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제2차 인문학여행 (13)
르네상스와 메디치가문에 대하여
– 메디치 가문의 태동시기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
▪종교개혁: (신흥가톨릭 탄생: 16세기 시작) 가톨릭종교제국의 황제 교황에 구데타로 새로운 율법의 신흥 가톨릭 국가 (신교)를 만들다. 그런데 종교개혁이란 말은 있었지만, 결코 종교를 개혁한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의 세속적 교리적 권력을 주도하겠다는, 기독교인들끼리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를 살육했던 권력 쟁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카톨릭 교황제국을 비난하고, 신흥가톨릭교회 (=개신교)를 세웠으나, 여전히 비리, 부패, 교만행위로 신흥가톨릭교회의 타락도 계속되어 오고 있었으니까. 오죽했으면, “신은 죽었다.”고 ‘니체’는 외쳤을까… 예수 가르침대로,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부터 낮은 자로 내려오지 않는 한, 종교개혁이란 말은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비리, 부패, 교만행위로 인한, 교회의 타락이라는 기독교회 통전성 (統全性)이 전승되어 지녀왔고 또 지녀갈 것이기 때문이다.
▪얀 후스 (Jan Hus, 1372? ~ 1415)는 체코의 가톨릭 신학자이며, 1415년 5월 4일 교황의 파문에 따른,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 ∼ 1498)
사보나롤라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설교가·종교개혁가로 한때 메디치를 물리치고 피렌체를 성시화시켜 신비적으로 지배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탈리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교황의 사주를 받은 피렌체시 당국에 의해 교회 법정에서 유죄 선고 를 받고 화형 당했다.
▪루터 (Martin Luther, 1483 ~ 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당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했다. 또한 그 시대 사회 분위기도 그랬 지만, 대서양 물이 서쪽끝 낭떠러지로 떨어져 Hades (Pluto)가 지배하는 지하세계로 흘러 들어 간다 고 루터(칼벵등)는 믿고 있는 가운데 신학을 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ㅡ> 에라스무스 (Erasmus)
▪콜럼버스 항해가 시작된 1492년에 끝난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Reconquista, 영어 reconquest)는 718년부터 시작된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 정복이 끝났다.
▪칼뱅 (Jean Calvin, 1509 ~ 1564)
가톨릭 신부와 학자, 모두를 쫓아내고 제네바 실권은 쥔, 그러나 정치적 종교적 감각이 전무했던 파렐은 그곳에 와있던 정치 감각과 20대에 기독교강요를 쓸 정도의 종교적 지식이 풍부했던 칼뱅을 제네바의 전권을 쥔, 시의회 비상대책위원장에 옹립시킨다. 제네바 성시화로 칼뱅의 새로운 율법 속에서 많은 사람이 가톨릭이 저질렀던 교수형, 화형으로 죽어갔다. 그중에 세르베투스도 있다. 1553년 10월 27일 제네바에서 미카엘 세르베투스 (Michael Servetus)가 화형당했다. 당시 그의 죄목은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부인했다는 것이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저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 종교적 광기와 독재의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 “정신적 독재자이자 광신적인 주지주의자”였던 칼뱅과 그에 맞서는 ‘다른 의견’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고 단호하게 맞섰던 프랑스의 설교자이자 신학자이자 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 (Sebastian Castellio, 1515 ~ 1563). 그는 종교적 관용,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한 최초의 개혁자이다.
▪대항해시대 (15세기 ~ 17세기): 가톨릭 신을 앞세워 약소민족들을 정복하여 식민지라는 말이 생겨난 시대로 포르투갈에서 시작된다. 시대사적으로 근세에 해당하며, 기술사적으로는 범선 시대와 거의 겹친다.
▪르네상스 (Renaissance 14세기 ~ 16세기): 메디치의 피렌체로 들어온 이슬람(오스만 투르크)의 서적들, 발명품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서적으로 유럽사의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이 전개된다.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 천 여년 만에 서구에, 그리고 천오백년이 지난 조선에, 다시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천 여년 동안 학문은 오직 ‘신학’ 하나뿐이었는데 … 어떻게 철학이 살아남아 다시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동방과 서방 교부들은 대부분 플라톤 철학 (퇴계 사상)을 모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고봉 기대승 사상)이 이단시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없거나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십자군 전쟁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서구에 다시 등장하였다는 말입니다. 당시 (14C경)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서지요.
