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린필드모임, 2023년 종강 실시
정원일 목사,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그리고 인문학 : 포스트모던 유대인과 인문학’ 주제로 열강
송년모임도 개최 11월 23일 이스트우드커뮤니티센터에서 [11월 16일 강연 전문 포함]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 린필드모임은 지난 11월 16일 오후 7시, LKS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ighway, Lindfield)에서 정원일 목사 (호주 이스라엘연구소 소장)를 강사로 종강모임을 실시했다.
종강모임에 강사로 선 정원일 목사는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그리고 인문학 : 포스트모던 유대인과 인문학’ 주제로 강연하며 서두에 “홀로코스트는 ‘번제물’이라는 뜻으로 2차 세계 대전시 약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나 총으로 죽어 화장터에서 태워져 재가 되게 한 대량 살상의 사건을 말한다. 유럽의 팽배한 반 유대주의와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등장하며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기획하고 기계적으로 특정 민족을 대량으로 죽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쳐 20세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흔히 유대인들 은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한 유대인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모든 유대인들의 피부 에 직접 와 닿는 상처와 슬픈 역사의 흔적으로 각인되어 있고 민족적 결속력을 갖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며 “신의 특별한 선민임을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역사 안에 충격적인 큰 도전이 되었다. 자식들과 아내와 남편과 부모가 눈앞에서 매를 맞고 강간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도하며 소망했던 생존의 기대감은 칠흙 같은 절망이 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두 상실되고 생존을 위한 수용소 안의 처절한 삶은 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으로 남게 되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은 신앙을 잃게 되었고 정체성의 상실과 생명과 존재의 가치에 대한 혼동과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유대교의 진보주의자들은 ‘신은 역사 가운데 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죽음’이라는 운동으로 ‘정의와 도덕과 인간의 고통에 관여하는 개인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리저 벌코 비치-홀로코스트 이후의 신앙)’고 주장했고 많은 반향을 얻기도 했다. 심지어 강성 랍비들은 ‘이것이 세상에 동화하며 독일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가게를 열고 비즈니스를 한 죄에 대한 분노하신 하나님의 벌 (랍비 사피라, 타이테 바움, 밀러 등)’이라고 가혹한 각성을 지적했다. … 과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일들이 생길 때 나의 죄 또는 조상의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비난한다면 과연 그것이 설득될 수 있는 말일까 반문하게 된다. 에밀 화큰하임이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신앙의 간극에 대해,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략을 상기하며 유대인들에게 614번째의 계명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613개의 계명에 한 개를 더해서)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소멸되지 않도록 우리는 생존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었다거나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절망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히틀러가 죽은 후에 그의 원대로 유대인과 유대교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승리를 안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대인의 역사 속으로의 귀환’이라는 책에서). ‘홀로코스트’는 신의 존재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야기하며, 변환의 시대에 대한 사유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홀로코스트 요약, 독일과 유럽의 시대 배경,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 1938), 독일의 반 유대주의, 미주와 러시아 기타 지역의 반 유대주의,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관의 변환, 전 후 세대의 평가, 홀로코스트와 포스트 모던 시대, 신의 부재와 인간, 철학자들의 견해, 현대 문명의 세계관, 병적인 이원론 등의 순으로 살폈다.
장연을 마무리하며 “유대교의 랍비들은 제 1 예루살렘 성전이 BCE 586에 파괴되고 멸망당하게 된 이유를 이스라엘에 팽배한 우상숭배와 성적타락과 살인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공교롭게도 AD 70년 같은 날 일어난 2차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에 편만한 ‘근거없는 미움’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멸망의 요건이 같으므로 ‘근거없는 미움’을 우상숭배나 성적 타락, 살인과 같은 심각한 죄들과 동급의 심각한 죄로 취급한다 (바빌론 탈무드, 요마 9b)고 평가한다. 그리고 미움과 증오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미움은 올 곧은 것을 굽게 한다’ 또, ‘사랑은 결점에 대해 눈감게 하고 미움은 덕에 대해 눈감게 한다 (시랏 이스라엘)’라고 가르쳤다. 랍비 죠슈아는 ‘악한 눈과 악한 성정과 미움은 평범한 사람을 세상에서 제거 시킨다 (아버지의 윤리 2:11)’라고 말했다. ‘미움을 가지면 괜한 사람까지도 해를 끼친다’는 의미이다.”라고했다.
이어 “독일의 나치가 처음에는 유대인을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매도하고 더 나아가 인종적으로 차별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지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재산을 빼앗고 생명을 빼앗고, 대량 살상에 이르는 더욱 더 잔인하게 악해지는 악의 종국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렇듯 사랑도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진다고 강조했다. 홀로코스트는 수많은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통해, 전체주의의 획일성으로부터 개인의 생명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시대의 화두로 돌이켜 놓았다. 이는 전통으로부터 세속화와 다양성의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다양한 타인의 성정을 수용하고 개인의 생명과 창의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유의 능력을 배우게 하는 신의 의도를 비로소 짐작하게 한다.”며 강연을 마쳤다.
강연 후에는 질의응답의 시간을 통해 현재 진행중인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시간을 갖으며 2023년도 종강모임을 마쳤다.
한편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11월 23일 (목) 오후 7시, 이스트우드커뮤니티센터 (159-161 Shaftsbury Rd, Eastwood)에서 송년모임을 개최했다.
이날 송년모임은 1부 송년회, 2부 총회순으로 진행됐다.
1부는 김동숙 관장 (본회 회계)의 사회로 한준수 회원의 색소폰 연주, 강성형 회원의 싱어롱, 테너 천인욱 회원의 축가와 앵콜곡, 정경옥 회원의 오카리나 연주가 있었다.
2부 총회는 임운규 총무간사의 사회로 인사말씀 (주강사 홍길복 목사), 내빈 소개, 축사 (호주한인복지회 이용재 회장), 경과보고 (총무간사), 사업보고 (프로그램 간사 주경식 교수), 예결산보고 (회계 김동숙 관장), 5대 운영위원회 집행부 인선, 주강사 선물증정의 순으로 진행됐다.
5대 운영위원회 9인 (가나다순)은 다음과 같다.
