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024년 4월 모임 실시 … 리드컴 모임은 중간방학
린필드 5월 앞모임은 독서모임으로 [4월 4일 강의전문 포함]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4년 4월 모임을 린필드와 리드컴에서 실시했다.
린필드 목요모임은 지난 4월 3일과 18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를 강사로 “소피스트들 이야기 : 우기지마라 네말도 맞고 내말도 맞다”, 이효정 작사 (소설가, 원로작가)를 강사로 ‘인생과 문학과 인문학’ 이라는 주제로 실시했다.
리드컴 수요모임은 4월 10일 (수) 오전 10시 명성교회에서 홍길복 목사를 주강사로 모임을 가진후 텀방학을 시작했다.
4월 3일 강사로 선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는 강연 서두에 “기원전 6세기 경 지중해 북쪽에 있던 밀레토스를 중심하여 일련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의 본질 (Arche)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 드디어 사람들은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소박한 의문들에 대하여 ‘신화적 혹은 종교적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 보는 이성적 단계로 들어섰다는 데 있습니다.”라며 ‘소피스트 출현의 시대적 배경’ ‘대표적 소피스트들’를 언급한 후 “나는 절대주의적 사고를 지지하는 편인가? 아니면 상대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편인가? 아니면 회의주의나 실용주의에 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라고 물음후 질의 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4월 18일 초청강사로 이효정 작가 (소설가, 원로작가)는 ‘인생과 문학과 인문학’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이효정 작가는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고스란히 목도하고 경험하며 글쓰기가 생에 큰 의지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효정 작가는 시드니 문인들의 문학스승으로 불리며 노년에도 회원들을 지도하며 최근에도 동인지를 발간한바 있다. 동인들의 모임 시드니한인작가회는 2023년 7월부로 단체명을 ‘이효정문학회’로 개명하기도 했다.
이효정 작가는 제주신문에 장편소설 ‘환절기’연재 (1971~72), 한국 MBC 문화방송 창사 20주년 기념 TV 드라마 원작 중편소설 공모에 ‘억새의 밀어’당선 (1981년), MBC 베스트 극장에 방영 (1983), 한국수필문학상 (2000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주관), 해외한국문학상 수상 (2005년,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주관), 교포신문에 매주 ‘이효정이 사는 세상’게재 (1994년 6월 ~ 2005년 11월), 계간 <문학시대>지에 소설 13편 게재 (2009 ~ 2016), ‘사람 사는 이야기’ 9회 연재 (2013 ~ 2015), (사)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회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역임, 시드니한인작가회 상임고문 역임, 작품집으로 장편소설 ‘환절기’, 소설집 ‘여보게 날세 등 다수가 있으며, 수필집으로 ’시드니의 봄을 기다리며‘ 등 6권이 있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현재 린필드에서는 목요일 (1, 3주 목요일 오후 7시)에, 리드컴에서는 수요일 (2, 4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모임을 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다음 린필드 목요모임은 2024년 5월 2일에 독서모임 (아트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 김태진 저 / 카시오페아 출판 / 2017년 8월 17일)으로, 5월 16일에는 ‘한의학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몸’ (유병욱 원장 / 시드니 새생명한의원)을 주제로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인다.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모임 안내
– 린필드 목요모임 (1, 3주 목요일) 5월 모임
.일시: 2024년 5월 2일, 16일 (목) 오후 7시 ~ 9시
.주제: 5월 2일 – 독서토론모임 (아트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 김태진 저 / 카시오페아 출판 / 2017년)
5월 16일 – 한의학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몸 (유병욱 원장 / 시드니 새생명한의원)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임)
.문의: 주경식 (0401 017 989, [email protected]) / 임운규 (0425 050 013, [email protected])
– 리드컴 수요모임 (2, 4주 수요일) 5월 모임
.일시: 2024년 5월 8일, 22일 (수) 오전 10시 ~ 12시
.장소: 새벽종소리 명성교회 새신자실 (31 East St. Lidcombe)
(대면모임)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문의: 천옥영 0422 712 235
시드니인문학교실 4월 4일 강의 전문
우기지 마라!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 소피스트 이야기
들어가는 말
