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 (31)
다산생가 (茶山生家) 둘러보기 / 정약용 (丁若鏞)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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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與猶堂)
강릉 오죽헌을 떠난 우리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동학혁명과 최제우, 최시형, 손병 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사상>을 공부하기 위하여 인사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회관을 방문할 계획인데 그에 앞서서 로중에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에 잠시 들리려고 합니다.
여유당은 다산이 18년 동안이나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그가 태어난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낸 곳입니다. 유여라는 당호는 老子에서 따온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與猶>에서 <與>란 <줄 여>로 <주고 베푸는 곳>이란 뜻이고, 猶는 <오히려 猶>로, <베풀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리라>는 다짐을 하는 자리라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이곳은 다산과 그의 4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았던 생가인 여유당 이외에도, 다산문학관, 사당, 동상, 실학박물관, 기념관, 수원성 건축시에 다산이 개발했던 거중기 그리고 묘소를 비롯하여 담장과 우물과 장독대 등 소소한 것들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4년전 우리 인문학여행팀이 전남 강진에서 돌아본 다산의 발자취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 茶山草堂 / 丁石 / 동암 / 서암 / 천일각 / 백련사 / 만덕산 / 윤중진의 묘와 비석 / 다산박물관 / 사의제 (사의제에서 먹었던 아욱국과 조밥).
다음에 옮겨오는 글은 4년전 우리 인문학교실이 처음으로 <인문학여행>을 했을 당시, 그리스와 터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유배지, 다산초당과 그 주변 견학을 위해서 준비하고 나누었던 글 중에서 <다산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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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생애
1762년 경기도 광주 (현재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정조 13년에 대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했습니다. 본래는 성리학자였으나 3째 형 정약종 (훗날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성도로 순교를 당했음)을 따라 천주교를 받아드렸으나 (세례명 – 요한),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를 떠났습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1801년 12살 먹은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어린 순조 대신에 정순대비 김 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완전히 노론 편에 서서 당시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발본색원하여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남인을 천주교와 결탁했다고 몰아치면서 1801년 그 유명한 신유사옥을 일으킵니다. 그 이전에 정조는 가톨릭에 대하여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펼쳤습니다만 왕권이 바뀌자 새로 세력을 잡은 노론 (벽파) 세력은 남인 (시파)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기 위해서 천주교를 이용했습니다. <천주교도들은 인륜을 무너트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邪學의 무리다. 그들은 금수와 같다.> 노론 세력에 휩싸인 정순왕후는 이런 하교를 통하여 조선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 강완숙 등 300여명을 죽였습니다. 한때 천주교에 깊이 심취하였으나 그 후 이념의 차이로 천주교를 떠났던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다행히 참수는 면했지만 노론세력에 밀려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8년이나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둘째 형 정약전도 그때 그와 함께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되었는데 그 역시도 실학자요, 성리학자였으나 그는 그곳에서 조선 최초의 해양학자요, 생물학자로써, 유명한 자산어보 (玆山魚譜)를 남기고 생을 마쳤습니다. 다산은 40살에 시작된 귀양살이를 57세까지 하다가 1818년에야 풀려났습니다. 그 후 다산은 강진의 귀양지에서 경기도 광주에 있는 그의 생가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다가 1836년, 7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이어진 황사영백서는 정약종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실상을 적어 당시 북경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그것이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사건입니다. 황사영의 백서는 현재 바티칸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으며, 충북 제천에 있는 베론선지에는 황사영이 머물던 토굴과 기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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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핵심 사상
1) 朱子學 만을 절대시하여 理氣論과 禮論에만 골몰하던 조선 후기, 18-19세기에 다산은 經世致用의 실학을 세우려고 노력한 인문학자였습니다. 다산은 조선 후기 공리공론에만 머물러 있던 성리학을 극복하여 백성들이 실제로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실질적이며 실용적인 각종 제도 개혁과 사회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다산에 앞선 실학자들로는 이율곡,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만, 다산은 이런 선대의 모든 실학 사상가들의 생각을 집대성했다고 하겠습니다.
2) 다산을 위시한 당시 실학자들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 계몽주의 사상과 그들의 합리주의, 자연과학, 종교의 다양성 등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형식적이며 공리공론에 치우친 유학을 거부하고 경세와 목민 같은 실제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다산은 일찍이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그 책임자로써 도르래를 발명하여 사용케 하는 등 새로운 업적을 이루어 내게 됩니다.
3) 다산은 유학의 병폐와 타락을 비판하고 성리학과 양반제도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어두웠던 시대 속에서 합리적이며 실제적인 新儒學을 세워 봉건사회의 모순과 계급의식을 극복하려고 심혈을 기울인 사상가라 하겠습니다.
4) 다산은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맹의 養氣論을 목민사상과 연결하였습니다. 다산은 특정한 사람을 성인으로 추대하거나 권위주의에 기울어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다산은 모든 인간은 그 누구든지 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忠孝 못지않게 윗사람 역시 아랫사람에게 慈愛를 베풀 줄 아는 상호존중을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다산은 사회적 약자들인 과부, 홀아비,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들에 대한 국가적 愛民思想을 제도화하도록 부르짖었습니다.
5) 특히 다산은 그의 전론 (田論)을 통하여 당시 인구의 35%를 넘어섰던 농노들에게도 토지를 분배토록 파격적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5천년 한국사에서 최초로 토지공개념을 주장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6) 다산의 사상은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세치용 (經世致用)입니다. 사회를 개혁하자는 주장인데 그 핵심은 토지제도의 개혁이었습니다. 둘째는 이용후생 (利用厚生)으로 외래문물,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농공상 모두를 제도와 기술로 새롭게 하여 富國安民을 이루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셋째는 실사구시 (實事求是)입니다. 허례와 허식을 버리고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고 실용주의적 접근을 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7) 다산은 조선 후기 최초로 Modernism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사대주의를 버리자! 공리공론을 버리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근대지향적 학풍을 조성하여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무실역행, 務實力行>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실제적인 열매를 맺도록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실증을 통한 합리성과 통합적 사고를 중시하고 민본사상과 민주사상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다산의 이런 생각들이 훗날 조선 말기에 이르러 개화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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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주요 저서
3대 저서로는 다음의 3권을 듭니다. 1) 목민심서 (牧民心書) –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지도자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기술한 책. 2) 흠흠신서 (欽欽新書) – 재판과 형벌의 공정성에 대하여 기술한 책. 3) 경세유표 (經世遺表) – 각종 세금 제도의 공평성과 과거 제도의 개혁을 비롯하여 국가경영에 대한 법치주의와 제도적 개혁에 대하여 기술한 책입니다. 그 외에 자신의 자서전적 성격의 글인 <자찬묘지명>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주역사전> <대학강의> <시경강의> 등 600여권이 있습니다. 정인보 선생은 아마 한자가 생긴 이후 한 사람이 쓴 책으로는 다산 보다 더 많은 책을 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타 창비에서 1991년 초판을 찍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박석무 선생의 다산에 대한 연구서 등이 있는데 그 중 다음 몇 권을 추천합니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유홍준, 창비, 1993년 / 다산 정약용 –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한길사, 2003년 / 경세유표, 이익성 옮김 / 정약용, 함규진 지음 / 조선의 의인들, 박석무 지음 /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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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