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플라톤 선생님, 두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플라톤 철학이 남긴 이원론과 국가론의 문제점 풀어가기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지난 2017년 2월 2일 이곳 Lindfield 한글사랑도서관(김동숙 관장)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교실에 함께 하셔서 공부해 오신 인문학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뒤에서 여러 모습으로 섬겨주신 운영위원님들을 비롯하여 물질과 마음을 다해 섬겨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동시에 이 곳에서 우리 교실을 널리 알려주심은 물론이고 모든 소식과 강좌를 한 번도 거르지않고 전문을 게재해주신 ‘크리스천라이프’(임운규 발행인)와 한국의 ‘나비통신’(최광열 발행인)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교실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하셨지만 신문을 통하여 꾸준히 읽고 배우고, 생각을 더해 가시면서 저희와 함께해주신 분들이 생각 밖으로 참 많으셨습니다. 그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 강좌의 원고는 호주는 물론, 한국, 몽골, 동남아시아, 캐나다, 미국, 남미 등 여러나라에 계신 친구들 수십명에게 보내왔는데, 특히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서는 우리 강좌를 중심하여 그 지역에 계신 분들 이십여명이 김영근 선생님과 함께 ‘필라델피아 인문학교실’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주셔서 참으로 반갑고 보람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한번 이 모든 분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2017년 2월 시드니인문학교실을 시작하며 플라톤 강좌를 하기전에 나눴던 강좌와 토론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제1강 우리들은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인문학의 목적)
제2강 인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인문학의 정의와 역사)
제3강 인문학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인문학 방법론)
제4강 생각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인문학의 출발점)
제5강 인문학의 주제1–사람(Saram)에 대한 서구적 이해
제6강 이웃되기의 역사학(박정신 교수)/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탈북자–이웃 환대하기(구미정 교수)
제7강 인문학의 주제2–사람에 대한 동양적 이해
제8강 인문학의 주제3–사람에 대한 통전적 이해
제9강 나의 철학 만들어 보기(철학이란 무엇인가?)
제10강 호주의 역사 이야기(한상대 교수)
제11강 내 인생의 중심개념은 무엇인가?(자연철학자들의 이야기)
제12강 해외 한인동포들 이야기(한상대 교수)
제13강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배경(주경식 교수)
제14강 종교개혁 500주년기념:루터-종교개혁과 교회분열의 사이에서(주경식 교수)
제15강 우기지 마라! 네말도 맞고 내말도 맞다!(소피스트들 이야기)
제16강 죽음:어떻게 맞을 것인가?(소크라테스의 생각, 삶, 그리고 죽음을 보면서)
‘시드니인문학교실’은 매년 2월부터 5월까지, 또 8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 매월 첫째 및 셋째 목요일 저녁 7시부터 Lindfield 한글사랑도서관에서 16번에 걸쳐서 모입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첫째 목요일 저녁에는 그동안 제가 진행해 왔던 것처럼 서양철학의 역사를 중심으로 강좌와 토론의 시간을 갖겠습니다만 셋째 목요일 저녁에는 인문학과 관계된 여러가지 토픽들을 가지고 강사들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시간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직 초청 강사들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토픽들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홍길복의 강좌 – 플라톤이 남겨놓은 숙제 풀기/행복과 중용의 관계(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헬렌이즘과 로마시대의 철학 이야기(견유학파, 스토아 학파, 에피퀴레스 학파들이 남겨놓은 인생의 교훈들 살펴보기)/중세의 시작–기독교 이야기/보편논쟁이란?/르네쌍스 이야기/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는가?)/계몽주의란 무엇인가?/칸트 철학의 3가지 중심 주제 등 근세까지의 서양철학사를 중심으로 너무 무겁지 않게 공부해 가고자 합니다.
초청 강사들로부터 듣고자 하는 토픽들 – 인문학과 정치, 혹은 인문학과 정치적 자유/인문학과 경제, 혹은 인문학과 경제적 평등/인문학과 법, 혹은 인문학과 정의/인문학과 자연과학과의 관계/인문학과 책 이야기, 혹은 인문학과 독서/인문학과 음악 이야기/인문학과 미술 이야기/인문학과 영화 이야기/인문학과 공연예술/인문학과 문학(시, 소설, 희곡 등) 이야기/인문학과 여행 이야기/기타 인문학과 종교, 죽음, 사랑, 분노, 음식, 바른 삶, 노후 등등.