기원전 6세기 경 지중해 북쪽에 있던 밀레토스를 중심하여 일련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의 본질 (Arche)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 드디어 사람들은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소박한 의문들에 대하여 ‘신화적 혹은 종교적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 보는 이성적 단계로 들어섰다는 데 있습니다. 대답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탈레스를 중심한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물이다 (탈레스), 아페이론이다 (아낙시만드로스), 공기다 (아낙시메네스), 흙, 불, 공기, 물이다 (엠페도클레스), 스페르마타, 누스, 로고스다 (아낙사고라스), 아톰이다 (데모크리토스) 등등 다양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피타고라스를 중심한 새로운 학파에서는 우주 만물의 본질을 수 (數, number)라고 하면서, 이 세상은 ‘수의 이상적인 비율과 조합’ (The Ideal Rate and Harmony of Number)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학파가 나타났습니다. 엘레아 학파입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이 세상의 아르케(Arche)는 ‘일자 (一者, The One)이며 우주와 만물은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반대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 우주 만상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보았습니다. 변화와 순환의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하고 역사는 흘러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니 사람 역시 새로운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 우주 만물의 Arche가 하나이면 어떻고, 여럿이면 어떠냐? 우주 만상이 불변하면 어떻고, 변한다면 또 어떠냐? 이렇게 보면 하나인 것 같지만, 저렇게 보면 여럿이고, 여기서 보면 변치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기서 보면 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생명을 걸고 싸울 것이 무엇이냐? 제발 좀 정신 차리고 지혜로운 인간,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해라! 세계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로만 규정되지는 않는다! 그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의 입장과 주장이란 제각기 대답은 다른 것 같지만 실은 일종의 절대주의 사상에 사로잡힌 것으로 규정 하면서 지식의 상대주의(The Relativism)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출현했습니다.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이렇듯 지식의 절대주의적 사상을 부정하면서 상대주의를 주창한 사람들을 ‘소피스트’ (sophist)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잠깐 인문학적인 입장에서 ‘절대주의’ (The Absolutism), ‘상대주의’ (The Relativism), ‘회의주의’ (The Skepticism), ‘실용주의’(The Pragmatism)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데 진리, 혹은 신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1) 절대주의(자)에서는 ‘진리는 있고 신은 살아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리와 신이 있다고 할 경우, 그 진리와 신은 하나뿐이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 상대주의(자)에서는 진리와 신이 있다고는 해도 오직 하나뿐인 진리와 신이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많은 진리들과 많은 신들이 있어서 그 어떠한 진리나 신도 자기만 혼자서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영원불변하다고 말해서는 않된다고 주장합니다. (3) 회의주의(자)에서는 진리나 신 같은 추상적인 개념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 말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은 다 알려고 해서는 않된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4) 실용주의(자)에서는 그 진리와 신이 지금 나(우리)에게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묻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아무 유용성도 없는 진리와 신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는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가 낳은 사상으로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고 봅니다. – 위의 네 가지 사조에는 사랑, 영원, 평화, 정의, 선 같은 개념들을 도입해 볼 수 있습니다. 백 퍼센트 꼭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보수적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절대주의에 가깝고 반대로 비교적 진보적이거나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거기에 더 가치를 두는 이들은 상대주의에 가깝다고 봅니다.
