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4월 모임 실시
린필드 목요모임, 주경식 교수 ‘격동의 근대 중국사 2부: 신해혁명에서 마오쩌둥까지’, 독서토론모임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나눠 … 다음모임은 5월 1일, 15일 [4월 3일 강의 전문 포함]
리드컴 수요모임은 주강사 홍길복 목사와 4월 9일 야외모임 후 중간방학 실시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4년 4월 모임을 린필드와 리드컴에서 실시했다.

리드컴 수요모임은 4월 9일 (수) 오전 10시 올림픽파크에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를 주강사로 모임을 실시했다. 이날 올림픽파크 호숫가 파빌리온에서 야외모음 3후 중간방학을 실시했다.
린필드 목요모임은 4월 3일과 17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주경식 교수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는 ‘격동의 근대 중국사 2부: 신해혁명에서 마오쩌둥까지’와 독서토론모임으로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저)’를 나눴다.
4월 3일 모임 강연에 선 주경식 교수는 ‘격동의 근대 중국사 2부: 신해혁명에서 마오쩌둥까지’ 주제의 강연 서두에 ‘혁명은 완성되었는가?’ 물으며 “1912년 1월 1일, 쑨원 (손문)은 남경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하며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2천 년을 이어온 중국의 황제 중심 통치 체제가 공식적으로 막을내렸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청조는 무너졌고, 혁명의 이상은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중국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과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혁명은 과연 완성되었는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혁명은 진짜 혁명이었는가? 라는물음이 중국 현대사의 첫 장을 여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은 분명히 정치 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한 것은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체제를 바꾼다고 사회 전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쑨원 (손문)이 꿈꿨던 ‘삼민주의 (三民主義)’ — 민족, 민권, 민생 — 는 선언으로 끝났고, 공화의 이상은 현실의 정치적 야망과 갈등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졌다. 무엇보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그 결실을 가져간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위안 스카이 (원세계) 였다. 그는 청조 말기의 실력자이자 북양군을 장악한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 청나라 내부에서도 실질적인 군권을 쥐고 있었다. 혁명 세력은 남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지만, 북부지역은 여전히 원세개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무력 충돌 없이 전국적인 정권 교체를이루려면 그의 협조가 절실했다.”고 언급하였다.

이어 ‘군벌 시대와 중화민국의 실패 : 권력은 바뀌었지만, 질서는 오지 않았다’ – 1) 황제가 된 공화국 대통령 – 원세개의 배신, 2) 군벌 할거 시대의 개막, 3) 외세의 그림자, 내부의 붕괴, 4) 민중은 무엇을 잃었는가?, 5) 공화의 실패가 낳은 또 다른 혁명 / ‘국민당과 공산당의 부상 : 하나의 중국을 꿈꾸며, 서로 다른 혁명의 길로’ – 1) 쑨원과 국민당의 재편: ‘삼민주의’로 다시 혁명을 외치다, 2) 공산당의 등장: 마르크스주의의 씨앗이 뿌려지다, 3) 제 1차 국공합작: 전략적 동맹, 공동의 적은 군벌과 제국주의, 4) 북벌: 통일을 향한 진군,5) 상하이 쿠데타 (1927): 칼날을 겨눈 동지, 6) 농촌으로 간 혁명가들: 마오쩌둥의 새로운 전략 / 일본 침략과 민족 통일 전선 : 외세 (일본의 침략) 앞에서 다시 손을 잡은 두 혁명 세력 – 1)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 만주사변과 괴뢰국 만주국 수립 (1931), 2) 민중의 분노, 항일 의병의 확산, 3) 공산당의 생존과 장정 (長征), 4) 시안 사건 (1936): 적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5) 중일전쟁의 발발과 항일 민족 통일 전선 (1937 ~ 1945), 6) 국민당의 실책, 공산당의 약진 /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한 나라, 두 혁명. 최후의 승자는 누구인가?’ – 1) 전쟁 직후의 힘의 균형: 국민당이 우세했다, 2) 정치 협상과 결렬: 다시 칼을 뽑다, 3) 국민당의 패착, 공산당의 전략, 4) 전략적 대반전: 국공내전의 3 대 전역, 5) 장제스의 후퇴와 마오쩌뚱의 승리 순으로 살폈다.