오늘은 2018년 첫 시간입니다. 먼저 각자 금년에 읽어보고 싶은 도서 목록을 정리해 볼 수 있도록 아래에 빈 칸을 만들었습니다. 각자 한번 작성해 보면 좋겠습니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인문학 친구들의 꾸준한 사랑과 관심 가운데 한해를 지나오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새해도 이 작은 교실을 통해서 우리들의 초심이 변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더 성숙해 지기를 바랍니다. 새해 새롭게 시작하는 마당에 우리는 다시한번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이 다짐했던 처음의 목표들을 재점검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교실에서 강의, 독서, 토론을 통하여 서양에서 이어온 문사철과 동양에서 다듬어온 시서화를 살펴보면서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의심하고, 고민하고, 우리 개인과 역사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진솔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개인적 삶의 의미와 보람을 추구해 나가는데 보탬을 얻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를 지향하는데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위와 같은 목표를 바라보면서 독서, 강의, 토론을 할 때 우리 인문학 친구들의 지녀야 할 기본적 자세 또한 대단히 중요합니다.
첫째는 ‘자아성찰(自我省察)’입니다. 인간이란 영원히 이상한 존재이고 풀려지지 아니하는 숙제입니다. 인간에 대한 최대의 원수는 인간입니다. 인간성 속에는 이기적 유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탐욕과 이기주의와 교만의 노예입니다.–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와 혜능대사의 이야기는 물론, 최근 우리가 보고 온 램브란트 특별전에서 그가 그렸던 100여개의 초상화 이야기도 늘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미술에 있어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작품의 대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둘째는 ‘절대란 절대로 없다’는 생각을 갖고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를 뿐’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황희 정승의 이야기나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의 빛에 대한 실험 이야기나 불트만과 후기 불트만학파 사이에서의 학문적 겸손에 대한 태도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피하거나 안만나는 것은 아주 나쁜 태도입니다. 우리 인문학 교실만해도 동과 서처럼 아주 먼 사람들이 함께 자리하여 서로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나눔으로 우리는 더욱 더 성숙해지게 됩니다.
셋째는 늘 ‘역시사지(易地思之)’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데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세상에는 손바닥을 얼굴보다 두배, 세배 더 크게 그리는 그림도 있습니다. 미국 동부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여학생에 대한 sexual rape 사건에 대한 대처 방법에 있어서 학교당국과 여학생들의 생각의 차이점을 기억해 둡시다.
대부분의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인문학도 결코 혼자서는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힘을 합하여 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각자는 점묘법(點描法)–점 하나 하나를 찍어서 마침내 큰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미술 기법과, 여러개의 작은 조각들을 맞추어서 전체를 이루는 ‘모자이크’나 ‘퍼즐 맞추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문학은 서로 협력하여 전체를 아우르고 함께 힘을 합하여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문학을 하려는 사람들은 일체의 차별의식을 가져서는 않됩니다. 나와 너, 사람과 자연, 하느님과 사람, 어린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가진 자들과 못가진 자들, 건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내국인과 외국인, 원주민과 이민자, 일체의 갑과 을 사이에 그려진 빗금(칸막이/슬래쉬)을 걷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문학은 언제나 그 사회와 조직 속에서 약자들의 편에 섭니다.–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의 한 주모에게 내려준 당호, 사의제(四宜齊)를 기억해 둡시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교실이 추구해 나가는 방향은 중용(中庸)입니다. 극단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중용이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식으로 중도(中道)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중용은 정도(正道)를 걷는 노력입니다. 포용, 관용, 너그러움, 똘레랑스, 균형과 조화(Harmony & Balance)입니다. 그럼 플라톤을 살펴보겠습니다.