오늘은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에 직접 참석 하시는 분들이나 아니면 이 강의안을 가지고 작은 그룹을 만들어서 공부하시는 친구들이나 혹은 제가 보내드리는 이 교안을 개인적으로 읽으시면서 인문학 공부를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귀하는 스스로를 살펴 볼 때 위의 네 가지 사조, 사상, 생각 중에서 어느 편에 가깝다고 보십니까?’ 이와 연계되는 질문입니다. “귀하는 생각, 사고, 경험, 판단, 정치, 경제, 종교, 신념 등에 있어서 비교적 보수적인 편입니까? 아니면 진보적이라고 판단하십니까? 어떤 때는 보수적이고 또 어떤 때는 진보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자, 그 정도로 하고 초기 자연 철학자들의 절대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서 처음으로 지식과 사상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문을 연 ‘소피스트들’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기원전 4-5세기경, 이오니아를 떠나 서쪽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일련의 새로운 지식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아테네에서 태어난 아테네 출신들은 아닙니다. 지중해 연안의 여러 섬들을 비롯하여 동쪽의 소아시아로 부터 서쪽의 이탈리아 등 이곳저곳에서 아테네로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소피스트란 ‘페리클레스’ 시대로 부터 시작된 자유와 지성, 학문과 이성의 시대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한 일군의 철학자 집단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소피스트의 시대란 곧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말합니다. 소피스트들은 페리클레스와 함께 출현하여 활동하다가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변화의 시기, 평화가 찾아오는 시기, 민주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나가려고 했으며 법률과 문법과 수사학 같은 실용적인 학문을 필요로 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이런 필요에 따라 젊은이들을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이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는 일종의 도덕교사였으며 부정적으로는 삯군 교사요, 괴변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소피스트’(Sophists)란 ‘소피아’(Sophia) 즉, ‘지혜’에서 온 말입니다. ‘지혜의 사람들’ 혹은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 여겨지면서 자타가 ‘현자’(賢者)라고 불렀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을 그 이전의 ‘철학자들’(Philosophers)과는 구별했습니다. 철학자란 단순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philia + sophia)이고 따라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인데 반하여, 자기들은 이미 무엇이 진정한 지혜인지 알고 있으며, 그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서 이 지혜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지혜의 교사’라고 여겼습니다. 초기 소피스트들은 무료로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만 후에는 돈을 받고 언변을 통하여 출세하는 법이나 성공하는 비결 등을 가르치는 유료교사로 전락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들 ‘지혜의 사람들’을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 말만 잘하는 사람들, 일종의 ‘궤변가’(詭辯家) 혹은 궤변론자(詭辯論者)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소피스트란 논리와 언변으로 상대방을 굴복시켜 자신의 논리적 승리와 실질적 이윤을 추구하는 무리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오늘날 정치인들, 언론인들, 교수들, 지식인들, 목사를 비롯한 종교인들은 지혜를 지니고 그 지혜를 사랑하고 가르치는 ‘지혜의 교사들인가? 아니면 말쟁이요, 돈 받고 자기가 아는 지식을 파는 ‘지식상인들’인가? /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인가? 언변 좋은 사람? 확신있는 사람? 언행이 일치되어 그의 삶이 그의 말에 대한 주석이 되는 사람? 지식이나 수사학이나 화술보다 더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눌언(訥言)이 진언(眞言)이라는 공자의 말을 되새겨보자).
소피스트 출현의 시대적 배경
‘오늘’은 ‘어제’의 산물이며, ‘내일’은 또한 ‘오늘’이 낳는 결과입니다. 모든 사상과 사상가들은 한 시대의 작품입니다. 인류의 지성사에서 소피스트들이 나타난 배경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의 사상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 변동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아테네의 정치적 변화는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가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스는 기원전 490년경부터 10여년이나 계속된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원래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9년부터 450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기원전 55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신흥 바빌로니아를 무너트려 천하를 통일한 신생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지역을 평정하고 지중해 서부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인도에서 부터 지중해까지 드넓은 땅에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욕으로 불탄 다리우스 1세의 영토확장정책은 마침내 그리스에 있던 작은 도시국가들로 하여금 동맹을 맺게 했습니다. 아테네는 이 서진하려는 페르시아를 저지하기 위해서 이오니아의 반란군들을 지원했습니다. 