▪지리적인 여건도 있었지만 서방교회에 비해 동방교회는 훨씬 더 이슬람과 접촉을 갖고 있었다고, 그래서 동방기독교 철학 개념은 플라톤 이분법 사상에서 먼저 벗어나 있었을 지도 …. 적어도 16세기까지 수학, 과학, 천문학, 지리학, 그리고 인권을 포함한 법학 등등 이슬람권이 서구를 훨씬 앞서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중세에는 신학밖에 없었다는 말은 철학등의 학문들이 있었으나 신학의 범주에서만 인정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학문들과 이때 이단시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메디치가의 무역과 함께 메디치의 피렌체 학자들에게 전해져 서구 르네상스의 문예부흥이 시작되었다는 것도요 ….
– 메디치 가문은 네 명의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비오 4세, 레오 11세)과 토스카나 대공 등의 피렌체의 통치자 배출
중세 이탈리아에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만토바의 곤차가문 등 여러 유력한 귀족 명문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가문은 단연 메디치였다.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코시모는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의 손자 로렌초-메디치는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로 메디치 가문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르네상스 => 문예부흥 => 종교개혁] ‘메디치’와 ‘갈릴레오’ 그리고 마키아벨리
▪︎서구문명의 발상지에 나라를 세운 당시 학문과 예술에 있어 앞서 있던, ‘오스만-튀르키에’의 <이슬람 학자>들의 <아리스텔레스의 재발견>에 대한 <연구자료>를 <피렌체 무역 (비지니스)그룹>에 의해 서구로 전달된다.
▪︎그 당시 유럽은 ‘그리이스 신화적 사상’에 입각해 있는 <플라톤의 이원론 IDEA 사상>이 지배하는, 종교적 바탕이 되는 ‘이분법 권위’를 여전히 영위하고 있었던 시대로,
▪︎오스만 튀르키에 이슬람제국과 무역을 하던 “메디치의 피렌체 무역상”에 의해 전달된 <일원론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으로 말미암아,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덩달아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그에 힘을 받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더불어> 무소불위 권력의 카톨릭 제국 교황에 대항하여,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구데타를 일으킨 소위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카톨릭 천지였던 유럽은 새-종교사상으로 말미암아, 종교전쟁과 더불어, 유럽세계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문예부흥-종교개혁”이 벌어졌다해도, 그때도 서구사회 모두는 헬라 신화적 사고(Greek Mythical Thinking)에 끄달려 있던 사회구조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기독교 철학을 개혁하여 계승해 간다는 신학자(theologian) 루터나 칼벵도,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가 펼쳐지던 그때에도, 저 대서양 끝에 낭떠러지가 있어 바닷물이 그 밑으로 떨어져 지하세계로 내려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 지하세계는 바로 ‘하데스(Hades = Pluto)신’이 다스린다는 그리이스 신화의 전승울 그들도 그대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헬레니즘 즉 헬라신화(Greek Mythology)가 그들 신학적 사고(Theological Thought)속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 ~ 1650)
나는 생각하고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루터-칼벵 이후 한세기가 지난후에 활약한 법관귀족 가문에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를 나왔다. 수학-과학에 능통했던 철학자인 그는,
▪︎신(Arche, divine, god)에 대한 사고를,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시킨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 ▪︎다시 신 중심으로 환원한 기독교-철학자(theologian)들의 1500년 지배 .. ▪︎그것을 다시 인간중심 세계로 환원시킨 르네상스 정신을 충실히 살렸던 프랑스 철학자다.
" 진정 진리를 추구하려면 최소한 인생에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어봐야 한다."
- If you would be a real seeker after truth, it is necessary that
at least once in your life you doubt, as far as possible, all things.
▪루터-칼벵 이후 한 세기가 지난 후에 활약한 법관귀족 가문에 ‘라 플레쉬 콜레주’ (Collège la Flèche)를 james-kang-2019.tistory.com
■ 토스카나(Toscana)의 메디치(Medici) 가문은,
▪︎13C ~ 17C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4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비오 4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다.
▪︎코시모(Cosimo)때 이르러 이탈리아의 은행, 정치 및 르네상스 시기에 사실상의 피렌체 통치자로 군림했던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 창시자>이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에 의해, 메디치 가문이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 토스카나 대공국 (Granducato di Toscana)
▪︎로마와 프랑스 사이 ‘프란치제나’ 가도를 떠나 순례하는 순례자들은 중세 시대 동안 토스카나주에 부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여행객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쉼터는 교회와 여관 주변 지역 사회 성장을 촉발시켰다.