Platon[BC 427년(혹은 428, 424년)∼347년(혹은 348)]은 어떤 인물인가?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써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습니다. 21살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에게서 철학과 인생을 배움으로 정치가가 되겠다던 처음의 인생 계획을 바꾸어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평생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과 사상이 만들어집니다. 살아생전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아니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만남으로 역사 속에서 위대한 철학자로 빛을 발하게 되었고 플라톤 역시 소크라테스를 만남으로 서양철학사에서 독보적인 사상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특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부터 큰 감명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플라톤의 저서라고 불리우는 대부분의 책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바울이나 베드로가 없이도 예수가 전해질수 있었을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플라톤이 없이도 소크라테스가 알려질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28살에 세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었으며 그리스의 4대 학원중 하나인 아카데미아(Akademia)를 세웠습니다[Athens의 4대 학원 i)Platon의 Akademia, ii)Aristoteles의 Lykeion, iii)Epikouros의 Epikouros학원, iv)Stoa학파의 Stoa학원]. 플라톤은 여기에서 주로 정치학, 윤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등을 가르쳤으나 수학과 기하학과 천문학을 포함한 물리학도 가르쳤습니다. 번듯한 학교건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기집 정원에 세워진 학교였으나 그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 학교는 AD 529년 유스티아누스황제가 아카데미아를 반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폐교할 때까지 거의 천여년 동안 지중해 세계 최고의 두뇌집단이었고 지식인 양성의 모체였으며 학문의 전당이었고 자유의 시험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권력을 등에 업고 인류 최초의 대학을 폐쇄한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종교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반지성적인지를 보여주는 예화가 됩니다. 한때 플라톤은 그의 정치사상을 실현해 보기위하여 여러 곳을 방문하며 노력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81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든 이론과 현실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정치든, 경제든, 종교든, 원칙과 이상, 꿈과 이론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플라톤의 대표적 저서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여러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편’이 35개가 전해집니다. 당시 글쓰는 방법은 주로 그리스 문학의 영향으로 인하여 등장인물들이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희곡식 글쓰기 방식이 가장 보편적이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주로 등장인물중 주인공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이름을 따거나 토론의 주제를 책명으로 붙였습니다. 기타 그의 편지라고 생각되는 ‘서간문’이 13개가 있는데 대화편이나 서간문에는 플라톤의 글이 아니라고 의심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신약성서나 기타 고대의 다른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저작들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파르메니데스’ ‘파이드로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메논’ ‘국가’ ‘법률’ 등이 있습니다. 2017년 현재 플라톤의 저서는 한국어로 완역이 안된 상태입니다(일본은 이미 백여년 전에 플라톤 전집을 완역했고 70년대엔 고대 그리스원전 모두를 일본어로 번역해 냈습니다).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의 위치와 한계
그는 서양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중 하나입니다. 그는 서양철학을 최초로 체계화하고 그 기본 토대를 구축한 사람이라고 불리웁니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지지나 반대중 하나라고 할만큼 그는 철학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흔히 서양철학은 Platonism이냐, 아니면 Anti-Platonism이냐 할 정도로 플라톤철학에 대한 찬반으로 양분됩니다. Whitehead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일뿐’이라고 했고 버트란드 렛셀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플라톤의 글 중에는 취급되지 아니한 분야가 없을 정도입니다. 형이상학, 철학, 신학, 윤리학, 미학, 정치학, 법학, 기하학, 의학, 천문학, 지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손을 댔습니다. 특히 중세 초기 기독교신학은 존재론, 유일신 사상, 이원론 등에 있어서 플라톤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플라톤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데아론’에 따른 ‘이원론’은 세상만사를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은 것으로서 양극화 논리를 초래했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그의 ‘철인정치론’은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플라톤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개인적 능력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제한이 있음으로 우리 ‘시드니 인문학교실’에서는 플라톤의 사상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된다고 여겨지는 다음 두 부분에 대해서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그의 대화편들 가운데 나타난 ‘이원론’ 사상이고, 둘째는 그의 ‘국가’(Politeia)에 나타난 ‘정치철학’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철학사상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제한성과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토론해 보고자 합니다.
