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7년 4월 15일,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1707 ~ 1783) 출생
레온하르트 오일러 (독: Leonhard Euler, 라: Leonhardus Eulerus,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논리학자, 공학자이다.

–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출생: 1707년 4월 15일, 스위스 바젤
.사망: 1783년 9월 18일 (76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지: 스위스,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국적: 스위스
.분야: 수학, 물리학 등
.소속: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러시아 제국 과학 아카데미
.출신 대학: 바젤 대학교
.지도 교수: 요한 베르누이
.주요 업적: 오일러 각, 한붓그리기, 오일러 공식, 오일러의 네 제곱수항등식,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 오일러 항등식,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오일러 방정식, 오일러 직선, 오일러 수, 오일러 운동 방정식, 오일러의 정리, 오일러 삼각형 정리, 오일러 지표, 오일러 피 함수, 코시-오일러 방정식 등
.부모: 마거리트 브루커, 폴 율러
.형제자매: 요한 하인리히 율러, 마리아 막달레나 율러, 안나 마리아 율러, 요한 하인리히
.배우자: 살로메 아비가일 그셀 (1776 ~ 1783), 카타리나 그셀 (1734 ~ 1773)
.자녀: 칼 율러, 요한 율러, 헬렌 율러, 샬롯 율러, 크리스토프 율러
.종교: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오일러는 미적분학, 그래프 이론, 위상수학, 해석적 수론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함수 기호 f(x)(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와 을 처음 도입하였다. 고전역학, 유체역학, 광학, 천문학 및 음악 이론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오일러는 18세기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이 분야에서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약 92권의 전집과 866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보냈다.

○ 생애 및 활동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으며,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있었다. 오일러가 바젤에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의 리헨으로 옮겨 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후 베르누이는 어린 오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오일러는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참가해 2등을 하였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이 상을 12번 수상하였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이 제의를 수락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 게오르크 젤 (Georg Gsell)의 딸인 카타리나 젤 (Katharina Gsell)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네바강 옆의 집을 샀으며, 13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5명만이 살아남았다.

– 베를린 시절
1741년 6월 19일, 오일러는 러시아에서의 혼란을 피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으로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25년 동안 살면서 약 380편의 논문을 썼다. 1755년에 오일러는 왕립 스웨덴 과학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오일러는 또한 프리드리히의 조카이자 안할트 공국의 공주인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Friederike Charlotte)를 가르쳤다. 1760년대 초 오일러는 그녀에게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썼으며, 후에 이 편지들은 묶여 ‘독일 공주에게 보내는 오일러의 편지 (en:Letters to a German Princess)’라는 저서로 출간되었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름입니다, 너무 많은 등 이 책에는 오일러의 인격과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수학 및 물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이 나타나 있다.
오일러의 많은 업적이 아카데미의 명성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결국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궁정에 많은 지식인 집단이 있었으며, 수학자가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정교하지 않고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일러는 기존의 사회 질서나 관습적인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단순하고 경건한 종교인이었는데, 이는 당시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던 볼테르과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였다. 오일러는 숙련된 토론자가 아니었고,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주 볼테르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 시력 악화
러시아에서 수학을 연구하는 동안 오일러의 시력은 점차 악화되었다. 고열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3년이 지난 1738년에 그의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력은 독일에 있는 동안 더 악화되었고, 그런 오일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은 키클롭스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하였다. 1766년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하였고, 수술이 실패하여 왼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뛰어난 암산 및 암기 실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일례로 그는 약 1만 3천 행에 달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여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775년에는 매주 평균 한 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사망
1783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오일러의 마지막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전에도 오일러는 팽창하는 풍선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으며 오후에는 동료와 함께 새로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던 그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몇 시간 후 사망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오일러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며 “그는 계산하는 것과 사는 것을 멈췄다.”라고 썼다. 이 일화는 훗날, 헝가리의 저명한 수학자가 되는 에르되시 팔이 신발을 신고 죽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일러가 뇌출혈로 쓰러질 때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을 석판에 썼다거나 말로 남겼다는 설이 있다.

○ 주요 업적 및 저서
그는 평생 동안에 500편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출판하였다. 오일러의 연구 목록에는 죽은 뒤에 출판한 것까지 포함해서 886항목이난 있으며, 현재까지 나온 전집은 75권에 달한다. 생애를 통해 그가 쓴 논문의 분량은 연평균 약800쪽이 되는 셈이다.
해석기하학 ․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 ․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 (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 (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 (1768~1770), 변분학 (變分學: 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에 관한 저서 『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이 있는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 (Methodus invenien야 lineas curvas maximi minimive proprietate gaudentes, 1744)』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주요업적으로 오일러 각, 한붓그리기, 오일러 공식, 오일러의 네 제곱수항등식,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 오일러 항등식,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오일러 방정식, 오일러 직선, 오일러 수, 오일러 운동 방정식, 오일러의 정리, 오일러 삼각형 정리, 오일러 지표, 오일러 피 함수, 코시-오일러 방정식 등이 있다.
– Selected bibliography
Mechanica (1736).
Methodus inveniendi lineas curvas maximi minimive proprietate gaudentes, sive solutio problematis isoperimetrici latissimo sensu accepti (1744). Latin translation: a method for finding curved lines enjoying properties of maximum or minimum, or solution of isoperimetric problems in the broadest accepted sense.
Introductio in analysin infinitorum (1748). English translation: Introduction to Analysis of the Infinite
Institutiones calculi differentialis (1755).
Vollständige Anleitung zur Algebra (1765).
Institutiones calculi integralis (1768–1770).
Letters to a German Princess (1768–1772).
Dioptrica, published in three volumes beginning in 1769.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