김동숙 (회계), 김용강, 김클라라, 박혜경, 임운규 (총무 간사), 주경식 (프로그램 간사), 천옥영 (부대표), 최진 (대표), 홍길복 (주강사)
시드니인문학교실 [11월 16일 강연 전문]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그리고 인문학 : 포스트모던 유대인과 인문학
1. 들어가는 말
홀로코스트는 ‘번제물’이라는 뜻으로 2차 세계 대전시 약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나 총으로 죽어 화장터에서 태워져 재가 되게 한 대량 살상의 사건을 말한다. 유럽의 팽배한 반 유대주의와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등장하며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기획하고 기계적으로 특정 민족을 대량으로 죽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쳐 20세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흔히 유대인들 은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한 유대인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모든 유대인들의 피부 에 직접 와 닿는 상처와 슬픈 역사의 흔적으로 각인되어 있고 민족적 결속력을 갖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의 특별한 선민임을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역사 안에 충격적인 큰 도전이 되었다. 자식들과 아내와 남편과 부모가 눈앞에서 매를 맞고 강간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도하며 소망했던 생존의 기대감은 칠흙 같은 절망이 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두 상실되고 생존을 위한 수용소 안의 처절한 삶은 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으로 남게 되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은 신앙을 잃게 되었고 정체성의 상실과 생명과 존재의 가치에 대한 혼동과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유대교의 진보주의자들은 ‘신은 역사 가운데 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죽음’이라는 운동으로 “정의와 도덕과 인간의 고통에 관여하는 개인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리저 벌코 비치-홀로코스트 이후의 신앙)”고 주장했고 많은 반향을 얻기도 했다. 심지어 강성 랍비들은 “이것이 세상에 동화하며 독일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가게를 열고 비즈니스를 한 죄에 대한 분노하신 하나님의 벌 (랍비 사피라, 타이테 바움, 밀러 등)”이라고 가혹한 각성을 지적했다.
반면에, 이런 유럽의 유대인들을 향한 비판에 대해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히틀러의 변태 같은 백정 같은 짓이 끔찍한 고통과 죽음을 몰고 온 것에 대해 어떻게 합당 하다고 할 수 있겠 는가? (랍비 노만 램)” 하는 ‘죄와 벌’에 대한 의견의 간극이 생겨났다. 랍비, 어빈 그린버그는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이고, 삶아서 비누로 만들고 머리털로 베개를, 뼈가 비료가 되게 하 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버려진 그들의 무덤에 대해, 신학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비 존엄과 죄로 인한 결과라는 비난으로만 남겨지게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어린 자녀 의 몸뚱이가 불타고 있는 현장 앞에서 어떠한 말과 신학적 견해도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일들이 생길 때 나의 죄 또는 조상의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 고 비난 한다면 과연 그것이 설득될 수 있는 말일까 반문하게 된다. 에밀 화큰하임이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신앙의 간극에 대해,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략을 상기하며 유대인들에게 614번째의 계명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613개의 계명에 한 개를 더해서)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소멸되지 않도록 우리는 생존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었다거나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절망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히틀러가 죽은 후에 그의 원대로 유대인과 유대교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승리를 안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대인의 역사 속으로의 귀환’이라는 책에서)
‘홀로코스트’는 신의 존재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야기하며, 변환의 시대에 대한 사유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2. 홀로코스트 요약
홀로코스트 (The Holocaust) 또는 쇼아 (히브리어: השואה, 이디시어: 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던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나치 독일과 독일 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사망자 중 유대인은 약 6백만여 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대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대인 어린이 약 백만 명 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대인과 기타 피 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 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과 구금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절차적으로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대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폴란드를 중심으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전염병에 걸리거나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 행동 부대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태워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생체실험으로 사망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 라고 오명을 얻기도 하였다. (위키피디아 참고)
3. 독일과 유럽의 시대 배경
2 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반 유대주의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팽배하고 급기야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나치가 집권당으로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성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앞서 1914 – 1918년 기간 동안 일어난 1차 세계 대전은 이것은 독일이 1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서 많은 유럽 국가들에게 빚을 떠안게 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한편 옛 방식의 정치 형태를 탈피해서 모든 민족에게 자치를 안겨주는 이상주의적인 시대정의를 산출하게 되었다. 이것은 유럽의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시민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게 되는 보호막이 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당시의 축소, 확대된 국가인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터키, 그리스, 리토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지에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소수 민족이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혜택을 누리게 된 민족은 유대인들이었다.
이 조약을 기초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은 자주 민족주의를 전 세계에 공언 했고 유대인들에게는 더 없는 안전이 보장되는 시민권자로서의 권리를 획득하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은 의도와 다르게 유대인이 앞으로 겪을 전대미문의 비극을 잉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조약의 규장은 국가간의 불안을 야기하고 지독한 증오를 야기하고 20여년에 걸쳐 불만과 폭력을 유발하는 분쟁요소가 되었다. 시대마다 사회, 정치적 희생양으로 취급되는 것에 익숙한 유대인들이었지만 막스의 공산주의를 이데올로기화 한 러시아의 볼쉐비키가 유대인의 세계정복과 독일을 좀 먹는 음로론으로 동일하게 인식되며, 새로운 양상의 증오의 강력한 이유로 등장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은 유럽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선진국이며, 법을 가장 잘 지키는 국가였다. 고도의 문명국가를 자부하는 독일에서 사회적 폭력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최고의 교육 수준을 자랑하고 성인 가운데 문맹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이며, 1870년 – 1933년까지의 독일 대학 들은 실제 모든 분야에서 학문의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 독일 민족과 유대인들은 상호 도움을 주는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민족은 교육에 대한 열정이 지대하다는 것과 독일이 교육에 있어 무상 혜택을 주고, 또한 필연적으로 유대인들은 독일의 문화와 학문의 틀을 지니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당시까지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가 전체의 약 30%를 차지했고 그중 1/3이 유대인이 포함 되었고 의학부분은 약 50%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그저 대량 학살이 아닌, 대량 존속 살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베르사유 조약은 취지와 달리, 이러한 존속 살인이 가능케 하는 증오심을 유발시키는 악성 조약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전쟁에 실패한 전범 국가에게 몰려든 경제적 빚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 공황은 상실감으로 팽배한 아리안족의 자존심에 기름을 붓고 불을 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됐지만 유럽에는 평화보다 더 큰 불안과 증오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쟁의 잔재는 곳곳에서 폭력을 유발했고 사람들은 그것에 길들여졌다. 독일에서도 그들의 자랑스러운 고도 문명국가의 자부심과 달리 폭증하는 사회적 절망과 불만이 폭력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20년간이나 이어진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압박을 정치인들은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폭력을 이용해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고 여론을 이용해 갔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 동안 독일에서는 376건의 정적 암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중 좌파와 연루된 22건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모두 유대인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유대인 출신 외부장관인 발터 라테나우가 암살되었지만, 암살자인 퇴역군인은 가볍게 처벌을 받고 유대인 작가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이 1922년, 죽을 때까지 구타를 당하며 암살 되었지만 혐의자는 작가의 비애국적인 글이 범행의 이유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며 편파적인 판결을 내렸다.
