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024년 2월 개강모임 개최
린필드 목요모임은 2월 1일 실시, 리드컴 수요모임은 2월 14일에 개강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4년 린필드 목요모임을 2월 1일 오후 7시에 실시했으며, 리드컴 수요모임은 2월 14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린필드 목요모임은 지난 2월 1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홍길복 목사를 강사로 “고대 자연철학자들 이야기”란 주제로 대면과 비대면 모임을 병행해 가졌다.
이날 강사로 선 홍길복 목사는 서두에 “오늘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자연 철학자들의 생각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서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친구들 각자가 과거와 현재의 내 인생살이에서 나와 함께 해온 혹은 나를 이끌어 온 ‘나의 중심 개념’ 혹은 ‘내 인생의 핵심 개념’이 무엇이었던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라며 밀레토스 학파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 엘레아 학파 (파르메니데스, 제논,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맺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이 세운 공로는 크게 두 가지라고 봅니다. 첫째는 모든 나타난 자연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계가 아니라 모든 현상계의 뒤에 있는 본질계를 문제 삼습니다. 근본, 본질, 원인, 아르케에 대한 호기심, 질문, 탐구로 부터 철학은 출발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소박하기는 하지만 이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두 번째 공로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 이전까지 해왔던 신화나 종교적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이성, 논리, 과학으로 풀어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적 방법론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논리적 방법, 합리적 토론, 이성적 탐구를 정착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서양 철학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헬렌이즘 (Hellenism)이 전통적인 헤브라이즘 (Hebrism)과 함께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Hebrew Faith에 뿌리를 둔 유대-기독교 전통은 초월적, 종교적, 도덕적 방향으로 나가면서 신앙과 도덕 세계에 큰 기둥을 세웠습니다. 한편 Hellenistic Speculation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위에 서서 이성, 합리, 과학, 인문학을 선도하면서 자연과학, 정치 사회학을 발전시켰고 또한 인간의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신장시켰습니다.”라고 강연을 마무리 한 후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강연후 질의응답의 시간에는 “오늘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제기되었던 ‘실체 개념’과 그 개념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다른 이해와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하여 우주의 실체와 그 실체에 대한 개인의 변화와 불변에 대한 주장을 들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주제를 ‘내 인생에서 중심 개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변하는가 아니면 불변하는가?’라고 정하고 출발했습니다. 이제는 오늘 강좌를 시작할 때 말씀드린 대로 각자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중심 개념’ 혹은 ‘핵심적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인생을 통하여 변화되어 왔는지, 변화되어 왔다면 어떻게, 왜 변화되었는지를 말씀해 보심으로 우리 인문학 교실을 좀 더 풍성하게 가꾸어 가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반대로 왜 나는 하나, 혹은 몇 개의 중심 개념 개념을 붙잡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켜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서로의 생각을 sharing해 보기로 합시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대립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입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 인생의 ‘중심 개념’이 불분명했다면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나의 인생철학’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는 않을지요?”란 물음에 참석자들은 각자의 생각을 나눈 후 2024년 개강 모임을 마쳤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현재 린필드에서는 목요일 (1, 3주 목요일 오후 7시)에, 리드컴에서는 수요일 (2, 4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모임을 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한편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2024년 프로그램중에 독서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올 전반기와 후반기에 김태진 작가 (서울시립대학교 겸임교수, 기업인재연구소 대표이사)의 저서 ‘아트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카시오페아 출판, 2017년)과 ‘아트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 현대미술의 거장들에게서 혁신과 창조의 노하우를 배우다’ (카시오페아 출판, 2021년)를 나눌 예정이다.
다음 린필드 목요모임은 2024년 2월 15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고직순 대표 (First Thursday Forum 대표)를 강사로 ‘인문학의 필요성과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인다.
리드컴 수요모임은 2월 14일 (수) 오전 10시 명성교회에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를 강사로 “중세철학 이야기 1·2 : ‘알아야 믿는다’와 ‘믿으면 알게 된다’ 사이에서”란 주제로 모인다.
