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 I (구약시대)
우르, 수메르, 하란,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과 지구라트, 니므롯, 헷족속, 에돔족속, 헤브론, 므깃도, 메르네프타 석비, 출애굽, 여리고, 다윗과 골리앗, 앗시리아의 침공,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바빌론과 다니엘,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이 신화이거나 사람이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사실과 지명이 실제로 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고학 (考古學 , archaeology)은 인간이 남긴 유적 ·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다.
시대적 범위에서 성서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서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서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이 수행되어졌다.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된 역사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F.M. Petrie)에 의한 텔 엘헤시(Tell el-Hesi) 발굴로 부터 시작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30~50m 높이로 솟아 있는 유적 언덕의 발굴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러한 언덕을 아랍어로 ‘텔’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고,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흙벽돌 건물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풍화작용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지는데,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무너진 잔해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새로운 흙벽돌과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게 된다.
이런 과정이 수천년동안 계속 되면서 주거지의 지반이 높아졌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유적 언덕인 ‘텔’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최초의 텔 발굴은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1년 행했는데,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전 재산을 투자하여 발굴했다.
소아시아에 위치한 히싸를릭크 언덕에서 새로운 도시 유적이 계속 발굴 되었는데, 모두 9개나 되는 층층히 쌓인 도시들 가운데 밑에서 여섯 번째 도시가 트로이로 추정되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을 계기로 ‘주거층론’이 등장하였는데, 주거층이란 일정 기간 존속한 고대인들의 삶의 터전을 말하여, ‘주거층론’이란 그들 사이의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1890년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인 페트리는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광야의 유적 언덕을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한 성경의 라기스라고 확신하고 발굴해 주거층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 모양으로 결정된다는 ‘토기연대 측정법’을 고안했다.
페트리의 토기 연대는 성서 고고학의 달력으로 인정되었는데, 누구든지 토기 아구리 한 조각만 있어도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나사렛 등의 주요 성지들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 왔고, 중세시대부터 기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쉽게 찾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벧엘, 실로, 아이, 기브온, 므깃도 등 구약시대의 도시들과 가버나움, 벳세다, 거라사 등 신약시대의 마을들은 이미 오래 전에 폐허가 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한 장소를 찾기 어렵다.
1.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 1794~1863년)
미국의 목사이며 언어학자인 로빈슨은 성서의 문자적 정확성을 입증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지역에 위치한,미확인된 성서 속의 여러 지명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 `텔 브엘세바’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로빈슨 일행은 `비르 에 세바’라 불리는 조그만 베두인 천막촌에 도착했다. 이곳의 아랍어 지명을 토대로 그는 이곳이 다름아닌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인 성서 속의 `브엘세바’임을 밝혔다. 1969년 이후 발굴을 통해 솔로몬시대 요새로 건설된 텔 브엘세바의 모습이 밝혀졌다.
3. 로빈슨의 아치(1850년대)
1838년 예루살렘의 성전 터의 축대 부분을 관찰하던 로빈슨은 지진으로 인해 튀어나왔다는 돌출부를 성전 부속건물로 통하는 통로를 받치기 위한 아치의 일부라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밝혔다.
4. 로빈슨의 아치(현재)
이렇게 묻혀 있는 팔레스타인 성서 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당대 최고의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무장한 에드워드 로빈슨이란 미국인 목사에 의해 1838년 최초로 시도되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성지를 순례했는데, 카이로를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등정한 후 요단강 건너편으로 향한 다음 여리고성으로 들어 갔다.
로빈슨은 수주일동안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조그만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르 에-세바라 불리는 베두인 마을에서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였던 브엘사를 발견하였다.
로빈슨은 고대의 지명은 비록 그 지방 주민과 언어가 바뀌더라도 그 발음은 계속 보존된다고 믿어 현지의 아람어 지명을 참고로 성경의 도시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로빈슨은 하루 종일 길 없는 외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탐사하였다.
1838년 로빈슨은 예루살렘 북쪽의 유적지들을 탐사하여 아나타를 예레미아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제바를 게바로, 묵크마스를 믹마스로, 엘-지브를 기브온으로, 그리고 베이틴을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벧엘로 정확하게 일치시켰다.
○ 목차 (구약시대)
1. 우르
2. 수메르
3. 하란
4. 소돔과 고모라
5. 바벨탑과 지구라트
6. 니므롯
7. 헷족속
8. 에돔족속
9. 헤브론
10. 므깃도 (Megiddo)
11. 메르네프타 석비
12. 출애굽
13. 여리고
14. 다윗과 골리앗
15. 앗시리아의 침공
16.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17. 바빌론과 다니엘
18. 페르시아와 그리스
19. 로마와 기독교
1. 우르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런 말이 성경에는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나온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된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이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다.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1929년 3월 17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우르의 발견,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이라는 머릿기사가 실렸는데, 이는 대공황의 늪에서 실의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성서적 복음주의의 희망을 주었다.
새로운 ‘아브라함’이란 제목이 갖는 의미는 아브라함이 유목민일 뿐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로 발달된 도시문명의 법과 문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박물관에서 고고학 연구를 한 ‘울리’라는 고고학자다.
그는 대영박물관과 펜실베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B.C.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라트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난나 (nanna) 신전의 받침대 역할을 하였다.
당시 우르 제3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도시의 수호신 난나를 모신 신전을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도시인 우르에서 믿음이 있던 아브라함을 광야로 불러낸 것이다.
2. 수메르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문명이라는 것이 나온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을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이다. 머리에 있는 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신전은 공공연한 난교의 장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다.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이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 (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 (Wedge)를 말한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른다.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인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다. 찬송가에도 나오지 않는가?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 (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하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는 청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이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다.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이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다.
3. 하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만 순종을 하여, 하란까지만 가서 살다가 늙어서, 거기서 죽는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가지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서 (우르를 떠날때는 60세 가량) 그 하란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 때에 가나안으로 출발한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 것이지요. 그래서 갈대아 우르도 중요하지만 이 하란이라는 지역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다. 근래에 와서 이 하란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땅에 위치하고 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결과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발굴된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에블라 문명을 세운 왕의 이름이 ‘에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하란에 있었던 에블라의 대문명을 암시하는 족보가 있다. 여기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인’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요? 어떤 잘못된 견해로 이집트에서 나온 문자를 토대로 ‘하비루’라는 노예에서 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이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 ‘히브리’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결국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 아들 셀라의 아들인 ‘에벨’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 에벨이 큰 문명국가를 이루었고, 에블라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정통 셈족의 국가인데, 어떤 원인에 의해 수메르인에게 멸망당한다. 강 아래쪽의 더 강성한 국가 수메르의 사르곤 왕이 에블라를 멸망시킨 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끌고 갔는데, 이들이 그곳에서 우상이나 만들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영적 분별력을 주셔서 새로운 땅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데라는 가다 말고 자기 조상 에벨이 세웠던 찬란했던 나라 ‘에블라’의 고토 하란 땅에 머무르다가 안주하고 말았다. 그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침내 가나안까지 들어갔다. 에벨 시절에 번성하던 에블라는 수메르인들이 강해지면서 망하게 되었고, 니므롯의 제국 때 바벨탑을 세우다가 세상이 나누이게 되었는데, 그때가 벨렉의 시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소돔과 고모라
창세기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가 말하기를 “네 목숨을 위하여 도피하라. 네 뒤를 돌아보거나, 어떤 평지에도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그래야 소멸되지 않으리라.” 하므로 천사들은 소돔성에서 머뭇거리는 롯에게 손을 잡아 이끌며 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소돔성을 빠져나와 산으로 대피하라고 하였다.