이것이 페르시아의 아테네 공격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초기 아테네는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습니다만 우리가 흔히 ‘마라톤 전투’라고 부르는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막강한 원정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공격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는 6백여 척의 배와 2만5천의 보병을 가지고 아주 손쉽게 남부 에레트리아를 함락하고 아테네를 공략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겨우 만명 정도밖에 않되는 병력을 지닌 절대적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전과 육상에서 모두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이 때 한 병사가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서 승전보를 알린 것이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이 전쟁에서 아테네가 승리함으로 그리스에 정치적 자유를 통한 민주주의를 출현 시켰고 경제적 번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때 태어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이끈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Pericles, BC 459-429)입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과 그후 그리스의 대표적 도시 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우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루는 그 중간기, 곧 하나의 전쟁은 끝나고, 아직 다른 전쟁은 일어나지 아니한, 평화의 시대, 아테네 최고의 민주적 절정기에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가 소피스트의 시대입니다. 페리클레스는 당시의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제논의 친구였으며 아낙사고라스의 제자로써 그들에게서 정신적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출현하여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정치의 기틀을 놓음으로 철학은 꽃피고 학문과 문화의 황금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시대가 어떤 인물을 배출해 내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정신과 문화는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Black list나 White list를 만들어내는 지도자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페리클레스는 뛰어난 용모와 인품에다 뛰어난 지성과 함께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추앙을 받습니다. 그는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을 배워 화술도 아주 뛰어났지만 무엇보다도 아테네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정치의 토대 위에 세움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는 Demokratia-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류가 지닌 세계문화 유산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위대한 건축물들을 세웠고 도시계획이나 건축이나 시민들의 경제를 크게 확장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아테네를 민주적 도시국가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입니다. 기원전 431년에 행한 ‘전몰자 추모 연설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들이 전해집니다. 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툼이 생겼을 때는 반드시 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② 모든 사람은 그의 출신이나 성분이 아니라 그의 능력에 따라 공직에서 일해야 합니다. ③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인생을 헛되게 살게 해서는 절대로 않됩니다. ④ 몇몇 사람들이 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해서는 않됩니다. 아테네의 시민이라면 모두가 골고롭게 나라 일을 맡도록 해야 합니다(물론 아직은 여자와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없었지만) – 여기에는 법치주의의 원칙, 평등주의의 원칙, Anti-Discrimination, Egalitarianism의 원칙들이 분명했습니다(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테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하게 되고 동시에 찬란했던 민주정치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 핵심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평등주의, 이 두 가지가 인문학과 사상의 자유를 꽃피우는 토양이라는 점입니다.
(2) 억압 받지 않는 사상과 자유로운 언로가 소피스트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원인입니다. 소피스트들은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주장에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대답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둥하는 것은 새로운 사상을 잉태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해주는 대로, 가르쳐주는 대로, 전통적인 주장대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발전에 기여할 수가 없습니다. ‘회의주의’는 부정적으로만 취급될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의심이나 회의를 확신에 이르는 걸림돌로 여기며 심지어는 죄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회의와 의심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지성의 문을 여는 첫 출발로 여깁니다. 소피스트들은 불만족한 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대들어라! 맞장을 떠라! 그것이 동일한 문제를 새로운 방향에서 보고 새로운 해법을 가져오는 전기를 가져옵니다(모든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자들이고 그들은 무엇이든지 변화하면 곧 자기들에게 불이이익과 위기가 닥쳐 올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3) 소피스트들의 출현에 대한 세 번째 배경은 부정적 시각에서 보는 눈입니다. 소피스트들을 괴변론자들이라고 볼 경우, 이들의 출현 배경에는 인간성속에 있는 허영심, 출세욕, 물질욕, 성공욕 같은 이기주의적 동기가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 출신들이 아닌 타지방이나 변두리에서 온 사람들, 혹은 지난날 노예 출신이었으나 지금은 숨은 신분을 지니고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 중에는 논리학이나 수사학 같은 학문을 익혀 일약 출세해서 크게 돈을 벌고 이름을 날려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후기 소피스트들 중에는 이런 경향을 지닌 사람들이 증가했습니다.
대표적 소피스트들을 몇 사람 살펴보겠습니다.