4.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시대 배경이 독일을 지배하는 때에 등장하였다. 그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바이에른의 국경지대의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쟁에 적극적이었고 공훈을 많이 세웠고 허풍이 심한 과격한 성격을 지녔다. 1924년 출간한 ‘나의 투젱’에서 아버지의 반유대주의적인 영향으로 평생 유대인에게 집착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독일이 유대인을 행해 행한 전쟁과 핍박은 히틀러 개인의 증오와 의지가 작용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다른 힘을 이용해 더큰 역량을 만들어내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작은 사회주의 단체인 독일 노동당을 폭력적인 민간군대와 결합하여, 반유대주의 강령을 덧붙여 대규모 정당을 만들고 호전적인 나치 돌격대를 구성하고 히틀러의 집회를 호위하고 나치 친위대를 결성해 행동으로 정책을 실행하고 정적으로 부터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 다음 1차 세계대전의 전범의 빚과 폭력제전의 희생양으로 유대인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경제적인 보상도 그쪽에서 해결을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나의 투쟁’에서 “만약 전쟁에서 모든 계층의 우수한 노동자가 전선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1만 2천명에서 1만 5천명의 더러운 유대인을 독가스로 처리할 수 있었다면, 수백만 명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그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모든 사이비 과학의 이론을 동원해 온갖 상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반유대주의는 완전무결한 세계관이며 가치 기준이었고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독일군으로 입대한 확고한 범 게르만주의자였다. 이 두 가지 생각이 그의 인생을 지배했고 그것이 정치적 어젠다가 되었고 선동의 시대적 호응을 얻는 전략이 되었다. 그는 동구 유대인들이 빈에서 벌이는 백인 매춘부매매에서 매독이 확산되고 항생제가 없던 시대에 이것이 유대인 볼쉐비키 정책의 일환으로 독일에 대한 정치 군사적 위협이 되고 생물학적으로 유대인과 얽히게 되는 것을 극히 혐오했다. 이러한 망상은 그와 그의 주변의 추종자들을 비합리적이고 잔인한 행위를 실행케 하는 광적인 관리자들로 변모시켰다.
이는 흑사병 (페스트)이 유행하던 중세시대에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인간 이하의 악마나 짐승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히틀러의 사이비 과학 이론으로 유대인을 세균이나 위험한 기생충으로 간주했다. 이런 사고와 인식은 인간의 군중 심리와 희생양을 삼아 자신의 불만과 책임을 전가하는 원론적인 악한 죄성에 편승해 지성의 전당이라 하는 대학의 교수와 대학생들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되었다. 독일의 대학은 히틀러의 망상적인 정권야욕과 세계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야욕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힘을 더했다. 역사학자들은 1870년에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대학과 교직에 있었던 선생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대학생들은 중요한 선거와 선동 집회에 한발 앞선 행동하는 그의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한다. 이는 1920년대에 압도적인 지지세력으로 발전해 20년대 말에 나치 학생 조직으로 나타났고 이는 불안한 사회와 경제 공황의 배경 가운데 민족적이고 종교적 이유로 유대인을 배척하는 결의문을 채택함으로 나치의 평등주의와 과격한 강령에 몸을 던지는 열정적인 젊은이들에게 돌파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과 순결을 강조하는 히틀러의 사고방식이 바이마르의 관용주의와 결탁하면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선동과 선전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반유대주의적인 신문이 거침없는 어조의 선동을 유발하고 국회의원이 된 발행인은 더욱 그의 면책권을 이용해 전국으로 구독자가 형성되는 여론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애국적인 유대인이 극복하기 어려웠던 최대 장벽은 바로 이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망이 이 공화국의 탄생을 야기했고 이 공화국이 유대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 독일 문화를 이질적인 문화로 변질시켰다고 의심하고 심지어 유대인 공화국이라고까지 비아냥 거렸다. 그래서 전쟁 패망의 이유를 유대인에게 돌렸고 그 책임의 희생양으로 유대인이 국가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의 유대인을 향해 문화적인 동화를 좇아가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유대인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방인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과 같다. 정당하게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 훔친 것이다. 언어를 비교적 빨리 익히고 책잡힐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유창하게 구사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남의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에 독일은 음악과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의 영향도 문화를 형성 하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갖는데 공헌 했다.
경제 대공황은 독일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경제적인 타격을 받게 했고 나치가 정권을 잡는데 빌미를 제공했다. 바닥을 친 경기는 1933년에 접어든 뒤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례없는 실업률이 미국과 독일에 찾아왔고 1932년 말에 있은 선거에서 양국의 정치 지형에 변동을 가져왔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33.1%의 큰 지지율로 집권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고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로 등극했다.
히틀러는 집권을 하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법적 효력이 약화된 것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는 본격적인 반유대주의적인 착취와 억압을 법적인 체계 안에서 이중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그것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나치 돌격대가 50만 명에 이르는 큰 세력을 갖추었고 엘리트 집단인 나치 친위대를 이용해 경찰과 수용소를 지위하고 조직적인 시스템으로 운용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12년 동안 국가권력을 통해 유대인을 억압했는데 그 규모와 수법이 더욱 악랄해지면서 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 국가적 계획이 되었고 이는 국가 전략적인 메카니즘 범죄가 되었다. 히틀러에게는 경제적인 재건과 그를 위한 유대인 수탈을 위해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다. 그에게는 대중 선동의 명수인 괴벨스가 있었고 친위대의 총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가 있었다. 괴벨스는 반유대 언론을 이용하고 돌격대와 당원들을 동원해 유대인 상점 불매 운동을 벌이고 상인들을 협박하는 선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1935년에 이르러 뉘렌베르크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을 통해 유대인의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상부 구조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5. 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 1938)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셸 그린슈판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언스 트 에두아르트 폼 라트를 암살했다.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 서는 대규모의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의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었으며 이는 친위대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집중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회당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약 30,000명의 유대인이 다하우 (Dachau), 작센하우젠 (Sachsenhausen), 부헨발트 (Buchenwald), 오라니부르크 (Oranieburg)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 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 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위키피디아 참고)
본격적인 홀로코스트는 이 사건 이후 노골적인 착취와 축출, 대량살상의 명분을 확보하고 급물살을 타게 된다.
