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 II (신약시대)
베들레헴, 나사렛, 예루살렘, 감람산, 베데스다 못, 실로암의 연못, 가버나움, 나사로의 묘, 겟세마네, 슬픔의 길, 고통의 지역, 골고다, 그리스도의 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이 신화이거나 사람이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사실과 지명이 실제로 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고학 (考古學 , archaeology)은 인간이 남긴 유적 ·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다.
시대적 범위에서 성서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서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서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이 수행되어졌다.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된 역사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 (F.M. Petrie)에 의한 텔 엘헤시 (Tell el-Hesi) 발굴로 부터 시작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30~50m 높이로 솟아 있는 유적 언덕의 발굴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러한 언덕을 아랍어로 ‘텔’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고,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흙벽돌 건물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풍화작용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지는데,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무너진 잔해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새로운 흙벽돌과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게 된다.
이런 과정이 수천년동안 계속 되면서 주거지의 지반이 높아졌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유적 언덕인 ‘텔’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최초의 텔 발굴은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1년 행했는데,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전 재산을 투자하여 발굴했다.
소아시아에 위치한 히싸를릭크 언덕에서 새로운 도시 유적이 계속 발굴 되었는데, 모두 9개나 되는 층층히 쌓인 도시들 가운데 밑에서 여섯 번째 도시가 트로이로 추정되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을 계기로 ‘주거층론’이 등장하였는데, 주거층이란 일정 기간 존속한 고대인들의 삶의 터전을 말하여, ‘주거층론’이란 그들 사이의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1890년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인 페트리는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광야의 유적 언덕을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한 성경의 라기스라고 확신하고 발굴해 주거층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 모양으로 결정된다는 ‘토기연대 측정법’을 고안했다.
페트리의 토기 연대는 성서 고고학의 달력으로 인정되었는데, 누구든지 토기 아구리 한 조각만 있어도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나사렛 등의 주요 성지들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 왔고, 중세시대부터 기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쉽게 찾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벧엘, 실로, 아이, 기브온, 므깃도 등 구약시대의 도시들과 가버나움, 벳세다, 거라사 등 신약시대의 마을들은 이미 오래 전에 폐허가 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한 장소를 찾기 어렵다.
1.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 1794~1863년)
미국의 목사이며 언어학자인 로빈슨은 성서의 문자적 정확성을 입증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지역에 위치한,미확인된 성서 속의 여러 지명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 `텔 브엘세바’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로빈슨 일행은 `비르 에 세바’라 불리는 조그만 베두인 천막촌에 도착했다. 이곳의 아랍어 지명을 토대로 그는 이곳이 다름아닌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인 성서 속의 `브엘세바’임을 밝혔다. 1969년 이후 발굴을 통해 솔로몬시대 요새로 건설된 텔 브엘세바의 모습이 밝혀졌다.
3. 로빈슨의 아치(1850년대)
1838년 예루살렘의 성전 터의 축대 부분을 관찰하던 로빈슨은 지진으로 인해 튀어나왔다는 돌출부를 성전 부속건물로 통하는 통로를 받치기 위한 아치의 일부라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밝혔다.
4. 로빈슨의 아치(현재)
이렇게 묻혀 있는 팔레스타인 성서 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당대 최고의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무장한 에드워드 로빈슨이란 미국인 목사에 의해 1838년 최초로 시도되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성지를 순례했는데, 카이로를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등정한 후 요단강 건너편으로 향한 다음 여리고성으로 들어 갔다.
로빈슨은 수주일동안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조그만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르 에-세바라 불리는 베두인 마을에서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였던 브엘사를 발견하였다.
로빈슨은 고대의 지명은 비록 그 지방 주민과 언어가 바뀌더라도 그 발음은 계속 보존된다고 믿어 현지의 아람어 지명을 참고로 성경의 도시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로빈슨은 하루 종일 길 없는 외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탐사하였다.
1838년 로빈슨은 예루살렘 북쪽의 유적지들을 탐사하여 아나타를 예레미아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제바를 게바로, 묵크마스를 믹마스로, 엘-지브를 기브온으로, 그리고 베이틴을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벧엘로 정확하게 일치시켰다.