(1)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58-410) – 그에 대한 예화입니다. ‘에우아툴로스’라는 젊은이가 ‘프로타고라스’를 찾아와서 제자로 삼아달라고 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학비로, 요즘 싯가로 치면 만불은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에우아툴로스는 지금 그만한 돈이 없으니까 우선 5천불만 내고 나머지는 이 후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다 마친 후 사회에 나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갚겠다고 했습니다. 흥정이 이루어져 그 청년은 3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가 출세하여 아테네의 시의원이 되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에우아툴로스를 찾아가서 전에 약속한 대로 미납금 5천불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우아툴로스는 자기는 아직 훌륭한 사람이 못되었으니 좀 더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년을 기다려도 에우아툴로스는 이 핑게, 저 핑게를 대면서 영 돈을 갚을 기색이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프로타고라스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재판관 앞에서 각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프로타고라스가 말을 시작했습니다. ‘현명하신 재판관이여 저는 이 재판에서 이겨도 5천불을 받게되고 져도 5천불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재판에서 이긴다는 것은 제가 승소를 한 것이니까 저는 법의 명령에 따라 5천불을 받게 되는 것이고 만약 제가 이 재판에서 지게 되면 그것은 저 에우아틀로스가 저를 이길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니까 저는 5천불을 받게 된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이기든 지든 간에 5천불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우아툴로스가 입을 열었습니다. ‘현명하신 재판관님 저는 오늘 이 재판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결코 돈을 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가 이 재판에서 이기면 그것은 법률이 저로 하여금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며, 만약 제가 오는 재판에서 지게 되면 저는 그 동안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은 스승님을 이길 만큼 훌륭한 사람이 못 되었다는 증거가 됨으로 저는 이 재판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5천불을 내지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영향력이 컸던 인물입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하면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라는 명제로 요약이 됩니다. 그는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이요, 기준이요, 주인공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는 ‘인간’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일반적 인간’입니다. 자연이나 신과는 구별되는 ‘객관적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둘째는 ‘나’라고 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주관적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해석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이 두 번째에다 강조점을 둔 소피스트 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이나 신중심이 아닌 일반적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개인주의’ 혹은 ‘개인 중심’에 방점을 찍게 됩니다. 객관적 인간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혹은 주체적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됩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신념은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보았습니다. ‘나에게 보이고 나에게 인식된 것이 사실이라면, 너에게 보이고 너에게 인식된 것도 역시 사실’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fact)이란 꼭 하나일 수 만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똑같은 물이나 공기도 어떤 사람은 차다, 습하다 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따뜻하다, 건조하다고 할 것이므로 어느 것은 맞고 어느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A, B, C 판사가 다른 판결문을 쓰고 1, 2, 3심이 각기 다르게 재판하는 것은 어느 것은 틀리고 어느 것은 맞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고 인식하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세상에는 틀린 것도 없고 무가치한 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는 신념과 행위의 주관성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피스트의 제 일인자인 프로타고라스가 내세운 인간 인식과 지식의 ‘상대주의’(Relativism)입니다. 그는 절대적 진리, 절대적 정의, 절대적 도덕율, 절대적 종교, 절대적 인간을 부정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문화권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 자연법이나 도덕이나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입니다.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척도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가 됩니다. 결국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주장은 ‘내가’ ‘각자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이 됩니다.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은 바로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현대의 상황윤리의 문제나 포스트 모던이즘 Post Modernism에 대해서 토론해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이나 ‘공공신학’-Public Theology에 대한 이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2) 고르기아스(Gorgias, BC 483–376) – 고르기아스는 프로타고라스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급진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진리의 상대주의를 넘어서 ‘회의주의’(Skepticism)로 나갔습니다. 그에 의하면 “① 근본적으로 진리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없다. ② 설혹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③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은 그 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철학은 3가지 불가능한 것, 즉 ① 존재하지 않는 것, ② 존재해도 알 수 없는 것, ③ 알아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철학의 주제와 철학함의 의미를 ‘단순히 실용적 수사학’으로 전락 시켰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피스트들을 괴변론자와 진리의 장사꾼으로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게 했습니다.
