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아우슈비츠에서 드러난 음악과 인문학
오늘 저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가 운영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피면서 음악과 인문학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한 개인도 결정적 위기나 죽음 앞에서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듯 아우슈비츠 강제 포로수용소에서는 그동안 좀처럼 노출되지 않았던 음악의 실체와 인문학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음악은 포로로 잡힌 연주자나 작곡가의 목숨 부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그 곳에서 거의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파시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인문학과 음악에서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 ~ 1956)가 1939년 덴마크 망명 중 쓴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란 시를 일부 읽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주1 김광규 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2014에서 인용.)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이후 독일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1903 ~ 1969)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건 야만”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주2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프리즘』, 문학동네, 2004, 29.)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이런 선언적 명제를 남길 수 있던 것은 방금 전 소개드린 브레히트의 바로 이 시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도르노의 이 선언적 명제는 다수의 학자에게 비판 받았습니다. 특히 조르조 아감벤 (Gio rgio Agamben)은 아도르노가 이 선언적 명제에 더해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 절박한 비판을 포 함해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 것을 두고 “아우슈비츠를 일종의 역사적 분수계로 만들고자 했다”고 비판했습니다.(주3 조르조 아감벤 지음, 정문영 옮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123.) 그러나 아도르노는 저 선언적 명제가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당시의 공허한 문화를 지적하는 하나의 표현이었을 뿐 자신 또한 ‘고통의 인식에 관한 객관적 형식으로서 예술이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주4 심온, <아도르노의 활동 예술론>, 서울대학교 대학원 2021년 02월, 1.)
사실 브레히트나 아도르노는 모두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장 아메리는 아우슈비츠에서 구사일생으로 생환했습니다. 그는 『죄와 속죄의 저편』에서 “아우슈비츠에는 문학적․철학적․음악적 형상을 한 죽음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주5 장 아메리 지음, 안미현 옮김, 『죄와 속죄의 저편』, 길, 2012, 48.) 그래서 장 아메리는 “추상적인 인간성에 의지하지 않고 주어진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유대인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사이 나는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주6 장 아메리, 위의 책, 180.) 인문학은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장 아메리에게 의문의 1패 정도가 아니라 의문의 참패를 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분인 임마누엘 레비나스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레비나스는 프랑스군 통역관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포로가 되어 하노버 근처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갇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지요. 유대인인 레비나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 가 가스실에서 죽지 않을 수 있던 것은 그의 신분이 군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도 포로로 잡힌 군인은 죽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가 포로로 잡힌 수용소에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똥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포로들은 그 개를 ‘보비’라 부르며 돌보았습니다. 포로들이 종일 힘겹게 작업을 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면 보비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짖었습니다. 레비나스는 그 참혹한 수용소 생활 중 보비에게 유일한 위안을 느꼈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포로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고 반겨준 개 보비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일군인들이 보비를 쫓아 버렸습니다. 훗날 레비나스는 그 개를 “나치 독일 최후의 칸트주의자”였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늘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법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존재가 바로 그 개였다는 얘깁니다. 전쟁 중의 독일은 그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는 의미입니다.(주7 강영안, 표정훈, 『표정훈이 묻고 강영안 답하다 철학한다는 것』, 효형출판, 2008, 239-240.)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 음악
그렇다면 음악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어떻게 사용됐을까요. 나치가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인간 학살에 이용했는지를 알려면 인류 역사에서 음악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용도로 생겼는지 그 기원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제까지 거의 모든 음악사나 명곡 해설서는 음악의 한 면만 부각시킨 측면이 강했습니다. 음악이 얼마나 아름답고 삶에 위로가 되는지만 강조했습니다. 감동과 위로와 희망 제시가 음악의 중요 역할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안다면 음악을 절반만 아는 것입니다.
2007년 이후 독서에서 저를 가장 전율하게 만든 작가 중 한 사람인 파스칼 키냐르를 인용합니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Konzentrationlager)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주8 파스칼 키냐르, 김유진, 『음악혐오』, 프란츠, 2017, 187쪽.)
오늘 저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와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죽거나 구사일생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몇 분 소개합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와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는 1940년에 이미 독일 점령지였습니다. 히틀러가 세운 이 두 곳은 모두 강제수용소였으나 성격은 판이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는 세 개의 수용소가 있었는데 모두 절멸 (絕滅) 수용소였습니다. 절멸수용소란 집단학살을 목적으로 세운 수용소란 뜻입니다. 절멸수용소에서 유대인, 집시, 성 소수자, 정치범, 사회주의자는 가스실에서 죽고, 굶어 죽고, 질식해 죽었습니다. 제1수용소는 1940년 4월 아우슈비츠에서 세웠습니다. 거기서 3킬로미터 떨어진 비르케나우에는 1941년 가을 제2수용소를 건설했습니다. 제3수용소는 1942년 10월 모노비츠에 건설했습니다.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는 1941년 11월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원래 이곳은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세운 군사 주둔지 겸 요새였고, 남쪽의 독일 드레스덴, 북쪽의 프라하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습 니다. 테레지엔슈타트는 잠시 머물다 가는 수용소였고, 독일이 적십자를 통해 포로 인권을 존중한다고 전 세계에 선전할 목적으로 세웠습니다. 포로의 절반이 유대인 중 돈 많고 사회적 명성이 자자했던 교수, 의사, 연주자였습니다. 이곳으로 연주자들이 몰렸기 때문에 창작곡을 세계 초연하는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테레지엔슈타트에서도 뒤에서 시체를 불태우고, 수감자를 목매달아 죽였습니다. 다른 강제수용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식사도 좋았고, 어느 정도 자유도 허용되긴 했지만 거기도 죽음의 그림자는 어른거렸습니다.