○ 목차 (신약시대)
20. 베들레헴
21. 나사렛 (Nazareth)
22. 예루살렘
23. 감람산
24. 베데스다 못 (Pool of Bethesda)
25. 실로암의 연못 (예루살렘)
26. 가버나움 (Capernaum)
27. 나사로의 묘(예루살렘)
28. 겟세마네 (예루살렘)
29. 슬픔의 길 (예루살렘)
30. 고통의 지역 1 (예루살렘)
31. 고통의 지역 2 (예루살렘)
32. 골고다(예루살렘)
33. 그리스도의 묘(예루살렘)
20. 베들레헴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지니며, 아랍어로는 ‘푸줏간’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그것은 목축업이 활발했던 것과 양을 잡는 날에 행해지던 잔치(삼상 25장 )에 그 기원이 있다. 또한 ‘에브라다’와 함께 병용하여 사용(미 5:2) 되기도 하였고 ‘에브랏'(창 35:16, 19, 48:7) 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다윗 왕의 고향(롯, 삼상 16장)이기도 하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삼상 16:1)이며, 다윗의 우물(삼하 23:13~17)이 있던 곳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미가의 개인 제사장 레위 인의 고향(사 17:7~13), 사무엘은 왕에게 베들레헴을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성지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르호보암 왕 때는 이곳에 요새가 쌓아졌고(대하 11:6), 한때 블레셋에 의해 점령되었고(삼하 23:14), 예수님의 탄생지로 예언되었고, 그 예언이 성취된 곳(미 5:2, 눅 2:1~5, 마 2:1~18, 요 7:41~42)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 Km 떨어진 곳에 있다. 특히 감람나무가 많은 해발 700여 m 높이의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 예수님탄생교회 (Church of the Nativity)
주후 135년 로마 황제 하드리안은 제2차 유태인 반란을 진압한 후 기독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예수님 탄생 동굴 위에 아도니스 신전을 만들어 세워 놓는다. 그 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는 이 아도니스 신전을 철거하고 이곳에 예수님 탄생 교회를 건립한다(주후 325년). 이 교회는 주후 529년 비잔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던 사마리아 인들에 의하여 크게 손상을 입게 되지만 곧 이어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서 복원된다(주후 565년).
현재의 건물은 십자군 시대의 예배당 모양을 보존하여 수리한 것이다. 탄생의 동굴은 성탄교회 내부 지하에 있다. 예배당의 모양은 십자가 모양의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십자군 당시 교회를 보수할 때 입구의 높이를 1.2m 정도로 낮추고 그 폭도 좁게 만들어 놓았다. 머리를 굽히고서야 교회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약탈자들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교회에 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방어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자세를 낮추고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주후 1100년 성탄절 날 볼드윈 1세는 십자군 시대의 예루살렘 왕으로서 그 즉위식을 이곳에서 가졌다. 주후 386년 제롬은 예수님 탄생교회 바로 옆에 있는 동굴에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때 번역한 불게이트(Vulgate) 성경이 지금까지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다.
– 라헬의 무덤
이곳은 ‘라마’로 언급되기도 하는데(에레미야 31장 15절), 무슬림, 기독교인,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기념 장소이다.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의 무덤(창 35:19, 48:7)은 헤브론 길에서 베들레헴 길로 꺾어지면서 곧바로 보이는 곳에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유대인들을 늘상 보게 된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나 중요한 절기 때 이곳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다. 그들도 죽은 성인이나 조상들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다. 이 외부 건물 구조물은 1860년에 새로이 지어진 것이다. 이 무덤에 와서 기도하면 번성과 안전한 출산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이곳에서 기도하기도 한다. 간간이 세파르딤 파에 해당되는 유대인 여성들이 이곳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 하더니 (창 35:16)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창 35:19 ~ 20)
21. 나사렛 (Nazareth)
나사렛은 예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 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사자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사렛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사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크리스챤 이라는 말도 히브리어로는 ‘노쯔리’,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나사렛은 에스드라엘론 평원 북쪽, 갈릴리의 언덕에 있는 한 마을이다. 티베리아스에서 31Km, 하이파에서 39Km 떨어진 해발 375m 정도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아랍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 마을 동쪽 산너머에는 새로이 조성되어온 유대인 도시가 있다. 성탄절을 전후한 시기에 성탄절을 느끼게 하는 도시의 하나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마 2:22~23, 요 19:19)으로 불린다. 이집트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곳(눅 2:39)으로, 예수님은 그의 소년시절(눅 2:51)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초기 그리스도 인들은 ‘나사렛당’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이것은 지금도 아랍어와 히브리어에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이곳 나사렛에는 오래전에 정착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과, 초기 로마시대 기간에 번성했던 것을 보여준다. 중기 청동기 문명 시대의 해골과 매장터가 도시 상부에서 발굴되었다. 1962년 가이사랴에서 발굴된 한 파편에는 히브리어로 나사렛이라 기록된 기록물이 등장하였고, 탈무드 시대의 기록물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빌립이 나다니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5)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23)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막 1:9)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6)
22. 예루살렘
691년 압델 말릭이 세웠다는 바위사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곳으로 지금은 회교사원으로 쓰임.