이어 결론부에서 ‘결론: 혁명의 완성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 황제를 몰아낸 자리에 누가 앉았는가’는 뒤물으며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 위에서 외쳤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혼란의 종착점처럼 보였지만, 실은 또 다른 격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두 번의 큰 혁명을 겪었다. 하나는 황제를 무너뜨린 신해혁명, 다른 하나는 체제를 뒤엎은 공산혁명이 그것이다. 하지만 공화는 완성되지 않았다. 쑨원이 꿈꿨던 ‘인민의 나라’는 군벌과 부패에 가로막혔고, 마오쩌뚱이 세운 ‘인민의 공화국’은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절대 권력으로 변해갔다. 공산당의 승리는 민심과 조직력의 산물이었지만, 정권을 잡는 것과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토지를 나누고 권력을 탈환했지만, 그것이 모든 인민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는가? 혁명은 완성되었는가, 아니면 아직도 진행 중인가? 수억 명의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이 바라던 세상은 과연 도래했는가? 1949년은 끝이 아니라 분기점이었다. 그 이후 중국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이라는 거대한 실험과 변화를 거쳤다. 이제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는 ‘누가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인가’, ‘공화는 실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언급하며 강연을 마쳤다.

4월 17일에는 독서토론모임으로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저)’의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5~7장 (‘맹자의 의’, ‘노자의 도와 자연’, ‘장자의 소요’)을 나눴다.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는 ‘강의’ 출간 이후 10년 만에 출간되는 ‘강의록’이다. 이 책은 동양고전 말고도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다른 책에 실린 글들을 교재 삼아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과 세계 인식, 인간 성찰을 다루고 있다.
신영복 저자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 · 전주 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하다가 1988년 8 ·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같이 쓴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묶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진솔함으로 가득한 산문집이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독 등을 가르쳤고, 1998년 3월, 출소 10년만에 사면복권되었다.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2007년 정년퇴임을 하고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2014년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16년 1월 1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현재 린필드에서는 목요일 (1, 3주 목요일 오후 7시)에, 리드컴에서는 수요일 (2, 4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모임을 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모임 안내
– 린필드 목요모임
.일시: 5월 1일과 15일 (목) 오후 7~9시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임)
.문의: 주경식 (0401 017 989, [email protected])
– 리드컴 수요모임
.일시: 5월 14일과 28일 (수) 오전 10~12시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장소: 명성교회 새신자 교실 (31 East St, Lidcombe)
.문의: 천옥영 0422 712 235
4월 3일 강의 전문

격동의 근대 중국사 2부: 신해혁명에서 마오쩌둥까지
지난 강의 요약:
아편전쟁에서 신해혁명까지 19세기 중엽, 중국은 아편전쟁 (1839 ~ 1842)을 계기로 서구 열강과 충돌하며, 수천 년간 유지해온 중화 질서와 자존감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42년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편입되며 반식민지화 되었다. 이후 청조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한 민중은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으나, 청 정부가 서구 열강의 군사력을 빌려 이를 진압하면서 민심은 더욱 멀어졌다. 청조는 양무운동을 통해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일부 도입했지만, 근본적인 정치·사회 개혁에는 실패하며 체제전환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무엇보다도, 청일전쟁 (1894 ~ 1895)에서의 참패는 일본의 부상과 중국 체제의 낙후성을 명확히 드러냈고, 이후 열강은 중국을 분할하며 정치·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개혁파들은 광서제를 중심으로 ‘100일 개혁’을 시도했지만,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보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좌절되었다. 서태후는 개혁을 억제하고 외세와 타협하며 자신의권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중국의 근대화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봉쇄했다.
그 여파로 발생한 의화단 운동 (1900)은 민중의 반외세 감정을 드러냈으나, 서구열강 8개국 연합군의 개입으로 중국은 더 큰 굴욕을 당하고, 신축조약을 통해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청조는 내부 개혁과 외세 저항 모두에 실패하며 국민적 신뢰를 상실했고, 1911년 신해혁명을 계기로 마침내 2천 년 황제 지배 체제가 붕괴되었다. 1912 년중화민국의 수립은 근대적 공화국1 [*1 공화국의 의미는 “공화 (共和)”는 한자로 ”공 (共, 함께할 공) + 화 (和, 화합할 화)”로 구성되어, 말 그대로 “함께 다스린다”, “모두가 참여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서양의 Republic은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유래했으며, 이는“공적 (公共)의 일”이라는 뜻이다. 공화국의 핵심 요소는 “주권재민” “법치주의” “권력분립”의 요소가 들어 있다.]을 향한 첫걸음이었지만, 그 혁명은 곧 심각한 정치적 혼란과 새로운 갈등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 서론: 혁명은 완성되었는가?