플라톤 철학의 제 1 핵심사상은 이원론(二元論, Dualism)입니다. 플라톤은 자연계를 포함하여 인간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둘로 나누어서 보고, 이해하고, 해석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은 (1) 첫째로 현상계(現象界 Form)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나타난 현실세계’를 말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맞거나, 입으로 맛을 보거나, 아니면 피부로 접촉해서 알게 되는 모든 현상계가 제 1차적 인식의 세계입니다. 교실, 책상, 의자, 책, 마이크, TV, 컴퓨터, 꽃병, 하늘, 해, 달, 별, 땅, 나무, 물, 새, 벌레, 소, 말, 개, 사람, 건물, 자동차 등등은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인지되는 현실계요, 나타난 사물의 세계입니다. (2) 둘째로 플라톤은 우리의 감각, 즉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지지 아니하는 현상계의 이면(裏面)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플라톤은 이 현상계 뒤에 있는 정신적 세계, 이념의 세계를 ‘이데아’(Idea), 혹은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의 ‘이데아론’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 이데아의 세계는 현상계에 대한 존재의 근원이 되고 이 현상계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플라톤이 좋아하는 기하학에서 삼각형을 봅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다른 모양과 다른 색깔과 다른 크기를 지닌 삼각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다양한 삼각형들은 본래부터 사람의 ‘머리속에 그려진 이념적 삼각형’의 다양한 변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기하학자에게는 ‘삼각형이란 세 개의 변이 만나서 내각의 합이 180도를 이루는 이상적 원형 삼각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 삼각형을 ‘완전한 삼각형’이라고 했습니다. 현상계의 수많은 삼각형들은 이 ‘완전한 원형 삼각형’의 변형이요, 모방으로써 ‘불완전한 삼각형’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이론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도록 그려진 모든 삼각형들은 ‘이데아 삼각형’을 본뜬 것이며(copy), 모방한 것이며(imitation), 혹은 나누어 가진 것(분유, 分有, sharing)으로써 ‘이데아의 복사 혹은 복제판’일 뿐입니다.
삼각형 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이념속에 상상으로 그려진 꽃의 이데아를 모방하거나 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상, 의자, 소, 말, 개, 사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사랑, 정의, 진리, 평화, 자유, 충성, 기쁨 같은 것들 까지도 다 감각적으로는 보이거나 만져지지 아니하는 원형적 이데아로부터 본떠 오거나 조금씩 나누어가진 불완전한 현상이라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열을 내면서 부르짖는 민주, 인권, 자유, 평등, 사랑, 진리 같은 것들도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한 부분적 신념일 뿐이지 절대로 절대적이질 못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으로써의 선이나 진리나 정의나 사랑이란 사실은 거짓된 것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후에 중세철학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데아론은 보편논쟁에서 유명론과 실재론으로 연결됩니다).
이와같은 논리에 따라 플라톤은 이 세상이란 ‘이데아와 형상’ ‘본질과 모방’ ‘원인과 결과’ ‘진리와 거짓’ ‘원칙과 변화’ ‘영혼과 육체’ ‘하나와 여럿’ ‘오리지날과 카피’ ‘원본과 짝퉁’이라는 두 가지로 되어있다는 이원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데아=본질=원인=진리=원칙=영혼=하나=오리지날=원본이라는 등식과, 형상=모방=결과=거짓=변화=육체=여럿=카피=짝퉁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에 의하면 인간(Body), 혹은 인간 존재(Whole Human Being)란 영과 육으로 되어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Body는 Soul과 Flesh,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Soul, Spirit, Mind는 오늘날 여러가지로 번역이 되고 분석되고 다른 의미로 풀이됩니다만 당시만 해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었습니다)은 이데아의 세계입니다. 당연히 영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아름답고 변하지 않고 죽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Flesh)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추하고 변하고 사멸되어 없어집니다. 영은 육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육체와 함께 존재하다가 육이 없어지면 다시 자기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영은 영원불멸이고 육은 잠깐입니다. 영원한 것은 완전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참된 진리이지만 일시적인 것은 썩고 쇠하고 더럽고 거짓됩니다. 이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 사람이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이 죽음을 찬양하고 죽음이란 영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이라 한 것과 그의 영혼불멸 사상은 모두 이와같은 그의 이데아론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이데아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하고 참된 세계를 알 수 있을까요? 플라톤은 이렇듯 일종의 영적이며 정신적이며 종교적 세계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는 길은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오직 ‘이성적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플라톤은 인간을 끌고가는 데는 두 가지 욕구가 있는데 하나는 ‘욕망’(慾望: Desire)이고 다른 하나는 ‘기개’(氣槪:Passion)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 욕망과 기개라고하는 두 마리의 말이 끌고가는 데로 따라 갑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 쌍두마차를 몰고가는 마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성이라는 마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과 역사는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성이 욕망을 지배할 때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고 역사와 사회는 올바른 길로 가게 됩니다. 