황금의 도시, 영원한 도시,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3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숨쉬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아무런 보잘 것 없는 풍경과 전무한 상태의 부존 자원을 가진 유대 광야의 동편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있는 이 도시를 성경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하였다. 이런 아무 쓸모없는 땅이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았고, ‘일신교의 보루로서’, ‘세계인의 성도’ 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모의 언덕에서 유명한 철학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설교와 도덕적 계율들, 그리고 한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르치셨고 실수와 우상숭배로 인해서 눈 어두워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른 판단의 기준과 신앙적인 확신을 심어준 신앙의 틀을 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 4:2)
이곳은 전인류의 절반이 종교적인 수도로 믿고 있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옛날의 영광이요 미래 희망의 상징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펼쳐진 곳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하게 지켜본 도시이다. 또한 회교도들은 이곳이 선지자 모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 믿고 있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신성한 도시인 동시에 테러와 전쟁의 피가 끊임없이 흘려진 곳이다. 즉, 칼이 오랜 동안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들의 자손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전쟁을 거쳐왔고, 사람들의 피로 바다를 이룬 적이 수없이 많았었다. 무려 50차례 이상을 포위 공격 당했으며, 36차례에 걸친 정복과 10차례의 심한 파괴를 당했다.
예루살렘의 시초는 고대사 속에 묻혀 있어 알 길이 없지만, ‘평화’라는 뜻의 ‘살렘'(salem) 이라는 이름으로 가나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8), 또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겔 16:3) 하였다. 사실상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곳이 된 것은 주전 10세기에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그의 수도로 삼고(삼하 5:6~10),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옮겨온(삼하 6:1~23)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윗성(City of David)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자신을 포함한 역대 왕들의 무덤이 되기도 하였다.
23. 감람산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눅 21:37)
감람산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쪽은 무덤지역 4개의 봉우리를 가진 조그마한 언덕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약 800 m 정도인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예루살렘 보다 약 90m 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AD 1세기 경에 숲이 다 망가져 버렸다. 유대인들은 이 산을 출발점으로 하여 일련의 봉화들을 밝혀두곤 하였는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동족들에게 새로운 달이 시작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죽은자들이 감람산 위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옛부터 이곳 감람산은 무덤 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예루살렘 동편의 산으로 다윗왕이 하나님께 경배(삼하 15:30~32) 하였으며, 솔로몬의 산당(왕상 11:7~8)이 있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 산을 자주 찾아와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기도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하였으며 부활 후 마침내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시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장소를 베다니 근방 (눅 24:50)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른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이 감람산 꼭대기하고 한다.
예수님이 체포 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이곳 감람산의 서쪽 기슭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마 21:1~10,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이 시작되었고, 예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막 13, 마 24, 눅 21)하신 곳이기도 하다.
24. 베데스다 못 (Pool of Bethesda)
예루살렘의 동쪽 성문 중의 하나인 스테반 문 (일명 사자문)에서 성 내부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이 연못은 예수님 당시에는 성의 북쪽벽 밖 가까운 곳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문(Sheep Gate, 느 3:1, 요 5:2) 곁에 위치하고 있다.
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110m, 너비 62~80m, 그리고 깊이 7~8m, 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 이곳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늘 집합되는 장소였고,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로서 성스러운 성지로 지켜져 오는 곳이다(요 5:2~9),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다.
