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 (32)
동학혁명과 천도교 사상
동학이란 무엇인가?
동학 (東學)은 1860년 (철종 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민족 종교이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서구에서 전파된 ‘서학 (천주교)’의 도래에 대한 대항으로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1905년 3대 교조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동학은 창도 당시 ‘한울 (하늘)’에 대한 공경인 경천사상과 ‘모든 사람이 자기 몸에 천주 (한울님)를 모시는 입신 (入信)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더 나아가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안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보국안민’ 사상이 바탕이 되어 세워진 나라 구제의 종교이다.
동학 창도와 수운 (水雲) 최제우
최제우는 경주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선말기의 어려운 나라 사정과 시대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자랐다. 그는 구제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득도하게 되었다고 그의 ‘동경대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37세 때에 한울님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고, 이때 그의 종교적 체험이 동학 창도의 기점이 되었고, 1905년 3대 교조 손병희의 천도교 선포에 이르는 동학 운동의 교리와 조직의 원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최제우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시운이 쇠하여 개벽을 대망하는 말세였다. 그는 이러한 시운에 대하여 “아국 운수 가련하다 (우리나라의 운수가 가련하다)”라고 하였고, 왕조 사회의 기강이 무너져 ‘천명을 돌보지 않는’ 경천의 가치관이 무너진 난세로 보았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는 ‘나쁜 질병이 가득 찬 혼탁한 세상’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심각한 사회· 경제적 위기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홍수· 지진· 역병등이 가중되어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때 전국적으로 농민폭동과 민란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불어 서양의 이양선 (異樣船)의 출현과 서학의 전래도 왕조 질서의 동요를 가져온 때였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제우의 서교에 대한 선이해가 동학 창도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학 사상 내용에는 유 (儒) · 불 (佛) · 선 (仙) 3교가 종합되어 있고, 그것을 통일하는 사상은 우리 민족의 경천사상과 나라와 백성의 구제를 위한 민족적 염원이 담겨있고 민간신앙적 요소가 널리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져 동학이 뻗어 나갈 수 있었다.
초기 동학의 내용
최제우의 동학 득도의 종교적 체험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만고없는 무극대도’를 맞은 것이 된다. 이 말은 그가 득도체험을 할 때 갑자기 몸과 마음이 떨리고 무슨 병인지 가늠할 수 없는 강령적 인격전환의 순간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가 하늘과 문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제우는 이 순간의 체험을 강령 (降靈)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 (氣化)가 있는’ 종교적 깨우침의 상태로서 강령체험에 의하여 수심정기 (守心正氣, 마음을 살피고 도의 바른 기운이 들어옴)의 새로운 도를 깨우쳤다고 생각하였다.
1861년부터 최제우는 득도체험을 기초로 하여, 한편으로 주문을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령의 방법을 만들어 시천주 (인간안에 내재하는 한울님을 잘 모셔야 한다)의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신도가 많이 모여들어 경주 일대의 민가에서는 13자 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 불망만사지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는 소리가 집집마다 들리고, 이렇게 하여 초기 동학교문이 형성되어져 갔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유도, 불도는 수천년의 운이 역시 다하였던가.” 라고 하며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대부 양반계층의 종교였던 유교의 사상 내용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무학의 백성들이 10여 년의 수학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고 입도한 그 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포교하여, 서민들에게도 군자의 인격을 갖출 수 있는 인격적 자존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서학에 대해서는 하늘의 계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도이므로 막강한 힘을 가졌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최제우는 천주나 천도가 서학의 독점일 수 없고 특히 동학이 서교와 다르다는 것을 뚜렷이 밝힐 필요를 느껴, 서교와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서학에서는 불교나 선사상에서 하늘에 빌어도 효험이 없다고 주장하여 주술적 요소를 배격하는 것을 비판하였으며, 천주학이 조상숭배를 배격하고 제사를 부정하는 것을 공격하였다. 또한 서교의 내세관을 비판하여 ‘죽어서 천당간다.’는 내세관에 대하여, 오직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이 기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동학의 서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비판은, 서양의 세력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위험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척사 (斥邪) 사상이다. 서양 문명과 서양 군함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곧 천하 분란의 문명적 위기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동학은 중화문화권인 천하 (天下)의 붕괴 속에서 내 나라를 단위로 한 ‘보국 (保國)’의 종교 이고, 안으로 ‘안민 (安民)’의 새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종교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동학교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금지시키고, 최제우는 추종자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64년 봄, 대구감영에서 혹세무민죄로 사형에 처하여졌다.