나치가 만든 강제집단수용소는 친위대 참모장 하인리히 힘믈러가 39살의 친위대 장교 루돌프 회스에게 책임을 맡겼습니다. 히틀러가 세운 나치 강제수용소는 아우슈비츠가 1945년 1월 17일에, 테레지엔슈타트 게토 수용소가 1945년 5월 8일 해체됐습니다. 저 파시스트들은 4년 7개월 동안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가스실로 수천 명씩 몰아넣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1941년 9월 키예프 바비야르에서는 나치가 유대인 3만 4000여 명을 36시간 동안 총살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살에 가담했던 독일군들이 자살하거나 미치는 바람에 독일군은 그 때부터 병사들 피해를 최소화하는 간접적 학살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게 가스실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최소 90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었고, 20만 명이 강제 노동, 기아,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루 평균 2만 명, 가장 많을 때는 2만 4천 명을 죽였습니다. 가스실에서 죽은 시체는 크레마토리움이란 여러 대의 대형 오븐으로 태웠습니다.
테레지엔슈타트 게토 수용소는 4년 7개월 동안 14만 명을 수용했는데 여기서 3만 3천 명이 죽었고, 8만 8천 명은 아우슈비츠와 크레블링카 등으로 이송되어 대부분 가스실에서 살해됐습니다. 강제 이송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3천 500명에 불과했습니다. 1만 명쯤 죽지 않았다는 통계도 보이긴 합니다. 저는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서 생존자 숫자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는 정도로 넘어갑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강제수용소에서 음악으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히틀러가 1933년 집권 이후 사회 모든 영역에서 유대인 추방에 착수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연주 기회를 박탈당하다가 끝내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음악가 멘델스존 가문은 수십 년째 이어오던 당시 베를린의 5대 은행 중 하나였던 가업을 몰수당하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등 가족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연주를 해야 했던 음악인들은 아우슈비츠로 입감하는 포로 환영식, 강제 노동에 나가고 들어오는 이들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행진곡이나 민요 등을 연주했습니다. 독일군 장교들과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적십자 직원들 앞에서 여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가짜 보여주기 쇼에 동원돼서 또 연주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동료의 사형 집행장에서,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수천 명의 비명 소리를 은폐하기 위한 연주도 해야 했습니다.
거의 모든 강제수용소 수감자는 수용소 수감 과정에서 음악으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수용소 입소 후 수감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즉시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싶으면 무차별 구타를 당했습니다. 불러 보라고 시킨 노래를 “모른다는 이유로, 너무 부드럽게 노래한다는 이유로, 너무 큰 소리로 노래한다는 이유로” 맞았습니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의 피와 상처”란 찬송가를 부르라고 강요하다 안 부르면 팼습니다. 다른 군인이나 독일군 개를 자처하는 카포들은 ‘나치 노래’, 외설적 노래를 강요했습니다. 안 부르면 안 부른다고, 노래를 잘못하면 못 한다고 또 때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우슈비츠든 비르케나우든 테레지엔슈타트든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히틀러 군대가 강요한 음악을 강제로 연주해야 했던 연주자와 그 음악을 무조건 듣거나 명령에 따라 노래를 불러야 했던 수용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루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독일 군인과 동포들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모욕과 차별과 학대를 당하면서 가스실 앞에서, 교수대 앞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던 연주자들 반응부터 알아봅니다.
연주자 반응
헤다 그랍-케른마이어 (Hedda Grab-Kernmayer, 1899 – 1990)
체코 출신 메조 소프라노 헤다 그랍 케른마이어는 1941년 12월 17일 테레지엔슈타트 게토 수용소로 강제 이송돼 마지막까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지 않고 풀려난 뒤 미국으로 이민갔습니다. 그는 드보르작 <성서의 노래>, 올리비에 메시앙의 <사라진 약혼녀>, 조르주 비제 <카르멘> 등으로 유명했던 유명 가수였습니다. 이 후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우슈비츠에 있던 이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평생 음악 이야기를 거부했습니다.
조피아 치코비악 (Zofia Cykowiak, 1923 – 2009)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에서 여성수인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던 폴란드인 조피아 치코비악은 연주 중에 죽음의 행렬에 늘어선 사람이 조금 뒤 죽을 줄 모르고 “오케스트라가 있는 걸 보니 여기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벌거벗은 여성 수인들 앞에서 연주한 적도 있었는데, 음악을 들으며 그들은 “하나님 이런 데서 음악이라니요”라며 울부짖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나치는 그렇게 인간을 최종적으로 파괴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조피아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난 1955년 큰맘 먹고 콘서트에 갔다가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아리아를 듣고 까무러쳤습니다. 친위대 장교가 좋아해서 수용소에서 자주 연주했던 곡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몬 락스 (Simon Laks, 1901 – 1983)
시몬 락스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입니다. 지휘자였기에 수용자들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음악이 불행한 이들의 용기를 꺾고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썼습니다.(주9 파스칼 키냐르, 김유진, 위의 책, 204.) 1948년에 쓴 《다른 세상의 음악》에서 락스는 1943년 성탄절 무렵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줬습니다. 수용소의 슈바르츠후버 사령관은 성탄 이브에 여성 병동 환자들 앞에서 독일과 폴란드 성탄 노래를 연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제 후배의 독일어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몇 마디 연주하지 않아서 도처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는 연주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지휘자 시몬 락스는 어떻게 해야할 지 판단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청중석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됐어 충분하다고!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 나가라고! 우리 좀 조용히 뒈지게 내버려 둬!”