또 오리겐 (AD 231년)은 두 개의 쌍둥이 연못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연못 가장자리에 4개, 중앙에 한 개의 기둥”을 말하고 있어 사도 요한이 전하고 있는 ‘다섯 행각’에 관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연못은 수백년 동안에 흙으로 덮여져 있던 곳이 1888년에 들어서 발굴되었다. 이 연못은 그 길이가 105m, 폭이 60m, 그 깊이가 7.5m가 되는 직사각형 모양에 네 개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서, 그 측면은 다섯 개의 회랑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로써 요한복음의 ‘다섯 개의 행각'(요 5:2)이라는 말이 입증되는 셈이다. 이 연못 중의 하나가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양을 깨끗이 씻겨서 들여가던 곳이다.
비잔틴에 의해서 건립되고, 614년에 페르샤에게 파괴된 5세기의 바실리카가 거대하게 남아있고, 십자군 시대의 교회당이 비잔틴 교회 위에 건립되어 있다. 이 교회당의 정면 모습과 정문은 오늘날도 연못의 모습 위에서 방문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십자군의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모인 안나와 요아킴이 살던 곳으로 AD 1140년에 발드윈 1세 (Baldwin I) 의 부인에 의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 안나 교회’ (St Anne’s Church)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교회는 마리아의 탄생지가 되는 귀중한 토굴 위에 건립되었다. 1187년 십자군의 패배 후에 살라딘 왕은 이슬람의 신학교로 이 장소를 사용했다.
1865년의 크리미아 전쟁의 결과로 압둘 마지브 술탄은 나폴레옹 3세에게 이 장소를 양도했고, 이 교회는 수리되어 백계 신부(White Fathers)들에게 넘겨졌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다섯 행각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낫게 됨이러라(요 5:2-4)
25. 실로암의 연못 (예루살렘)
실로암의 연못 = 에제키아 지하수도 끝에, 티로페온의 계곡에 있는 이 연못의 수조는 장님의 눈을 뜨게한 예수의 기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요 9장).
26. 가버나움 (Capernaum)
예수의 갈릴리 선교 본부로서 3년 동안의 공생애 활동의 가장 중요한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 4:12~13)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이 도시를 ‘그의 고향’ (his own city), 혹은 ‘그의 도시’라 부르고 있다.(마 9:1, 막 2:1)
이곳은 고대로부터 ‘해변의 길'(Via Maris, 사 9:1) 이라는 남북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헤롯 빌립과 안티파스의 경계로 많은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군인, 상인, 여행자 등)이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곳이라 여겨진다. 예수의 사역 중에도 로마의 백부장과의 만남이 보도되고 있다.(마 8:5~13) 이 사실은 BC 135년 하드리안 황제때의 이정표가 발견되어, 가버나움 옛 도시 안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곳에서 예수는 어부 출신의 그의 제자들(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셨으며(막 1:21, 29, 막 4:18~22), 또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시던 회당 (마 8:5, 막 1:23, 눅 4:23, 7:2)과 베드로의 생가 (마 8:14, 막 1:29) 가 남아 있으며, 특히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명이 예수께서 가르치시던 집의 지붕을 뚫고 들어간 사건 (막 2:1~12)은 유명하다. 이는 갈릴리 지방이 현무암 지대여서 그 돌로 집을 짓고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지붕을 덮는 형태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지역의 고대 가옥이 그러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주로 활동 하시면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으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하셨다.
1838년 미국의 탐험가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inson)이 이 도시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후 여러 차례 발굴을 통하여 알려진 현재까지 남아 있는 회당은 그 기초만이 예수 당시의 것이며, 석회석으로 2층 구조로 남아 있는 건물은 4~5세기의 것이다. 또 6세기에는 베드로의 생가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638년 아랍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은 교회는 746년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가버나움 터는 1905년에 발굴되어서 가버나움 옛 회당을 발견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베드로의 집 터 위에 5세기 경에 세워졌던 유적들을 발굴하였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표적인 도시로서 심판의 날에 소돔과 같은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을 선언하기도 하였다.(마 11:24) 예수의 사역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등의 도시는 비잔틴 시대 이후 더 이상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배은 망덕 한 도시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하여서 이미 그 도시는 파괴되고 잊혀진 지 오래이다.