롯이 사위들을 설득했지만 사위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아내와 딸들도 반신반의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밤이 지나 날이 밝아 오고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천사들은 억지로 롯과 아내와 딸들의 손을 이끌고 나왔다.
창세기 18:20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들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라 하였다.
이전에 하나님은 두 천사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 심판하실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50명이 있어도 소돔을 멸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하나님은 의인이 50명뿐만이 아니라 10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소돔의 죄악을 정탐하기 위해 온 두 천사는 소돔 성문에 앉아있던 롯의 간청으로 롯의 집에 초대받게 된다.
롯은 평소에 선량한 마음으로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이런 평소의 건실한 자세가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타락한 소돔 사람들은 잘생긴 남자천사 두 명이 롯의 집에 들어가자 그들과 동성연예를 하기 위해 롯의 집으로 몰려들어 갔다.
두 천사를 내어 달라는 소돔 사람의 협박에 롯은 차라리 내 딸들을 범하라고 하였지만 소돔 사람들은 듣지 않고 롯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에 두 천사들은 롯을 집 안으로 잡아당긴 후 문을 닫고,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의 죄가 크므로 주께서 성을 멸하실 것이니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하라고 하였다.
롯이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렸으나 사위들은 롯이 농담하는 줄 알고 믿지 않았다.
결국 롯은 천사들의 강권으로 반신반의하면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소돔성을 빠져 나오게 되었다.
천사들은 평지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롯은 도주하기 가까운 작은 성읍으로 대피하기를 원하니 천사가 허락하여 소알이란 성읍으로 대피하게 된다.
롯이 소알에 들어가 해가 중천에 솟았을 때 하나님은 소돔 위에 불과 유황을 비처럼 내리셔서 소돔과 고모라와 주변 평지의 모든 사람과 생물들을 뒤 엎으셨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쳐져서 소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다.
다음 날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어나 소돔지역을 살펴보니 그 지역은 화산재로 뒤덮혔고 연기가 피어 올랐다.
성경 속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소돔의 멸망이야기가 성서 고고학에 의해 진실임이 밝혀지고 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 (Dead Sea)는 물이 증발해 소금기만 남아 있는 곳으로 소돔지역으로 의심되었던 곳이다.
1920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사해 북동쪽 고대 유적지인 툴레이랏 엘-기술을 발견하였다.
이곳에서 수천년 전에 건설된 신전과 형형색색의 벽화가 발굴되었다.
1965년에는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사해 동편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밥 에드라’라고 불리는 고대도시를 발견하였다.
이곳은 서기 전 2000년경에 수천명이 거주하던 대도시임이 밝혀졌다.
고대 사해 변 싯딤 골짜기에는 5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소돔과 고모라는 그 중에 있었다.
창세기 14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다섯 왕이 싯딤 골짜기의 다섯 왕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해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같은 지명이 등장한다.
1973년 이 지역 탐사에서 서기 전 3000년경에 설립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다섯 도시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밥 에드라, 누메이라, 사피, 페이파, 카나지르로 이름 붙혀졌다.
다섯 도시의 특징은 모두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변에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사해의 동쪽 지역은 넓은 집수 유역 덕분에 수량이 풍부한 여러 강들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온다.
따라서 일찍부터 샘과 하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정착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요르단 지역의 가장 험난한 아르논 골짜기는 사해로 들어 오면서 절벽과 협곡을 이루고 있다.
5. 바벨탑과 지구라트
지금부터 바벨탑 사건에 얽힌 고고학을 살펴 보겠다. 구약성경 창세기 11장 1-9절에 보시면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 서로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서 성이란 도시를 말한다. 개정개역판 성경에 보시면 도시라고 되어 있다. 그냥 성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를 누가 주도했을까? 바로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 ‘니므롯’이다. 니므롯이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가지 이질적인 종족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쉽게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와 같이 도시부터 만든 이후에 높은 탑을 쌓은 것이다.
이제 바벨탑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살펴 보겠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한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그라트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이다.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뿐 아니라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BC500년 경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다고 한다.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되는 것이다. 63빌딩보다 더 높다. 수천년 전에 이러한 어마어마한 탑을 지은 것이다. 다 지었으면 더 높았겠지만, 중간에 하나님이 공사를 중단시켜 그 정도로 그친 것이다.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많은 지구라트들이 남아 있다. 지그라트의 무너진 수많은 벽돌을 다시 쌓아서 복원하였다. 후세인이 관광목적으로 복원한 것도 있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마르둑 (Marduk)’이라고 쓰여 있다.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이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른다. 이 사진의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다.
6. 니므롯
고대 근동에 최고의 영웅이던 니므롯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다. 창세기 10장에 상세히 기록이 남아 있다.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꾼’이란 히브리어 뜻으로 볼 때 ‘전쟁을 즐기는 사냥꾼’, ‘사람을 죽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니므롯’이라는 이름의 뜻은 ‘님(높은 사람)’ + ‘마랏(반역한다, 대항한다)’으로서 높은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반역한다는 뜻이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도시라)을 건축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나아갔다’는 말은 쳐들어갔다는 말이다. 앗수르는 셈의 자손들로 큰 민족이었으나, 니므롯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 결과 동방으로 이주해서, 아사달에 도착해서 홍익인간의 기치를 내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된다. 물론 동방으로 이주할 때 앗수르족속만 온 것은 아니고, 야벳족속의 일부와 함족속의 일부도 함께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티그리스강 주변의 비옥한 땅에 고대도시 니므롯도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다른 고대도시들이 있었다.
티그리스 강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강 가에 자리잡은 이 도시가 바로 니므롯 성이다.