시몬 락스는 아우슈비츠에서 음악을 지시한 독일 친위대 장교의 반응도 소개합니다. 수많은 인간을 학살한 친위대 장교가 잠시 음악에 감동하여 짐승에서 인간이 되는 장면을 드물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고 <아우슈비츠에서의 음악>에서 말했습니다.
“SS가 음악을 들으면,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인간 비슷한 존재로 변하기 시작한다. 목소리는 평소의 쉰 목소리가 아니고, 사근사근하게 된다. 그래서 SS는 거의 친구처럼 얘기한다. 때로는 어떤 선율이 그와 가까운 사람을 생각나게 하면, (…) 눈에는 안개 같은 것이, 인간의 눈물과 비슷한 것이 보인다. (…) 음악을 너무 사랑하여 울 수 있는 인간이 동시에 그 끔찍한 일을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쉽게 믿을 순 없겠지만.”
시몬 락스는 그랍-케른마이어나 조코비약과 달리 전쟁이 끝나고 책을 써서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의 반 인륜 범죄를 고발하는 한편 작곡도 열심히 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그가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기 전과 후의 음악을 모두 검색해 들어볼 수 있습니다.
수형자(관객) 반응
프리모 레비 (1919 – 1987)
아우슈비츠의 제3 강제수용소 모노비츠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 처음 도착했을 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로자문데> 3막 간주곡을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강제 수용소 입소를 환영한다며 슈베르트를 연주한 겁니다. 이때 레비는 밀려오는 조소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레비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에게 너무 잘 알려진 로자문데가 “이런 상황에서 연주된다는 게 너무 이상해서 수감 동료들은 서로를 보며 어이 없다는 듯 웃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결혼식에서 축가로 장례식장에서 부르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부르는 격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때가 1943년 말이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모두 그들이 다시 고향에 못 돌아올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구타와 굶주림, 갈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습니다. 그런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슈베르트의 감미롭고 달콤한 음악이라니! 프리모 레비는 <로자문데>가 연주될 때 기이한 모양새를 하고 행진해 들어오는 수감자들을 봤습니다. 오열 종대로 목을 뻣뻣이 세운 채 팔를 몸에 붙이고 걷고 있었는데 프리모 레비는 그 모습이 나무토막같다고 느꼈습니다. <로자문데> 간주곡이 끝나자 행진곡을 연주했는데 나무토막 같은 수형자들은 나막신을 신고 음악에 발을 맞췄습니다. 이들에게 나막신을 신긴 건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서 쉽게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썼습니다.
“그 음악이 울릴 때 우리는 밖에, 안개 속에 있는 동료들이 로봇처럼 행진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죽어 있다. 음악은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며 그들에게서 의지를 몰아낸다. 의지 같은 것은 이제 없다. 북소리의 박자가 걸음이 되고, 반사작용으로 지친 근육을 잡아당긴다. (…) 그들의 의지를 대신한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
수용소에서 경험한 음악은 그 이후 평생 레비를 괴롭혔습니다. 프리모 레비가 음악을 두고 남긴 말들은 끔찍합니다. 레비가 수용소에서 들었던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은 그곳에 갇힌 사형수들을 ‘나락으로 끌고 갔습니다. 음악은 ‘저주’였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동안 수용소에서 들은 음악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레비는 질문했습니다. “(…) 도대체 왜 지금까지도 그 무해한 노랫가락이 기억 속에 되살아나면 혈관 속의 피가 얼어붙는지.” 레비는 독일인들이 계획한 이 기괴한 음악 광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즉 “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복종거하나 감내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노래를 다시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로마나 두라초바
“우리는 작업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막사가 가까워졌다.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여성 오케스트라가 당시 유행하던 폭스트롯을 연주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우리를 약 올리고 있었다. 어찌나 그 음악이 증오스럽던지! 연주자들이 얼마나 혐오스럽게 느껴지던지!
카지미에시 귀즈카
수감자들이 대열에서 비틀거리며 행진하고 있을 때, 머리 철책 부근에서 연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었다. 그 소리가 수감자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안겼다. 음악은 살아남을 수 있는 특별한 용기와 힘을 주었다.”
음악은 악기이고 무기이며 덫이다.
이제 오늘의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리고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얼마 전 작고한 서경식 선생은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서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드러난 음악의 폭력성은 음악을 악용한 결과인가, 아니면 음악의 본래적 속성인가? 음악을 악용했다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음악에 이용당하지만 않는다면 음악이 본래 선한가?”(주10 서경식, 『나의 서양 음악 순례』, 창비, 2011, 288.)
서경식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음악은 본래 선한데, 그것을 누가 악용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음악 자체에 그런 폭력성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의 ‘폭력성’이라는 말은 도덕적 비난대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혹적인 것도 말을 매개로 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특징이기 때문이 다.”(주11 서경식, 위의 책, 295.)