1912년 1월 1일, 쑨원 (손문)은 남경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하며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2천 년을 이어온 중국의 황제 중심 통치 체제가 공식적으로 막을내렸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청조는 무너졌고, 혁명의 이상은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중국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과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혁명은 과연 완성되었는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혁명은 진짜 혁명이었는가? 라는물음이 중국 현대사의 첫 장을 여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은 분명히 정치 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한 것은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체제를 바꾼다고 사회 전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쑨원 (손문)이 꿈꿨던 ‘삼민주의 (三民主義)’ — 민족, 민권, 민생 — 는 선언으로 끝났고, 공화의 이상은 현실의 정치적 야망과 갈등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졌다.
무엇보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그 결실을 가져간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위안 스카이 (원세계) 였다. 그는 청조 말기의 실력자이자 북양군을 장악한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 청나라 내부에서도 실질적인 군권을 쥐고 있었다. 혁명 세력은 남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지만, 북부지역은 여전히 원세개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무력 충돌 없이 전국적인 정권 교체를이루려면 그의 협조가 절실했다.

△쑨원 (손문) △위안스카이 (원세계)
쑨원 (손문)은 내전을 피하고 공화국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대의를 위해 권력을 양보한다’는 전략적 판단 아래 원세개에게 임시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이는 혁명의 명분을 지키기 위한 고심 끝의 타협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원세개는 곧 독재의 길로 나아갔고, 그는 황제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려는 제정 복고 시도 (1915)를 감행했다. 공화제를 수립한지 불과 3년 만에 다시 황제를 자처한 이 아이러니는, 중국 정치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혁명을 주도했던 쑨원 (손문)은 이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은 취약했고, 외국 열강들의 지원도 제한적이었다. 결국 원세개의 죽음 이후에도 중국은 중앙집권적인 공화국이 아닌, 수많은 군벌들이 각자 영토를 장악한 군벌 혼란기 (1916 ~ 1928)로 접어든다.
이 혼란 속에서 민중들은 “공화국”이 도대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게 된다. 세금은 여전히 가혹하고, 관료는 부패했으며, 외세의 간섭은 지속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제국을 무너뜨린 대가로 돌아온 것은 더 치열한 권력 투쟁과 민중의 피눈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제스 (장개석)를 필두로한 국민당, 그리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혁명의 주도권을 둘러싼 또 다른 투쟁이시작되었고, 이 둘의 관계는 협력과 배신, 통일과 분열을 반복하며 중국의 현대사를 이끌게 된다.
이제 신해혁명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또 다른 격동의 시간을 통해, 공화의 꿈이 어떻게 공산당의 그림자로 변해갔는지를 살펴보자.
- 군벌 시대와 중화민국의 실패
— 권력은 바뀌었지만, 질서는 오지 않았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溥儀)가 공식 퇴위하고, 중국은 명실상부한 공화국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새로운 혼란의 장이 펼쳐졌다. 공화의 깃발 아래 세워진 중화민국은 단 한 순간도 안정을 누리지 못한 채, 각지의 군벌들이 판을 치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황제는 없지만, 도대체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가?”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 즉위 당시 나이: 2세 (1906년생)
1) 황제가 된 공화국 대통령 – 원세개의 배신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공화국 두 번째 대통령 원세개 (위안스카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명목상 중화민국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제왕적 권력을 추구했다. 그는 관료제를 장악하고 국회를 무력화 했으며,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그는 스스로를 “중화제국 황제”로 칭하며 제정을 부활시키려는 제정 복고 사건을 일으킨다. 이는 혁명을 통해 황제를 몰아냈던 수많은 이들에게 배신감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내부의 반발, 각지의 반란, 심지어 그의 측근들 조차 등을 돌렸고, 결국 원세개는 ‘황제 놀이’가 실패로 돌아가자 병을 얻어 1916년 초 사망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새로운 희망이 아닌, 더 깊은 절망의 시작이 되었다.

2) 군벌 할거 시대의 개막
원세개의 죽음 이후, 그의 북양군은 통제력을 상실한 채 각 장군들이 스스로 군권을 장악하며 각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로써 ‘군벌 시대 (1916 ~ 1928)’가 시작된다.