그 니므롯 지역의 발굴현장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했다. 이렇게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니므롯의 도성을 복원한 복원도가 있다. 비록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니므롯은 대제국을 유지했던 것이다.
니므롯이 죽은 후 가족들에 의해서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화했다고 조작되었다. 고대 갈대아인들이 세운 모든 나라의 왕들은 이 니므롯의 화신인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권위가 인정되었다. 앗시리아의 살만엣셀 왕의 모습인데,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고 왕권을 받는다. 결국 니므롯은 사후에도 계속 갈대아지역을 통치한 것이다.
니므롯 지역의 신전 입구에서 거대한 인면수신의 조각이 발견됐다.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현재 이 조각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모두 망한 뒤에도 마케도니아를 거쳐 니므롯의 권위는 계속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로 기록된 비석에도 니므롯이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이스 사람들이 세운 영웅의 만신전, 즉 팡테옹에서도 니므롯은 중앙의 가장 높은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는 서열이 한참 아래였다.
7. 헷족속
지금부터는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 (힛타이트)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 보자.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다. 거기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나온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힛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까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힛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이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힛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게 되었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힛타이트 문명권이 규명되었는데, 터키 지도위에 붉은 색을 칠해놓은 이곳이 힛타이트의 중심부다.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지금의 터키 땅에 있는 힛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의 왕궁터와 힛타이트인들의 신전의 모습이다. 거대한 돌기둥에 돌사자 두 마리가 보인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청동으로 된 문이 여기에 있었다. 신전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힛타이트인들이 짧은 시간동안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 비결이 무엇인지를 고고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바로 이것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힛타이트의 전차다. 속도전에 능했고,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쏘고 하니까 일반 민족들이 그 속도에 도저히 방어를 할 수가 없어서 힛타이트인들이 중동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힛타이트의 전차가 바로 그들 나라의 힘의 원천이었다.
힛타이트의 전차가 얼마나 감명이 깊었는가 하니, 이것은 이집트의 왕들이 세운 비석이다. 이집트의 역사 자랑을 잔뜩 해 놓고는 힛타이트의 전차를 그려놓았다. 힛타이트 군이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이집트를 침략해 왔으나 그것을 막아냈다 하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이집트가 패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만 이렇지 고고학적 조사결과 이집트가 힛타이트에 점령되어 조공도 바치고 하였음이 밝혀졌다.
힛타이트 족속은 전차뿐만이 아니고 금, 은, 동 특히 철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세계사 책에도 최초의 철기 문화는 힛타이트 족속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나온다. 철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대단히 앞서 있었다. 그들의 금속공예는 예술적 수준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사슴을 정교하게 조각한 술잔도 있다.
그런데 힛타이트 족속이 남긴 기록은 역시 수메르 인들이 만든 설형문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기술과 전투력은 앞서 있었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수메르인들의 것을 그대로 이어서 쓴 것이다. 히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에서 발견된 유명한 비석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서로가 평화를 맺도록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 평화조약 문서다. 인류 역사로 볼 때 평화조약문으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그것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 있는데, 바로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총회장에 들어가면 오른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힛타이트의 하투사에서 발견된 최초의 평화조약문을 확대하여 동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평화조약은 오래 가지 않고 결국은 다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8. 에돔족속
다음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족속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을 보겠다. 창세기 36: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라고 되어 있다.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이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에서라는 말이나 에돔이라는 말이나 모두 붉다는 말이다. 에서가 털이 많고 붉게 생겼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세일산 자체가 아주 붉은 산이다. 그래서 에서도 자기 색과 같은 땅을 좋아해서 거기서 산 것 같다. 그런데 이 에돔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있었지 다른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수천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다, 집단 주거지로 들어가는 입구 색깔이 붉다. 들어가는 입구는 이렇게 좁은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은 안쪽이 굉장히 넓다. 그래서 이곳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거기 들어가면 전반적으로 붉은 바위로 된 협곡인데, 그 바위를 뚫고 집도 짓고, 신전도 짓고, 무덤도 만들고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여기에서 거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BC 3세기경에 에돔족속들이 동서양 무역사업을 활발히 행하여 굉장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명한 나바티안 상인집단을 형성해 가지고, 동서양에서 본 안목으로 자기들 거주지에 투자를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페트라 폴리스라든가 여러 가지 화려한 집들을 짓고 아주 잘 살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달력에서도 많이 나오는 페트라다. 이것의 건축구조는 보시는 바와 같이 어디서 돌을 가져다가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니고, 바위산을 파 들어가 만든 조각품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 덩어리를 파서 그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조금만 실수해서 조각이 떨어지면 작품전체가 망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바티안 상인들이 거금을 투자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에돔족속의 왕이 살던 집이요, 무덤이다. 야곱자손과 에서자손 사이의 투쟁이 계속 내려왔는데, 그 중에서도 절정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왕인 헤롯이 바로 에돔 족속이다.
9. 헤브론
대표적인 족장들의 도시인 헤브론의 역사는 이집트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해발 950m의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하므로 시작되었으며 (창 13:18~33), 은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Machpelah, 쌍굴)의 동굴을 샀다 (창 23:16~18).
그리고 그곳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그리고 레아 등 모든 조상들의 무덤이 되었다.
한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12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 정탐하게 한 곳이 바로 헤브론에 이르는 에스골 (포도송이) 골짜기였으며, 정탐 후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들이 가지고 온 “포도 한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였다” (민 13:23).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헤브론의 포도와 과일은 유명하여, 포도의 경우 한 송이의 무게가 10Kg 이상 나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맛도 매우 달다. 이 기사에서 성경은 “헤브론은 이집트의 소안보다 7년전에 세운 곳이다” (민 13:22)라는 토를 달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헤브론에서 일어나는데, 바로 다윗왕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임명되어 (삼하 2:1~4), 7년 6개월동안 수도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삼하 5:44).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도 헤브론은 여전히 유다의 중요한 요새였다. 이 사실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헤브론을 그의 혁명 기지로 삼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하 15:1~10).
헤브론에 관한 신약 성경에서의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헤롯 대왕 때에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 위에 거대한 건축을 함으로써 조상들의 무덤을 보호하는 일을 하여, 오늘까지 그가 쌓은 예루살렘 성전 벽과 더불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8세기 이후 아랍이 이 지역을 장악한 이래 족장들의 무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아랍인들이 관리하고 있어,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 곳을 찾는 유대인들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10. 므깃도 (Megiddo)
BC 4000년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 (삿 1:27~28), 아마도 다윗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깃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방 요새가 되었다 (왕상 9:15~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깃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BC 609년에 요시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28~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 (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 (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 (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 (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 (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 (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 (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 (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유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 (BC 869 ~ 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 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11. 메르네프타 석비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비롯됐다 (창 32:28). 그런데 엘,즉 하나님과 싸웠다는 뜻의 이스라엘의 기원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민족이 약탈당해서 더 이상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졌다는 고대 이집트의 한 절망적인 비문에서부터 출발한다.