2대 교조 해월 (海月) 최시형과 동학
최제우가 순교한 뒤 동학의 정신과 교통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지하에 숨어 다니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등 교리를 확립하였고, 조직을 강화하여 동학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최시형은 그의 시대에 이르러 보편자인 ‘천주 (한울님)’는 더욱 세속화되어 ‘만인과 만물이 하늘이다.’ 라는 범천론적인 경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최시형은 쫓기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고, 멍석을 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면서 “우리의 일상 생활이 모두 ‘도’가 아닌 것이 없다” (日用 行事莫非道也)고 가르쳤다. 그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도를 일상 생활을 통하여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그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서도 “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이다” (海月神師法說), “어린아이도 하느님을 모셨으니 아이를 때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다” (海月神師法說)라고 하여, 새로운 여성관을 제시함과 동시에 어린이와 약자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부간의 화순함 (夫和婦順)이 도의 으뜸 종지라는 가르침을 통하여 남편과 부인의 관계를 지배 와 복종 관계가 아닌 서로 화순하기를 힘써야 하는 평등적 관계임을 선언하였다.

최시형은 봉건 왕조사회의 신분질서에서 오는 차별제도를 부정하고, ‘물물천 사사천 (모든 물건이 하늘이고, 모든 일들이 하늘이다)’의 사상을 통하여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인간존엄의 가르침을 사물들 에게까지 확대하였다.
스승 최제우는 “성 (誠) · 경 (敬) 두 자를 잘 지키라”는 가르침으로 하늘공경과 사람공경을 강조했는 데 최시형은 ‘경’의 대상을 ‘천’과 ‘인’에서 ‘만물’로까지 확대한 점은 최시형이 스승 최제우의 가르침보다 자연보호와 환경 윤리까지 앞서간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강조한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 등의 법설은 오늘날 환경운동의 헌장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특히, 최시형의 범천론은 양반사회에서 천시당했던 노동과, 일반 세속사 전반에 대하여 천주를 위하는 덕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에 대하여 그는 “사람이 그저 놀고 있으면 하늘님이 싫어하시니라.”고 한 점에서 세속적 근로와 직업을 신성화한 근대적 세속윤리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온갖 욕망을 자제하고 마음을 정 (定) 하면, 그것이 양천주가 되고, 양천주로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설파하여, 무지한 백성들도 양천주하면 성인이나 군자가 된다고 하는 최시형의 ‘향아설위 (向我設位)’의 주장은 그의 ‘인즉천’ 사상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최시형은 동학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종교적 포교와 동학 교리의 확대에만 전념하였지만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동학사상은 당시 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농민혁명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동학 농민혁명의 역사적 배경
고종 집권 초기 조선은 각종 사회혼란과 정부 권력자들의 무능과 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고부군 농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 이미 1882 년 (고종 19)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 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 (고종 31)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고종 31)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민씨 정권이 청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조선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화 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났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고종 31)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원인
1892년 (고종 29)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여 왔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 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조병갑은 오히려 전창혁에게 심한 매질을 가해 버렸고 전창혁은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고종 30)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 (고종 31)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다. 농민군은 관아를 습격 ·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자진 해산하였다. 이는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이것이 ‘제 1차 동학농민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그후 2차 봉기, 3차 봉기가 이어졌지만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에 의해 패배함으로 동학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동학 농민혁명의 평가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성격은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혁명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교도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성격이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3대 교조 의암 (義菴) 손병희와 천도교
