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제2차 인문학여행 (9)
로마시내와 근교에서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명소들에 대하여
(콜로세움, 콘스탄티노 개선문, 캄파돌리오광장, 스페인광장, 트레비 분수, 베네치아 광장, 포로 로마나, 사도바울 기념교회, 아피아가도, 카타콤베, 판테온 등)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 등으로 지어져 있고,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고,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 동상인 콜로서스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AD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콜로세움은 수 세기 동안 계속 개축되어왔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다만 중세에 이르러 제국이 쇠퇴하고 로마가 폐허로 변하자, 콜로세움도 이와 같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요새, 교회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쟁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개선문 콜로세움과 함께 웅장함을 내뿜는 거대한 문은, 고대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개선문이다. 티누스의 개선문, 세비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함께 ‘로마 3대 개선문’으로 불리는데, 그 중에서도 크기가 가장 크며, 3개의 아치형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캄피돌리오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del Campidoglio)은 이탈리아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 광장이다. 미켈란젤로가 1537년 설계했다. 투시적 효과가 의도된 동적인 타원형 외부광장이 특이하게 사다리꼴을 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에 하나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캄피돌리오 광장에는 3개의 궁전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정면에는 세나토리오 궁전 (Palazzo del Senatorio)이 있고, 우측에는 콘세르바토리 궁전 (Palazzo dei Conser vatori), 좌측에는 누오보 궁전 (Palazzzo Nuovo)이 있다. 세나토리오 궁전은 현재 로마 시청사로, 좌우 2개의 건물은 카리톨리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은 12개의 꼭지점을 지닌 연꽃 문양의 하얀 타원형 타일 바닥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 신전의 신성한 돌 옴파로스 (Omphalos)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달걀형의 옴파로스는 표면에 여러 선들이 교차하는 다각형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옴파로스는 ‘배꼽’을 가리키는 말로 ‘세계의 중심’을 뜻한다. 즉 타원형으로 타일이 장식된 캄피돌리오 광장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스페인 광장
17세기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했던 것에서 이름이 유래된 광장이다. 스페인 광장과 트리니티데이 몬티 성당을 잇는 스페인 계단 인근에는 과거 안데르센, 괴테 등 유명 예술가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로마 관광의 핵심명소 중 한곳으로, 현지인들에게 휴식처로, 관광객들에게는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트레비 분수
중세 르네상스 시대는 교황에 의해 상수도 시설을 전면 수리 개편하면서 새로운 수도 시설 개발과 함께 물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분수를 여러 개 설치하였는데 그중에 트레비 분수는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제일 처음 트레비 분수를 만들려고 했던 때는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처녀의 샘을 부활시키겠다는 취지로 트레비 분수를 계획했다. ‘처녀의 샘’은 목마른 군인들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나 물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이러한 내용이 이 건물의 한쪽 면에 남아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5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공사는 중단이 되었다. 그 후에 트레비 분수를 설계한 사람은 니콜라 살비 (Nicola Salvi)로 당시 교황 클레멘스 12세가 다시 트레비 분수를 만들기 위해 공모전을 주최했고, 니콜라 살비가 바로크 양식의 트레비 분수 설계로 우승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공사는 1732~1762년 살비의 사후에 완성되어 교황 클레멘스 13세 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베네치아 광장
로마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로마의 심장’이라 불리는 광장. 시내 곳곳을 오가는 버스가 운행되어 로마 교통의 중심지라 불리기도 한다.
광장에는 이탈리아 황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유해가 묻힌 무덤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도 자리하고 있다. 매년 봄과 여름에는 ‘공화국 건국 기념일’, ‘로마 제국 탄생일’ 등 여러 행사가 열려 근위병 교대식, 퍼레이드 행렬 등의 화려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포로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세워진, 옛 로마의 중심지. 지금은 건물 일부와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예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개선문과 신전, 바실리카의 흔적들을 둘러불 수 있어 콜로세움과 함께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다. 고대 로마인들이 모신 신들의 신전이나 그들이 생활했던 건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영화 ‘글래디에이터’ 장면을 떠올리며 걷는다면 이상적인 산책코스이다.
사도바울 기념교회
성 바울 순교기념교회는 성 바울의 트레폰타나 교회 (Tre Fontana Church of St. Paul)라고 부른다. 이 교회는 바울의 마지막 순교의 모습을 담고 있는 교회로서 사도바울이 처형된 바로 그 자리위에 현재 바울 순교 기념교회를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여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 머리가 세 번이나 위로 솟구쳤다. 그의 머리가 솟구치는 장소마다 샘물이 솟아났으며 처음 떨어진 곳에는 뜨거운 물, 두 번째 떨어진 곳에는 따뜻한 물, 그리고 마지막에 떨어진 장소에는 차가운 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 장소를 기념하여 ‘세 가지 샘물’이 솟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트레폰타나 (Tre Fontana)’라는 이름의 바울 순교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아피아 가도
에트루리아 인들이 지배했던 초기의 로마 시대에 지어진 몇몇 도로들은 대개 로마를 벗어나서 에트루리아를 이어주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인들은 도로 건설의 주역이 되어 이탈리아 내의 도로들을 확장했다. 이 도로는 로마 (이는 로마 제국과는 다르며, 초기의 로마 공화국을 말한다)의 영역을 벗어나서 건설된 최초의 도로다. 이러한 도로들은 이티네라리움을 통해 목적지가 결정되고 계획되어, 로마 시에서 영토 경계선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카타콤베 (Catacombe)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첫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베의 면적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카타콤베는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보금자리와 휴식처였다. 카타콤베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배를 행할 수 있는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 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판테온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한 로마 건축물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παν)’ + ‘신 (θεος)’을 의미한다. 그리스어가 뜻하듯이, 다신교 국가인 로마 제국에서 특정 신이 아니라 무려 30만의 모든 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되었다. 판테온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돔 형태의 건축물이고 규모면에서도 미국 국회의사당 중앙 돔 보다 크다.
현존하는 건물은 서기 12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것. 이전의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아그리파가 세웠는데, 하드리아누스가 118~125년에 재건하면서 아그리파를 존중하는 의미로 옛 판테온의 정면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을 그대로 새겼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때 건물을 수리하기도 했다. 판테온은 현존하는 그 어떤 로마 건축물보다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거대 돔 건축물이기도 하다. 직경 43.3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비견될 돔이 없었을 정도이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이른바 <완벽한 고대 건축>이라는 중세 유럽인들의 이상향이며, 판테온의 돔과 실내 장식, 열주 (기둥들)는 르네상스 건축과 그 이후의 유럽 전통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판테온 내부에는 자신들의 신앙관에서 모시는 신외에 피정복민들의 신까지 모셨으며, 고대 지중해의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피정복민의 정체성을 파괴하지 않으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 내로 흡수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애 회원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