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단톡방에서
장엄 (莊嚴)
세상의 모든 ‘장엄 (莊嚴)’들은 우리를 압도합니다. 불시에 압도된 정신이 겪어야 하는 것은 감각(感覺)의 카오스입니다. 때로는 의지(意志)에 없는 ‘울음’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만약 압도적인 ‘장엄(莊嚴)’ 앞에서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감각한 사람이거나, 미숙한 인격이거나, 소시오패스일 공산이 큽니다. 바보거나 세상모르는 어린아이거나 그도 아니면 철두철미 냉혈한이라는 겁니다. 제대로 배우며 성장한 교양인이라면 놀랄 때 놀라고 감탄할 때 감탄하고 압도될 때 압도되어야 정상입니다.
우리가 아는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육사 이원록도 그런 정상적인 교양인들이었습니다. 반듯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생애에 처음 만난 압도적인 ‘장엄(莊嚴)’ 앞에서 목이 멘 경험을 각각 자신의 글쓰기로 토로했습니다. 시간을 격하고 있지만 같은 장소 앞에서 동일한 느낌을 기술했습니다. 연암(燕巖)과 추사(秋史)의 ‘장엄 앞에서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이라는 책에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사의 소회는 「광야(曠野)」라는 절창으로 표출됩니다. 난데없는 ‘장엄’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우는 것으로 남아(男兒)된 자로서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한결같은 사자후(獅子吼)들입니다.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드넓은 평원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당하여 연암은 이렇게 독백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삶의 통찰이 담긴 멋진 멘트다. 하지만 뒷통수를 내려치는 건 그 다음 대목이다.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1천 2백 리에 걸쳐 한 점의 산도 없이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을 보고 처음 터뜨린 그의 탄성이다.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니? 어리둥절한 동행자 정진사의 물음에 연암의 장광설이 도도하게 펼쳐진다. 이름 하여 「호곡장론(好哭場論)」 혹은 통곡의 패러독스! 천고의 영웅이나 미인이 눈물이 많다 하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렸을 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석(金石)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울지 못했다. 그런 울음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요컨대 기쁨이나 분노, 사랑, 미워함, 욕심 등 어떤 감정이든 그 극한에 다하면 울 수가 있으니, 그 때 웃음과 울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극치를 겪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픔을 당했을 때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억지로 부르짖을 따름이다. 궤변 혹은 예측 불가능한 생성. 이에 다시 정진사가 묻는다.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七情)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 될까요.”
대답 대신 또 다른 궤변이 이어진다. 갓난아기는 왜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가? 미리 죽을 것을 근심해서? 혹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그렇게 보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이때의 울음은 우리가 아는 그런 울음이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경계를 넘는 순간의 환희이자 생에 대한 ‘무한긍정(無限肯定)’으로서의 울음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의당히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저 비로봉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 만하고,”“이제 산해관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요동벌판에 왔으니 이 역시 한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호곡장론’의 대단원이다.
참고로 이 ‘호곡장론’ 부분은 독자적으로 인구에 회자되어 일종의 고사성어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다음에 나오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시 「요동벌판(遼野)」이다.
천추의 일대 통곡장이란(千秋大哭場)/익살스런 그 비유가 신묘한 법문일세(戱喩仍妙詮)/비유를 하자면 갓난아기가(譬之初生兒)/세상에 태어나며 울음 먼저 우는 셈(出世而啼先).
요동벌판을 보고 연암이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라고 외친 것과 갓난아이의 울음에 대한 궤변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텍스트다. 이렇게 비약과 생략을 통해서도 충분히 소통이 될 정도로 그의 ‘패러독스’는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것인가?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2003) 중에서]
연암이나 추사에 이어서 육사가 자신의 울음터를 소개하고 있는 글이 절창 ‘광야’입니다.
「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즈런한 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전집』, 깊은샘, 2004]
고미숙씨는 연암의 ‘호곡장론(好哭場論)’이 연암 특유의 ‘패러독스’로 후대 사람들의 흉금을 울렸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후대의 공감을 얻은 것은 당연히,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였습니다. ‘패러독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역설이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그의 정신은 이미 ‘압도’된 상태입니다. 그 호연지기가 표현의 묘(妙)를 얻어 호곡장론(好哭場論)이 탄생하였다는 걸 후대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이야기를 ‘패러독스’로, 문체(표현)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아니면 본인이 호연지기 자체를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갓난아이의 울음’을 ‘적병을 깡그리 사로잡는’ 적재적소의 예시(보조관념)으로 읽지 않고 시종 ‘궤변’이라고 토를 다는 부분도 어색합니다. 전체 글의 계륵처럼 느껴집니다.