▪︎12세기와 13세기 중부 이탈리아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교황령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들인 구엘프와 기벨린 간에 분쟁은 토스카나인들을 분열시켰다. 두 세력은 아레초, 피렌체, 루카, 피사, 시에나 등 몇몇 토스카나의 강력하고 부유한 중세 코무네들을 생기게 했다.
▪︎코무네(comune,자치공동체)들 간의 세력 균형은 ㅡ 피사에겐 항구, 시에나에게는 은행업, 루카에겐 은행업과 비단 산업 등 이들이 지닌 자산으로 지켜졌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 무렵에는, 피렌체가 토스카나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피렌체를 지배하는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커가는 부와 힘에 의해 이익을 취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 중 로렌초 데 메디치가 가장 유명하다. 그의 영향력에 대한 유산은 피렌체 미술품과 건축물들에 거대하게 표현되어 오늘날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후손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1533년 프랑스의 왕자 앙리 (이후 앙리 2세)와 혼인했다.
▪︎흑사병이 1348년 토스카나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토스카나 인구의 70%를 앗아갔다. 멀리사 스넬 (Melissa Snell)에 의하면, “피렌체는 질병 발생 여섯 달에 인구 3분에 1을 잃었고, 1년 째에는 인구의 45%에서 75%를 잃었다.”라고 한다. 1630년에 피렌체와 토스카나는 다시 한번 페스트의 공격을 받았다.
– 메디치와 갈릴레오
▪피렌체 메디치 (Medici, 약’을 만들어 팔았던 집안) 가문,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코시모와 로렌조 시대를 함께 살아갔던 갈릴레오 (Galileo Galilei). 변방의 평민으로부터 시작되어 엄청난 부로 교황에 의해 토스카나 (Toscana) 대공 (Grand Duke, Prince) 귀족가문으로 변모하게 이르렀던 메디치, 하지만 갈릴레오는 몰락한 귀족집안 출신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가 고향이다.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류트 연주가로, 음악 이론에 관해 중요한 연구를 일부 남겼다.
▪︎예술과 과학 그리고 교육에 뜻이 있던 메디치의 코시모에게 발탁되어 그의 손자 로렌조때까지 수석교사로 생을 누리면서,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별(Medician stars)”로 명명해 대공에게 헌정하는등 메디치 가문에 잘 보이려 노력을 했고,
▪︎훗날 지동설 설화에 몰리자, 그와 친분이 있던, 메디치와 귀족들 그리고 종교세력의 뒷받침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변방의 평민으로부터 시작되어, 엄청난 부’로, 교황에 의해 토스카나(Toscana) 대공(Grand Duke, Prince) 귀족가문으로 변모하게 이르렀던 메디치, 하지만 갈릴레오는 몰락한 귀족집안 출신이다.
– 성가족 (Sagrada Familia)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 1564)는 로렌초에 의해 메디치 가문에 입양되었기에 형제처럼 자란 로렌초의 친아들과 조카가 추기경, 교황이 되었다. 가톨릭 교리에 가스라이팅 되어 있던 미켈란젤로. 그들과 하이어라키 차이에 욱하는 성질이 심해져 갔다. 로렌초의 눈 밖에 나자 로렌초에 의해 밀라노의 스포르차의 후원도 받게 되었던 (미켈란젤로 삼춘뻘 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 ~ 1519)는 미켈란젤로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따라서 성가족(Saint family)의 개념이 아래와 같이 다르다.
– ‘메디치 Medici’ 가문 (Cosimo de’ Medic, Lorenzo de’ Medici)
– 참고: 드라마 메디치 – 마스터즈 오브 플로렌스, 더 매그니피션트 메디치 Medici는 이탈리아-영국 합작 드라마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역사
메디치Medici는 이탈리아-영국 합작 드라마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역사 드라마이다. 피렌체 여행을 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이 메디치 가문이다. 엄청 재미있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피렌체나 메디치 가문에 대한 관심이 있으면 재미있게 볼만하다. 시즌1은 마스터즈 오브 플로렌스 Masters of Florence가 부제이고, 시즌 2와 3은 더 매그니피션트 The Magnificient가 부제이다. 시즌1은 “국부” 코시모 로렌초, 시즌2와 3는 그의 손자 “위대한” 로렌초에 대한 내용이다.