– 페트리의 이스라엘 석비
1896년 겨울 이집트 최대의 유적지 테베에서 한 파라오의 장례신전을 발굴하던 영국 출신의 이집트 학자 페트리 (W.F.Petrie)는 높이 3.2m, 폭 1.6m에 달하는 검은 화강암 석비 하나를 발견했다. 당시까지 이집트 지역의 발굴에서 파라오의 업적을 새긴 전승비와 기념비가 자주 출토되기 때문에 이 발견은 그리 대수로운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28줄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해독하던 그는 27번째 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군다나 이 단어의 끝에는 민족을 의미하는 한정사가 붙어있어서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서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이 최초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 메르네프타
이 비문을 기록한 주인공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열 세번째 아들인 메르네프타였다. 부친이 거의 90세가 넘도록 67년간이나 통치했기 때문에 메르네프타가 서기전 1210년쯤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이 넘어서였다. 부친의 오랜 통치기간 중 그 위로 열 두명의 형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메르네프타는 모두 10년을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를 괴롭혔던 남쪽의 누비아와 서쪽의 리비아를 점령했고 북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평정했다. 일명 이스라엘 석비로 불리는 메르네프타의 전승비는 바로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르네프타는 시적인 어조로 팔레스타인 정복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홉 활 (원수) 중에서 아무도 고개를 드는 자가 없다. 이제 리비아는 폐허가 됐고 하티는 평정됐다. 가나안은 온갖 재난으로 약탈당했다.
아쉬켈론은 정복됐고 게제르는 사로잡혔으며 야노암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의 자손은 더 이상 없다. 후루 (팔레스타인)는 이집트 때문에 과부가 됐다.”
메르네프타는 가나안 지역의 세 도시국가와 한 민족을 정복했다고 언급하는데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등은 모두가 땅을 의미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그들은 이미 정착한 도시국가내지는 왕국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민족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당시 이 민족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던 유목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비문을 통해서 이미 서기전 1210년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막강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 민족을 물리친 사건을 그의 승전비에 기록할 만큼 위협적인 세력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당시까지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근거하여 람세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던 람세스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여겼다. 하지만 1896년에 발견된 이스라엘 석비에서 메르네프타가 이스라엘 민족을 무찔렀다는 언급 때문에 그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이라고 여겼다. 더욱이 왕들의 계곡에 있는 메르네프타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서 이상하게도 그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 홍해에 빠져 죽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출 14:28). 하지만 1898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아멘호텝 2세의 무덤에서 무려 16기에 달하는 왕족의 미이라가 발견됐고 이 중에서 메르네프타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어졌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발견됐지만 당시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은 1840년대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 왕궁 벽의 라키쉬 부조를 통해서였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메르네프타 석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민족에게 점령당하고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페트리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석비를 발견한지 80년이 지난 1976년 시카고 대학의 유르코 (F.J.Yurco)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을 카르낙 신전 부조를 통해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발표는 니느웨 궁전의 부조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선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집트 테베의 카르낙 마을에는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을 모신 대신전이 있는데 신전 마당의 한 외벽에 메르네프타가 가나안의 네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조는 당시까지 람세스 2세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됐지만 왕의 이름을 자세히 분석한 유르코는 그의 아들 메르네프타의 전투장면이 추가로 삽입된 것을 확인했다. 유르코는 ‘3200년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논문에서 메르네프타가 그의 비문에서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 언급한대로 실제로 신전 부조에서도 모두 네 가지 장면의 전투가 등장한다고 밝혔다.
비록 이 부분에서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하는 생생한 장면은 서기 5세기쯤 로마인들이 근처에 세워진 한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운반하기 위해서 벽을 허무는 바람에 일부가 훼손됐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투장면에서는 세 도시와는 달리 성벽을 지닌 도시가 나타나지 않는다.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서기전 1210년쯤 아직 도시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 용사들은 머리띠를 두루고 길다란 턱수염을 길렀으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사람들과 복장과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원주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2. 출애굽
a) 비돔과 람세스
영국의 이집트 탐사재단은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흙벽돌로 만들었다는 국고성 비돔을 찾기 위해 1882년 설립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북부에 정착했던 곡창지대인 고센 땅을 발굴 하였다.
스위스 출신의 에두아드 나빌은 고센 땅이 삼각주 지방에서 가나안과 가까이에 있는 북서지역임을 알아냈고, 이 곳의 유적지들을 조사한 끝에 텔 엘-마수쿠타를 비돔으로 여기고 발굴을 시작했다.
나빌은 이 곳을 발굴하여 흙벽돌로 만들어진 창고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는 고대 이집트어로 ‘페르-아툼 체쿠’, 즉 ‘체쿠에 있는 태양신 아툼의 신전’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집트어 ‘체쿠’는 히브리어로는 ‘숙콧’이라고 발음될 수 있고, 숙콧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출발한 장소이기 때문에 그는 이 곳을 비돔으로 결론지었다.
출애굽기 13:20 그들이 숙콧에서 그들의 여정을 시작하여 광야의 끝에 있는 에담에 진을 쳤는데
창세기 47:11 요셉이 파라오가 명령한 대로 그의 아비와 형제들을 정착시켰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소유를 주었으니 가장 좋은 땅 라메세스의 땅을 주었더라.
비돔과 짝을 이루는 국고성 ‘람세스’는 원래 람세스 2세가 건설한 하이집트의 수도 ‘피람세스’를 말하며,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가족이 머문 곳이다.
이 곳은 람세스 2세의 고향이었으며, 기원 전 13세기에 그가 건설한 화려한 왕도였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1970년대 이후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독일의 이집트 학자인 에드가 푸쉬는 1987년부터 나일 강의 지류 펠루시움 강변에 위치한 킨티르라는 곳에서 대규모 궁전 유적지를 발견하여 이 곳이 국고성 람세스임을 주장하였다.
나빌과 푸쉬 같은 고고학자의 노력으로 출애굽의 출발지인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가 발굴됨으로 출애굽 사건 증명에 기여를 하였다.
출애굽기 1:11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장할 공사 감독자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짐을 지워 그들을 괴롭히니라. 그들은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성읍들로 피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더라
b) 홍해 바다 속에서 발견된 이집트 전차 바퀴
WYATT (http://www.wyattmuseum.com/index.htm)라는 성서 고고학 협회에서 출애굽 당시 홍해에 수장된 이집트 전차부대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1978년에 홍해에서 얕은 지점을 찾아 탐사하던 중 산호초로 뒤덮힌 곳에서 전차 바퀴를 비롯한 전차부대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홍해에서 발견된 것은 8개의 살을 가진 바퀴인데, 이집트 전차의 역사와 대조한 결과 출애굽 당시와 일치하는 이집트 18번째 왕조의 바퀴임이 밝혀졌다.
