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유교와 도교
막스 베버 / 문예출판사 / 1990.10.31

1990년 10월 10일에 발간된 『儒敎와 道敎 (유교와 도교)』이다.
발행사는 文藝出版社, 저자는 막스 베버, 옮긴이는 이상률이며 총 355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사회와 그 사회경제적 발전 유형을 베버가 체계적으로 기술한 이 책은 70여년 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지만 중국의 사회제도를 비교하는 데 아직도 유용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서양과 비교하면 외면적으로는 여러가지 좋은 사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는 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하였는가’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 목차
- 사회학적 기초1: 도시, 제후 및 신
- 사회학적 기초2: 봉건국가와 봉록국가
- 사회학적 기초3: 행정과 농업제도
- 사회학적 기초4: 자치,법률 및 자본주의
- 독서인 신분
- 유교적 생활지침
- 정통과 이단
- 유교와 퓨리터니즘

○ 저자소개 : 막스 베버(Maximilian Weber, Maximilian Carl Emil Weber)
독일의 사회사상가 막스 베버(1864~1920)는 칼 맑스, 에밀 뒤르켐 등과 함께 현대 사회학을 창시한 사상가 중의 하나로 꼽힌다.
역사, 경제, 정치, 법제도, 종교, 철학, 예술 등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적 현상들을 자신의 인식지평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이 현상들의 사회학적 분석에 필요한 이론들과 개념장치를 구축해, 현대 사회학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흔히 사회학적 개념구성의 ‘건축학’이라고 불리는 ‘경제와 사회’, 세계 대종교들을 다루는 ‘종교사회학 논문집’, 그리고 방법론적 구상을 담은 ‘과학론 논문집’등이 있다.
베버는 독일 튀링겐주의 에르푸르트에서 막스 베버 1세의 일곱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국민자유당의 부유하고 유력한 정치가이자 공무원이며, 어머니 헬레네 팔렌슈타인 (Helene Fallenstein)은 절대적인 도덕 신념을 견지한 개신교도이자 칼뱅주의자였다. 베버 1세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그의 가정도 정치와 가까워졌으며, 그의 살롱에서는 여러 저명한 학자와 유명 인사가 드나들었다. 베버는 어머니의 인생관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어린 베버와 동생 알프레드 베버 (그 역시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가 되었다)는 이렇듯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베버가 13살이던 1876년 성탄절에 부모님에게 준 선물은 두 편의 역사 평론인 “독일 역사의 과정에 대하여. 황제와 교황의 지위를 중심으로”와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민족 대이동까지 로마 제국시대에 관하여”였다. 14살 때 그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리비우스를 주석으로 단 글을 썼으며, 대학 진학 전에 괴테,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에 대한 지식을 섭렵하였다. 베버가 사회 과학 분야로 학업을 계속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1882년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다. 법과 공부를 하는 동시에 젊은 베버는 경제학 강의를 듣고, 중세 역사와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잠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군으로 복무하였다.
1884년 가을에 베버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하고자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8년 동안 괴팅겐 대학교에서 한 번, 그리고 잠시 군사 훈련차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빼고 베버는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며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하급 법정 변호사로, 나중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된다. 1886년 베버는 영미권의 법 체계에서 변호사회에 해당하는 “참조인” (Referendar) 시험에 통과하였다. 1880년대 말에 베버는 역사 공부를 계속하였다. 1889년 그는 “중세 사업 조직의 역사”라는 제목의 법제사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써서 법학 박사 학위를 땄다. 2년 뒤 베버는 하빌리타치온 논문인 “로마의 농업사와 공법 및 사법에서 그 중요성”을 완성하였다. “시간강사” (Privatdozent)가 된 베버는 이제 독일에서 교수직 자격을 얻게 된다.
박사 논문과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쓰는 사이 몇 년 동안 베버는 당시 사회 정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8년 그는 역사학파 쪽 독일 경제학자들의 새로운 모임인 “사회정책학회 (Verein fur Socialpolitik)에 가입하였는데, 이들은 경제학의 역할은 우선 당시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경제 문제에 관한 대규모 통계 연구를 주창하였다. 그는 정계에도 발을 들여 좌파 성향의 복음주의 사회 의회에 가입하였다. 1890년 “폴란드 문제” 즉 동부 이동 (Ostflucht, 지역 노동자들이 당시 급속히 산업화되던 독일 도시로 이주하면서, 독일 동부로 외국인 농장 노동자들이 유입하던 것을 뜻한다)를 연구하기 위하여 “학회” (Verein)이 설립되었다. 베버는 이 연구에 뛰어들어 결과물의 상당 부분을 썼다. 최종 논문은 뛰어난 경험적 연구 저작으로 널리 찬사받았으며, 농업 경제학 분야에서 베버의 명성을 굳혔다.