○ 시드니인문학교실 2월 모임 안내
– 린필드 목요모임
.일시: 2월 1일과 15일 (목) 오후 7~9시
2월 1일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 고대 자연철학자들 이야기 1·2
2월 15일 강사 고직순 대표 (First Thursday Forum 대표) – 인문학의 필요성과 언론의 역할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임)
.문의: 주경식 (0401 017 989, [email protected]) / 임운규 (0425 050 013, [email protected])
– 리드컴 수요모임
.일시: 2월 14일과 28일 (수) 오전 10~12시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주제: 중세철학 이야기 1·2 : ‘알아야 믿는다’와 ‘믿으면 알게 된다’ 사이에서
.문의: 천옥영 0422 712 235
[시드니인문학교실 2월 1일자 강의 전문]
고대 자연철학자들 이야기
내 인생의 중심개념은 무엇인가? 그건 변하는가, 불변하는가?
이제부터는 고대 서양 철학의 역사를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자연 철학자들의 생각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서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친구들 각자가 과거와 현재의 내 인생살이에서 나와 함께 해온 혹은 나를 이끌어 온 ‘나의 중심 개념’ 혹은 ‘내 인생의 핵심 개념’이 무엇이었던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 생명, 죽음, 인간, 부모, 자식, 남편, 아내, 결혼, 이혼, 가정, 산다는 것, 인간관계, 우정, 신뢰, 배신, 세계, 우주, 국가, 민족, 정부, 정치, 경제, 정보, 과학, 돈, 건강, 학문, 학위, 교육, 책, 음악, 미술, 스포츠, 개인, 공동체, 종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 신, 진리, 사랑, 섹스, 자유, 주체, 정체성, 영원, 통일, 예수, 부처, 구원, 해탈, 득도, 선과 악, 고통, 비극, 모순 – 이외에도 내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중심 개념들, 핵심 개념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나는 오늘 이날까지 이것을 위해서 혹은 이것에 이끌리어서 살아왔다’고 생각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한번 검토해 보시고 오늘 강좌 말미에서는 허심탄회하게 그것들을 내놓고 주장이든, 반성이든,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핵심 개념이 ‘돈’이라고 말하면 좀 수준이 낮아지고 ‘경제’라고 표현하면 고상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색스’라고 말하면 천해지고 ‘젠더’(Gender)라고 말하면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지난날의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무엇이었던 지를 함께 나누면서 ‘내 인생의 중심 개념’을 재검토해 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저는 다음 3개의 그룹을 중심하여 이야기를 엮어가려고 합니다. 첫째는 ‘밀레토스 학파’이고, 둘째는 ‘피타고라스 학파’이며, 마지막은 ‘엘레아 학파’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려고 합니다.
처음 밀레토스 학파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우주의 본질, 핵심, 아르케는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초기에는 탈레스를 비롯한 3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후에도 여러 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제각기 ‘이것이 우주의 아르케요, 본질이요,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우주의 아르케가 ‘무엇이냐?’고 하는데 촛점을 두지않고 도대체 그것들은 ‘어떻게’ 피차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가느냐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무엇’(what)에서 ‘어떻게(how)로 토픽이 옮겨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엘레아 학파는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주의 아르케는 변하느냐 불변하느냐?’ 개인과 역사에서 인간들이 추구해 온 온갖 본질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불변하는 실체인지 아니면 가변적인 것들인지를 묻습니다.