6. 독일의 반 유대주의
독일 유대인이 법적으로 독일인과 동일한 자격을 얻게 된 것은 1869년 북독일 동맹에서, 1871년 독일 제국에서 법적 평등권을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유대주의”, 열린정신 인문학 연구 6, 133-156).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해 가진 이질감이 없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당시 독일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유대인의 해방에 대한 관념적 의견이 나타나고 있는 정도였으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유대인 혐오 거부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 사회의 경제적 기술적인 급격한 변화에 따라 부상한 논제는 반대와 거부의 여론이 논쟁적으로 대두 되어 오히려 국가적인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가톨릭 계열의 중앙당은 하층민 구교도 유권자를 선거에 동원하기 위하여 반 유대주의를 강령에 포함 시키는 정치 세력화의 일환으로 반 유대주의가 공공연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다.
최초의 독일 반 유대주의 정당은 1878년 베를린 궁정목사인 슈퇴거에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 유대주의”, 136) 의해 조직된 ‘기독 사회 노동당’ 이었다. 초기 중립성과 기독교의 사랑을 정강으로 하던 정책에서 1879년 9월 연설을 기점으로 반유대주의를 여론에 각인시키고 19세기 후반 독일의 반 유대주의의 확산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유대주의라는 말도 이때 처음 등장했는데, 빌헬름 마르 (Willhelm Marr)라는 언론인이며 작가가 1879년 ‘게르만에 대한 유대의 승리’라는 글에서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 유대주의”, 147) 유대인 증오를 정당화하고 반 유대적 감정을 부추기는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은 12판을 거듭하며 출판되었고, 이는 반 유대주의가 독일 사회에 얼마나 급속도로 파급되며 호응을 얻었는지를 대변한다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 유대주의”, 137). 이들의 반 유대주의는 과거 종교적인 행태를 벗어나, 정치적으로 조 직되고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이 독일의 경제적 혼란기에 자본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급진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 유대주의”, 136).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여러 사회 지도자들에 의해 유대인을 공직과 교직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청원운동으로 전개되었고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실행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잘 알려진 음악가 바그너 (Wagner)의 사위 휴스톤 챔벌린 (Houston Stewart Chamberlain)은 1898년 ‘19세기의 토대’라는 책에서 ‘열등하고 사악한 유대인’과 ‘정결한 아리안’의 대결 구도를 등장시켰고 여러 판을 거듭해 출판함으로 큰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독일 사회 개혁당은 1899년 거행된 당대회에서 ‘유대인의 완전한 분리와 절멸’로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 유대주의”, 138) ‘유대인의 문제’를 강령에 포함시켰다. 이는 나치 정부의 히틀러에 의해 최종 결정된 Final Solution이 (윤용선, “나치 집권 이전 고교양 시민 계층의 반 유대주의”, 136) 이미 계획되어질 수밖에 없는 토양이 형성 되고 있었다고 짐작하게 한다.
7. 미주와 러시아 기타 지역의 반 유대주의
미주 지역만 하더라도 1654년 미국에 유대인이 첫발을 내디딘 이후 이민자의 유입이 1840년 – 1880년에 독일 유대인 약 30만 명과 1890년 – 1917년까지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유대인 대 학살을 피해 250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1830년 – 1914년까지 독일, 북유럽, 동유럽과 남유럽,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의 유럽인들이 이주 하였다. 이것은 이들이 가진 반 유대주의가 신대륙에 와서도 그대로 재현되었고, 19세기에 이르러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1866년 뉴욕의 의류업자들이 상가지역에 불이 난 것이 보험금을 타기위해 유대인이 고의로 불을 낸 것이란 소문으로 증거도 없이, 대형 보험사들이 유대인을 보험 가입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유대인 억압 협회’라는 단체는 유대인은 공직에 선출되지 못하고, 유대인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지 말 것, 연극인들에게 불공평한 처우를 하거나 연극 자체를 거부하였다. 농민들에게는 악덕 금융업자라는 오해를 일으켰다. 하버드의 유대인 학생수가 많아지자 그 숫자를 제한하는 일이 다른 대학에서도 적용되었다. 헨리 포드 (Henry Ford)는 노골적으로 유대인을 비난하였고, “시온의정서” (위서 <protocol>라고도 불리는 반유대주의적 책.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음모가 유대인들에 의해 계획 되고 있다는 설)는 1900년대에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음모론이 등장해 더욱 유대인을 멸시하고 여러 사건들로 인하여 미국인들에게 유대인들은 불쾌감을 주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여실히 반 유대주의로 드러나고 유대인들의 삶은 미주에서도 역시 반 유대주의를 겪어야 했다. 소련 지역에서도 이디쉬언어를 사용하는 아쉬케나짐 (중세이후 프랑스와 유럽에 살던 이디쉬언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 큭히 독일에 만히 살고 호로코스트의 대부분 희생자들이 아쉬케나짐이었음)이 이주자의 약 90%를 차지했는데, 시온주의자들을 “부르조아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자들로 간주하였다. 이는 곧 반유대주의적인 편견으로 사회 속에서 현실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중세 유럽의 게토와 구 소련 지역의 포그롬 (Pogrom)은 반유대주의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내며 그 흔적은 유럽과 러시아의 역사 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반 유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늘 이중적인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기독교 국가들로 가득한 유럽에서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와 문화에 동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안식일과 정결음식 준수, 그들의 유대 절기를 지키는 이중적인 종교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의 ‘마라노스’ (Maranos)이다 (‘마라노스’는 거짓으로 개종을 한 유대인 동족을 향한 비하의 호칭이다. 스페인어로는 돼지라는 뜻). 마라노스는 14-5세기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개종 (1320년 개종운동)을 약속하며 세례를 받는 것으로, 살던 터전으로부터의 축출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유대교를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으로 인해 이런 비하하는 별칭 (‘돼지’ 또는 ‘변절자’라는 뜻)을 얻게 되었고 이는 ‘상종 못할 사탄 같은 짐승스런 존재인 유대인’ (마이클 L. 브라운, 김영우 역, 유대민족의 비극적 역사와 교회, 서울, 한사랑, 1994, p42)이라는 독일의 명칭과도 같은 맥락의 저주스런 이름이었다. 또한 이는 나중에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끔찍한 고문과 감금과 추방을 명령받았던 역사가 있었다.