1893년 그는 그의 먼 친척인 마리안 슈니트거 (Marianne Schnitger)와 결혼하였는데, 나중에 이 사람은 여성주의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작가가 되어, 베버가 죽은 뒤 남편의 학술지 논문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데 기여하였다. 1894년 부부는 프라이부르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베버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89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같은 자리를 받았다. 이듬해에 아버지 막스 베버 1세는 아들과 심한 다툼을 하고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베버는 점차 신경 과민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어 교수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의 상태 때문에 자신의 수업도 줄어들었고, 1899년 가을 마지막 강의는 끝내지도 못하였다. 1900년 여름과 가을에 요양소에서 몇 달을 보내다가 베버와 아내는 그 해 말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으며, 1902년에야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왔다.
1890년대 초에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한 뒤 베버는 1898년 초부터 1902년 말까지 전혀 글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1903년 가을에 교수직을 떠났다. 이러한 의무에서 벗어나 그 해에 베버는 사회 과학과 사회 정책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학술지에서 동료 에드가 야페 (Edgar Jaffé)와 베르너 좀바르트 (Werner Sombart)와 함께 공동 편집장직을 맡았다. 1904년 베버는 이 학술지에 그의 매우 독창적인 몇몇 저작을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있었다.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 되었으며, 나중에 그가 경제 체제의 발전에 문화와 종교가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는 데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 저작은 베버 생애에 출간된 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또 그 해에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세인트 루이스에서 세계 박람회 (루이지애나 만국 박람회)와 연계한 예술 및 과학 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베버는 자신이 그때 일반 강의를 다시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1907년에 유산을 받아 개인 학자로 계속 활동하였다. 1912년 베버는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규합하기 위하여 좌파 정당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여러 자유주의자들이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혁명 이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베버는 하이델베르크의 군 병원에서 원장으로 잠시 복무하였다. 1915년과 1916년에 그는 전후 벨기에와 폴란드에서 독일의 수위권을 유지하려는 위원회에서 일하였다. 독일 제국의 확장과 전쟁에 대한 베버의 생각은 전쟁을 거치면서 바뀌었다. 그는 19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 베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정전 위원회와 바이마르 헌법 기초를 맡는 위원회에서 고문이 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의 제48조를 삽입하는 데 지지하였다. 이 조항은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포고를 통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이용하여, 히틀러 정부가 반대파를 억압하고 독재 권력을 얻게 되었다. 이때 베버가 독일 정치에 기여한 점은 아직도 논쟁거리이다.
베버는 이때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빈 대학교에서, 나중에 1919년에는 뮌헨 대학교에서 일하였다. 뮌헨에서 그는 독일 대학에서 최초인 사회학 학회의 회장이 되었으나, 결국에는 개인의 사회학 직위를 갖지는 않았다. 베버는 1919년과 1920년에 우파의 선동 때문에 정계를 떠났다. 뮌헨의 여러 동료와 학생들은 1918년과 1919년 독일 혁명 당시 그의 연설과 좌파적 태도에 반대하였으며, 일부 우파 학생들은 그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막스 베버는 에스파냐 독감에 걸렸으며, 1920년 6월 14일 뮌헨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 출판사 서평
막스 베버의 유교와 도교는 중국철학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거론하는 책이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읽었다 하더라도 막스베버가 왜 이렇게 기술했는가를 생각해본 이는 더욱 드물다.
막스베버의 학문과 그 시대적 배경을 조사해서 읽어본 이는 말할 것도 없다.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하게될 독자들은 중국철학을 전공하거나, 아니면 중국과 관련된 인문학에 종사하는 분들일 것이다.
그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발췌를 하고 세미나를 해가면서 읽어보라는 것이다.
또 이 책을 읽기 전에, 막스베버에 대한 인물조사는 물론, 막스베버가 영향받았던 여러 사상들을 먼저 탐구한 다음에 읽어보아야 이 책이 지적하는 점이, 중국에 있어서 어느정도 맞고 또 어느 정도 틀린 것을 떠나서, 왜 그렇게 밖에 나올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몇 가지 단초를 제공하자면, 책의 목차 부분을 가만히 살펴보면 막스베버의 학문방법의 전모를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가 첫 서두부터 제시하고 있는 화폐제도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알아차린다면 뒷부분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또 그가 들고 있는 근거들이 어느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제시되고 있는가도 살펴볼만한 포인트이다.
○ 베버의 유교테제는 틀렸을까? – 함께 읽고 싶은 책: ‘유교와 도교'(막스 베버 지음, 문예출판사 刊)
이십여 년 전 독일 유학시절 읽었던 베버 ‘유교와 도교’를 나는 요즘 다시 읽고 있다. 강의 때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현실을 설명하는 데 개념적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다.
이 책은 원래 베버가 1915년에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에 두 차례에 걸쳐 발표했던 ‘유교’라는 제목의 논문을 이후 대폭 수정 확대해 1920년 ‘종교사회학논집’ 제1권에 ‘유교와 도교’로 수록한 글이다.
베버는 이 책에서 왜 동아시아가 근대자본주의 발전을 내생적으로 성취하지 못했는가를 유교윤리의 내재적 특징에서 찾는 이른바 ‘유교테제’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유교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의 결여, 종교적 근거의 거의 모든 잔재의 결여라는 의미에서 철저히 합리주의적”이며, “현세와의 갈등을 절대적 최소로 감소”시킨 “현실긍정과 현실적응”의 윤리며, 또한 “극히 의도적으로 사람을 자연발생적인 혹은 사회적 상하관계에 의해 주어진 인간관계에 묶어두는” 가족주의 윤리로 특징 지워진다.
이런 특징은 “세계의 합리적 개조의 과업”과는 거리 멀고, 이윤동기를 사회적 불안의 원천으로 경멸하며, 나아가 모든 거래관계의 기초인 신용을 항상 근친관계에 근거하게 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적 사물화를 방해했다고 베버는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는 그의 통찰이 계속해서 타당성을 갖도록 하지는 않았다. 베버의 진단과 달리 동아시아는 20세기 후반에 근대 자본주의를 급속하게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은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끌어, 유교문화를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열쇠로 보는 ‘유교가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한다. 이는 베버를 거꾸로 세우는 것이다. 실로 ‘현대 사회학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버의 유교테제가 틀렸다고 단정 짓는 건 섣부르다. ‘유교 르네상스’는 단순히 베버의 유교테제와의 작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버는 유교문화에 젖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그가 ‘선택적 친화성’과 ‘전철수’라고 하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라 할 것이다. ‘유교와 도교’가 다시금 우리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길 기대한다. _ 전태국 (강원대 사회학)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