이성의 지배를 받는 개인이 행복한 사람이고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입니다. Homo Sapience!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성을 최고의 자리에 앉힌 플라톤철학은 이런 기초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감각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 속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는 떨어져있는 초월성을 지닌 인식능력으로써 일종의 ‘절대정신’ 같은 것입니다. 이렇듯 이성을 통한 절대적 이데아 인식이 결국은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적 신앙 사이에 거리를 만들게 됩니다. 헬레니즘(Hellenism)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인식을 주장하고, 헤브라이즘(Hebraism))은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길로 갈라서게 됩니다. ‘이데아란 어디엔가 있다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사유함으로 깨닫게 된다’는 철학의 세계와 ‘신이란 인간이 생각하고 깊이 사유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귀의할때 만이 알 수 있다’고 하는 종교의 세계가 제각기 따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성적 능력을 신뢰하고 깊은 사색을 통하여 진리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믿음과 기도, 성령과 영적체험을 통하여 도와 진리의 세계로 나갈 것인가? – 지난 날 인류는 이 둘 사이에서 대결과 선택, 혹은 타협과 양보를 거듭 하면서 진리와 영원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 선생님에게 이원론이 제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몇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토론하려고 하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1) 첫째 질문입니다. 인간 세상은 플라톤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지는가? 영과 육, 너와 나, 본질과 형상, 참과 거짓, 빛과 어두움, 흑과 백, 선과 악, 성과 속(聖과俗), 촛불과 태극기식의 양자 대립 구도로 갈라지는 것일까요? 육체노동을 하거나 육신을 위해서 일하고 먹고 자고 노는 것은 모두 속된 일이고 정신노동을 하면서 책읽고 공부하며 기도하는 일들은 모두가 다 거룩한 일일까요? 사농공상은 천한 일이고 선비나 관료나 종교인이 되는 것은 귀한 일일까요? 성직과 속직이 따로있고 성일과 속일을 구별하는 것이 바른 태도일까요? 기독교 성도들이 성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교회예배를 중시하는 것과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중 누가 더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일까요? 단기선교를 가는 것은 거룩한 일이고 청소하면서 돈을 벌어 식구들을 보살피는 것은 속된 일일까요? 인간의 삶이란 두부모 짜르듯이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聖 속에도 俗이 있고 俗 가운데도 聖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는 하루 빨리 聖者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성자들을 취소해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원론적 구분법이 현실에서는 그대로 적용이 되지도 않고 그리된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극복해내야 할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는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2) 둘째 질문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책임하게 만들어 놓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원론에 빠지게 되면 현실을 도피하고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책임성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은둔, 도피 하거나 반사회적, 반문화적이 되기가 쉽다고 봅니다. 수도원적, 기도원적 삶이 미화되고 스스로를 게토화하여 종교적 울타리 안에 안주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종교인으로서의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종교인들이라고 해서 먹고 자고 놀고 영화보고 운동하고 여행하고 정치에 참여하고 세상을 비판하고 성생활을 하는 것이 죄짓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런 것들은 어딘가 잘못된 일을 하는 듯이 심리적 및 정신적 부담감을 갖게 만듭니다. 이런 태도는 결국 인간성을 부정하고 사람을 비인간화시키고 무책임한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이는 AD 1세기 이후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바울이나 요한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빛과 어두움, 이 세상과 저 세상,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기독교를 성속 이원론적 신학 위에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성과 신앙은 서로 적이요, 상극입니까? 이 둘은 피차 조화 할 수 없고, 상호 보완이 불가능한 방법론일까요? 종교개혁시대 마틴 루터까지도 ‘이성은 마귀의 매춘부요 악마의 창기’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기독교까지도 정말 이성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요, 종교란 무조건, 덮어놓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요? 전통적 기독교는 가능한한 교리화 되어버린 극단적 이원론을 극복해 내고 우리시대 ‘상식을 존중하고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 위에서’ 종교를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합리적 신앙의 세계로 초청하여 함께 신앙의 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은 없을까요?
