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요엘서 개관 – 하나님 나라를 견고케하는 능력, 성령!
요엘서가 기록된 시대가 언제인지를 확정하는 것은 난제로 남아있다. 오직 저자인 요엘의 이름만 등장할 뿐 명확한 역사적 상황이 제시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빠르게는 B.C 9 세기부터 늦게는 포로 후기인 B.C 515년 이후까지 기록연대에 대한 견해는 범위가 넓다. 첫째, 본문에는 성전이 존재함으로 성전이 없었던 시기인 B.C 576에서부터 B.C 515년 사이는 분명히 배제된다.
또한 시리아와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주전8세기 중반 이전이나, 6세기 말이후에 나온 책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왕의 이름이나 침략군이 누구인지도 언급되었지않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요엘서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대해 칼빈은 대단히 중요한 입장을 취했다.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가 가르친 시대를 확정 짓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낫다. 또 우리가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인 지식이 없이는 많은 부분들의 설명이 불가능한 호세아서와 같은 경우에 그의 시대를 모르는 것은 독자들에게 큰 손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요엘의 경우에 그의 시대는 모호하고 불확실할지라도, 그의 가르침의 취지는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다.”
이렇듯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정확하게 알수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도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모든 시대의 성도를 향한 보편적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요엘은 먼저 이전에 겪지 못했던 일이 있을 것을 말한다.(1:2-4). 메뚜기 떼가 공격해서 식물을 남김없이 먹어 버릴것이라 선포한다. 물론 메뚜기떼에 의한 피해는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참혹하다. 1:4을 보면 “ 팥중이가 남긴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나오는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은 다 메뚜기를 부르는 말이다. 아마 메뚜기의 생애과정에 따라 달리 부른 듯하다. 메뚜기들이 일생의 과정을 지내면서 잔인하게 식물을 먹어치우는 재앙을 말한다.
그런데 이 메뚜기 재앙이 과연 문자적으로 메뚜기인지, 상징적으로 군사적 침략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철저한 재앙을 예비하셨는가 이다. 왜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에 이런 총체적 위기가 도래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 중요하다. 그것은 약속하시고 베푸신 땅에서 죄악을 제거하시려는 정화작업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무엇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그들의 실책이었는가? 요엘서만 읽으면 심판의 구체적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여러 선지서들을 통해 하나님의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정한 죄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의 회개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메시지를 읽으면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 했을 가능성이 크다. (2:12-13)
따라서 그들이 지금 당하는 메뚜기재앙 (그것이 문자적으로 메뚜기이건 상징적으로 외국의 침략군이건)은 그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2:10-11)의 징조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란 무엇인가? 그 날은 원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적들과 싸우시기위해 구원자로 오시는 날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아모스서(5:18-20)와 스바냐서 (1:2-18)에서 그 의미를 반전 시켰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언약관계를 자신들의 이기적 욕심으로 파기하고 뻔뻔스러워진 그의 백성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날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메뚜기재앙과 여호와의 날이 연관되는 이유이다. 그날은 분명히 준비되고 올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은 무엇인가? 그들이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애통하고 회개하여 께로 돌아 오는 것이다. (2:12-13). 징계가 목적이 아니다. 징계가 초점이 아니다. 회복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방향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2:18) “자기 땅을 지극히 사랑하시어”에서 살펴볼 수있다. 개역판에는 “ 중심이 뜨거우시며”라고 번역했다.
언약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심히 뜨겁다는 것이다. 언약을 파기하고 자기 좋은 대로 달려간 그의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하나님의 목표와 지향점은 진정한 회복이다.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은 뜨겁다. 그래서 그들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속에 오셔서 함께 그 사역을 행해 나아가실 것이다. (2: 2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어떤 방법을 통해?“ 이루실 것인가? 그대답이 2:28-29에 명시되어있다.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회복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가능함을 선포하신다. 우리는 이 구절의 중요성을 신약성경을 통해서 확보한다. 사도행전 2:16-21에서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의 사건을 이 구절을 통해 명시한다. 교회의 탄생에 관한 사건이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매우 중요한 두가지 사항을 점검하게 된다.
첫째는 , 이제 바야흐로 성령의 민주화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 이전에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지도권과 관련이 되어있었다. 모세와 칠십인 장로(민11:25) , 여호수아(신34:9), 왕들(삼하 23:2; 시 51:11), 선지자들(왕하 2:9)이 성령의 수혜자들이었다. 그러나 요엘은 성령의 민주화를 선포한다.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만 피난처를 찾고 하나님께로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적 서열은 “나이많은 유대인 남자 자유인”이 최고 위치였다. 그들이 동틀 무렵에 드리는 기도는 자신들이 “노예나 이방인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었다. 그런데 요엘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쓰시기위한 사람에게 부으시는 성령의 수혜자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여종(여자이면서 노예), 나이든 사람뿐 아니라 젊은이 (너희 자녀들이 , 너희 젊은이는), 유대시민뿐 아니라 만민(만민에게) 에게까지 미치면서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하신다.이렇듯 성령의 민주화 시대를 예고하신다.
둘째로 성령에 대해 생각할 것은 과연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시점과 목적이 무엇인가 이다.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망각하고, 언약을 파기한 파렴치한 행각으로 좌초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였다. 그러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은 뜨거웠다. 이제 하나님백성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만물의 생명력 복원을 진척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구체적으로 성령주심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의 임재란 자기도취에 빠져 신비로운 황홀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땅의 진정한 회복을 위한 추동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아담의 실패이후 사탄이 가져다 주는 온갖 종류의 사악한 이기심의 발로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진정어린 마음을 닮은 공동체와 개인으로 서기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해야한다. 성령의 강림과 사역은 종교적 행사에서 떠들썩하고 법석을 떨거나 일시적인 마음의 흥분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의 무너지고 훼파된 도덕성과 양심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진실된 삶의 양태로 복구되기 위한 열망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다. 다시말해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성령사역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하심은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속에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인간성회복의 유전인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축복을 갈망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축복이 누구에게 도래되는가? 2:28에서는 만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곧 2:32 에서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라고 했고, 곧이어 2.32 하반부에서는 “남은자 중에 부름받은자”라고 규정한다.
성령을 받고 그의 임재하심속에서 지상최대의 축복인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확립은 결국 주님의 이름안에서 복된일에 초청받은 부름받은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보내심을 약속하셨고 또한 보내심으로 교회를 시작하셨고 그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교회가 건전하고 튼튼한 때는 이 성령의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속에서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신실하게 설 때였다.
요엘서를 통해 메뚜기 떼와 이방의 침략군, 그리고 계속된 여호와의 크신날로 인해 이스라엘의 일시적붕괴를 체험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본질적 회복을 맛보게 된다. 무너진 사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변형된 것에 대한 환상이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샬롬과 인간들 사이의 샬롬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통로는 하나님의 참된 영이신 성령을 받고 변화될 때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된 인간성과 참된 사회를 위한 변혁의 원동력이 바로 우리가운데 성령이 임하실 때 주어진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난무하는 시대이다. 성령님을 이기적 종교생활의 도구 정도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은근히 부각시키기위해 성령님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 특별히 오늘 본문인 요엘서를 통해 만난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타락으로 깊이 달려간 인간사회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사역이 성령님 사역의 진정한 방향이다.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체험하고 확장시켜가는 진정한 일군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된다.
육신적 안목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이다. 이때 우리는 어떠한 길을 갈 것인가? 성령님의 역사속에서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고 기쁘게 이 길을 걸음으로서 이 시대를 회복하는 참된 사역자로 서기를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이 것이 성령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사는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들의 삶의 몫이 아닐까?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