밀레토스 학파
지난 강의에서 살펴 본 기원전 6세기 경 그리스 동편 에게 바다 건너편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몇몇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자연계에 대한 소박한 호기심과 의문이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의구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신화적 대답’에 만족해하거나 아니면 불만족스러워도 더 이상 ‘의심은 가도 질문은 못하는 상태’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화적 사고에 반기를 들고 합리적 대답을 시도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의 질문은 한마디로 ‘이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우주와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여기서 말하는 ‘本質’(Arche, Essence, Substance)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이 현상계(現象界)의 이면세계(裏面世界)를 물어본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본질적 질문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처음으로 ‘합리적 대답’을 시도했습니다. 운명론적 대답이나 종교적 및 신화적 설명을 벗어나 소박하기는 하지만 ‘이성적 설명’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Thales, Anaximandros, Anaximenes인데 이들은 모두 소아시아 지역의 이오니아(Ionia) 주에 있던 도시국가 밀레토스(Miletus) 출신이었기 때문에 흔히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 탈레스(Thales of Miletus, 624–546? B.C) – 현재 탈레스 자신의 글이나 저서가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탈레스에 대해서 아는 것들은 거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해 주고 있는 제2차 자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자료들은 대부분 그들 자신이 남겨놓은 1차 자료가 아니라 그들의 제자들이나 후세의 인물들이 전해주고 있는 제2, 제3의 자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전해주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정보들은 바울을 비롯하여 복음서의 편집자들이 남겨놓은 것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게 3개의 ‘아버지’ 호칭을 붙였습니다. (1) 기하학의 아버지, (2) 천문학의 아버지, (3)철학의 아버지입니다. / 기하학의 아버지로써 탈레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길이를 측정해내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사람이나 막대기의 실제 키(높이)와 그것의 그림자가 똑같아지는 시간에 이집트의 피라밋의 그림자를 재어서 피라밋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발견해 냈습니다. / 천문학의 아버지로써 탈레스는 처음으로 하늘의 별들을 관측해 내는 망원경을 발명해 냈습니다. 본래 그는 올리브 농장을 경영하면서 부를 많이 축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는 풍년이 들고 또 다른 해에는 흉년이 드는 것을 보면서 이는 하늘의 별자리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미리부터 별자리의 이동을 관측하면 흉년을 대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원시적이지만 천체 망원경을 만들어서 별들의 움직임을 더 자세히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든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다가 물웅덩이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녀 트라키아와 나눈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는 585년 5월 28일에 일어난 개기일식을 미리 예측한 사람으로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런 것보다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로써 가장 돋보입니다. 그는 최초의 논리학자였다고 불리웁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결혼을 하라고 하자 ‘아직은 결혼 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하다가 몇년 후 어머니가 다시 결혼하라고 하자 이번에는 ‘아 결혼 할 때가 어느덧 지나가 버렸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상대방의 논리를 비껴가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신중하고 이성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신화적 이론을 만들어 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탈레스를 모든 서양철학의 아버지 자리에 앉게 해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역사상 최초로 ‘모든 사물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해, 달, 별, 바람, 구름, 산, 꽃, 나무, 강, 바다, 짐승, 벌레, 인간, 인간의 말, 행동, 생각 – 이 모든 것들의 근본 아르케 (Arche)는 무엇인가? (arche란 처음, 우두머리, 근원, 근본을 뜻하는 그리스 말로써 라틴어로는 principium, 영어로는 principle로 표기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런 것이 되도록 만드는 하나의 그 어떤 원리, 원칙, 아르케는 무엇인가?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과 바탕에 대한 ‘최초의 질문자’였다는 점에서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Good Question is better than wrong (stupid, general) answer. 질문이 대답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값집니다 (질문없는 교육, 질문을 차단하는 사회와 종교). 둘째로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가 되게 한 것은 그 자신이 던진 그 질문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성적’ 혹은 ‘과학적’ 대답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의 아르케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는 ‘물’ (Water)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사실 그가 던진 질문에 비해서 좀 엉뚱하거나 수준이 낮아 보입니다. 우주와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의도적 무신론자이거나 물질주의자의 행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탈레스에 의하면 우주 만물의 아르케, 우주의 본질이 되기 위해서는 (1) 일체의 모든 것들이 거기에서부터 나올 수 있어야 하고, (2) 그것은 생명을 유지 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어야 하고, (3) 동시에 그것은 운동이 가능한 것, 즉 유동성을 지닌 것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4) 그것은 언제든지 다른 형태로 변화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는 네 가지 전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제에 따라서 볼 때 ‘물’이야말로 우주와 만물의 아르케가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1) 만물은 물에서 부터 생성이 되고, (2) 물은 생명을 유지 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며, (3) 물은 항상 쉬지 않고 요동하며 움직일 뿐만 아니라, (4) 동시에 물은 언제나 수많은 다른 모습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탈레스를 지지해 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상에 물기가 없는 존재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주의 온갖 생명체들은 물론 무생물까지도 물로 만들어졌거나 물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물기로 그 생명과 존재를 계속해서 유지합니다. 