플라톤 철학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취급하려는 핵심 사상은 그의 ‘정치철학’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원래의 그리스 말로는 ‘Politeia’인데 영어로는 흔히 ‘The Republic’ 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말로는 ‘국가’라고 번역했습니다만 그 둘 다 플라톤이 생각했던 의도를 제대로 옮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에서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를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어 볼려고 했습니다. ‘폴리스를 폴리테이아로’ 개조해 볼려는 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플라톤이 ‘폴리테이아’에서 시도한 것은 ‘이상적인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폴리테이아’는 플라톤의 저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주로 소크라테스와 그의 여러 제자들이 나누는 대화체로 엮여져 있지만 플라톤 자신의 정치철학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핵심 사상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폴리테이아’가 취급하는 처음 주제는 정의의 문제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正義를 定意해 보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정의란 ‘디카이오시네’(dikaiosyne)입니다. 그 뜻은 ‘올바름’입니다. 정의의 문제는 최근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특히 서양의 정치철학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로 취급되어왔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에게는 이익이 돌아가게 해 주고 악하고 나쁜 사람은 불리하게 해주는 태도와 제도’가 ‘올바른 것이요 곧 정의라는’라는 논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착하고 선한 사람과 악하고 나쁜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고 구별해 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착하고 선한 사람에게 이익을 얻게 해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누군가가 악하고 나쁘다고 해서 그에게도 악하고 나쁜 방법으로 불이익을 주는 것이 과연 ‘올바는 태도냐?’하는 것입니다. 논리가 복잡해지면서 유명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Trasimacos)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을 옹호 해 주는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통치자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정한 후 그 법을 지키는 것을 정의라고 하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불의라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법을 만드느냐 하는 것인데 모든 법은 결국 강자, 곧 통치자들이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양치기, 선장, 의사, 성직자 등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글라우콘은 ‘정의란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놓고 피차에 타협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사회계약일 뿐이지 절대적 정의란 없다’고 봅니다. 아데아만토스는 효용성이 없는 정의란 효용성이 있는 불의보다 못한 것이라고 열을 올립니다.
‘폴리테이아’에서 취급하고 있는 둘째 주제는 ‘정의’(올바름)가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 국가’란 무엇인가?입니다. ‘어떤 국가가 정의를 실현해 낼 수 있는가?’ 플라톤의 대답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철인국가’입니다. 그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나라가 가장 이상적으로 정의, 올바름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국가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플라톤은 ‘폴리테이아’ 제 8권과 9권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정식의 독재체제’(獨裁體制 Autocracy)를 비롯하여 군사적 무력같은 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는 참주체제(僭主政治 Tyrant)는 물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소수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갖고 그 권력을 그들 사이에서 이어가는 공산당이나 관료 사회 같은 과두정치(寡頭政治 Oligarchy)와 더 나아가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체의 민주정치(民主政治 Democracy)까지를 통털어서 잘못된 국가체제라고 합니다. 그런 국가에서는 도저히 정의를 실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특히 플라톤은 아테네의 민주적 정치체제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부당하게 죽였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민주적 정치체제가 지닌 단점을 보았던 것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철인이 다스리는 나라인 철인통치 국가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나라였습니다. 그가 주장한 철인정치는 일종의 귀족정치(貴族政治, Aristocracy)요, 엘리트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국가의 구성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상적 국가에서 영토는 ‘폴리스’이고 국민과 주권은 다음의 3계층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국가의 제일 밑바닥에는 생산자로써의 서민이 있습니다. 그들은 농공상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절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욕에 붙들려서 더 잘 먹고 더 잘 입기를 바라며 사는 계층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위, 중간 자리에는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용기입니다. 군인에게는 기개적 결기가 있어야지 나라를 수호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생산계층과 군인들은 이성적 능력이 아주 빈약하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죄수와 같이 허상만 바라보면서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들에게는 밖에서 비쳐오는 이성의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감정에 이끌려서 인간의 말초 신경이 요구하는 데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지도를 받고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 입니다(동굴의 비유, Allegory of the Cave). 플라톤은 제일 윗자리에다 이 두 계급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들까지도 스스로를 통치하는 철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지혜입니다. 그들은 이성적이어야만 이데아를 알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이란 ‘만물의 외형이 아니라 본질인 이데아’를 알고 터득한 사람입니다. 이데아의 세계를 내다보고 그 원리를 깨달아 안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 비로소 그 ‘폴리스는 이상적인 폴리테이아가 된다’는 주장 입니다.
