뎃포즈 (鐵砲洲)에 위치한 오쿠다이라 번 (奧平藩) 나카야시키 (中屋敷)에 난학 주쿠를 개설했다. 그러나 이듬해 나가사키를 방문했다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영어를 독학하는 한편 이 난학 주쿠를 영학 (英學) 주쿠로 바꿨다. 1860∼1867년에는 막부에 출사하여 번역 업무를 하는 관리로 일했다. 이 기간에 세 번에 걸쳐 막부의 해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는 기회를 얻었다. 1868년 4월 쓰키지의 영학 주쿠를 신센자 (新錢座)로 이전, 당시의 연호를 따서 게이오기주쿠 (慶應義塾)라고 명명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재야의 대표적 계몽사상가로서 저술과 번역 작업에 힘썼으며,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 같은 책을 통해 ‘독립자존’의 국민정신 함양에 의한 국민국가 형성과 대외적 독립의 달성을 제창했다. 1879년 도쿄학사회원 (東京學士會院, 현재의 일본학사원) 초대회장에 취임했고, 1882년에는 『지지신보』 (時事新報)를 창간했다. 1901년 1월 25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과 번역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지식인과 대중들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인들의 필독서이자 애독서로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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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