8.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관의 변환
8-1. 현대의 가장 심각한 구속의 사건
독일 지도계층은 ‘유대인 문제’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를 정치적 권력 획득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사회 변화기에 유대인들의 문제와 반 유대주의에 대한 그들의 관념적 이해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배출하는 것 보다 오히려 사회 정치적인 희생물이 되었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의 위해서 독일 사회 속에 정당한 법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독일의 사회에 동화되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법적 지위는 또한 반 유대주의 법안에 의해 그들의 권리와 권한을 박탈당하고 있었다.
호주의 유대인 대표자 이사회 (Jewish Board of Deputies)에 따르면, 유대인에 대한 적대 감정은 고대 시대로 접어든다. 그리스, 로마의 이방인의 반 유대주의는 유대인들을 따돌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기독교의 상승세는 새롭고 잘못된 비난을 더 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박은 책임이 있고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야 말로 하나님으로 거부당한 마귀의 자식들 (요 8:44)이라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정치적인 성공을 이룬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은 이러한 견해가 사회적 실재가 되게 하였다. 제한된 권리와 영예가 박탈된 대접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교회의 진실됨과 승리를 보장하는데 대한 증인들로 존속되었다고 적고 있다.
유럽사회에 의한 유대인들의 사탄화는 사회적, 정치적 열등 계급으로 취급되고 이는 중세 시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크리스천들에게는 고리 대금업이 불허됐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몇 개 되지 않는 허락된 직업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점차 반유대주의가 증폭하는 이유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시 이런 감정이 폭발하여 유대인의 다량 살상 (포그롬)과 재산의 약탈이 자행되었다. 반 유대적 미신으로 알려진 크리스천 어린아이들을 도살하여 제사를 드린다는 오명과 우물에 독을 푼다는 소문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동부 유럽에 회자되는 조작된 모의로 작용했다. 유대인들은 무역이나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었고 땅을 소유할 수 없었으며, 배지나 구별되는 모자를 쓰도록 해 구분을 시켰다. 그들은 정해진 게토 지역에서 살아야 했고, 일반 주민들로부터 격리되었다.
그들에게는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모욕적인 법 제정과 잔인한 취조와 통제와 감시, 강압적인 침례와 교회 출석, 자산 몰수와 추방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후에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했지만, 이들은 이전 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소작농이나, 장인, 크리스천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나 자본주의의 파괴자, 탐욕적인 금융업자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유대인과 아리안의 민족적인 인종의 우수성을 견주는 고통을 수반하게 되었다.
또한 1903 – 1905년 사이에 러시아 비밀경찰에 의해 만들어진 ‘시온의정서’는 유대인의 모의로 인해 사회를 전복하고, 정부를 무능케 하고 세상을 정복한다는 편집적 편견을 담았다. 나치는 이 문서를 이용해 유대인의 세계 모의의 근간 문서로 삼고 국가 정책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나치가 정권을 잡고 2년 후에 이 의정서는 독일의 초등 교육의 교재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질문’을 우리 스스로 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관계없는 이들이 ‘유대인의 문제’를 고안해 내었고 유대인의 생명을 제거하기 위해 ‘방안’ (Solution)을 제안하였다. 그것이 바로 개종과, 추방 그리고 대량 학살의 인종 살상으로 이어진 실체로 그 진면목의 스스로를 드러내었다”고 기술한다. 홀로코스트 역사학자로 잘 알려진 라울 힐버그 (Raul Hilberg)는 세 가지 유형의 연속적인 반 유대 정책이 역사 안에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렇게 사실상: 너희들은 유대인들이라서 우리 가운데 함께 살 권리 가 없다”고 외쳤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너희들은 우리 가운데 살 권한이 없는 자들이다”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독일의 나치는 “너희는 살아남을 권리가 없다”라고 공포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Hilberg, R,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Third ed.>.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61).
이러한 핍박의 역사는 20세기 근대에 들어서만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에 더 더욱 불신과 거부의 의도가 깊다. 거슬러 올라가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거의 전멸 하다시피 처형하고, 도시 전체를 피 바다로 만든 십자군 전쟁은 또 하나의 끔찍한 기독교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살상의 역사로 각인되어 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자행된 게토와 포그롬,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개종요구와 종교재판, 그리고 고문과 추방과 처형, 영국의 고리대금법으로 인한 추방, 유럽에 창궐했던 페스트의 주범으로 유대인을 지목한 유럽의 반 유대주의는 국적 없이, 법적 보호망 없이 세상을 떠도는 방랑인과 같은 유대인들에게 끊임없는 핍박의 역사로 기록되어 왔다.
9. 전 후 세대의 평가
– 엘리 위젤의 ‘밤’
자신도 홀로코스트의 현장에 있었으며 그 아픔을 세상에 알린 ‘엘리 위젤 (Elie Wiesel)’이라는 홀로 코스트 생존자 이면서 노벨 평화상 (1986) 을 수상한 문필가가 있다. 그가 여러 책들 중 [밤] 이라는 책을 썼는데 책에는 아우슈비츠와 부헨 발트라는 수용소를 전전하며 홀 로코스트를 통해 유대인 동포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여동생의 죽음의 체험을 담고 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거울의 밑바닥에서 한 시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눈 속의 시체의 눈빛은 그 후 잠시도 나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위젤은 유대교의 하시디즘의 분파에서 성장했는데 (미야타 미쓰오, 박은영, 양은혜 역, 홀로코스트이후를 살다, 서울, 한울아카데미, 2013, p179),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에 의해서도 알려진 하시디즘은 이웃 사랑과 기도와 명상 축제나 교제 등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휴머니즘”의 생활양식에서 자라났다.
그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있는 장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구덩이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불길이, 거기서 무엇인가를 태우고 있었다. 트럭 한 대가 구덩이에 가까이 가서 싣고 있던 짐을 안에 떨어뜨렸다. 아기들이었다. 갓난아기! 그렇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이다. 아이들이 불길 속으로… 이 밤의 일은 내 삶을 하나의 긴 밤으로 바꾸어 버렸다. 수용소의 이 최초의 밤의 일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연기를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로 화해 버린 어린 아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나의 신앙을 영원히 불살라 버린 그 불길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내 신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설령 내가 신처럼 영원히 사는 벌에 처해 진다하더라 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결코…” (미쓰오, 홀로코스트이후를 살다, 183-184).