손병희는 동학의 제 3대 교조이다. 손병희는 22세 때인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손병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때 통령 (統領)으로 북접 (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동학군이 패하면서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 처형되었고, 손병희는 은신하여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손병희는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제정세와 근대 문물을 살피는 가운데 문명 개화운동으로 대대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서 드러난 동학의 입장은 반봉건 (反封建) 반제국주의 (反帝國主義) 노선이었다. 농민적 입장에서 신분제와 지주제로 요약되는 봉건지배체제의 변혁을 꾀하고,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망명생활을 통해 국내 지배층과 외세를 모두 거부하는 동학의 노선이 시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손병희는 서양의 발달된 물질문명을 보면서, 그것을 ‘천지가 크게 변하는 창시 (創始)의 운 (運)’이라고 생각하였다. 문명화가 세계의 대세라는 것은 국외에 있는 그에게 너무나 확연한 사실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농민층의 ‘반란세력’이 아닌 시세를 아는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동학세력의 노선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내 집권세력으로부터 엄혹한 탄압을 받고 있던 처지에서 동학을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화파세력과 동학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일본을 끌어들여 정치적 입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문명개화 노선으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개화론으로의 전환을 위해 망명 개화파,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손병희는, 1902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권동진 (權東鎭), 오세창 (吳世昌) 등을 동학에 입교시켜 자신의 참모로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망명 개화파세력들을 끌어들인 손병희는 1903년 「삼전론 (三戰論)」을 발표하여 동학의 노선 전환을 공식화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전 (道戰), 재전 (財戰), 언전 (言戰) 이라는 세 가지 싸움인 삼전 (三戰)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원의 부원 (富源: 경제적 부를 생산할 수 있는 근원이나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재전, 외교관을 양성하여 각국과의 외교를 잘하자는 것이 언전이었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 대도주 (大道主) 명의로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천도교 창건을 알리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리고 손병희는 이듬해 1월 천도교인의 열렬 한 환영 속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손병희는 귀국 직후인 1906년 2월 10일 <천도교대헌 (天道敎大憲)>을 발포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대헌’에 따라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고문실 (顧問室) 현기사 (玄機司) 이문관 (理文觀) 전제관 (典制觀) 금융관 (金融觀) 서응관 (庶應觀) 등의 부서를 두었다. 교단 지도부는 도사 (道師) 육임 (六任), 연원대표인 교령(敎領)등으로 구성되었다.
1906년 3월 3일 전국적으로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하고, 연원대표인 교령을 교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교무를 담당하는 임명직 교구장과 천주에 대한 성념 (誠念)과 사회에 관한 교화 (敎化) 등을 담당하는 종신직 교령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교무행정 기구인 교구 (敎區)와 정신교화 기구인 연원제 (淵源制)에 입각한 이원적 조직체계가 완성되었다.
이후 손병희는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천도교리의 체계화에 노력하였다. 각종 교리서들이 ‘천도교중앙총부명의’로 편찬되었다. 특히 1907년 출간된 “대종정의 (大宗正義)”에서 인내천 (人乃天)을 천도교의 교의로 공식화하였다.
이후 손병희와 천도교단에서는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인내천 교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인내천은 한편에서 천도교 종교의식의 원천이 되어 온갖 도법 (道法)과 교화 (敎化)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천도교 정치사상의 근간이 되어 온갖 이론과 행동을 규정짓게 되었다.
즉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 (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포덕천하 (布德 天下: 덕을 천하에 편다는 뜻으로, 세상에 천도교를 널리 보급함을 이르는 말), 광제창생 (廣濟蒼生: 널리 백성을 구제함)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천도교 3·1운동 참여
손병희와 천도교단은 3·1 운동의 준비와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각 기관이나 연원을 대표한 핵심 지도자였던 손병희 권병덕 최린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 등 15명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처럼 손병희와 천도교단이 3.1운동의 준비와 확산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은 보국안민의 천도교리와도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손병희는 3월 1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상춘원에서 요양하던 손병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주경식 교수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