서경식과 파스칼 키냐르, 그리고 플라톤을 위시한 그리스 음악가들은 음악이 “샤머니즘에서 확실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샤먼이 다른 세상과 교신을 통해 그곳 얘기를 전하듯 음악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서경식은 “무엇 때문에 청각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데로 통하는 문이 준비되어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청각 우주는 그 기원부터 저 세상과의 특권적인 왕래를 본질로 삼아온 걸까”라고 반문하면서 음악의 본질을 알고 싶으면 무당을 보라고 말합니다. “무당이 어떤 격렬한 리듬이나 기묘한 선율에 몰입해 다른 세계와 교신하는 모습”에서 음악 탄생이 비밀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다른 세계와 교신한다는 의미에서 은총인 동시에 작두 위에 올라서야 하기에 폭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서양음악의 본질
서양음악의 근간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입니다. 이 사실은 어떤 음악을 전공하든, 전 세계 어디서든 이견이 없는 정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은 소수의 단편들만이 현존하지만,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남긴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음악관, 그들이 이해한 음악의 기원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서양 음악의 근간 이 고대 그리스 음악이란 사실은 모든 논의가 거기서 시작됐다는 역사적 의미만을 가지 않습니다. 그들의 그 때엔 그런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에는 역사적 가치만 가진 게 아니란 뜻입니다. 그리스 음악 사상은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그 이야기를 빼놓고는 오늘의 음악 문제를 적절하게 논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음악이란 종종 오락거리일 때가 많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음악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중요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제시한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음악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연루된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음악 개념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광범위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와 음악, 연극, 춤은 분리된 게 아니라 이 모두가 무지케(Mousike), 즉 음악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예술과 공예도 나눠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음악 없는 삶과 문화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웨인 D. 보먼은 그의 《음악철학》에서, “당시에는 삶으로부터 예술을 분리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고, 음악은 한가로운 기분전환거리나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활에 필수적이었고, 교육받은 개인의 표지였고,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기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고대 그리스에서 어떤 사람을 비(非)음악적이라고 말하는 건 그가 무지를 넘어 비문명인이라는 의미였습니다.(주12 웨인 D. 보먼, 『음악철학』, 까치, 2011, 37쪽.)
플라톤과 고대 그리스 음악
고대 그리스인들은 음악을 과학이면서 동시에 예술로 인식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소리와 숫자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밝혀냈습니다. 그는 다른 크기의 행성들이 우리 귀에 들리지 않지만 서로 다른 음높이를 방출하면서 거대한 우주적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피타고라스는 도덕적, 정신적 삶은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음악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이 자연계의 법칙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혀냈습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이자 음악가였던 피타고라스는 “수를 만물의 근원으로”으로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 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적 두 소리 사이에서 옥타브 (2:1)가 가장 완전한 협화음이고, 완전5도 (3:3)는 두 번째 협화음, 그리고 완전 4도 (4:3)는 세 번째 협화음이란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피타고라스에게 우주의 핵심인 숫자와 음악은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음악은 우주 질서를 반영합니다.
고대 그리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 (B.C. 427-347)입니다. 음악 철학 논의에서 플라톤보다 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은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플라톤은 음악을 매우 진지하게 대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음악이, 사회, 정치, 교육뿐 아니라 삶의 모든 단면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플라톤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상당할 정도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한 마디로 왜 플라톤에게 음악이 그토록 삶 전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는지는 굳이 설명을 길게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플라톤은 음악에 대해 양면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이 음악에 끼친 영향을 말하면서 그가 걱정하고 염려한 음악의 부정적 측면은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플라톤은 음악을 향해 한편으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주13 웨인 D. 보먼, 위의 책, 39.) 플라톤은 이미 그때부터 음악의 중요성과 함께 위험성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음악이 관능적이고, 사람을 기만할 수 있고, 인간의 성격에 강력한 악영향과 더불어 국가 안보를 해칠 수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음악이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나약하게 하고 민감하게 하는 반면에 체육이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미개하고 폭력적이며 무지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음악은 목속으로 침투하여 영혼을 지배한다. 피리는 인간의 팔다리를 움직여 춤추게 한다. 저항할 수 없는, 음란하게 골반을 흔드는 춤이다. 인간의 육체는 음악의 먹잇감이다. 음악은 육체에 침입하고 그를 사로잡는다. 음악은 자신이 지배하는 인간을 노래라는 덫에 가두어 복종하게 한다. (…) 음악은 이목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아, 소리가 울리는 그곳에 붙잡아 둔다. 음악은 최면을 걸어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이길 포기하게 만든다. 듣고 있을 때, 인간은 한낱 수감자에 불과하다.” – 플라톤, 《국가》, 제3권 401D.
플라톤의 이런 생각은 그보다 27년 늦게 태어난 소아시아 퀴메의 역사가 에포루스 (Ephorus, B.C. 400 ~ 330)와 150년 늦게 태어난 그리스 역사가 풀리비오스 (B.C. 200? ~ 118?)로 이어졌습니다. 에포루스는 “음악은 유혹하고 사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이고 했는데 풀리비오스는 그의 말을 인용하여 음악은 유혹하고 사로잡기 위해 사기술을 쓴다면서 음악은 기원에서부터 사기와 관련이 있다는 섬뜩한 말을 했습니다.