하나님의 침묵과 마치 신은 죽어서 반응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절망을 기록하고 있다. “세 명을 사형대에서 처형한 장면을 보고 뒤의 사람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소리에 내 마음 속에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디라니 여기 계신다… 여기… 이 교수대에 매달려 계신다… 그날 밤 스프에서는 시체 맛이 났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는 1961년 처음으로 유럽의 유대인 학 살을 대량 학살이라는 다른 역사적 사건과 달리 홀로 코스트라고 명명했다. 홀로코스트는 ‘번제물’이라는 뜻이다. 6백만 명이 태워지는 이 번제의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세계의 동정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UN의 투표를 통해 1948년 세 곳으로 분할된 비좁은 팔레스타인 땅을 얻으며 2000년 만에 세계의 역사와 지도 안으로 다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 미야타 미쓰오의 “홀로코스트 이후”
일본의 동경대 법학자인 미야타 미쓰오는 “홀로코스트 이후..”라는 책에서 유대인과 관련하여 3번의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신의 변증이라고 불렀다. 그 첫 번째 사건은 창세기 22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며,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 (12장)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100세에 아들을 갖게 한다. 하지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죽이라고 믿기지 않는 요구를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 한다. 이 결박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아케다” (미쓰오, 홀로코스트이후를 살다, 7)라고 하는데 구약에서 단 한번 쓰여지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결박하는 자라면 이삭은 결박당하는 자이다. 결박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힘이 있음에도 결박당하고 번제물이 되 기를 작정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을 히브리 11장에서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부활의 신을 신뢰 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마 27:45-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아들 예수는 신을 향해 절규했지만, 이 때 신은 침묵하였다. 십자가에 결박당한 아들의 간절한 구원의 요청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차갑게 외면하였다. 아들은 십자가에서 결박당한 채 죽었다. 하지만 신은 삼일 후에 사망 가운데서 아들을 부활케 하였다.
그와 같이 홀로코스트는 하나님의 장자라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물로 6백만의 유대인이 태워 지는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역사 속으로 다시 부활 (재탄생)하는 기적을 이루었다고 미야타 미쓰오는 서술한다. 그리고 엘리위젤이 묘사한 것처럼 이것은 다른 여느 전쟁과 타 민족에게 일어난 대량 학살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즉 ‘번제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이 곧 소수민족 (신명기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으로 택해진 유대인의 통전적 정체성이며, 신의 의도에 속한 새생명, 즉 부활의 역사성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10. 홀로코스트와 포스트 모던 시대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을 회복하며 세상이 산업화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인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그 이전에 있었던 모던 시대의 다음 시대를 의미한다. 그가 지적했듯이 모던 시대는 계몽주의 시대를 계승한 논리와 이성이 중심이 되어 실존의 문제들에 철학과 사상이 집중 되었던 시기이며, 이 시기에는 두 번의 큰 세계 전쟁이 일어난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와 레비나스, 마틴 부버와 같은 유대 철학자들은 이 시대를 주도 했던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일관된 국가가 가진 결정주의로 인해 개인의 주권과 존엄성이 무시되었던 시대적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의 책들을 쏟아냈다. 그들의 전후 사상은 ‘전체주의’,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타자와 시간’, ‘나와 너’ 등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들은 특히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인류의 잔인한 인종 말살의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며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험의 시기에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모던 시대가 가진 민족주의와 결정주의 획일화를 통해 전통적인 전체주의를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소수자의 인권과 타인의 주권과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수단화 되는 시대성에 대해서 지적한 것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모던 시대가 획일화의 시대, 민족주의와 결정주의, 전체주의와 권력과 무력이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자문화와 종교의 우월성이 강조되는 속성들을 가진 획일화의 시대였다면, 포스트 모던 시대는 그 시대의 시행착오와 오류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열망이 표출된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포스트 모던 시대는 흔히 개인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혼합주의, 해체주의로 표방되는 시대이다. 이는 모던 시대의 시대성으로부터 탈피한 근원을 가진 요소들이다. 획일성과 전체주의의 전통 중심적인 사회에서 다양성과 개인의 권리와 인권이 보호 받으며, 타인과 소수자를 위한 윤리가 정립되며, 개인의 의견이 존중되는 시기이다. 또한 개인의 창의력과 개성이 사회 속에 역할을 발휘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전통에서 세속화의 시대로,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공동체의 목적과 결정주의 보다는 개인주의와 창의력의 시대로의 전환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용성과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체성의 지속성과 생명력을 보존하는 세계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수많은 유대인들은 신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토록 갈망하며, 기도하고, 절기와 안식일과 코셔 음식을 지켜왔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가족의 죽음과 인간의 존엄성을 모조리 짓밟힌 굴욕과 수치심과 민족의 자부심과 존재 의미에 대한 깊은 상실감일 것이다. 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가운데는 그 때의 경험을 말하기를 꺼려하고 가족들 안에도 그 경험을 꺼내는 것을 금기시 하고 그들의 삶에는 정신적인 트라우마와 깊은 우울감과 마음의 상실감에 대한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이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불가론자나 무신론자로의 신앙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11. 신의 부재와 인간
신의 선택과 구원의 문제는 신의 뜻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관계성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마틴 부버는 신과 사람 사이에 있는 상호성은 증명할 수가 없다 (마틴 부버, 표재명역, 나와 너, 서울, 문예출판사, 2004, 191)고 영적인 관계성의 문제는 믿음과 신뢰, 사랑의 문제로 가시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신 자체의 존재를 증명 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상호성에 관해 말하는 자는 증언을 하는 자이며,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현재이건 미래이건 증언하도록 부르는 것이다”라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은 신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부버는 정의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면에서라도 중독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이며, 누구든 유전적이거나, 생물학적 인자, 또는 사회적인 결정 인자가 내재한다고 본다. 이는 알코올이나 약물 남용 외에 도박이나 섹스, 돈이나 가정 등 수많은 우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행태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와 권력과 유토피아와 같은 안전지대를 향한 갈망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심취할 수 있는 우상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간디가 “종교란 한 점으로 수렴되는 각기 다른 길이다.” 라고 말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존재적 결핍에 대해, 신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의 갈망을 해결하기 부단히 애쓰고 있다는 힌두교적인 범신론적 견해를 엿보게 한다.