물은 액체, 고체, 기체로 자유자재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갑니다. 물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결코 한 곳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탈레스 이전의 많은 신화들 역시 지구를 둘러싸고 적시는 큰 강물이 있는데 그 강의 이름은 ‘오키아노스’ (Okeanos)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탈레스는 이런 신화적 스토리를 원용하여 우주의 본질을 물이라고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참고: (1) 히브리 성서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 바람, 기운은 수면 위에서 운행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 벌써 물 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나님은 과연 無에서 有 (ex nihilo)를 만드신 것일까요? 기독교 조직신학이 의도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창세기 2장 10절 이하에 나오는 ‘에덴에서 흘러 나오는’ 4개의 강은 우주의 생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2) 여기에서 우리는 老子에 나오는 ‘상선약수’ (上善若水)를 생각해 봅시다. 노자의 도덕경 (道德經)은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편은 ‘道’라는 글자로 시작되고 하편은 ‘德’이라는 단어로 시작함으로 그 두 글자를 합하여 ‘道德經’이라 합니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최고의 선, 가장 높은 진리와 도덕율은 물과 같은 법이라고 합니다. 노자의 중심 개념은 한 마디로 ‘물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道無有水’라고 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도를 나타내는 최상의 것은 물’이라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도는 곧 물이요 물이 곧 도입니다’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까운 것이다. – 물은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잘난 척하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탈레스 철학의 두 번째 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 속에는 신들이 가득차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신관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늘에는 하늘 신, 땅에는 땅의 신, 바다에는 바다 신, 산에는 산 신, 나무에는 나무 신 등등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는 그것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탈레스에 의하면 신 없는 물질은 존재 자체가 가능하질 못합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탈레스의 이런 범신론적 사상을 앞에서 말한 ‘우주 만물의 아르케는 물’이라는 생각과 연결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물기없는 물질도 없고’ ‘신이 없는 물질도 없으므로’ 탈레스에게 있어서 ‘물은 곧 신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물은 곧 신이고 신은 곧 물이다! 이것이 탈레스를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의 일원론 (一元論)을 주장한 일원론자 (一元論者)라고 보게 한 것입니다. 그는 물질과 정신, 현상과 이상, 세계와 하나님을 둘로 나누어서 보지 않고 묶어서 하나로 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따라서 탈레스는 물을 신성하고 거룩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물을 신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강 = 물 = 신 = 거룩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세상 모든 만물을 속되고 거룩한 것으로 나누어서 보는 이원론의 폐해를 극복하고 일체 우주 만물을 신성시하여 서로 하나가 되게 하려는 일원론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숙고해 보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합니다).
· 아낙시만드로스 (Anaximandros, 610–546 B.C) – 탈레스의 제자요, 같은 밀레토스 출신으로 이 학파의 두 번째 인물인 아낙시만드로스는 그의 스승 탈레스를 넘어섰습니다. 그는 우주 만물의 아르케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 말로는 ‘아페이론 ’(apeiron), 즉 무한한 것, 무규정자, 무한자가 바로 우주와 만물의 본질이요, 근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이렇듯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끝이 없고 영원하고 동시에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써 ‘아페이론’을 말한 것은 아마도 탈레스가 만물의 아르케를 ‘물’이라고 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철학이 지닌 물질주의적 요소를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만물의 아르케를 ‘정신화’한 형태로 ‘아페이론’을 주장함으로 우주의 근원에는 일종의 종교적이며 신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 아낙시메네스 (Anaximenes, 585-528 B.C) –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였던 아낙시메네스는 우주 만물의 아르케를 ‘공기’(air) 혹은 ‘숨결’(breath)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스승인 아낙시만드로스가 주장한 ‘아페이론’이란 너무 지나치게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라고 보고 그 ‘무한한 것’이 구체화될 때는 공기나 숨결로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기와 숨결은 만물에다 생명과 영혼을 부여하고 뭉쳤다가 흩어짐을 반복함으로 온갖 만물들을 만들어내게 된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공기의 수축과 팽창이야말로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고 이를 통하여 바람, 물, 땅, 돌, 흙, 불이 만들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숨결, 영, ruah를 불어넣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낙시메네스의 생각과 유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성서나 고대의 문헌들은 어떤 면에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유사한 설명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초기 밀레토스 학파와는 시간적, 공간적 차이가 있는 몇몇 다른 실체론자들의 이름과 사상들을 기술해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철학사에서는 순서상 약간씩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지만 이는 그들의 사상이 뒤 떨어져서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연대기적 이유 때문입니다.