27. 나사로의 묘 (예루살렘)
바위를 파서 만든 묘, 나사로의 묘의 안팎
나사로의 묘 = 한 사람의 환자가 있다. 나사로라 하고, 그 자매 말타의 마을 베타니야의 사람이었다. 베타니야는 예루살렘 근처, 25리 정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라고 요한 전에 기록돼 있다. 오늘날 이 베티니야 마을은 아자리아라고 불리고 있지만, 예수가 행한 많은 기적중에도 가장 유명한 나사로의 소생을 기념해서 여기에 세워진 3개의 소 예배당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 회교도가 관리하고 있는 나사로의 묘는 17세기에 전개된 24단의 위험한 계단을 내려간 곳에 있다. 여기에 안치되어 있던 죽었던 자 나사로는 예수의 말에 의해 소생했다.
28. 겟세마네 (예루살렘)
겟세마네의 정원은 기독교의 전통에 있어서 가장 영적인 곳이다. 아직 올리브나무가 울창하며,이는 필히 예수가 끌려가던 마지막날 밤을 지켜 보았으리라 믿어진다.”Gethsemane”는 히브리어로 “Gat Shemen”즉 올리브 숲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이 지방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마태복음 26장 36절).
29. 슬픔의 길 (슬픔의 길)
라틴어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 m 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 마련된 14개 장소는 18세기에 와서야 확정된 것이며,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 검증되기도 하였다.
제1지점 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빌라도 법정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 (Praetorium, 마 27:11 ~ 14)으로부터 시작되며 예수께서 사형이 확정된 곳이다. 헤롯 대왕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며,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고교회 (Church of Condemnation)가 서 있다.
제2지점은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하셨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시는 예수를 보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 (Ecce Homo, 요 19:5) 라고 했다.
AD 135년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세운 에케호모 아취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제3지점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가 서 있다. 십자가의 무게와 모양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제4지점 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이며
제5지점 은 구레네 사람 시몬 (Simon of Cyrene)이 십자가를 대신 진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시몬의 아들들은 ‘알렉산더와 루포 (막 15:21)로 알려져 있으며,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롬 16:13)라 부르고 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계속되는 비아돌로로사는 비교적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올라간다.
제6지점 은 성베로니카 여인이 물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성베로니카(St. Veronica)가 예수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는데 돌려 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1882년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제7지점 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1875년에 두 개의 예배실이 세워졌다. 이 곳은 예수 당시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cf 히 13:12~13)
제8지점 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라고 말씀하신 곳이며,
제9지점 은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곱틱교회가 서있다.
제10지점 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이며,(요 19:23~24)
제11지점 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이며,(눅 23:33)
제12지점 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곳이며, (마 27:45~51)
제13지점 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마 27:59)
제14지점에서 그가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마 27:60~61)
※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안에 있다.
30. 고통의 지역 1 (예루살렘)
157.158. 예루살렘 : “채찍질 교회”의 정문 내부는 스테인드 유화로 장식되어 있다.
159. 예루살렘 : 비어 돌로로사,에세 호모의 로만 아치.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요한복음 19장 1-3절) 1920년대에 세워진 이 교회는 십자군들이 세운 곳위에 세워졌으며, 지금은 프란체스코 교회가 운영을 하고 있다. 이 교회는 “빌라도가 예수의 발을 씻는 모습” 등이 스테인드글라스에 나타난다. 위의 높은 쪽에는 금테를 두른 모자이크가 있다. 이는 “별에 의해 뚫어진 가시왕관”이라는 그림이 있다.
에제 호모라는 로마식 아치의 잔재가 있는 곳에 두번째 기착지가 있다. 이도 빌라도가 예수를 군중에게 소개할 때의 음성을 기념한 것이다. 하드리안왕(서기 135년)때 예루살렘의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 아치는 지금도 훤히 보인다. 왼쪽의 아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른쪽 아치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이 교회에는 옛 폐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로마 아치나 안토니아 요새나 로마시대의 도로 등이 있다. 돌에는 고대 주사위 놀이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놓고 도박한 곳이라고 믿겨진다. 스투루디온의 연못은 B.C. 2세기 때의 저수지로써 하드리안황제에 의해 지붕이 씌워졌다.