(3) 트라시마코스(Trasimacos, 출생과 사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원전 427년을 전후하여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칼케톤 출신의 소피스트) – 플라톤의 Politeia(영어로는 Republic, 우리말로는 ‘국가’ 혹은 ‘공화국’으로 번역함) 제 1권 중에는 50살이 된 소크라테스와 31살이 된 트라시마코스 사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습니다. / 소크라테스가 묻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dikaiosyne란 본래 ‘올바른 상태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고 이는 최근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문제중 하나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 입니다. 통치자는 자기에게 유익하고 이로운 것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정한 후, 그 법을 지키는 것을 정의라고 하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불의라고 합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은 백성이 아니라 통치자입니다. 그들은 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합니다. 정의란 결국 강자, 곧 법을 만들고 통치하는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란 곧 불의 입니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돌본다.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 일한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도 백성을 위해서 일한다. 그 어떤 통치자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 때 트라시마코스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너무나 순진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 일한다고요?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겁니다. 명성과 돈이 그의 목표입니다. 선장이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 일한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장이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은 자기 또한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양치기는 진정 양을 위해서 양을 친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양을 친다고 보십니까? 양치기가 양을 치는 것은 착해서가 아니라 젖을 짜고 고기를 먹고 가죽을 얻어 옷을 만드는 등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양을 치는 겁니다. 선한 목자는 없습니다. 양치기는 양을 이용하는 사람이고, 통치자는 백성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겁니다.’ 트라시마코스에 의하면 양치기에게 있어서 양이란 삶의 수단인 것 같이, 통치자에게 있어서도 백성들이란 통치자의 유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정의는 강자의 논리’이며 ‘정의는 곧 불의’라는 주장을 계속합니다. 그는 ‘백퍼센트 순수한 거짓말 보다는 약간의 진실을 섞어놓은 거짓말이 보다 더 효과적인 같이, 불의 또한 진실인 양 위장을 하려면 약간의 정의를 섞는 것이라’고 하면서 현실을 비웃고 비판했습니다(목사나 신부나 스님은 진짜 그들의 신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과 명예,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일하는 이기적 존재들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토의해 봅시다).
(4) 리시아스(Lysias, BC 445-380) – 아테네 출신의 소피스트. 직업적 연설문 작성자로 알려짐 ‘신체 장애인을 위한 변론문’이 알려진 글 입니다. 그의 이야기들은 주로 플라톤의 ‘Phaedros’ 편에서 소개됩니다. ‘우리는 누구와 섹스를 하는 것이 도덕적인가?’라는 주제의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리아스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선생님 참 이상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최고의 성스러운 행위를 섹스라고 하는 최고의 추악한 행동과 연결시키는 것은 전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섹스는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는 것이 도덕적입니다’(이런 주장은 그 논리적 모순이 어디에서 출발한다고 보십니까?).
소피스트들이 철학사에서 미친 영향과 그 평가중 긍정적인 것으로는 그 때까지의 자연철학자들이 제기했던 우주 만물의 본질을 인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대답도 자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어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의 핵심 문제인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주제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그 다음 소피스트들이 주장했던 ‘인간 지식과 인식의 상대화’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해체주의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여기에서 보면 참이지만 저기에서 보면 거짓일 수 있다. 3사람에게는 3가지 진리가 있다. 시드니의 겨울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춥다고 하는가 하면 몽골 사람들은 그게 무슨 겨울이냐? 너무 덥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과 진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설명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절대주의적 사고에 대항하게 만든 것은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부정적인 요소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에 대한 이해
(1) 인류의 역사를 비롯한 정신사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쉬임없이 변천을 거듭할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와 삶이 변해온 모습을 ‘전근대’(pre-modern)에서 ‘근대’(modern)로 변천했고 그 ‘근대’가 다시 ‘후기근대’(post-modern)로 바뀌어왔다고 봅니다. ‘포스트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이즘’이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모던’ 혹은 ‘모던이즘’을 모체로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며, ‘모던’이나 ‘모던이즘’ 역시도 그 이전의 ‘프리 모던’이나 ‘프리 모던이즘’을 바탕으로 생겨났던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자연스런 역사의 흐름은 하나의 순리이며 개인의 호, 불호와는 관계없이 생겨나고 지나가고 또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정신사의 흐름이며 순환이라고 보겠습니다.
(2) 우리가 아는대로 ‘근대사회’ Modern Society 와 근대사회의 정신적 이데올로기인 ‘근대주의’ Modernism 는 흔히 르네상스가 시작된 14세기부터 준비되었으며 계몽주의가 꽃을 피운 18세기 후반까지 약 5백년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인문주의, 인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사상이 서구의 정신사를 견인해 왔다고 봅니다. 인간, 특히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확신과 인간의 이성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는 신념이 이 기간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3) 그에 앞선 ‘프리 모던’ 혹은 ‘프리 모던이즘’은 ‘근대주의’ 이전으로 고대로부터 중세를 이어온 수 천년의 긴 기간과 그 시대의 사상을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우주관과 형이상학적 이론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신화와 신앙, 계시와 그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은 통제되었습니다.