(1) 엠페도클레스 (Empedokles, 495-435 B.C) – 시칠리아 출생. 정치인, 웅변가, 의사, 시인, 철학자, 종교인. 그는 헤라클레토스의 ‘만물은 유전한다’는 사상과 파르메니데스의 ‘만물은 불변한다’는 두 극단적 주장을 종합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변화를 인정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불변의 실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만상의 뿌리요, 다른 것들로부터 만들어지거나 파생되지 아니하고 변하지 아니하는 아르케로써 흙, 공기, 불, 물의 4가지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4가지 원소들이 결합과 분리를 통하여 만물이 변하고 차별성을 만들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우주의 4원소들이 피차 사랑하거나 미워함으로 때로는 조화를 만들어내고 혹은 대립과 갈등을 만들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여튼 엠페도클레스는 역사상 최초의 다원론자 (多元論者)가 되었습니다.
(2)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 500–428 B.C) – 소아시아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활동. 유명한 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친구이자 스승.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그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론을 넘어서 ‘이 세상은 수도 없이 많은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소들을 ‘씨’ 혹은 ‘종자’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리스 말로는 ‘스페르마타’ (spermata)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엠페도클레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원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낙사고라스는 이 우주에 산재되어 있는 그 수많은 스페르마타, 즉 소립자들은 그냥 무질서하게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 손에 있는 수많은 스페르마타의 질서를 잡아주는 것을 ‘누스’(nous)라고 불렀습니다. 우주 만물의 근원이요, 질서의 중심이요, 통제의 핵심으로써 통치자, 균형자, 조정자로 명명된 이 ‘누스’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종의 ‘정신’ 혹은 ‘이성’ ‘로고스입니다 (아마도 훗날 헤겔이 생각했던 ‘절대정신’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만들어 내는 근원적 힘이었습니다.
(3) 데모크리토스 (Demokritos, 460-370 B.C) – 트라키아의 압델라 출신의 물리학자, 수학자, 형이상학자요, 마지막 자연 철학자라고 불리웁니다. 그는 우주 만물의 아르케를 ‘원자’ (atom)이라고 보았습니다. 아톰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한의 단위로써 물리적 소립자를 말합니다. 때문에 원자는 소멸되지도 않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만물을 형성하고 있는 단 하나의 근원적인 것으로 원자론을 주창함으로 탈레스를 이은 일원론자 입니다.
유치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초기 그리스 철학의 문을 연 이들 밀레토스 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이 제기했던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그들은 ‘이 세계를 이렇게 지탱하고 보존해 주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무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에 앞서서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이어오는 것이며 동시에 지금 존재하는 것 역시 언젠가는 소멸하여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그의 존재를 지속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다양하고 다양해야만 할뿐 아니라 모두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은 변화무상하게 보이는 이 우주를 보는 다양한 안목을 만들어 내는데 공헌한 사람들입니다. 왜 세상은 이렇게도 다양할까? 그리고 이 다양성의 근거는 무엇이고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많은 생각을 하게해 줍니다. 둘째 핵심은 밀레토스 학파의 후계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에 앞선 스승들의 논리와 주장을 반박함으로 정신사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점입니다. 탈레스는 ‘물’이라고 했지만 아낙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는 다시 ‘공기’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철학사는 제자가 선생의 이론을 뒤엎는 데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뒤에 오는 이가 앞서 간 이의 주장을 수용만 하고 그것을 뒤집지 못한다면 역사는 결코 발전하지 못하고 반복만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는 반역이 아니라 반성이고 동시에 협력과 발전입니다.
