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 (20)
나일강에 대하여
나일강의 발원지는 18세기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1858년 영국인 스피크는 빅토리아호 (湖)가 나일강의 수원일 것이라 추정하고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후 1870년대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호를 탐험한 끝에 백나일의 발원지대를 상세히 밝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1870년대에는 나일강의 모습이 거의 알려지게 되었다.
나일강에는 몇 개의 원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오지에 있는 것은 부룬디산맥에서 발원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카게라강이 되어 빅토리아호로 흘러든다. 빅토리아호부터는 빅토리아나일이라 하는데, 키오가호를 지나 머치슨폭포를 거쳐 앨버트호의 북단으로 들어간다. 앨버트호에서 수단 국경까지는 앨버트나일이라 하며, 여기까지의 나일강은 산악지대를 지나면서 머치슨폭포와 비슷한 경관을 이룬다.
나일강은 세계 4대 고대문명의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라는 세계사적 의의를 갖고 있으며, 현재도 이 강이 흐르고 있는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의 식수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사막화 등 기후변화와 나일강 주변 국가들의 인구증가 등으로 인해 수자원으로서 나일강의 중요성은 더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인접국들간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나일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고대 이집트문명이 지금의 하르툼 북쪽 메로웨를 거쳐 에티오피아에 영향을 준 통로가 되었다. 1816년경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모하메드 알리에 의해 근대적 치수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861년 카이로 북쪽에 댐이 완성됨으로써 거대한 삼각주 지대의 농산물 재배가 활발해졌다.
내륙수로로서의 개발은 19세기 말부터 1900년에 걸쳐, 부평초 때문에 항행할 수 없던 수단 남부의 습지대를 우회하기 위해 바르엘제라프강에 인공 수로를 연결하여 항행을 한 것이 시초이다.
나일강은 고대로부터 주기적 범람이 유명한 곳으로 20세기까지 범람은 계속되었으나 1970년 아스완하이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고, 이 다목적댐에 의하여 나세르호가 생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약 2만 4,300km2, 수단의 약 4,050km2의 농경지가 관개되었다. 나일강은 국제하천이므로 이집트ㆍ수단ㆍ에티오피아ㆍ우간다 사이에 물의 이용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수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용은 1954년 우간다에서 오웬폭포에 댐을 완성하고 수력발전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0년에는 구 (舊) 아스완 댐에서도 수력발전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의 규칙적인 범람은 배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염분으로 생긴 토양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농산물을 그리스와 로마 등지로 수출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일 강의 범람이라는 천혜의 조건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문명의 밑거름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높은 산들과 동아프리카의 큰 호수에서 발원하는 나일 강에는 봄과 여름에 정기적으로 비가 내린다. 그래서 매년 9월이면 강의 수위가 최고에 달해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홍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에 큰 피해를 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홍수와 달리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따라서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생태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인들은 메마르고 붉은빛을 띠는 사막과 달리 범람 지역을 비옥한 ‘검은 땅’이라 불렀다. 검은 땅은 다시 좁고 긴 지형을 이루고 있는 상 (上) 이집트와 광대한 삼각주를 이루고 있는 하 (下) 이집트로 구분하지만, 경작이 가능한 지역은 대부분 하이집트이다. 이집트의 농경은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을 적절히 이용하고, 그 물과 토양을 수로와 저수지 등을 통해 넓은 농토에 공급함으로써 가능했다.
발제 : 임현명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