각 군벌은 자신만의 군대와 세금을 거두며 지역을 장악했고, 중앙정부는 허울뿐인 이름만 존재하는 상태였다. 북경의 정부는 자주 바뀌었지만, 정권 교체는 선거가 아니라 총칼로 이루어졌다. 민중들은 어느 파벌이 정권을 잡았는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세금은 늘고, 군대는 마을을 약탈하며, 지도자들은 국민보다 자신의 권력과 이익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군벌로는 직예파 (直隸派), 안휘파 (安徽派), 봉천파 (奉天派) 등이 있었고, 이들 사이에는 끝없는 권력 투쟁과 내전이 반복되었다. 한편 남부 광저우에서는 쑨문 (손문)이 국민당을 재건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지만, 그의 세력은 아직 미약했고 현실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3) 외세의 그림자, 내부의 붕괴
군벌들이 내전을 반복하는 동안, 외세는 중국의 분열을 기회 삼아 더 깊이 개입했다. 일본은 21개조 요구 (1915)를 통해 중국 내의 막대한 이권을 확보하고 만주로 세력을 확대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여전히 조차지와 조약항을 통해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즉, 중화민국은 독립된 주권 국가라기보다, 내부는 군벌에 의해, 외부는 열강에 의해 찢긴 반 (半) 국가 상태였다. 이는 중국인들에게 또다시 ‘혁명의 배신’을 느끼게 했고, 정치적 냉소주의와 좌절감을 확산시켰다.
4) 민중은 무엇을 잃었는가?
이 시기 중국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농민은 군벌들의 병력 충당과 전비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착취당했고, 상인과 도시 노동자들은 정치적 불안정과 물가 폭등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았다. 새로운 질서를 기다리던 민중은, 황제를 몰아낸 대신 더 많은 군벌의 약탈과 더 깊은 혼란을 맞게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닌 ‘말뿐인 이상’이 되었고, 진짜 새로운 질서와 국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었다.
5) 공화의 실패가 낳은 또 다른 혁명
이처럼 중화민국은 제도적 공화국이었지만, 실제로는 군벌이 지배하는 혼란한 나라였다. 그 결과, 쑨원 (손문)은 다시금 혁명의 깃발을 들었고, 그가 남긴 사상과 정당인 국민당 (국민정부)은 그의 사망 이후 장제스 (장개석)를 중심으로 북벌을 단행하며, 군벌을 제압하고 중국의 재통일을 시도하게 된다.

△장제스(장개석) △쑹메이링 (송미령)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새로운 갈등의 불씨, 즉 중국공산당과의 충돌이 본격화되며, 중국은 또 다른 내전에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국민당과 공산당의 부상 — 하나의 중국을 꿈꾸며, 서로 다른 혁명의 길로
20세기 초, 중국 대륙은 군벌의 칼끝 아래 찢겨 있었고, 국민들은 정치적 무력감과 외세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때, 이 거대한 혼돈 속에서 두 개의 정치 세력이 등장한다. 하나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한 국민당, 또 하나는 레닌과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따르는 공산당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손을 맞잡지만, 곧 칼날을 겨누며 중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1) 쑨원과 국민당의 재편: ‘삼민주의’로 다시 혁명을 외치다
신해혁명의 아버지였던 쑨원 (손문)은 중화민국 수립 이후 정권에서 밀려났지만, 군벌과 외세에 의해 망가진 공화정의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혁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이것은 반쪽짜리 혁명이었을 뿐이며, 진짜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선언했다.
쑨원은 1919년 광저우에 국민당 (중국국민당, 國民黨)을 재건하고, 자신의 사상인 삼민주의 —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 를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통한 통일, 외세의 축출, 민중의 권리와 삶의 향상을 꿈꿨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사력과 자금, 조직 면에서 국민당은 여전히 약체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소련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뜻밖의 동맹이 시작된다.
2) 공산당의 등장: 마르크스주의의 씨앗이 뿌려지다
1917 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아시아 전역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황제를 몰아낸 나라가, 이제는 노동자·농민의 나라가 되었다”는 소식은, 군벌과 자본가에 지친 중국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마오쩌뚱 (모택동) △중국공산당 농민운동
1921년, 상하이에서 13명의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정당이 바로 “중국공산당 (중공)”이다.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노동자 혁명을 지향했고,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소수였지만, 이들은 조직적이고 이념적으로 무장한 ‘또 다른 혁명가들’이었다. 초기 멤버 중 한 명이 바로 후일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마오쩌둥이다.