(4) ‘post-modern’ 혹은 ‘post-modernism’은 이렇듯 ‘pre-modern’과 ‘modern’의 과정을 거쳐서 19세기 후반부터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이며,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던이즘’에 대한 첫 비판은 흔히 니이체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니이체는 계몽주의와 이성주의를 거부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그 동안 합리적 이론을 통하여 이루어 온 보편적 진리를 거부하고 서양정신사의 근간을 이루어온 형이상학의 정당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1883년에 출판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던이즘’에 대한 사형선고이며, 동시에 ‘포스트 모던이즘’을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제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에 시작되어 1918년 11월까지 약 5년간 938만명의 전사자와 2,314만명의 부상자를 포함하여 모두 3,252만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냈고, 이것으로 마침내 ‘근대주의’ Modernism이라는 허구의 가면은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개념은 이런 역사적 전환기를 거치면서 戰後의 새로운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드 오니스(Federico de Onis)가 1934년에 출판한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시선집’에서 처음으로 ‘포스트 모던’이란 말을 사용했고 이어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1939년 ‘역사의 연구’에서 ‘포스트 모던이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인이, 그리고 그 후에는 학자들이 사용했던 이 ‘포스트 모던이즘’은 한결같이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후 인간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지난날을 단절하고 새 시대를 열어보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을 지니면서 점차 이 포스트 모던이즘은 건축, 미술, 조각, 음악과 같은 예술 분야로 부터 시작이 되어 이제는 영화, 연극, 춤, 각종 오디오와 비디오와 행위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 이후부터는 문학, 철학, 종교, 각종 사회과학 분야와 다양한 학술 분야는 물론이고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널리 확산이 되었습니다.
(6) 오늘날 ‘포스트 모던이즘’은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이 되었고 우리 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포스트 모던이즘’이라는 개념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운동이나 경향성이 아닌 우리 시대의 제반 현상들을 거의 모두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들 중에도 포스트모던이즘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피차 모순이 되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보고, 이는 받아드리기 어렵고 배척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7) ‘전근대 사회’ pre-modern society에서는 신과 신앙과 신학이 중심이었다면 ‘근대 사회’ modern society에서는 인간과 이성과 과학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후기 사회’ post-modern society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과정 중에 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하에서 이제까지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살펴보면서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징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종래의 모든 가치관이나 가치체계가 전도(뒤집혀짐)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날의 전통에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가족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활,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습니다. 회사, 교회, 국가,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을 중심으로 가치를 판단합니다.
둘째는 아직 바람직한 새 가치관이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종래의 전통적 가치관은 부정했지만 새로운 대안이 만들어지지는 못한 어중간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사회는 ‘흔들리는 사회’로 보여집니다.
셋째는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양한 문화, 다양한 종교, 다양한 인간, 다양한 형태의 가정 등, 우리 사회를 pluralistic society로 봅니다. 모든 것은 쉬이 지나가고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고 판단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생겨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종교란 선택과 기호의 문제라고 봅니다. 커피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고 자동차에도 수많은 기종이 있듯이 종교도 수많은 종교가 있고 자기의 기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고 봅니다. 뷰페 음식에서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받아드립니다.
넷째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고 보는 점입니다. 객관적 기준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않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나에게는 사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볼 경우에도 사람마다 얼마든지 제각기 다른 사실과 진실을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다섯째는 이런 입장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으로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너그러움’과 ‘관용’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깁니다. Tolerance입니다. 자기만 특별히 남보다 우월하다든가, 자기의 생각, 주장, 입장, 지식, 소유, 문화, 종교를 절대화 하거나 우월화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우월성이나 절대성을 강조하면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대화의 상대가 않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해체주의(Destructionism)을 강조합니다. 해체주의는 일체 과거의 사상과 사고방식을 해체 시키고 새로운 사상과 사고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즉 지난날의 역사를 파괴하고 분해해보고 분석함으로 새로운 것의 설립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파괴적 해체주의’(destructive desconstruction)가 아니라 ‘긍정적이며 건설적 해체주의’(constructive / affirmative constructionism)를 강조합니다.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세계를 세우기 위한 해체’를 말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말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꼭 누군가가 부시고 무너뜨리고 해체해서 해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 Questions & Comments
▷ Sharing – 나는 절대주의적 사고를 지지하는 편인가? 아니면 상대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편인가? 아니면 회의주의나 실용주의에 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