플라톤, 에포루스, 풀리비오스의 전율할 만한 음악 이야기는 인류 최초 악기인 피리 기원에서도 어른거립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는 독일 가이센클뢰스터를레에서 B.C. 3만6800년 발굴된 뼈로 만든 피리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피리는 여신 아테나가 발명했습니다. 아테나는 황금 날개와 멧돼지의 어금니를 한 가마우지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을 듣고는, 그 소리를 흉내 내기 위하여 최초의 피리인 아울로스를 만들었습니다. 가마우지의 울음은 너무 매혹적이라 들으면 공포를 느끼며 온몸이 얼어붙게 만들었다. 가마우지는 그때 사냥감을 죽였다. 최초의 피리 (음악)는 공포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즉 피리는 악기이자 무기였습니다. 고대인들은 새의 울음을 흉내 낸 피리를 만들고 이걸 미끼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미끼새 소리를 유인해 동물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이게 팩트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우습습니다. 중요한 건 음악을 우리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악기와 악보를 만든 그리스인들은 음악에서 처음부터 피비린내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저 무시무시한 말의 근거는 그리스 사상입니다. 재미있는 건 피리 때문에 잡아먹힌 동물의 복수가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세이렌이란 바다 괴물이 등장합니다. 상반신은 여인이고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입니다. 세이렌은 뱃사람을 노랫소리로 유혹해 죽입니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어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게 하고 자신을 돛대에 꽁꽁 묶어 풀어지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명령 합니다. 노래가 들려오자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쪽으로 가려고 미쳐 날뛰면서 풀어달라고, 저 음악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선원들이 그럴수록 밧줄을 더 조였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세이렌 노래를 들은 사람이 죽지 않으면 세이렌은 자살하고 주검은 바위가 됩니다. 그러나 그 노래를 죽지 않아 지금도 선원이 그 소리를 들으면 그들이 탄 배는 침몰합니다. “다가가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 거절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음악이다.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2018)
이제부터는 바르셀로나 출신 여성 제작자 겸 감독인 마르타 타가로의 2018년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의 세 장면을 감상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 실제 주인공은 스페인 사회주의자 사진사 프란세스크 보시 캄보 (1920 – 1951)입니다. 프랑코 독재와 싸웠던 캄보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가 2차 대전을 맞았고 외인부대로 복무 중 포로가 되었습니다. 마우트하우센 강제 수용소에는 7,000여 명의 스페인인들이 조국에서 버림받은 뒤 마우트하우센 수용소에 갇혀서 열악한 환경과 끔찍한 노동, 부조리한 폭력과 변덕스러운 처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소장과 ‘식별 담당관’ 파울 리켄은 수용소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는 괴상한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진사 경험이 있는 프란시스코는 리켄의 조수로 배정받습니다. 사회주의자였던 프란치스코는 나치의 공공연한 전쟁범죄와, 나치 최고 간부가 수용소를 방문한 사실을 증명하는 사진 필름을 확보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나치 간부에게 순종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목숨을 걸고 필름을 빼돌릴 작전을 꾸밉니다. 독일 패전이 가까워오자 나치는 사진 자료를 파기하려 하지만, 프란시스코와 동료들은 필름을 위안부 포로, 정직한 독일인, 심지어는 수감자들조차 경멸하는 불한당 포로에게까지 필름을 나눠줍니다. 전쟁 도중 직접 필름 반출은 실패했지만, 종전 후 캄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사진 공개로 나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주목한 두 장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악과 함께 사형 장면 1:17-22:38
우리가 먼저 볼 장면은 탈옥하려다 붙잡힌 죄수의 공개 처형 장면입니다. 이때 수용소 소장은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쳐형 장면을 잘 보고 기억하라. 마우트하우센에서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포로는 없다”는 단 두마디 연설을 하고 사형을 집행합니다. 탈옥수가 교수형으로 죽자 한 사람씩 그 앞을 지나면서 똑바로 쳐다보게 합니다. 이 때 수용소 음악 노예들은 음악을 연주합니다. 마르타 타가로 감독은 수감자들이 죽은 탈옥수를 한 사람씩 쳐다보는 장면을 약 3분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한 장면을 3분간 보여준다는 건 엄청나게 깁니다.
(영화 시청)
마우트하우센 강제 수용소는 소편성의 악대를 운영했지만 더 큰 수용소는 수형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운영했습니다. 이들은 친위대의 지시에 따라 연주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국제적 십자가 대표단이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연주를 하게 해 수용소에서 무차별 사형집행과 폭행이 없는 안전한 수용소처럼 보이도록 위장했습니다. 레퍼토리는 상황에 따라 다양했으며 일반적으로 행진 음악, 노래, 캠프 국가, 경음악, 댄스 음악, 대중 노래, 영화 음악, 오페레타 멜로디, 클래식 음악 및 오페라 발췌곡이 포함되었습니다. 히틀러의 생일과 다른 나치 공휴일에 공연도 그들 몫이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수감자들의 지위에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같은 죄수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독일군인과 카포에게 개처럼 모욕당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평생 죄책감과 우울감을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동족들이 사느냐 죽느냐를 선택 당하는 그 자리에서도 연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음악 노예였습니다.