이에 대해, 스캇 펙 (Scott Peck)은 “기독교는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고, 기독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죄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스캇 펙, 김영범 역, 끝나지 않은 여행, 서울, 열음사, 2003, p304). 그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자신을 더 이상 주장 하지 않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가 저지른 가장 큰 죄가 오만과 나르시시즘 (스캇 펙, 김영범 역, 끝나지 않은 여행, 304)이라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신을 독점해서 자신의 뒷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표현한다. 그것을 벗어나 우리가 신을 소유하기보다 신의 소유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신을 소유한 것과 같은 우월성에 기인한 극단적인 행동은 중세의 십자군과 근대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반 유대주의의 비극적인 역사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C.S 루이스가 “지옥문은 넓게 열려있어서 지옥에서 쉽게 걸어 나올 수 있다”고 회심과 선택의 여지가 언제든 남아 있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콧 버슨, 제리 월즈, 김선일 역,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서울, IVP, 2009, 326). 그 만큼 천국에 올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이 추구하는 우상적이고 세상적이며, 극단적인 인간의 방법을 선호하는 존재임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는 하나님은 효율적인 분이시므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불구덩이에 넣는 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 천국을 설명할 때는 다양성을 언급한다. 믿음과 인지와의 사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영역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도 행위나 노력과 지혜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이며, 아무도 그것을 자랑치 못하게 하는 피조물의 영역이 아님을 지적하는 구원의 궁극적 주권의 권위가 신에 속해 있음을 상기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us)은 “신이여 당신은 …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 품이 아니면 진정한 안식을 찾지 못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 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주장 한다. 또한 “… 섹스는 커다란 선물이지만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나 항상 그 선물을 집어들 필요는 없다.” (스캇 펙, 김영범 역, 끝나지 않은 여행, 304)고 말함으로 “신은 끊임없이 구애한다.”는 표현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끊임이 없음을 나타낸다. 인간은 아무리 멀리 도망을 쳐도 신은 그를 찾아 소유하려 한다. “이런 면에서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에 의해 노예가 될 때”라고 고백하는 죤 던 (John Dunn)의 시는 우리에게 육체적인 사랑보다 하나님께로의 귀의와 시대를 불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과 순종의 의미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 시대, 나치가 ‘유대인들의 문제’에 대해 주어진 선과 악의 선택과 그에 대한 분별력은 결국, 이 시대에도 인간의 본연적인 죄성과 영적 무사유와 게으름에 기인 한다는 자각을 요구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반응은 불행한 선택으로 결론 내렸고 그것은 인간의 죄의 근성과 잔인함의 극단을 여실히 보여 준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12. 철학자들의 견해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19세기의 문제가 ‘신은 죽었다’라는 것이라면, 20세기는 ‘사람이 죽었다’라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이 명제 안에는 과연 신은 실존 하는가? 사람은 왜 죽었다고 말하는가? 하는 질문을 유발하고 있다. ‘신의 죽음’이라는 주제와 이에 대한 질문은 19세기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기하였고, 여러 철학자들과, 페오도르 도스토옙스키 같은 철학자가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저술 등에서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과정을 거쳤다.
‘신의 부재’에 대한 논쟁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을 거듭하며 자리잡은 그들의 세계관은 나치의 시대에 까지 이르는 극단의 사상이 되었다. 극단 민족주의자인 히틀러는 ‘유대인의 전제적인 신’을 멸망시키는 것을 그의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의 아리안족의 생태적 우수성을 기반으로 유토피아를 꿈꾼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가졌다. 그의 인식 속에는 결코 신은 존재 하지 않았고 급기야 신을 대적할 뿐 아니라,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행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20세기의 최고 지성이라고 불리는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세상의 무성한 잔혹함을 어떻게 윤리적 가치에 준해 반박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고 말했다. 무신론자인 그는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지성인의 삶을 살았지만 결코, 세상의 방종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이 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단순한 질문은 삶의 전반에 총체적 방향성을 결정하는 출발점이 된다.
– 탈무드의 대답
어느 철학자가 랍비 (르우벤)에게 물었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일까요?” 하고 묻자, “그 사람은 창조주를 부인 하는 사람일 겁니다. 왜 그렇죠?”라고 반문하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도덕률에 대해 “보십시요, 이 사람은 그가 그 것들의 근원 (신)을 부인할 때까지는 이 법률의 어떤 것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토세프타 쉐브옷 3:6)”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은 역설적이지만,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어떠한 선한 도덕률이라도 결사코 부인 하려고 달려들 것이란 말이다. 신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무신론자의 반박이 랍비에게 가장 골치 아픈 상대라는 말이다.
13. 현대 문명의 세계관
서구의 세속적 현대 문명은 ‘지성과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도덕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느 작가가 마치 ‘꺾인 꽃의 문화’라고 표현한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도덕과 자유는 마치 꺾여진 꽃의 생명이 유효할 때까지만 꽃이 아름답고 향기를 내는 것 처럼 뿌리가 없는 한 결코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의 개입이 없는 도덕과 윤리는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결국, 인생의 변덕스런 욕망과 세상의 권력과 호기심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는 사상누각이 될 것이기 때문” (윌 허버그, ‘유대교와 현대인’, p91-92) 이라고 유대 철학자는 조언한다.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생을 건축하는 든든한 기초가 된다는 말이다.
