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노자 (老子)의 생각 돌아보기
1. 이 세상에 적용해야 할 자연의 질서: 도 (道)
– 노자철학의 토대는 인간이란 자연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는 자각에 있다. 따라서 인간적 지혜의 이상적인 형태는 만물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인식하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을 변화시키는 실체를 파악하고 우주 만물의 변화 속에서 일정한 법칙을 찾아내려 한다. 그 법칙이란 모든 현상의 배후에 깔려있는 시공을 넘어선 본체와 그 운동원리이다. 그 본체를 그는 도 (道)라고 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의 시원으로 이해한 도는 자연계의 원동자로서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창조력을 갖는다.
* 어떤 물건이 흐릿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겨난 것이었다.
고요하고 텅 빈듯하지만 홀로 서서 변하지 않고, 두루 행해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라 할 만한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 (道)라고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큰 것 (大)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제 25장)
* 道는 一을 낳고, 一은 二를 낳고, 二는 三을 낳고, 三은 萬物을 낳는다. (제 42장)
* 사람을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스스로 그러함’ (自然)을 법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제 25장)
*위대한 도는 장마물 처럼 왼편 오른편 어디에나 퍼져 있다. 만물은 이것에 의지하여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으며, 공을 이룩하고도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고 하면서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 (제 34장)
2. 도 (道)의 작용
–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이때 만물의 발전은 반드시 일정한 정도 (곧 극점)에 이르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 세상의 사물 중에는 무조건 영원히 발전해 나가기만 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분별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만물의 변화과정 속에 드러나는 일시적인 구별일 따름이다.
*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 (제 40장)
* 그것을 道라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큰 것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큰 것은 끊임없이 가고 있다. 끊임없이 가는 것은 멀리 끝까지 간다. 멀리 끝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제 25장)
* 만물은 다 같이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모두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 만물이 번성하고 있지만 제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제 16장)
*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 (靜)이라 하는데 그것은 운명 (命)을 따라 되돌아가는 것이다. 운명을 따라 되돌아간다는 것은 영원불변하는 법칙이다. (제 16장)
3. 부드럽고 연약함
– 노자는 유약 겸양 부쟁 (柔弱 謙讓 不爭)의 덕을 설파한 사상가이다. 노자는 기본적으로 도의 속성은 유약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약하고 유연함을 생명의 상징으로 보았다.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 약하다는 것이 무 (無)로 자연의 상태에 가까운 것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리고 유연함의 극치를 추구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조하고 또한 곳곳에서 ‘다투지 말라’ ‘씨우지 말라’고 설교하고 있다.
* 최상의 훌륭함이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의 훌륭함은 만물을 이롭게 해 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위치에 처신하는 것이다. (제 8장)
* 천하에는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는 물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그 무엇으로도 물에 대신한 만한 것이 없다. (제 78장)
* 유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제 36장)
* 억센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 (제 42장)
* 사람이 살아 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고 나서는 굳고 강해진다. 만물이나 초목도 살아 있는 적에는 부드럽고 여리지만 죽고 나서는 말라서 뻣뻣해진다. (제 76장)
*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그와 다툴 수 있는 상대가 없게 된다. (제 22장, 66장)
4.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기
– 노자가 말하는 나 (我)라는 주체성은 세상 사람들이 한결 같이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바다처럼 형체도 없이 출렁이고, 무작정 부는 바람처럼 어떤 세속적 개념으로 잡을 수 없는 자유의 주체성이다. 자기를 주창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때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닌 인간은 번뜩이는 지행의 빛과 의지의 불꽃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노자는 너무 넓어서 어떤 관점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인격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았다.
* 천지 자연은 장구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하고 오래갈 수 있는 까닭은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 (聖人)도 이와 같다. 사람 앞에 서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람 앞에 설 수 있다. 내 몸을 잊었기에 오히려 내 몸을 온전히 한다. (제 7장)
* 정말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욕망의 문을 닫는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마음의 엉킴을 풀어 헤친다. 자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풍진 세상과 어우러진다. 이것을 현동 (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현동에 이른 사람을 보면 친밀하게 대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이롭게 해야 할지 해롭게 해야 할지, 존경해야 할지 경멸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한다.
외부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하다. (제 56장)
*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난다.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옳음이 더욱 밝혀진다. 스스로 업적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공적이 인정된다. 스스로 뽐내지 않기 때문에 남보다 뛰어나게 된다. (제 22장)
* 스스로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밝게 알려지지 않는다. 스스로 옳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알려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다. 스스로 뽐내려는 사람은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 (제 24장)
5. 무위지치 (無爲之治)
– 도는 안하는 일이 없이 큰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작위 (作爲)도 없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의 위대한 작용이나 존재는 의식조차도 못하기 일쑤이다. 도처럼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않고 되어지는 것을 무위 (無爲)라 하고, 그러한 상태를 ’스스로 그러함 (自然)’이라 부른다. 노자의 승부사로서의 진면목은 무위로 이기는 것을 가장 높이 산다는 데 있다.