피타고라스 학파
비슷한 시기에 밀레토스 학파 다음으로 나타난 그룹은 피타고라스 학파입니다. Pythagoras (582–497 B.C)는 사모스섬에서 태어났지만 정치적 폭정을 피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집단을 흔히 ‘피타고라스 학파’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 모임은 일종의 종교적 신비주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피타고라스는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영혼은 금욕으로 정화되며 환생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피타고라스 공동체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모든 관계는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 우리에게 있어서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로서 보다는 기하학자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임의의 직각 삼각형에서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는 다른 두 변을 각기하는 두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과 같다’를 지금도 기억하시는지요? 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에서 응용되어 나온 수학과 기하학의 공식은 34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수학의 원리가 만물의 원리’입니다. 그는 數 (number)를 우주 만물의 아르케라고 보았습니다. 우주는 count가 가능한 숫자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에는 수학자도 철학자요, 기하학자도 철학자요, 천문학자도 철학자요, 음악가도 철학자이긴 했지만 피타고라스는 바로 여기에서 수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로 변신을 합니다. 그런데 우주 만물의 아르케를 ‘수’라고 보았던 피타고라스는 ‘그 arche가 무엇이냐?’하는 ‘무엇’ (what?)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수’가 ‘어떻게’ (how)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는데다가 촛점을 두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우주와 만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數’란 1,2,3,4… 하는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모든 수의 ‘이상적인 비율과 조합’ (The Ideal Rate and Harmony of Number)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는 최초로 홀수와 짝수를 생각해 냈고 원과 삼각형과 사각형을 그려내면서 수의 구분과 대립을 고안해 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남자와 여자, 밝음과 어두움, 여름과 겨울, 낮과 밤, 선과 악의 비율과 조화에 따라서 다양한 만물과 만상이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데 피타고라스는 ‘건강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경우 그것은 찬 것과 뜨거운 것, 건조한 것과 습한 것, 넘치는 것과 모자란 것, 운동과 정지, 배부른 상태와 배고픈 상태의 균형과 조화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동양의학의 기본과도 일치가 된다고 봅니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이란 1,3,5,7,9와 2,4,6,8,0의 수학적 배분과 균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하여 피타고라스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우칠 때가 되었습니다. ‘수학은 영혼의 정화와 그 불변성을 보증한다’ ‘우리는 수학을 연구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정화 시킬 수 있다’하는 말이 주는 철학적 해석은 인생과 온갖 우주 만상은 조화, 균형, 비율 (Harmony, Balance and Rate)로 만들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극단적 양극화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없는 이들, 甲과 乙들, 정규직과 비정규직들, 남자와 여자, 1세계와 3세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어지면 죽음이 오고 전쟁이 일어나고 질병이 창궐해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정치와 경제가 무너져 내리고 종교가 분열되고 그만 모든 것이 망가지고 부서집니다. 특별히 종교인들이 더 권위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독선적인 것은 우주와 만상의 균형과 조화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레아 학파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세 번째로 살펴 볼 그룹은 ‘엘레아 학파’입니다. 엘레아 (Elea)는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이 학파의 중심 인물인 파르메니데스가 태어나서 활동한 곳입니다. 여기에는 주로 그리스로 부터 온 정치적 망명객들이 모여서 활동했습니다.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들 중에서는 다음 두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515-450 B.C) – 그의 철학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주 만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만약 이 세계에 그 어떤 아르케가 실재로 존재한다면 (1)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2) 불변하는 것이어야 한다. 변하는 것을 아르케라고 부를 수는 없다. (3) 분리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르케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전제 아래서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만물은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화란 실로 인간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착각이요, 환상 이라는 겁니다. ‘해 아래 새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기존하던 것들이 다만 자리를 바꾸거나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우주 만물의 아르케는 오직 ‘하나’ 곧 一者 (The One)이라고 주창했습니다.