160.161. 예루살렘 : 비오 돌로로사의 전경, “시온자매들의 교회”마루에 새겨진 주사위 놀이.
162. 예루살렘 : 리토스트라투스의 전경,고대 로마의 포장, 이곳이 예수가 빌라도 전에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졌던 곳이라고 생각되어진다.
31. 고통의 지역 2 (예루살렘)
예루살렘 : 콥트수도원의 내부, 입구에 있는 로마양식의 기둥이 예수의 고통의 지역 LX을 나타내주고 있다.
세번째 지역은 예수의 쓰라림을 기념하는 곳이며, 이곳에는 아르메니아 천주교회가 세운 성당이 있다. 이는 19세기 건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군인들에 의해 보수되고 완성되어졌다.
예수와 그의 어머니의 만남을 기념하는 조그마한 회당이 독특한 양식의 출입문과 함께 서있다. 폴란드 조각가 Zieliensky의 작품이다.
문에 새겨진 글로써 예수와 시몬의 만남을 기념하는 곳이다. 시몬은 예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들고 가면서 십자가형에 처해질 골고다까지 간 사람이다. 이는 성경의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다.
163.164.165. 예루살렘 : 비어 돌로로사,상:고통의 지역 III,
하(좌):고통의 지역 IV,하(우): 고통의 지역V.
166. 예루살렘 : 비어 돌로로사,좁은 골목에 수공품 가게와 고대풍의 건물들이 서있다.
167.예루살렘 : 비어 돌로로사, 고통의 지역 VI.그리스 정교회가 십자가를 표시했다.
그리스 천주교도가 소유하는 이 교회는 예수와 베로니카의 만남을 기념한다.
168. 예루살렘 : 비오 돌로로사,고통의 지역 VII.
예수의 두번째 쓰러짐을 기념하는 기둥이 서있는 거리이다. 비어 돌로로사 사이의 교차로에 세워져 있다.
169. 예루살렘 : 고통의 지역 VIII, 벽에는 조그마한 십자가가 있다.
그리스 정교회당의 바깥벽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려진 조그만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예수는 신앙심 깊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성경의 누가복음에 잘 기록되어 있다.
170.예루살렘 : 비어 돌로로사의 전경.
예수의 세번째 쓰러짐이 일어난 곳으로 Coptic교회당의 입구쪽에 있는 로마시대의 한 구역이었다. 다음의 다섯 지역의 십자가는 이 성스러운 무덤 내부에 있다.
32. 골고다(예루살렘)
골고다의 언덕에는 오늘날, 가파른 계단을 통과 하면 2개의 예배당이 있다. 하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이고, 또 하나는 그리이스 정교이다. 카톨릭 쪽에는 2개의 처가 있고, 또 그리이스 정교쪽에는 12개의 처(그리스도 종언의 땅)가 있다. 제단 아래 비치는 바위의 일부 은으로 표시된 곳은,십자가가 박혀있던 장소라 한다.
33. 그리스도의 묘 (예루살렘)
그리스도의 묘의 외관 = 그리스도의 묘 : 예배당이 있는 제단 안에 있다. 이 작은 건조물은 2개 부분으로 나뉘고, 앞의 천사의 예배당 여자들이 그리스도 묘를 방문했을 때 천사가 앉아 있던 바위의 일부가 중앙에 박혀 있다. 그리고 다음의 작은 방이야말로 예수의 묘이고, 또 고난의 길의 종점이기도 하다. 약 2m 의 흰대리석 석판은 알리마타야의 요셉 정원에서 발견된 신묘의 원석을 포함하고 있다. 묘위에는 43개의 은제, 램프가 매달려 있고, 로마 교회와 그리이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가 각각 13개를 또, 코프트 교회가 4개를 소유하고 있다.마리아의 이콘이 바위를 파낸 중에 숨져지듯이 놓여 있다.
김성 교수(협성대 성서고고학)
* 참고도서: 성서 고고학 이야기 (김성 교수, 동방 미디어)
* 참고 사이트:
http://wonderfulnature.com/
http://www.wyattmuse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