출애굽기 14:6~7 그가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니, 그가 선별한 육백 대의 병거들과 이집트의 모든 병거들을 거느렸으며 병거마다 대장들이 맡았더라.
c) 출애굽 여정
애굽에서 시나이 반도를 지나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블레셋 사람의 길 (출 13:17) 이다.
그러나 블레셋 길에는 막강한 애굽의 군사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군사진지인 ‘많은 믹돌들’이 있었습니다.
이 군사 진지는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대상로를 보호하거나, 팔레스타인이나 아라비아 반도로의 정벌을 위한 군 주둔지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불과 40일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민족의 위험과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지름길을 포기한다.
따라서 모세의 출애굽은 시나이 반도를 남행하는 우회로를 택하게 된다.
고센 땅을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 변을 따라 남쪽의 험한 산악지역을 거쳐 내려 가게 됩니다.
1972년부터 10년 동안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의 오렌 교수는 이집트의 실레에서 이스라엘의 라피아까지 210km 구간을 발굴한 결과, 무려 150군데에 달하는 고대 야영지와 정착지를 확인하였다.
출애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 중에는 저장능력이 40톤에 달하는 곡식창고와 유물,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들이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d) 에담 광야
‘에담’의 뜻은 ‘방어벽’ 이고, ‘수르’의 뜻은 ‘성벽’이다. 같은 지역을 표현하고 있는 이집트어와 히브리어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이집트 본토로 유입하는 유목민들이나 이방인들을 제지하기 위하여 현재의 수에즈 운하지역을 중심으로 길게 방어벽 (믹돌)을 쌓아 두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현재 ‘엘림 광야’로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의 지형적인 특색은 거의 풀이 자라지 않는 벌판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숙콧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진쳤고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하히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민 33:6~8)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삿 5:8)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삿 5:11)
e) 마라
‘쓰다’는 뜻. 홍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물이 염수 (소금물)였을 것이다. 오윤무사를 마라로 간주 하기도 하지만, 이 지점 보다 80Km 남쪽의 ‘아인 이브라’ 지역을 마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홍해 (갈대바다)를 건넌 후 3일 길 (민 33:8)을 걸어서 도달하였다는 점과 엘림과 근접한 지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이다. 게벨 함맘 파라운 (바로의 온천산)이 멀리 보이는 홍해 변의 풀이 많이 자라 있는 지역이다. 라스 말라암 (Ras malaab : 운동장 같은 곳이라는 뜻) 이라 부르는 지점 2 Km 남쪽 지점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3)
히하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 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마라에서 발행하여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으므로 거기 진쳤고 (민 33:8~9)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4~25)
f) 엘림
‘아인 이브라’ 남쪽 11Km 지점의 ‘와디 그란델’. 아흐마드 함디 터널에서 11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에는 물샘 열 둘과 종려 70그루가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이곳에는 적절한 물을 공급해주는 담수샘이 있고,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 멋있는 협곡과 종려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 비가 온 뒤에 움푹 패인 땅에는 물이 가득한 것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 15:27)
g) 신광야
황량한 벌판이 끝나면서 이제는 작은 모래 산들이 점점 높아 보이기 시작한다. 석회암 절벽 사이사이에 산들이 형성 되어있다. 지형이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에담 광야에서 신광야로 들어가는 특징이다. 성경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 (출 16:1) 로 이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신광야’라는 지명은 당시 이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달신 SIN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건조한 불모 해변 평야인 엘 뚜르 항구의 북쪽 엘 까아 (el qaa), 구리와 망간의 제련지역인 와디 마가라 (wadi maghara)에서 약 150 Km 지점으로 이집트의 신왕국 때에는 항구 마가라항이 있었고 지금 이 지역에는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처음 목격하게 된다. 음식과 물의 부족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또한 만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두번째로 법도와 율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다. 또한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도록 하신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출 16:3)
h) 르비딤
현재의 ‘와디 베이란’ 또는 ‘와디 레파이드’로 시나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 종려 숲이 있다. 홍해에서 60Km, 시내산에서 54Km 떨어진 이 ‘바란 오아시스’는 ‘시나이의 진주’로 불리운다.
창세기 21장 12절의 하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 이드로가 양을 치던 장소이며,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 곳이다.
이곳에는 현재 모세 기념 예배당과 여자 수도원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 17:1)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 17:8)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9출 19:2)
알루스에서 발행하여 르비딤에 진쳤는데 거기는 백성의 마실 물이 없었더라 르비딤에서 발행하여 시내 광야에 진쳤고 (민 33:14~15)
i) 시내광야
시내광야는 시내산 동쪽에 있는 에르 라하 (er Raha) 평원 지역으로 해발고도 800m 로서 현재 성 캐더린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시내산의 한 줄기이다. 시내광야 주변의 지형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모세산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 (2,285m), 캐더린산 (2,642m), 세발산, 세일산 등으로 해발 2000 m 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뿐이다.
이들 산악과 평야는 화강암, 편마암, 섬록암이 그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성산 (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 경에 세워졌던 조그만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시내산은 가데스에서 11일 길 (신 1:2)이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7장 30절, 38절, 갈라디아서 4장 24~25절 등 4번 언급되고 있다. 모세 일행은 출애굽 1년 3월 15일에 이곳에 도달한다. 이곳의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은 성산 앞에 장막을 치고 거주한다. 이 평원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기간 체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출 19:1~2)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레 7:38)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 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민 1:19)
.시내 산 (Mt. Sinai)
시내 산이라 불리는 바위산 구역은 길이가 3.3Km, 폭 1.7Km로 전체 면적에 달한다.
이 지역은 해발 2,000m 이상의 산봉우리만 25개에 달하는 고산지대다.
해발 2,285m의 시내 산은 화산 폭발 결과 흘러 나온 용암이 굳어진 화강암으로 형성된 봉우리다.
