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 (30)
율곡 이이 (栗谷 李珥) – 그의 생애 (生涯)와 사상 (思想)
개요
앞서 우리는 오죽헌 (烏竹軒)을 둘러보고 신사임당 (申師任堂)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신사임당이 낳은 이율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시대의 뛰어난 문인 중 하나이며 성리학자입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현룡이었고 율곡은 그의 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뛰어난 성리학자이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에만 치우치지 아니하고 실천적 현실 참여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에도 심혈을 기울인 선각자로써 우리나라 돈 5천원짜리 지폐에는 그의 화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율곡은 파벌상 西人의 정신적 구심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각양 서열을 철폐하고 국가와 사회의 제반 정책을 개혁해 나가는데 앞장섰던 비파벌적 이상을 위해 노력한 정치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정립한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을 바탕 삼아 성리학을 다시 정립해 나가는데 크게 공을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율곡로가 있어서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출생과 생애
조선 초중기의 유학자 율곡 이이는 1563년 (중종 31년) 외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 죽현동에 있는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번 한국여행길에 우리는 강릉을 방문하여 오죽헌을 둘러보고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자료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이었던 이원수이고 어머니는 조선 시대 최고로 소양이 깊고 뛰어난 여성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詩文과 書藝로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입니다. 신사임당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모범으로 한국의 화폐 5만원짜리에 초상화로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이원수는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신사임당과 결혼하여 3째 아들로 율곡을 낳았습니다. 이이는 3-4세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정도로 천재성을 지녔으며 13살 때 처음으로 진사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율곡은 6살 때 외가인 강릉을 떠나 친가가 있는 경기도 파주 율곡리로 이사를 했는데 <율곡>이라는 아호는 여기 <율곡리>에서 따온 것입니다. 16살 때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하였고 그에 따른 충격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佛名을 받고 불경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후 20세엔 결혼하였고 21세 (1564년, 명종 19년) 이후 29세 사이에 과거 시험에 만도 9번이나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된 후 예조와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사시, 행정, 외무고시를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셈이며 그동안 그는 대사간 (지금의 감사원장격)에 9번이나 임명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일평생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성에는 집도 한 채 없었는데 처가에서 사준 집 한 채까지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말년에는 선조에게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다가 반대파들과 충돌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핵 당하여 관직에 물러난 후 후학을 양성하다가 1584년 (선조 17년) 4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의 자운산에 있고 그 근처에는 <자운서원>이 있어서 율곡의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의 사상
1)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입니다. <성리학 性理學>은 12세기 중국 송나라 때, <주희 朱熹>가, 전부터 내려오던 유교의 근본 사상을 새롭게 정리하고 가다듬어 확립한 사상으로, 흔히 주희를 선생으로 칭하는 이름인 <朱子>를 따라서 <朱子學>이라고도 부릅니다. 유교는 대부분의 종교들, 특히 비슷한 시대 불교가 추구하는 죽음이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유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인간답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 것이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유교는 종교적 내세보다는 현세에서의 도덕적인 삶을 중시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착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 같은 존재일 뿐이다>라고 가르치면서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도덕적 생각과 도덕적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 각도에서 공자는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도덕적 스승입니다. 여기에서 불교와 유교는 마찰을 가져오고 대립을 일으키게 됩니다. 불교는 속세를 떠나, 인연을 끊고 해탈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교는 떠날 것이 아니라 머물러 함께 살면서 仁義禮智를 중심하여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임금과 신하를 중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공동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고려에서 이조시대로 바뀌면서, 유교는 점차 비현실적인 불교를 벗어나, 불교사상을 대신하여 유교사상을 국시로 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리학입니다. 性理學의 어원은 性卽理를 줄인 말입니다. 같은 말인 朱子學은 朱熹, 곧 朱子의 이름을 딴 것으로 모두 같은 내용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초기 성리학에 공을 세운 사람들 중에는 안향, 권부, 우탁, 이색, 정몽주 같은 이들이 있고 그 뒤를 이어서는 정도전, 맹사성, 정인지, 신숙주, 길재, 조광조, 서경덕, 이황, 이이 같은 분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하여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써 <인간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중시한 사회 도덕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율곡은 이기 일원론자입니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을 理와 氣로 양분하여 봅니다. <이기론, 理氣論>은 플라톤식의 이원론 (Dualis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데아, Idea>와 <현상, Phenomenon>을 구분하는 식입니다. 