베토벤 음악의 중독성 (영화 1:10:04-13:08)
우리가 이제 볼 장면에서 주인공 리켄은 마우트하우센 강제 수용소 소장 아들 생일에 소장 집에서 불려가서 사진을 찍습니다. 제게 앞 장면 만큼 인상적이었던 건 리켄이 연주되는 베토벤 소나타 월광을 듣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기를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말을 시키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중단시키고 아, 베토벤이라면서 진지하게 음악을 듣습니다. 그 이후 소장의 초등학생 아들에게 실제 권총 선물을 합니다. 그러자 소장은 총알을 장전해 표적을 쏘게 하다가 파티를 수발드는 수감자를 두 사람이 쏴 죽입니다. 그 이후 난리가 납니다. 그 와중에 리켄은 프란치스코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가겠네. 몸 조심해. 독일 음악이라는게 가끔 듣다 보면 너무 강렬해, 이해하나? 좋아!”
영화 감독은 베토벤을 그토록 좋아하는 리켄이 가학적 취미를 갖고 죄수들을 고문하고 모욕당하고, 처형 당하는 장면을 찍습니다. 그리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흐르는 가운데 독일군 장교는 인간 사냥을 합니다. 그것도 어린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영화 시청)
감독은 이 신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파스칼 키냐르한 이 말이 아니었을까요?
“가장 세련되고 난해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동시에 잔혹해질 수도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란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예술은 야만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폭력의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지와 국가를, 평화와 전쟁을, 피 흘림과 사상을 대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의지와 죽음, 폭력, 피, 사상은 어떤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 논리는 설사 그것이 이성을 거스른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논리로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인문학
앞에서 인용했던 레비나스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독일군 포로 수용소 상황, 히틀러의 인종 말살 정책, 그로 인해 생겨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자기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1,500년 넘게 기독교 복음으로 변화된 유럽에서 어떻게 2차 대전 같은 엄청난 규모의 전쟁과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극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는 서양철학 전통의 인식론과 존재론, 아니 서양철학 전통 전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양철학은 한마디로 제국주의의 철학, 전쟁의 철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우슈비츠로 통칭되는 유대인, 집시, 성 소수자, 사회주의자를 처형한 그곳에서 수형자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기록을 살펴볼 것도 없이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의 몇 구절 인용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는 정신적인 사람은 고립되고, 완전히 홀로 고립되었다. 그곳에서는 정신과 잔인함이 만나는 문제가 훨씬 더 과격한 모습으로,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훨씬 더 원색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아우슈비츠에서 정신이란 그 자체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주14 장 아메리, 위의 책, 30.)
“실제로 정신적인 사람은 항상, 어디서나 권력에 전적으로 의존적이었다. 권력을 정신적으로 의심하고 그것을 자신의 비판적 분석 대상에 포함시키지만, 동일한 지적인 작업 과정에서 권력에 굴복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주15 장 아메리, 위의 책, 40-41.)
“세상 어디에서도 현실이 수용소만큼 그렇게 많은 영향력을 가진 곳은 없으며, 세상 어디서도 그렇게 현실인 곳은 없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그처럼 불가능하고 그렇게 무가치하게 보이지 않았다. (…) 철학적 진술은 그것의 초월성을 상실하고, 우리 앞에서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사실적인 주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허황된 수다로 변해 버린다. (…)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의미론적 분석이나 논리적 구문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감시탑을 바라보며, 화장터의 지방 태우는 냄새를 맡는 것으로 충분했다. (…) 우리는 수용소에서 ‘더 깊어지지도’ 않았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더 선해지지도, 더 인간적이지도, 인간에 대해 더 호의적이고 윤리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주변적인 이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탈인간화된 (entmenscht) 사람의 행동이나 범행을 보면서, 인간의 타고난 존엄에 관한 생각에 의구심을 품지 않은 채 그 사람을 쳐다볼 수 없었다.”(주16 장 아메리, 위의 책, 51-53.)
“말은 우리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에게는 말의 죽음을 애도할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주17 장 아메리, 위의 책, 55.)
“내 몸의 경계는 내 자아의 경계이기도 하다. 피부는 외부 세계에 대해 나를 보호한다. 내가 신뢰를 가지려면 내 피부의 표면에서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첫 번째 구타와 함께 세상에 대한 이 같은 신뢰가 무너진다. 내가 세상에서 신체적으로는 반대하지만, 경계로서의 내 피부의 표면에 접촉하지 않는 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그 첫 번째 구타로 내게 자신의 육체성을 강요한다. 그는 내게 접촉함으로써 나를 파멸시킨다. 그것은 강간, 곧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와 같은 것이다.”(주18 장 아메리, 위의 책, 71.)