.시내 산 정상
시내 산 정상은 2,285m 높이의 붉은 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산 정상에는 1934년 건설된 길이 25m, 폭 11m 규모의 성삼위일체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j) 바란광야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와디 마라(Wadi Mara) 계곡을 따라 나가면 아인 후드라 (Ain Hudra)라고 불리는 바란 광야에 이른다. 바란광야의 뜻은 ‘굴이 많은 땅’이라는 것으로서 이 지역은 노년기의 산악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온갖 색깔을 띠고 있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산의 골격이 다 돌출된 모습들은 파충류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균 해발 600~750m 정도의 석회암 산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고 두려운 광야’ (신 1:19)로 일컬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미디안과 애굽 사이에 있던 땅’ (신 1:1) 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 살았던 지역 (창 21:21)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 중 정탐꾼을 처음 보냈던 (가데스: 민 13:3, 26) 곳이며, 38년 이상의 긴 시간을 보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사무엘이 죽은 뒤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들었던 지역 (삼상 25:1)이기도 하다. 민수기 33장 2절, 하박국 3장 3절의 바란 산은 아카바만 서쪽 해안에 있는 바란 광야의 한 산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동쪽 해안인 아카바 만을 향해 계속 내려가서, 아카바 만의 누에바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75 Km를 가면 이스라엘과의 국경인 타바에 도착하게 된다.
k) 에발 산 중턱의 여호수아 제단
1980년부터 세겜을 중심으로 므나세 지역의 철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고 있던 제르람은 해발 940m의 에발산 중턱에서 한 돌 무더기를 주시하였다. 돌이 많은 산지에서 포도밭이나 올리브 밭을 가꾸기 위해 치운 돌을 모아 놓은 돌무더기들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유난히 에발 산의 것이 이 고고학자의 눈에 띈 이유는 바로 근처에 흩어진 구약시대의 토기 조각들 때문이었다. 성서 고고학의 달력이라 일컬어지는 토기 조각들은 그 지역이 곧 어느 시대에 번창했던 주거지였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에 주변과 구분되지 않는 흙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유적지 조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에발산의 여호수아 제단
세겜의 에발산 발굴을 통해서 B.
C 13~12세기에 건설된 제단 터를 발견하였다.
한 변의 길이가 8~9m 정도인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m나 되며, 제단의 한 가운데 바닥에는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m 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 있었다.
.에발 산의 여호수아 제단 복원도
구약 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어 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장들이 올라 가는 이 경사로는 길이가 7m, 폭이 1m 정도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졌다.
1982년부터 2년 간에 걸친 발굴 결과, 이 돌무더기 아래에서 철기1시대 (B.C. 1200~1000)에 건설된 제단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한 변의 길이가 8~9m 정도인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m나 되는 단단한 구조였다. 이 제단의 한 가운데 바닥에는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m 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 있었다. 구약 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 위로 올라 가는 경사로가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장들이 올라가는 이 경사로는 길이가 7m, 폭이 1m 정도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졌다.
내부에 채워진 흙과 불에 탄 재 사이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토기 조각들과 동물들의 뼈가 많이 출토되었다. 짐승 뼈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섭씨 400~600도의 불에 데워졌고, 소, 양, 염소, 사슴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사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레위기에 등장하는 희생 제물이었다.
모세는 요단 강 건너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세겜에 있는 에발산에 있는 제단을 만들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여호수아는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들’로 제단을 쌓았다 (신명기 27:4~8). 그 후 12지파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 부류는 그리심 산 쪽으로, 다른 한 부류는 에발 산을 향하게 한 다음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차례로 낭독하였다 (여호수아 8:30~35).
이 제단이 여호수아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발견된 토기류의 70%가 ‘목이음 항아리’였다는 점이다. 물이 부족한 산악 지대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멀리 떨어진 샘으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길어 오기 위해 대용량의 항아리가 필요했다. 몸통과 아구리를 분리해 만든 다음 목 부분을 이어 놓은 이 큰 항아리는 정착시대 (B.C. 1200~1000)의 특징적인 토기로 분류된다. 또한 람세스 2~3세 시대 (B.C. 1279~1153)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양식의 스캐럽 도장도 발견되었다.
13. 여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이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고생도 안하고 성에 들어가 완전히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안 믿는 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이 실제로 여리고성의 유적을 파고 들어가서, 성경에 기록되었던 여호수아 시대의 실질적인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리고성을 발굴한 모습, 그리고 여리고성 폐허에서 발굴된 식량단지들이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된다. 그때 되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이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탐사 팀에 의해서 여리고성은 여호수아 시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견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여리고 성벽을 고고학적으로 복원한 모형이 있다.
여리고 지역에는 여호수아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여리고라는 도시가 굉장히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수님 시절에는 그 유명한 삭개오가 여리고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구원을 받게된 사건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14. 다윗과 골리앗
지금부터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을 보자.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 48-51절의 기록에 의하면 엘라계곡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졌다. 블레셋 사람 중에 골리앗이라 불리는 거인때문에 이스라엘 용사중 많은 사람들이 벌써 엎어져 죽은 상황에, 다윗이라는 소년이 자기 형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러 갔다가 그 거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멸하는 꼴을 보고 어린 다윗이 의분을 느껴 나가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때에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 어린 소년이 물매를 들고 나가서 한 방에 정통으로 맞추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하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 재미있는 발견이 이루어 졌다. 1993년 5월에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하다가 이마에 돌이 박혀있는 거인의 해골을 발견했다. 이마 좌우거리를 측정하여 거인의 키를 계산해 본 결과 그 키가 2미터 90센티나 되는 거대한 체격의 거인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대측정 결과 약 BC 1000년경의 다윗시대에 죽은 것으로 측정되었다. 발견장소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체격이 거대하였고 이마에 돌이 박혀 있고 연대가 다윗 시대임을 종합해 볼 때, 이 해골의 주인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골리앗의 유골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거인해골입니의 이마를 보면 물매돌이 아직도 정통으로 이마 한복판에 확고히 박혀 있다. 그래서 외국신문의 영어표현이 절묘하게 잘 되어 있다. “다윗의 물매에서 날아간 돌이 아직도 거인의 이마에 박혀 있다.” 이와 같이 영어로 쓰여 있다.