플라톤은 이들 철학자들에게는 통치자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입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곧 의무성이다’라는 뜻입니다. 권력과 명성과 부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로마시대 이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게는 보통 국방을 위한 병역과 남보다 훨씬 더 높은 세금과 기부행위가 포함되었습니다만 플라톤은 이미 그리스에서부터 통치자들에게는 일체의 사유재산이나 그 어떠한 개인적인 것도 결코 허락되어서는 않된다고 했습니다.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정까지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국가의 것이요, 공동체의 것입니다. 결혼도 국가가 지정해서 해야 하고 자식도 우생학적인 검토를 받은 후 임신을 허락받아야 하고 또 그렇게 임신 후 태어난 애기들은 당연히 국가의 소유로써 출생과 동시에 부모를 떠나 공동체 속에서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국가의 통치계급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플라톤은 ‘폴리테이아’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양을 쳐서 젖과 고기와 가죽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진정한 양치기가 아니다. 선한 목자는 양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않된다. 그는 양 자체를 사랑해서 양을 쳐야한다. 마찬가지다. 철학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다. 그는 오직 올바름을 위해서 올바로 일을 해야 한다. 정의는 정의 자체로서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추구하는 정의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를 위해서 정의로워야한다’ 하여튼 플라톤은 ‘정의가 강 같이 흐르고 공의가 물 같이 흐르는 사회’를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는데 그 이상적 국가라는 이데아를 깨닫고 이성적 지배를 받는 철학자들이 아무 사심도 없고 사리사욕도 없이 통치하는 나라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 대한 비판적 평가
현대 정치철학에서는 플라톤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가 거의 없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정과 플라톤이 주장했던 철인정치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플라톤은 독재정치를 지지한 사람이며, 국가주의에 함몰된 사람이고, 비합리적 사고에 젖어든 철학자였다고 평가합니다. 그가 폴리테이아에서 주장했던 철인정치이념이란 근본적으로 비민주적 제국주의, 독재주의, 경쟁주의, 이기주의, 초인주의, 불평등주의, 반사회주의를 비롯한 각종 차별주의를 조장하고 그것들을 정당화시킨 논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그리스인 우월주의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신에게 세 가지 감사거리가 있다. 첫째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둘째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소크라테스 시대에 아테네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철인정치는 근대 서구 제국주의 이론을 뒷받침했으며 그의 남자와 그리스인 우월주의는 근대 각종 불평등주의와 특히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15세기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는 플라톤의 이론을 힘입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화하고 노예화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을 위시한 서구는 최고의 국가적 위상을 제국주의의 완성에 두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국민을 철학적 국민이라고 확신했으며 유태인들은 우생학적으로 역사에서 제거해 버려야 할 열등한 민족이라고 믿었습니다. 파시즘이 자행한 인종말살이나 생체실험은 사실 일본이나 나치에서 시작된 범죄행위가 아니라 미국과 구소련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가 그보다 오래 전부터 해오던 일들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나 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 시킨 역사를 보면서 그것을 그대로 본받아 실행해 본 것입니다. 미국 뉴욕주의 정식 이름이 Empire State이고 그곳에 세운 최고층 건물이 Empire State Building이라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플라톤의 이론에 따른 제국의 건설이 철인정치의 최고 목표라는 생각이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적 서구 제국주의의 본색이라는 비판은 그래서 제기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 선생님에게 물어볼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시민이 그 사회의 주인이 되며 시민들이 의사를 결정하는 민주정을 왜 반대한 것입니까?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한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닐까요? 철인통치란 독재정치이고 불평등한 정치체계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 세상에는 이성이 지배하고 그 어떠한 사라사욕도 없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 Questions & Comments
▷ Sharing(토론) –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가장 이상적 국가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요?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