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었던 것이 사라져 없어 질 수도 없는 오직 그 ‘하나’가 바로 만물의 아르케라는 입장입니다. 그에 의하면 ‘있는 것이 없어지거나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은 모순입니다. 있는 것은 그냥 있을 뿐이고 없는 것은 그냥 없을 뿐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른 존재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 위치를 변경하는 것일 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는 有가 無에서부터 나온다거나 존재가 비존재로부터 파생된다고 하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했습니다. 無에서는 당연히 無가 나와야 하고 有에서는 당연히 有가 나오는 것이 맞다는 입장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결함과 모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간들은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지식의 함정에 빠져서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마치 모든 것이 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겁니다. ‘감각적 지식은 참된 것이 아니다.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지식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세상이란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습관이 너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못하도록 해라. 습관을 경계하라. 무슨 일이든 절대로 습관화 하지 말고 비습관화 하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합니다 (참고: 老子의 道德經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장철학에서의 道란 우주와 만물의 아르케입니다. 아낙사고라스가 말하는 누스나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말씀이나 노자가 말하는 도란 본디 하나로써 우주 만물의 본질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변하는 것,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 제논 (Zenon, 495-430 B.C) – 에레아 학파의 제논은 동명이인인 스토아 학파의 제논과 다른 사람입니다.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 그의 철학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일체의 多數와 運動을 부인했습니다. 어떤 것이 아르케가 되려면 그것은 ‘하나’ 곧 一者일 수밖에 없고 동시에 정지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제논은 여러 개가 되거나 움직이는 것은 아르케가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세상만사는 많은 것처럼 보여도 실은 하나이고 만상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하나일 뿐’이며 이는 우리의 불완전한 감각이 만들어 내는 착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세상만사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지되어 있고 이것 역시 우리 인간의 감각이 불완전한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실례로 든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1)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아킬레스는 결코 앞지를 수 없다. 아무리 거북이는 느리고 아킬레스는 빠르다고 해도 일단 거북이가 먼저 출발을 하거나, 아니면 거북이를 앞에다 세우고 출발하게 되면 아킬레스는 죽을 때까지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무엇을 앞지르려고 하면 반드시 앞서 간 자가 일단 한번은 통과한 지점을 지나가야만 한다. 거북이가 아직 통과하지도 아니한 지점을 자기는 발이 빠르다고 해서 그냥 통과하게 되면 그것은 앞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아직 가지도 않은 지점을 자기 혼자서 달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앞지르는 행위는 뒤에 가는 자가 앞서가는 자가 일단은 한번 통과한 지점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거북이를 앞세워 놓으면 아킬레스는 계속해서 거북이의 뒤를 따라가게 될 뿐이지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없게 된다. 만약 아킬레스가 발이 빠르다고 해서 거북이를 앞지르게 된다면 그건 앞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서 달리는 일인 경기이지 시합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2) 쏘아놓은 화살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 된 것이다. 우리가 화살이 움직인다고 보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감각이 만들어 준 것이다. 보라! 모든 화살은 매 순간마다 정지된 상태이다. 우리는 정지된 상태의 화살을 보면서도 움직이는 화살을 보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정지 상태의 화살의 순간적 연속을 보면서 그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지된 상태는 아무리 더해도 여전히 정지일 뿐이다. ‘정지된 상태의 연속적 통합을 운동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분활된 공간 속에서의 개별적 모습은 정지 상태의 통합이지 운동은 아니다’ (물론 모든 움직이는 물체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보면 정지된 상태가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는 무비 카메라는 통하여 실제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경험합니다. 제논의 논리에는 어떤 모순과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보십니까? 공간 개념과 시간 개념의 통일성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현대의 기술과학적 도전이 아니라 하더라도 파르메니데스나 제논 시대에 이미 이에 대한 철학적 이론이 제기되었습니다.