15. 앗시리아의 침공
앗시리아가 주변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세력을 키워가다가 결국은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남유다보다 북 이스라엘이 더 타락했기 때문에 더 일찍 멸망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앗시리아의 침공시에 남 유다는 힘이 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약 136년을 더 견뎌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많은 고고학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비난을 하였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믿지 않았다. 그 시대에 앗시리아가 얼마가 강력한 나라인데, 힘도 없는 히스기야 왕이 이기긴 뭘 이기겠냐며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발굴된 실린더처럼 생긴 앗시리아의 비석에서 성경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이 발견되었다. 즉, 앗시리아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산헤립의 원통형 비문이다. 전쟁에서 패한 산헤립왕은 속이 상해서 고국 앗시리아로 돌아갔는데 쿠테타가 일어나서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서 신전에서 암살 당해 죽었다. 그후 에살핫돈이라는 아들이 산헤립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 열왕기하 20장 20절에 보면 산헤립의 침공 때 히스기야왕이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고고학적으로 그대로 발굴되었다. 오늘날에는 이곳이 예루살렘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히스기야 왕 시절에 급히 판 수로다. 완전히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안과 바깥에서 각각 400m씩 파 들어가 가지고 800m의 수로를 팠다. 성 바깥의 기혼샘이라는 샘으로 부터 성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혼샘 윗 부분은 막아 버렸다. 이것을 급히 만들었는데, 다행히 산헤립의 침공 전에 완성을 하여, 성안에 물이 있으니까 끝까지 버텨 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을 에워싼 앗시리아 군은 대치상태에 있다가 여호와의 신이 그들을 쳐서 패배하여 도망을 치게 되었다고 열왕기하 19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 왕이 기혼샘에서 수로를 파서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 바로 이 실로암이라는 인공 못이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눈을 뜬 기적의 못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도 눈병있는 사람들은 이 물 떠간다고 난리다.
그런데 결국은 남 유다도 타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앗시리아의 뒤를 이은 (역시 갈대아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지만) (신)바벨로니아라는 나라에게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고, 이 때 다니엘 등도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다가 바벨로니아 최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 유다는 결국 멸망되었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이때 하나님의 법궤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소문에 예레미야가 감추었다는 말이 있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 제1탄 ‘레이더스 (Raiders of the lost Ark)’에 보면 이 사라진 법궤를 찾아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16.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1) 히스기야 터널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지인 기혼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5백25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은 앗시리아의
포위에 대비한 최대 방위사업이었다. 터널의 기울기가 0.06%로 양쪽의 고도 차이가 32㎝밖에 되지 않는 정밀한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2) 기혼샘
에덴에서부터 흐르는 네 강 중의 하나가 기혼인데 아마도 예루살렘의 우주적 중심성과 관계 있는 것 같다`솟구쳐 나온다’라는 뜻을 가진 기혼샘에는 오늘날에도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중세에 건설된 계단 밑으로 흐르는 샘물은 이곳에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거쳐 실로암 못으로 흐른다.
3) 실로암 비문
여섯줄로 모두 2백글자 중에서 1백77자만 보존된 이 비문은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돼 있다.
“3규빗 (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 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 (5백25m)을 흘러나왔다.”(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소장)
기원전 701년 봄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은 맹렬한 기세로 유다를 공격했다. 이미 라기스를 함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다급한 상황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역대하 32:2~3)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유다의 공병대가 바위굴을 파기 시작했다.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밖의 수원지인 기혼샘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성 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대규모 터널공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뚫는 것으로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힘든 폭 60㎝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횃불의 그을음과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를 뒤집어 쓴 채 청동제 도끼로 바위를 쪼는 굴착작업은 예루살렘을 향해 치닫고 있는 앗시리아 군대의 진격속도와 겨루는 또다른 전쟁이었다.
1838년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은 기혼샘에서 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2천5백년의 세월동안 퇴적된 바닥의 진흙층 때문에 그는 거의 기다시피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 영국의 워렌도 `히스기야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그는 기혼샘 근처에서 수직으로 11m나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다윗의 부하인 요압이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수구'(사무엘하 5:8)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히스기야 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 비로소 밝혀졌다.
그해 여름 어느날 예루살렘 실로암 마을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그 중 한 아이가 물이 흘러 나오는 지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6m 정도 들어갔을 때 그 아이는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벽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콘더 (C.R.Conder)와 세이스 (A.H.Sayce), 독일의 구테 (H.Guthe) 등 고고학자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이 비문 해독에 매달렸다. 탁본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메사 석비’와 비교해 볼 때 언제든지 현장에서 비문을 확인할 수 있었고, 고대 히브리어 비문이 예루살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여섯 줄로 2백자가 기록된 실로암 비문은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 터널 개통 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3규빗 (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 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 (5백25m)을 흘러나왔다.’
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 길이 5백25m인 지하 터널의 기울기는 0.06%, 즉 양쪽의 고저 차이가 고작 32㎝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기혼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3백15m이다. 그런데 왜 적이 쳐들어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당시 유다인들은 구불구불하게 5백25m나 되는 긴 터널을 팠을까. 지금까지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중에 가장 타당한 설명이 바로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도할 때 지질학자인 단 길 (Dan Gill)은 정밀 조사 끝에 이 터널지역이 원래 4만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을 밝혀냈다. 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팠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양쪽이 도중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쿠데타 소문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사야의 예언 (이사야 37:7)대로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어떤 학자들은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만 성을 포위하던 당시 전술에 비추어볼 때 히스기야 터널 때문에 예루살렘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성서고고학사에 있어서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의 발견은 성서학 고고학 비문학 앗시리아학 지질학 수리학 토목공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들이 총동원된 학제간 연구의 좋은 본보기로 기록된다.
한편 실로암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이 지난 1890년,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인이 어느날 밤 아무도 몰래 혼자 연장을 갖고 히스기야 터널로 들어가 이 비문을 떼어냈다. 이 과정에서 비문의 작은 조각들이 바닥의 물 속으로 사라졌다. 이 도굴꾼은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고, 소문을 접한 오스만 터키 당국은 이 유물을 압수했다. 스위스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에서 탐사와 발굴활동을 하던 콘라드 시크 (Conrad Schick)는 곧바로 이 비문의 모형을 완성했지만, 비문 자체는 이스탄불의 제국박물관으로 운송됐다. 지난 1996년 다윗에 의한 `예루살렘 정도 3천주년’을 맞아 실로암 비문의 이스라엘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701년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고대 히브리어 기록 중 가장 긴 문장인 실로암 비문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17. 바빌론과 다니엘
다니엘의 무덤은 지금 이란(페르시아)의 수사에 아직도 남아 있다.
바빌론에 끌려 간 다니엘은 ‘다니엘서’를 기록하는데, 그의 예언대로 바빌론의 멸망 다음에는 메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가 그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후대에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대해서 성경의 신빙성이 많은 공격을 받았다.
다니엘서에는 헬라어 (그리이스어) 단어가 세 개 들어 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빌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헬라’ 즉, 그리이스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보면 그리이스와 바벨로니아는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말 (言)도 서로 오고 갔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세 개의 단어가 무엇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그 단어들은 모두 그리이스의 악기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최소한 한 개의 악기는 다니엘 시대 이전부터 바벨로니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악기였다.
