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태의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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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을 넘어서
야야 헤릅스트는 <피해의식의 심리학>에서 진정한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피해자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세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라고 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사랑하라고 한다.
둘째, 과거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피해의식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부정적인 생각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이 갖는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자신 안의 고정관념을 대면하라. 내가 알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고정관념이 만들어놓은 가식적인 나일뿐이라는 것이다.
여기 패의식과 환경을 초월하여 삶의 굳건한 모습을 보여준 한 사람의 영웅이 있다.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즈칸의 말이 얼마나 도전적인가!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는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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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은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보다 더 넓게 세계를 정복했다. 그의 행군거리는 마일 단위가 아니라 적어도 위도와 경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가 쓸고 간 도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 강의 위치가 바뀌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칭기즈칸의 군대 몽골족의 승리는 “불행과 가난에 찌든 유목민의 군대가 갖는 다이내믹한 힘에 풍요로운 문명국가들이 굴복한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문명비평가도 있다.
늦은 시간은 없다
우리는 특정한 과거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는데 얼마나 걸치적거리는 장애물을 달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과거 어느 한 시점의 불쾌한 경험, 실패한 경험이 두고두고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것들 때문에 웅비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중간에 포기하고 꺾어버리고 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우리의 삶은 단순히 나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한 시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기를 원하신다. 쓰임받기에 늦은 시간도, 포기하기에 늦은 시간도, 새로 시작하기에 늦은 시간도 없다. 죽음 앞에 선 강도도 예수님 믿고 회개하고 천국에 갔다. 아브라함을 75세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사고로 기자로 꿈을 펼쳐 보지 못하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려 10년 동안 병상에서 소설을 썼다. 3년 동안 무려 13개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어느 날 기차역에서 출장 가는 밀런 출판사 편집장 레이슨을 만나 “한번만 읽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레이슨은 읽지 않았다. 미첼은 끝나기 전엔 결코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만 읽어 주십시오 – 미첼 올림”
동일한 전보를 세 번째 보내었다. 드디어 그의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렸고, 미첼은 이 소설로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녀가 만약 다리가 다쳤을 때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포기했다면, 두 번째 전보를 부치고 포기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6년, 55세가 되던 해에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즉, 믿으면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써 증명된다. 이는 ‘강한 믿음’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절대적이면서도 모호한 존재일 것이다. 거울을 보면 내가 있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때가 많다. 나의 영혼이나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나라고 믿었던 특성들이 보기 좋게 바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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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는 자신을 너무도 확실하게 믿은 사람의 이야기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의 똑똑함과 냉철함, 그리고 지식이 그에겐 믿음이었다. 더불어 점점 더 커지는 그의 자기 확신적 열정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게 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죽어나갔으며, 결국 그 또한 건강을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영혼 거래에도 구원을 받은 그였지만, 스스로를 너무 믿어 벌어진 일들을 돌이켜보면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까 혼란해지기까지 한다. 즉, 나를 믿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 믿음이 또 너무 크면 자만의 나락이나 나르시시즘으로 곡해될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의 대상을 바로 찾고 바로 믿는 것이다.
1) 기준은 하나다. 예수님처럼 꼭 예수님처럼!
“비교는 행복을 앗아가는 도둑”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행복’을 ‘자존감’이나 ‘자기 확신’으로 바꾸어도 꼭 들어맞는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지 않은, 타인과의 비교는 우리의 삶을 요동하게 한다. 하지만, 기준을 이 땅에서 완벽하게 살다 가신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둘 때 우리는 완벽한 방향을 따라 달려갈 수 있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사로 잡히느냐, 예수님을 모델로 하여 완숙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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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는 그동안 우리가 평균의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일깨운다.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그동안의 사고방식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평균소득 이상이면 행복하고, 그 이하면 불행할까? 평균 키보다 크면 우월하고 작으면 열등한 것인가? ‘평균’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기준은 예수님이 아닌 평균이 되고 나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절대기준’인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워한 푯대이다.
2) 원칙을 갖되 융통성 있게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말을 정말로 갈릴레이가 했을까라는 설왕설래가 많다. 어찌 되었건 종교재판을 받고 나온 갈릴레이의 이 말엔,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강력하게 견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난 갈릴레이가 원칙을 꺾었다거나 스스로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내가 추구하던 나와는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곤 하는데, 대부분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 원칙은 단기적일 수도, 보다 장기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위해 밤 7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와 ‘나는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 것이다’란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몸이 아파 약을 먹어야 하는데 7시 이후라고 먹지 않거나, 내 삶을 포기하거나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도우려는 것을 두고 우리는 ‘원칙’을 지킨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스스로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일까?
원칙은 꼿꼿하게 서서 부러지지 않겠다, 물러서지 않겠다가 아니라 원칙에 따라 물러나거나 돌아가야 할 때를 아는 것. 때로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원칙을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 원칙을 가진 융통성은, 결과적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을 지킬 수 있는 큰 힘이 된다.
3) 자리바꿈, 남을 돌아볼 것
때로는 자기 확신이 ‘고집’과 ‘아집’으로 변질되면 신호가 온다. 대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다. 내가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니, 혹 사람들과의 갈등이 생기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나의 열정이 과하여 다른 사람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달리진 않았나? 그것이 결국엔 잘못된 열정으로 불타오른 것은 아니었나? 또는 누군가의 자만에 나 스스로를 애써 구기고 쪼그라든 건 아닐까?
남에게 미안하고, 나에게 미안한 일들은 삶에서 반복되지만 그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믿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며 피해의식을 넘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삶의 푯대를 결코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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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태 목사
(알파크루시스대 글로벌 온라인 학부장, 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