* 도는 언제나 일부러 하는 일이 없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제 37장)
* 성스러움을 끊어 버리고 지혜를 내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배로 늘어날 것이다.
어짊을 끊어 버리고 의로움을 내버리면 백성들은 효도와 자애로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기교를 끊어 버리고 이익을 내버리면 도둑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본시의 바탕 (素)을 드러내고 소박함을 지니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제 19장)
6. 천하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 노자 사상의 또 다른 특점은 일반적인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고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긴 것이나 짧은 것, 또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 등이 있을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상대적인 그러한 가치를 믿고 뒤쫓는 데서 불행이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착하게 보이는 것을 착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본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대적인 뜻에서 생겨났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며, 긴 것과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있게 되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상대적인 관념에서 있게 되며, 음악과 소리도 상대적인 소리의 조화의 구별이며, 앞과 뒤도 상대적인 개념의 구별에 불과하다. (제 2장)
* 다섯 가지 색깔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들의 귀를 먹게 하는 것이며, 다섯 가지 맛은 사람들의 입맛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발광케 하는 것이며, 얻기 어려운 재물이란 사람들의 행동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다. (제 12장)
* 위대한 성취는 결함이 있는 듯하지만 그 효용에는 결함이 없는 것이다. 크게 충만한 것은 텅 빈 듯하지만 그 효용은 한이 없는 것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이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듯이 보이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말을 더듬는 듯이 보인다. (제 45장)
* 도에 밝은 이는 어두운 듯이 보이고 도에 나아가는 이는 물러나는 듯이 보이며,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듯이 보인다. 훌륭한 덕은 골짜기처럼 보이고, 크게 결백한 것는 때가 묻은 듯이 보이고, 광대한 덕을 지닌 이는 부족함이 있는 듯이 보이며, 튼튼한 덕을 지진 이는 교활한 듯이 보인다. 바탕이 참된 것은 더러운 듯이 보이고 크게 모가 난 물건은 모가 없는 듯이 보인다. (제 41장)
7. 윤리 (倫理)란
– 공자는 어짊과 의로움을 크게 내세우고 있지만 노자는 어짊과 의로움은 도에 어긋나는 의식적인 행위로써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위대한 도 (道)가 무너지자 어짊 (仁)과 의로움 (義)이 생겨났다. 지혜 (知)가 생겨나면서 큰 거짓이 존재하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화목하지 않게 되자 효도 (孝道)와 자애 (慈愛)가 생겨났다.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 (忠臣)이 생겨났다. (제 18장)
* 예 (禮)라는 것은 충실함과 신의가 얇아진 결과로 생겨난 것으로서 혼란의 시작인 것이다. (제 38장)
8. 반학문 반문화(?)의 논리
– 노자는 일반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지식 또는 지각 자체를 부정한다. 그는 지혜가 사람들을 불행케 만드는 원인이라 생각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결국 유한하고 불완전한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무한하고 완전한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무고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근심 걱정을 안겨 주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자가 생각했던 진실한 앎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먼저 무엇이 도에 합당한 일인가를 알아야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문화력을 중심으로한 문명을 비판하고 그 대신 자연의 운행 원칙을 적용한 새로운 문명의 건설을 꿈꾸고 있다.
* 지혜가 생겨나면서 큰 거짓 (僞)이 존재하게 되었다. (제 18장)
* 성스러움을 끊어버리고 지혜를 내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배로 늘어난다. (제 19장)
*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제 65장)
* 학문을 끊어 버리면 걱정이 없게 된다. (제 20장)
* 학문을 하면 날로 지식이 늘어나지만, 도를 닦는 일은 하면 날로 지식이 줄어든다. 지식이 줄고 또 줄어들어서 일부러 하는 일이 없는 무위 (無爲)에 이르게 되는데 무위하게 되면 되지 않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제 48장)
* 공부하지 않는 것을 공부하는 것으로 삼아라. (제 64장)
* 천하에는 처음 (始)이 있었는데 그것이 천하의 어머니 (母)가 되었다. 그 어머니를 터득함으로써 그 자식들을 이해하고, 그 자식들을 이해함으로써 다시 그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 (제 52장)
* 수컷의 강함을 알고서 암컷의 연약함을 지키면 천하의 만물이 모여드는 골짜기 같은 존재가 된다. 골짜기 같은 존재가 되면 변함없는 덕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어 다시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제 28장)
*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이이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은이 이다. (제 33장)
*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게 된다. (제 44장)
추천 텍스트
<노자: 자연과 더불어 세계와 소통하다> 김학주 역 / 연암서가 / 2011.4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역 / 소나무 / 2001.12
<노자가 옳았다> 김용옥 역 / 통나무 / 2020.10
<노자도덕경주> 왕필 저 / 김시천 역 / 전통문화연구회 / 2011.12
김춘택 강사 (시드니 동양고전읽기 주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