볼테르 같은 철학자는 “내가 아는 변호사, 재단사, 주차요원, 심지어 나의 와이프가 신을 믿는 다면, 적어도 내가 덜 사기 당하고, 덜 갈취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누군가 “만약 신이 죽었다면, 과연 누가 이 시대에, 근친상간이나 수간 같은 끔찍한 일에 대해 옳고 그른지 제대로 말해 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현대 휴머니스트들 은 동물들이 그것을 즐기는지, 아닌지, 그들의 권리에 대해 먼저 문의해야 할 것이라는 (어빙 크리스톨, ‘After world, p161)’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휴머니즘의 발상은 자칫 진리의 주체를 망각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독일의 내 놓으라는 지성들이 온 세상을 송두리채 파괴하는 전쟁의 망상으로 치닫고, 반 인륜적인 ‘홀로코스트’의 잔인한 살상을 저지른 근대 역사가 바로, ‘신의 부재’로 가득한 세계관이 창출한 결과를 상세히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14. 병적인 이원론
세상엔 극단적인 종교적, 정치적 이원론으로 점철된 많은 전쟁이 있었다. 홀로코스트를 포함 하여, 십자군 전쟁, 중세의 마녀 사냥,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보스니아, 르완다, 스탈린, 레닌의 구소련, 모택동의 중국 대혁명의 대량 학살이 그렇다. 어느 철학자가 병적인 이원론은 종 교의 이름으로 선한 사람들을 모집해 악한 일을 자행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나치 이데올로기이다. 수없는 지성들이 나치의 사상을 만들고 나치의 지적 위엄을 더했 다. 성서학자 게르하르트 키텔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이데거, 세기의 위대한 법 철학자 칼 슈미트가 그 중심에 있었다. 나치 선동의 주동자 요세프 괴벨스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독일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일 지성 중의 지성이다. 아우슈비츠의 악명높은 의사 맹겔레는 인류학에 기반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었다. ‘최종 해결책’을 만들어 유대인을 말살하기로 결정한 참가자들의 반 이상이 의학 박사이었고 당시 인구의 2% 정도만이 대학 졸업자였는데, 친위대 장교들의 41%가 대학 졸업자였다고 한다.
‘병적인 이원론’은 사람을 비인간화하고 원수들을 악마화하며, 우리 자신을 희생자 취급한다고 조언한다. 홀로코스트 시대의 독일 지성들이 모두 반 인륜적인 악을 행하는 비인간화의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오히려 유대인으로 인해 피해 받는 희생자로 둔갑하고 남에게 악을 행하는 명분을 삼았다. 극단적 이원론으로 발전한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세상 곳곳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나가는 말
유대교의 랍비들은 제 1 예루살렘 성전이 BCE 586에 파괴되고 멸망당하게 된 이유를 이스라엘에 팽배한 우상숭배와 성적타락과 살인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공교롭게도 AD 70년 같은 날 일어난 2차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에 편만한 ‘근거없는 미움’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멸망의 요건이 같으므로 “‘근거없는 미움’을 우상숭배나 성적 타락, 살인과 같은 심각한 죄들과 동급의 심각한 죄로 취급한다” (바빌론 탈무드, 요마 9b)고 평가한다.
그리고 미움과 증오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미움은 올 곧은 것을 굽게 한다” 또, ‘사랑은 결점에 대해 눈감게 하고 미움은 덕에 대해 눈감게 한다 (시랏 이스라엘)”라고 가르쳤다. 랍비 죠슈아는 “악한 눈과 악한 성정과 미움은 평범한 사람을 세상에서 제거 시킨다 (아버지의 윤리 2:11)” 라고 말했다. ‘미움을 가지면 괜한 사람까지도 해를 끼친다’는 의미이다.
성서에서 악한 것 중 가장 금기시하는 율례는 십계명의 제 3계명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한 말일 것이다. 랍비들은 이 말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함부로 악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해석한다. 신의 이름으로 함부로 악한 일을 행한 것을 죄로 다스리겠다는 말이다. 그것이 심상치 않은 최고의 계명으로 명시하여 경고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각한 죄임이 틀림없다. 이는 십계명중 신을 희생자로 만드는 유일한 계명이기 때문이라고 랍비들은 설명한다.
아마 그 대표적인 일들 가운데 하나가 ISIS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알라 아크바’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며 테러와 살상을 저지르는 일일 것이다. 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 단체에서도 목사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신도를 호도하거나 성폭행과 자산 갈취와 진리를 왜곡하는 일은 비일비재 하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의 이름을 핑계삼아 악한 일을 일삼는 것이 죄가 될 것인데도 감지하지 못하는 것에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가 있다. 이미 익숙해 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악을 구분하는 신적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일임과 동시에 또한 악한 일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부모가 길에서 주운 물건을 가져도 된다고 말할 경우, 그럼에도 돌려줘야 한다 (바바 메지아 32a)”고 가르친다.
직장이나 군대에서도 상사의 말을 따라 살상을 저지른 것도 엄연한 죄이고 “살인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살인을 하라는 상관의 명령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탈무드는 “악행에는 전달자가 없다 (키두쉰 42b)”고 말한다. 누가 전달했던지 악행은 행한 사람의 책임 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나치 전범들 중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의 작전명 ‘Final Solution’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가 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폴란드를 중심으로 수용소를 세워 잡아들이고, 생체 실험하고, 가스실에서 죽이고 화장터에서 시체를 태우고 유대인의 몸에서 나온 모든 것으로 가발을 만들고 비누로 만드는 것을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다. 그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 첩보요원들에게 잡혀 예루살렘의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상관의 지시만 따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유대인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고 직무에 충실했을 뿐” 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이를 취재했던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의 죄성’에 대해서 강하게 지적했다. 어느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악의 평범성이 우리 주위에 편만하고, 그런 악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죄라고 강조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결국 예루살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랍비들은 예루살렘 제 2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근거없는 증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죄성이 1차 성전 때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이 저지른 확연한 죄악에 대해서는 70년의 포로 생활 후에 회개하고 돌아 올 수 있었지만, 근거없는 증오와 미움은 저지르는 수많은 사람이 죄를 깨닫지 못하므로 회개할 수가 없어 계속 죄만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쿡이라는 랍비는 “제 2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근거없는 미움’으로 파괴되었다. 그래서 제 3 성전은 근거없는 사랑으로만 재 건립될 수 있을 것이라”라고 말했다. 이는 CS Lewis가 ‘악과 사랑은 동시에 복리로 증진한다’라고 한 말을 기억나게 한다.
독일의 나치가 처음에는 유대인을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매도하고 더 나아가 인종적으로 차별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지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재산을 빼앗고 생명을 빼앗고, 대량 살상에 이르는 더욱 더 잔인하게 악해지는 악의 종국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렇듯 사랑도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진다고 강조했다.
홀로코스트는 수많은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통해, 전체주의의 획일성으로부터 개인의 생명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시대의 화두로 돌이켜 놓았다. 이는 전통으로부터 세속화와 다양성의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다양한 타인의 성정을 수용하고 개인의 생명과 창의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유의 능력을 배우게 하는 신의 의도를 비로소 짐작하게 한다.
정원일 목사 (호주 이스라엘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