·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 544–483 B.C) – 소아시아의 에페수스에서 태어남. 부유한 귀족 가문이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고독한 철학자로 평생을 삶. 아무 스승도 없이 혼자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전개함. 헤라클레이토스는 앞에서 본 밀레토스 학파나 엘레아 학파와는 아주 반대의 생각을 지닌 자연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떤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우주의 아르케, 만물의 본질에 대하여 매우 독창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에서 처음으로 ‘로고스’ (Logos)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아르케는 ‘로고스’였습니다. 그는 이 ‘로고스’를 우주와 만물의 보편 법칙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성’ 혹은 ‘논리’로 번역되는 이 ‘로고스’는 그후 서양 철학은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많이 아는 것을 거부하고 깊이 아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박학다식 (博學多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당시 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잡다하게 떠들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었습니다. 철학자는 알아야 할 것만을 아는 사람들이지 이것저것을 다 알아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박식은 결코 지성인을 만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많이 알려고 애쓰지 말아라. 하나를 확실하게 알려고 노력해라’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핵심은 ‘우주와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Panta rei!)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는 ‘생성과 변화의 철학자’입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만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만물은 쉬임없이 변화하고 유전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이나 앞으로 흘러올 물이 모두 물이기는 해도 그건 절대로 같은 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떠오르는 태양과 내일 뜨는 태양은 절대로 동일한 해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사실 홍길복이라는 사람도 10대, 20대, 30대, 그리고 60대, 70대가 동일한 홍길복은 아닙니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하나이지만 다른 겁니다. 불은 변하여 물이 되고, 물은 변하여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불이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대립하고 대결하며 투쟁합니다. 전체와 부분, 화음과 불협, 삶과 죽음, 수면과 깨어남, 젊음과 늙음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전자는 다시 후자가 되고 후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전자가 되는 것이 만물의 변화의 법칙이고 순환의 원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두 변화의 과정입니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고 왕이다’ 대립과 대결, 전쟁과 타협을 통해서 세상은 질서를 만들게 되고 새롭게 변화해 간다는 이론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런 사상이 훗날 토마스 홉스를 비롯한 여러 정치 철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본대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하나의 실체에 대하여 전혀 다른 입장을 갖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흔히 ‘대립되는 쌍둥이 철학자’로 불리곤 합니다. 하나의 본질에 대하여 서로 다른 주장과 입장을 제기한다는 것은 인류의 정신사에 대단한 유익을 준다고 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를 대표로 하는 ‘실체 불변의 원칙’과 헤라클레이토스 사상의 핵심인 ‘실체 변화의 원칙’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맺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이 세운 공로는 크게 두 가지라고 봅니다. 첫째는 모든 나타난 자연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계가 아니라 모든 현상계의 뒤에 있는 본질계를 문제 삼습니다. 근본, 본질, 원인, 아르케에 대한 호기심, 질문, 탐구로 부터 철학은 출발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소박하기는 하지만 이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두 번째 공로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 이전까지 해왔던 신화나 종교적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이성, 논리, 과학으로 풀어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적 방법론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논리적 방법, 합리적 토론, 이성적 탐구를 정착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서양 철학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헬렌이즘 (Hellenism)이 전통적인 헤브라이즘 (Hebrism)과 함께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Hebrew Faith에 뿌리를 둔 유대-기독교 전통은 초월적, 종교적, 도덕적 방향으로 나가면서 신앙과 도덕 세계에 큰 기둥을 세웠습니다. 한편 Hellenistic Speculation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위에 서서 이성, 합리, 과학, 인문학을 선도하면서 자연과학, 정치 사회학을 발전시켰고 또한 인간의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신장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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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제기되었던 ‘실체 개념’과 그 개념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다른 이해와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하여 우주의 실체와 그 실체에 대한 개인의 변화와 불변에 대한 주장을 들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주제를 ‘내 인생에서 중심 개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변하는가 아니면 불변하는가?’라고 정하고 출발했습니다. 이제는 오늘 강좌를 시작할 때 말씀드린 대로 각자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중심 개념’ 혹은 ‘핵심적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인생을 통하여 변화되어 왔는지, 변화되어 왔다면 어떻게, 왜 변화되었는지를 말씀해 보심으로 우리 인문학 교실을 좀 더 풍성하게 가꾸어 가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반대로 왜 나는 하나, 혹은 몇 개의 중심 개념 개념을 붙잡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켜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서로의 생각을 sharing해 보기로 합시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대립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입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 인생의 ‘중심 개념’이 불분명했다면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나의 인생철학’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는 않을지요?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