– 드라마 메디치의 배경
내용 이해를 위해선 15세기 이탈리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있어야 한다. 드라마 내에서는 이에 대한 묘사가 친절치 않아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력 간 다툼이나 무역 이슈가 얼마나 심각한건지 이해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이슈가 유야무야 해결되는 느낌도 든다(논리갑 메디치가 말빨로 해결하는 느낌?).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15세기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국가로 쪼개져 있었고 피렌체 공화국도 그 중 하나였다. 시즌 1, 2에 등장하는 주변의 강대국으로는 밀라노공국과 베니스 공화국이 있다. 그리고 시즌3 초반에 등장하는 나폴리 왕국이 반도 남쪽에 있다. 신의 대리인인 교황도 영토가 넓었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Cosimo I de’ Medici, 1519년 6월 12일 ~ 1574년 4월 21일)는 2대 피렌체 공작이었다가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1569년 초대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초대 피렌체 공작이었던 알레산드로가 1537년에 암살당하자 권력을 계승하였으며 메디치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기울어가던 메디치 가문을 다시 부흥시켰다.
집권이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공화파들을 제압하고 피렌체에 귀족정을 뿌리내리게 하였다. 1557년에는 무력으로 시에나를 정복하는 등 영토 확장에 성공하며 도시국가 수준의 피렌체를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집권 초기의 피렌체는 1530년에 있었던 피렌체 공성전의 여파로 정치는 혼탁했고 경제는 피폐하였으며 사회는 무질서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이기는 했으나 강력한 부국강병 정책을 통해 피렌체를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황제 카를 5세의 봉신임을 분명히 했으며 반-프랑스, 친-황제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를 통해 당대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적 세력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 피렌체의 독립성을 유지하였고 밀라노의 경우와는 달리 피렌체가 스페인의 속주가 되는 것을 막아냈다.
그의 외할머니인 루크레치아는 위대한 로렌초 (1449 ~ 92)의 딸이자 메디치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누나이다. 이런 가문의 혈통으로 인해 교황 레오 10세는 코시모의 대부가 되어 주었다.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코시모와 6촌 형제지간이다.
– 코시모는 레오노르 사이에서 11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리아 (1540년 4월 3일 ~ 1557년 11월 19일) : 알폰소 디 에르콜레 2세와 약혼했으나, 혼인 이전에 사망
.프란체스코 1세 (1541년 3월 25일 ~ 1587년 10월 19일) : 부친을 이어 토스카나 대공에 오른다.
.이사벨라 (1542년 8월 31일 ~ 1576년 7월 16일) : 남편 파올로 조르다노 1세 오르시니에게 살해당함.
.조반니 (1543년 9월 28일 ~ 1562년 11월) : 피사 주교와 추기경이 됨
.루크레치아 (1545년 6월 7일 ~ 1561년 4월 21일) :1560년에 모데나와 페라라 공작 알폰소 2세 데스테와 혼인
.피에트로 (페드리코) (1546년 8월 10일 ~ 1547년 6월 10일) : 1살 때 사망
.가르치아 (1547년 7월 5일 ~ 1562년 12월 12일) : 15세 때 말라리아로 사망
.안토니오 (Antonio, 1548년 7월 1일 ~ 1548년 7월) : 유아기에 사망
.페르디난도 1세 (1549년 7월 30일 ~ 1609년 2월 17일) : 추기경이었으나 형 프란체스코 1세가 후계없이 사망하자 토스카나의 대공에 즉위함.
.안나 (Anna, 1553년 3월 19일 ~ 1553년 8월 6일) : 유아기에 사망
.피에트로 (1554년 6월 3일 ~ 1604년 4월 25일) : 부인 엘레오노라 디 가르치아 디 톨레도를 살해함.
– 코시모는 혼인을 하기 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 사이에서 사생녀 한 명을 두었다:
.비아 데 메디치 (1536년 추정 ~ 1542년 3월 1일)
– 1562년에 레오노르 사망 후, 코시모는 하녀 엘레오나라 델리 알브리치 (Eleonora degli Albrizzi) 사이에서 2명의 자녀를 두었다:
.불명의 딸 (1566년 출생 및 사망) : 세례 전 사망
.조반니 (1567년 ~ 1621년) : 코시모에 의해 적출화 됨
– 1570년, 코시모는 카밀라 마르텔리 (1590년 사망)과 혼인하였고 자식 한 명을 두었다:
.비르지니아 (1568년 5월 29일 ~ 1615년 1월 15일) : 모데나 공작 체사레 데스테와 혼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로렌초 가문의 수장. 일명 ‘대인 로렌초’ (Lorenzo Il Magnifico, 로렌초 일 마니피코).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사실상의 통치자로,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르네상스의 열렬한 후원가였다. 동시대 피렌체인들에게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로도 알려진 그는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였으며 학문과 예술인들의 후원자였다.
강성형 회원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