“대량 학살, 고문, 모든 종류의 신체 훼손은 객관적으로는 공식화된 자연과학적 언어로 기술될 수 있는 물리적 사건의 연속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사건 내부에 있는 사실이지, 도덕적인 체계 속에 있는 행위가 아니다. 민족사회주의의 범죄는 모든 것을 자신의 총통과 제국의 규범 체계에 넘겨준 범인들에게 도덕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를 양심과 연결하지 않은 범행자는 그 범행을 자기의지의 객관화로 알 뿐, 도덕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 나의 원한은 범죄가 범죄자에게 도덕적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의 진실과 대면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주19 장 아메리, 위의 책, 144.)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으면 그것은 국가에 대한 범죄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아에 대한 범죄라고 믿었다. 많은 사람은 친위대원이 아니라 노동자, 색인카드 운반자, 기술자, 타이피스트였고, 그들 중의 소수만이 당의 표식을 달고 있었다. 나에게 그들은 모두 합쳐서 독일인이었다. (…)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가스 처형실에서 나오는 타는 냄새를 맡았고, 전날 도착한 희생자들을 분류하는 선별대에서 가져온 옷들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립공인 용감한 노동자 파이퍼는 성실함으로 얻은 겨울 외투, 그가 말하는 ‘유대인 외투’를 입은 모습을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정말로 당연하다고 여겼고, 그것은 내게 놀라울 정도로 분명했다.”(주20 장 아메리, 위의 책, 151.)
“이 순간 수감자 십장이자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건장했던 폴란드 전문 범죄자 유스첵이 내 눈 앞에 떠오른다. 아우슈비츠에서 그가 한 번은 사소한 일로 내 얼굴을 때렸는데, 그 사람은 자기의 지휘권 밑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그렇게 다루는 데 습관이 배어 있었다. 이 순간 내가 더없이 분명하게 느낀 것은 사회에 저항하는 오래된 나의 방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개적인 반란 행위로 십장인 유스첵의 얼굴을 갈겼다. 나의 존엄성은 주먹질을 가한 그의 턱에 놓여 있었다. 그다음 결국 제압당하고 처참하게 얻어맞은 이는 당연히 신체적으로 훨씬 나약한 나였고, 더 이상의 이미를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고통스럽게 매를 맞으면서도 나 자신에게 만족했다. 용기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신체가 우리 자아의 모든 것이고 우리의 전 운명이 되는 삶의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몸이었고,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굶주림과 내가 당했던 구타와 내가 가했던 구타 속에서 말이다. 피골이 상접한 채, 때가 덕지덕지 앉은 내 몸은 나의 비참함이었다. 내 몸은 내려치기 위해 힘을 줄 때 나의 신체적이고 형이상학적 존엄성이었다. 신체적인 폭력 행위는 나와 같은 상황에서 분열된 이념을 복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는 구타를 통해 내가 되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서도.”(주21 장 아메리, 위의 책, 178-179. / 장 아메리의 인용문 굵은 글씨 강조는 강연자)
유시민이 인문학에 던진 화두
작년 여름 유시민이 출간한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인문학자들의 주장과 다른 인문학의 위기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인문학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인문학의 진짜 위기인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가 아닌지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유시민은 그 원인으로 인문학자들이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 그에 더해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실을 활용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주22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돌베개, 2023, 27.)
과거에는 인문학자들이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어떤 삶이 훌륭한가?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가? 어떤 힘이 사회 질서와 문화를 바꾸는가? 역사에 정해진 방향이 있는가?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등등의 결코 쉽지 않은 질문에 인문학은 어떻게든 답을 내놓았다고 했습니다. 과학과 달리 인문학은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럴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게 본연의 임무였기에 그렇게 했다는 얘깁니다.(주23 유시민, 위의 책, 28.)
유시민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인문학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최근 100년 동안 과학자들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이 찾아냈으나 인문학자들은 과학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과학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기 때문입니다.(주24 유시민, 위의 책, 29.)
유시민은 ‘과학혁명의 시대에 인문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를 비롯해 정보통신혁명을 주도한 이들은 인문학을 공부했기에 필요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등등의 주장 모두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인문학은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고 만든 학문이기에 생산력 증대나 경쟁에서 승리하는 일은 인문학과 관계가 없고,(주25 유시민, 위의 책, 37.)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만든 기계인 인간의 뇌는 자신은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따위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자 윌슨 (Edward Wilson, 1929 – 2021)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생존에 필요한 것, 그러니까 객관적 진리보다는 신화와 자기기만과 부족의 정체성처럼 ‘적응의 이익’이 있는 것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의 뇌는 자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 채 수천 세대를 이어가며 번식”했기에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주26 최재천, 장대익, 『통섭: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북스, 2005, 184.)
유시민의 이런 주장에는 인문학도들이 귀 기울여야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 역시 젊었을 때 무관심했던 과학 공부를 하기 위해 꽤 여러 권의 과학 책을 사서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시민의 일부 주장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운 과학철학이 던진 화두
근대 이후의 과학은 첨단 무기와 문명의 이기만 발전시킨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바꿔 놓았습니다. 데카르트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과학적 지식만이 인간과 세계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경험과 관찰, 사실에 대한 증명으로만 참된 지식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대세로 300년 이상 맹위를 떨쳤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새로운 과학철학의 등장으로 “과학이 인간 이성의 빛나는 업적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뿌리로부터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과학철학계의 대표 주자인 토머스 쿤 (Thomas Kuhn, 1922 – 1996)은 과학도 인간이 만든 문화 현상 중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과학 이론들 간의 우열이나,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기에 20세기 후반의 지성계는 크게 요동쳤습니다.
마이클 폴라니 (Michael Polanyi, 1891 – 1976)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그는 1958년에 쓴 『인격적 지식』 에서 지식 구성에 있어서 개인 참여는 필수적이기에, 개인의 참여로 객관적인 지식이 가능해졌다고 말했습니다.(주27 오승성, “신학의 ‘개인적인’ 신앙과 신학의 ‘객관적인’ 지식 – 칼 포퍼와 마이클 폴라니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 학논총>, 제 79호, 2012, pp.109-134.)