여기에서 理를 중시하는 것을 <主理說>이라하고 氣를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은 <主氣說>이라 합니다. 주리설은 이성, 원칙, 본질, 정신을 강조하고 주기설은 감성, 삶의 현실, 도덕을 중시합니다. 주리설은 이황이나 류성룡 같은 영남지방의 유생들이 주도하여 <영남학파>를 이루었으며, 주기설은 서경덕이나 이이 같은 사람들이 이끌어 감으로 호남지방을 중심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황과 이이 사이에는 끝까지 타협하지 못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理와 氣는 <하나인가>아니면 <둘인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퇴계는 理와 氣를 분리하여 둘로 보면서 그 중에서도 理를 강조했습니다. 理는 이상이요, 원리요, 원칙이며, 따라서 불변하는 것인데, 氣는 현상이요, 변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율곡은 그 둘은 사실 그렇게 나누어지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둘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퇴계는 <理氣二元論者>가 되었고 율곡은 <理氣一元論者>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황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는 플라톤이 된 셈이고, 이이는 땅을 내려다보며 손짓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된 셈입니다. 율곡은 이 이기일원론의 바탕 위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바뀌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물의 원리로서의 理는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원리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氣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릇은 변치 아니하는 그릇이지만 물은 그릇의 형태에 따라 얼마든지 그 모양이 바뀌어진다. 물 그 자체는 변치 아니하지만 물을 담는 그릇이 둥근 그릇이냐, 네모난 그릇이냐에 따라 그 형태는 변한다>고 본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에서 변하고 실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끊임없이 변한다. 理는 바꿀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지만, 氣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계속 바꿔 나가야 한다. 이상은 바꿀 수 없지만, 현실을 바꿀 수 있다. 理와 氣는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율곡의 견해였습니다.
율곡은 현상적으로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변하듯이 인간의 삶 역시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배부름과 배고픔이 교차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곡은 인간이 자연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도덕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필연적이지만 인간은 주어진 필연성을 거스릴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아무것이나 먹지는 않는다. 인간은 추워도 자식을 먼저 생각한다. 인간은 힘이 들어도 양보할 줄 안다. 인간은 재물이 들어와도 그 돈의 출처나 성격을 본다>고 말합니다.
퇴계는 四端 – 인간이 지닌 4가지 본성으로써 측은지심 (惻隱之心), 수오지심 (羞惡之心), 사양지심 (辭讓之心), 시비지심 (是非之心) – 과 七情 – 희로애구애오욕 (喜怒哀懼愛惡欲) -을 理와 氣로 나누어서 보고 四端은 근본적으로 七情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理이고 칠정은 氣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곡은 사단과 칠정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단칠정은 모두가 다같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율곡은 理와 氣를 하나로 묶어서 보고 四端과 七情을 동일한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理氣一元論자였습니다.
3) 율곡은 경장론자 (更張論者)이며 참여적 개혁론자입니다. 율곡에 의하면 자연이나 사회는 <시작 → 발전 → 절정 → 쇠퇴 → 멸망>의 과정을 거쳐가는데 인간에게는 이런 과정을 스스로 극복해 낼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란 비록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하더라도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요청되는 것이 바로 更張論입니다. <스스로 주어진 운명을 바꾸어 내려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고 또한 그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율곡은 이런 이론에 근거하여 각종 사회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삼강오륜과 같이 바꿀 수 없고,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토지제도의 개혁, 신분제도의 개혁, 과거제도의 개혁, 교육제도의 개혁, 세금제도의 개혁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또 바꾸어야할 사회제도이며 법률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율곡의 이런 사회개혁론은 훗날 유형원, 조헌, 유인석, 최익현,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를 배격하고 남녀 차별을 반대한 율곡은 <삶에 적용되는 학문만이 참된 학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4) 율곡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 사람입니다. 율곡은 제도와 법률 개혁의 최종적 목표는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미 조선 초기 부터 <사람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사회 개혁자였습니다. <임금이 있으려면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으려면 백성이 있어야 한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 그런데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밥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백성들이 먹고 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백성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그런 의지가 약한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사람 중심> <백성 중심>의 정치 지도자에 대한 이상적 꿈은 율곡이 처음으로 제창했다고 하겠습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