연암의 호연지기는 추사를 징검다리 삼아 육사에게 이어집니다. 이육사의 「광야(曠野)」는 연암의 호곡장론의 근대시적 구현입니다. 육사는 연암이 섰던 그 자리에서, ‘광야(曠野)’에서, 그 ‘울음터’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목놓아 자신의 호연지기를 토로(吐露)합니다. 그러니, 문화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열하일기』의 ‘호곡장론’ 없이는 이육사의 「광야」도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작(詩作)의 동기(動機)로는 ‘독립에의 의지’라는 그 흔한 ‘광야의 주제’보다는 ‘호연지기’가 우선입니다. ‘조국의 독립’ 이전에 연암의 ‘호곡장론’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게 봐야 합니다. 저항시의 위상을 훼손하는 불손(불순)한 언설이라고 책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짜 역사주의적 해석이야말로 이육사의 「광야」가 제대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방해가 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후손들은 연암이라는 걸출한 한 문화적 선대(先代)가 물린 조선 남아의 호연지기를 「광야(曠野)」라는 시에서 제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진정한 ‘광야(曠野)’를, 위대한 호연지기의 역사적 현장을, 진정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요동 벌판, 그 막막한 광야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호연(浩然)을 울음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던 조선 남아(男兒)들의 심정이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으려면 그 길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김윤식 교수의 소론(所論)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출전은 [김윤식, ‘육사의 「광야」와 연암의 「호곡장」’, 문학동네, 38호]입니다.
“천고 이전에 노래 부른 ‘나’와 천고 이후에 이를 복창해야 할 ‘초인’은 무엇인가. 역사 이전의 첫 번째 존재가 ‘나’라면 후자는 역사 이후의 첫 번째 존재라 할 수 없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나’와 ‘초인’의 만남을 가능케 한 계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래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계기, 또 그 노래를 목놓아 부를 수 있는 계기를 문제 삼을진댄 그것은 ‘광야’가 아닐 수 없다. ‘광야’를 매개로 해서만, 그리고 ‘광야’에서만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 있고, 또 이런 사색, 이런 상상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중략]
<열하일기> 중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호곡장론」을 정밀히 분석해 보인 김명호씨의 논문에 따르면 추사의 「천추대곡장」의 근거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요동 벌판을 마주한 연암이 저도 모르게 ‘통곡하기 좋은 장소로고! 울어볼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고 한 곡절을 밝힘에 있어 김씨의 시선은 연암이 사용한 문체의 특이성, 가령 ‘소리없는 눈물’을 무성안수(無聲眼水)라 한 조선식 한자에 집중되어 있다. [중략] 문체의 변혁이 요망될 만큼 그 현장감이 깊었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통곡하기 좋은 장소를 설명하기 전에 연암은 당연히도 통곡의 의미부터 캐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칠정(七情) 가운데 슬픔만이 통곡을 유발하는 줄 알고 칠정 모두가 통곡으로 될 수 있음을 모르고 있다’고 전제하고 기쁨이 극에 달하면 통곡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어찌 그뿐이랴. 분노, 즐거움, 사랑, 미움 등도 극에 달하면 통곡으로 될 수 있음을 설명함에 연암이 든 사례는 다름 아닌 갓난아기(赤子)였다.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우는 울음이야말로 거짓 없는 행위라는 것, 이를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한 장소가 요동벌판이라는 것.…” [김윤식, ‘육사의 「광야」와 연암의 「호곡장」’(문학동네, 38호), 중에서]
육사의 「광야」가 연암의 「호곡장론」의 영향 아래서 씌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광야’를 목전에 두고 ‘소망했던 세계’도 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양자 공히 마음껏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펼칠 수 있는 세계(그 안에는 ‘강한 조국’에의 열망도 있을 것입니다)의 도래를 꿈꾸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는 120년이라는 긴 시간을 격하면서도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절박했던 그 어떤 ‘공감’의 내포가 무엇이었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소박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후일 북학파의 거두가 되는 연암이 광야 앞에서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었다면, 후일 이국땅에서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는 육사는 그 앞에서 물론 ‘조국의 독립’을 소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암도 그랬지만, 육사도 그런 구체적인 ‘역사’를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도 조국도, 그 어떤 구체적인 대상도 부르지 않은 채 오직 ‘가난한 노래의 씨’와 ‘천고의 뒤’에 올 ‘초인’을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의 호연지기, 그의 구국의 노래가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지금 ‘광야’라는 ‘장엄(莊嚴)’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앞도적인 것 앞에 우리도 같이 서야 합니다. 그 안에서 ‘강철 같던’ 일제 강점의 현실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져야 합니다.
사족 한 마디. 식민지 시대의 절창으로 알려진, 육사의 「광야」와 윤동주의 「십자가」는 역사적 고통을 실존적 성찰을 통해 초극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두 작품이 더욱 감동적인 것은 역사가 주는 ‘고통’을 그 ‘고통’의 차원에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경지로의 도약을 통해, 멀찌감치, 어른스럽게, 초극하려는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어쩌면, 그 길이 시인이 나아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고, 초인을 부를 ‘노래의 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사의 ‘호연지기’와 윤동주의 ‘참회’,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볼 때 그래야만 할 것 같습니다. 후손인 우리도 그런 어른스런 선대의 뜻을 이어, 남을 원망하고 탓하기 전에,
*2023년 8월 23일, 시드니인문학교실 단톡방에서 최진 대표님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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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 대표
시드니인문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