예전부터 써 오던 악기이므로 그리이스 말 그대로 바벨로니아에서 쓰인 말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엘서에 수메르 단어가 8개나 들어 있다. ‘수메르’라는 나라가 언제부터 인가? 아브라함보다 이전 아닌가? 다니엘서가 기원전 500년경이라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전이므로 1500년도 더 된 단어가 8개나 남아 있다는 말이다. 느부갓네살 통치 시대 이후에는 수메르 언어가 전혀 쓰이지 않았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다니엘서에 수메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느부갓네살 시대, 혹은 그 이전에 다니엘서가 쓰여졌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저작시기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시기로부터 먼 훗날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수메르 단어로 확정되게 되었다. 히브리어조차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히브리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도 포로로 잡혀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내용에 있어서 허무맹랑한 사실이 너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 한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외국의 포로중의 일부를 잘 먹이고 갈대아 학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너무나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벨로니아의 정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에 고대 바벨로니아 지역을 발굴하다가 특별한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비석에 그 건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비석에는 포로로 잡혀 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었다는 기록이 다니엘서에 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 속에 던져 넣으려던 바벨로니아 군인들은 방화복을 입고 했었는데도 오히려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불길이 강했으나, 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여진 비석에 보면 바벨로니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불타는 용광로 속의 세 명의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다니엘서에 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에 떨어졌는데, 사자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뼈까지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계깊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고대 바빌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는데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잡아먹힌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성경에는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이 미쳐서 이슬을 묻혀가면서 풀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려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을 차려 돌아온 뒤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던 것 같다. 바벨로니아의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명각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왕이 미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경의 기록이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느부갓네살왕의 명각이다.
성경에 기록된 느브갓네살 왕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위는 의심을 받아 왔다.
왕의 비행은 좀처럼 기록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느브갓네살의 정신이상 (精神異常)을 암시하는 바빌론 당시의 점토문서가 근년인 1975년 그레이슨 (A. K. Grayson)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이 문서 (NO. BM 34113)는 불행하게도 많이 훼손되어 단편 (斷片)에 불과하지만 내용은 왕의 비정상적인 질병을 알리는 흥미진진(興味津津)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느브갓네살은 생각했다.
3. 그의 생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5. 그리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에윌-마르둑 (Evil-Merodach, 느브갓네살의 장자로 그 뒤를 이어 왕이 됨, 왕하 25:27-30)에게 나쁜 권면 (bad counsel)을 했다.
6.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명령을 내렸다.
7.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주의하지 않았다.
11. 그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12. 가족과 친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14. 그의 주의는 에사길 (Easagil; 바빌론 주신의 신전)과 바빌론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기울여지지 않았다.
16. 그는 신 중의 신에게 빌었고, 그는 탄원하면서 손을 들었다.
17. 그는 위 (대한) 신, 마르둑을 향하여 슬피 울었다.
18. 그의 기도는 계속되고, 향하여,
이러한 본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조정의 대신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 에윌-마르둑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느브갓네 살은 인생의 가치를 상실하고, 엉뚱한 지시를 내리고, 대신들의 조언을 거절하며,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보이지 않고, 가족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가의 수반으로서 국가 종교와 그 주신의 신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왕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이 아들인 에윌-마르둑에게 상황을 알리면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라는 권고를 하게 됐다고 보인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바람직한 권고였으나 나중에 느브갓네 살이 복권(復權)했기 때문에 그저 “나쁜 권면”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세계를 호령하던 느브갓네살 왕이 하루 아침에 광인이 되어 7년간이나 떠돌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아무리 부와 권세를 거뭐 쥐어도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고, 정신병 하나 제대로 치유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7년간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18. 페르시아와 그리스
대제국 바벨로니아도 결국 파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다리오) 장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다리우스는 키루스 (고레스)왕에 이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되고 페르시아의 왕궁인 페르세폴리스를 건립하였다. 그림은 페르세폴리스에 조공을 바치러 온 수많은 사신들의 벽화가 있다. 60여개의 나라들이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러 나아 왔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이다. 그 엄청난 통치하에 남들도 잘 대해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크세르세스 황제때 바다 건너 그리이스까지 다 정복하려 하다가, 스파르타,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들에 불과한 그리이스에게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그때 마라톤이란 것도 시작되었다. 그리이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크세르세스는 국내에서 폭정이나 하면서 시시하게 지냈는데,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크세르세스 왕이다.
페르시아의 대단한 왕이었던 다리우스와, 그 앞에 조공을 바치려고 나아오는 그리이스 사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서 하도 조공을 많이 바치라고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이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켰지만 페르시아는 그리이스에 패하고 말았다.
다리우스 왕의 도장은 두루룩 돌리면서 찍는다. 실린더형으로 되어 있다. 이 전성기를 누리다가 결국은 그리이스가 힘이 더 강해져서 알렉산더 대왕 때, 철천지 원수로 여겨온 페르시아를 완전히 진멸한다. 알렉산더는 본래 점령을 하면 융화정책을 썼는데, 역사적 이유 때문에 페르시아만은 용서하지 못하고 완전 초토화시켰다. 그 웅장하던 페르세폴리스는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고 그후 수천년 동안 잊혀졌다가 근래에 다시 발굴되게 되었다.
아테네 도시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도시의 수호신 아테네 여신의 신전이다. 아테네는 평생 처녀로 살았기 때문에 처녀신 아테네로 불리었다. 그리스말로 처녀는 파르테노스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아테네 파르테노스’가 된 것이다.
19. 로마와 기독교
그러나 그 위대했던 알렉산더왕과 그 나라들도 모두 망하고 결국은 멀리 있던 나라인 로마가 중동을 점령하고, 전 세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줄리어스 시이저의 암살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옥타비아누스가 최초의 가이사로 오른 것이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명하여 호적하라 할 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 그 가이사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 시절에 중동과 서구에 가장 안정된 평화가 왔기 때문에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고, 그 당시에 건립된 로마의 도로는 세계적이다. 로마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길부터 닦았다. 이렇게 로마가 전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여기까지 모든 역사의 흐름이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다 맞아 떨어진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았던 금신상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이 다 맞아 떨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성경은 놀라운 책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그 당시에 로마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도 남아 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도 예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요, 빌라도의 비문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별로 학식도 없었고 숨고 도망다니던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너무나도 담대한 사람들로 바뀌어졌다. 그래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그 시대에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이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렇게 시체만 들어있던 지하묘지 카타콤에서 집회를 하고 하다가, 결국은 황제의 가정에까지 복음이 다 전해진 것이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경우는 그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세력이 필요하게 되어, 급격히 양성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 경건하지 못한 형식적인 기독교인이 많이 생기면서 초대 기독교정신은 희석되고 타락하게 되었다.
김성 교수(협성대 성서고고학)
* 참고도서: 성서 고고학 이야기 (김성 교수, 동방 미디어)
* 참고 사이트:
http://wonderfulnature.com/
http://www.wyattmuse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