현대 자연과학이 아무리 객관성과 합리성을 주장해도 지식에는 개인의 성향, 삶의 현실, 사회적 조건, 심지어 신체적 조건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파이어아벤트 (Paul Karl Feyerabend, 1924 – 1994)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는 『이성이여 안녕』에서 ‘과학은 신화나 미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과학이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종교나 여타의 이데올로기들과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과학만능주의에 종언 (終焉)을 고했습니다. 한스 가다머도 관찰과 실험 이전에 이미 과학자는 자신의 선입견, 자기가 속한 집단의 전통, 세계관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방법이 제아무리 엄격하고 철저하다 해도 그것으로는 결코 전체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처럼 50년 전부터 이미 지식과 사상의 최전선에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보이던 과학의 권위가 철저하게 도전받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한 이들이 철모르는 젊은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토머스 쿤, 가다머, 폴라니 등은 20세기 사상사에서 이미 평가가 끝난 학자들입니다. 특히 이들이 공부한 새로운 과학철학은 비판이론, 구조주의, 현상학과 함께 20 세기를 대표합니다. 과학만능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30~70년대에 역사,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은 자연과학에 버금가는 엄격한 과학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문학이나 종교학이 과학적 지식이 되려는 노력으로 인해 논리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 등의 개별학문이 발전했고, 이러한 학문의 분화로 인간은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되었지요. 강영안 교수의 발언으로 이 논의를 정리해 봅니다.
“… 철학은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에 관여하기보다 논리 분석이 되었고, 종교학은 어떠한 종교적 헌신이나 참여 없이 국외자로서 종교 현상을 기술하는 과학이 되어버렸다. (…) 인문학은(…) 하나의 ‘연구’가 되어버렸고, 따라서 인간의 자기 인식과 이해, 자기 형성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인간이 해 놓은 여러 표현들 (사상, 종교, 역사, 예술, 문학 등)을 대상적으로 연구하는 활동에 그치고 말았다. 그 결과, 인문학은 (…) 삶을 반성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배움으로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주28 강영안 외, 『과학적 지식과 인간다운 삶』, 소화, 2000, 17.)
그러나 아직까지 대한민국 지성계로 눈을 돌려보면 과학만능주의가 대세인 듯합니다. 미셸 앙리 (Michel Henry, 1922 ~ 2002) 의 『야만』은, 과학에 인문학과 종교학이 굴복했을 때 인간 문명이 어떻게 야만이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습니다. 프랑스 현상학자 미셸 앙리는 1922년에 태어나 2002년에 죽었습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자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야만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삶의 문화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의할 때 근대 이후의 절대화된 과학적 지식은 삶의 지식을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거나, 고통을 느끼거나 견디는 것, 주변 사물의 색깔을 구별하고, 소리를 듣고, 추위와 더위와 슬픔과 환희 등등은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확실한 것들인데, 살아 있는 한 이런 지식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갈릴레이 이후의 지식은 이런 것들을 이차적으로, 또는 주변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근대 과학은 이러한 삶의 실재들을 환영 (illusion) 처럼, 가상처럼 다루기 시작했다는 선언입니다. 미셸 앙리도 물질적 우주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정당성, 그 결과의 실증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검증과 증명과 반증을 통한 과학적 지식이 유일하고 진정한 지식이란 오만입니다. 바로 이런 근대적 지식은 삶의 지식을 제거하거나 은폐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부딪치는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먹고, 배설하고, 연애하고, 아프고, 슬프고, 기도하고, 기뻐하는 실제 경험들, 그리고 인간이 만드는 예술, 윤리, 종교 활동을 미셸 앙리는 다시 보게 합니다.
너무 무거운 강연이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이야기하면서 달콤할 수는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동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공부하여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뿐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에 일조하기 위해 출범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 간단히 요약하자면 좋은 이야기, 책, 영화, 음악, 그림, 연극, 드라마 등 무엇이든지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를 나누기 위해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운영되고 있다고 초기 모임 글에서 읽었습니다. 제 강연은 어떤 결론을 내지 않고 열어 두었습니다. 그럴 만한 지식도 능력도 없기에 그렇게 했습니다만 그렇게 열려 있는 것이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취지에 더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어설픈 사람의 긴 강의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강유철 작가
지강유철 작가는 강원도 원천에서 태어나 총신대학교 종교음악과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40대 말까지 성가대 지휘자와 청년 교역자로 일했다.
1998년에 교단장 금권 선거 양심선언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건강교회 국장으로 담임목사 세습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1999년에는 ‘옷 로비 사건’의 광풍에 맞서 연정희를 옹호했고 1990년대 중반부터 개신교와 진보 월간지에서 전문 인터뷰어로 우리 시대 양심적 지식인, 정치인, 예술인 등을 만났다.
2002년 창립한 교회개혁실천연대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고 2009년부터는 100주년기념교회 부설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지은 책으로 『요셉의 회상』, 『안티, 혹은 마이너』, 『장기려 평전』 등이 있다.
공저로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전병욱 다시 읽기』, 『교회 세습 반대의 풍경들』, 『사랑하며 춤추라』, 『백낙청 회화록』, 『신영복의 말과 글, 만남』,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노회찬이 꿈꾸는 정치와 세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