3) 제 1차 국공합작: 전략적 동맹, 공동의 적은 군벌과 제국주의
소련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을 모두 지원하면서, 두 당이 연합하여 중국의 통일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끌도록 유도했다. 이에 따라 1924년 “제 1차 국공합작 (第一 次國共 合作)”이 성사되었다. 이는 실로 역사적인 동맹이었다. 이념은 달랐지만, 적은 같았다: 군벌,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
국민당은 공산당원을 받아들이며 조직을 확대했고,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자금 지원을 받으며 황포군관학교 (장제스가 초대교장)2 [*2 한국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지청천, 김원봉, 이범석 장군 등이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다.]를 설립해 정규군을 양성했다. 공산당 역시 국민당을 통해 대중속으로 침투할 기회를 얻었다. 두 세력은 서로를 이용하면서도 경계하는 관계 속에서, 공동의 목표 ‘북벌’을 향해 나아갔다.

△제1차 국공합작 (중국국민당 + 중국공산당)
4) 북벌: 통일을 향한 진군
1926 년, 쑨원의 사망 이후 국민당은 장제스 (장개석)를 중심으로 북벌을 개시했다. 북벌은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려는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다. 장제스는 뛰어난 지휘력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국민당 내 실권을 장악해 갔다.
북벌군은 차례로 남부와 중부의 군벌들을 제압해 나갔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마침내 ‘새로운 국가’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당 내부에서는 점점 공산당 세력의 확장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장제스는 ‘혁명은 필요하지만, 공산주의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5) 상하이 쿠데타 (1927): 칼날을 겨눈 동지
마침내 1927년 4월, 장제스는 결정적인 선택을 내린다. 상하이에서 공산당원과 좌파 노동자들을 무차별 체포, 학살한 사건 — 이른바 상하이 쿠데타 (혹은 4.12 반공 쿠데타) — 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제 1차 국공합작의 파열음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이후 국민당은 공산당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충격에 빠졌고, 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도시를 기반으로 하던 공산당은 완전히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마오쩌둥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혁명의 길을 찾아야 한다”며 방향을 전환한다.
6) 농촌으로 간 혁명가들: 마오쩌둥의 새로운 전략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생존 전략으로 농민을 기반으로 한 게릴라 전쟁과 혁명 기지 구축을 제안했고, 이는 후일 중국 혁명의 근본 전략이 된다. 그는 1927년 “추수 봉기”, 1929년 “징강산 근거지”를 통해 지방의 공산당 무장세력을 조직했고, 이 시기 중국 홍군 (紅軍)이 본격적으로 탄생한다.
이후 국민당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농촌 지역에서 끈질기게 살아 남았고, 점차 세력을 넓혀갔다. 이것이 훗날 장정 (長征)과 중일전쟁을 거쳐, 결국 정권을잡는 기반이 된다
- 일본 침략과 민족 통일 전선— 외세 (일본의 침략) 앞에서 다시 손을 잡은 두 혁명 세력
1920 ~ 30년대의 동아시아는 말 그대로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군벌 내전으로 피폐해진 중국 대륙,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침략 야욕을 키워가던 일본 제국. 이 두 흐름이 충돌하면서, 중국은 다시 한번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극한의 위기 속에서, 이전에 칼끝을 겨눴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민족 통일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재결합한다. 그리고 이 전선은 결과적으로 중국 현대사의 주도권을 공산당에 넘겨주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만주사변 (1931년 9월 18일 일본관동군이 만주철도 폭파)
1)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 만주사변과 괴뢰국 만주국 수립 (1931)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은 스스로 만주의 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조작한 뒤,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략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만주사변 (柳条湖事件)’이다. 일본은 국제 여론을 무시한 채 침략을 강행했고, 몇 달 만에 만주 전역을 점령, 1932년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존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군벌의 잔재와 공산당 토벌로 혼란한 상태였다. 장제스는 “먼저 안 (공산당)을 다스리고, 후에 외 (일본)에 대응한다” (先安內後攘外)는 입장을 고수하며, 일본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피했다. 하지만 이 소극적 자세는 국민들, 특히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강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2) 민중의 분노, 항일 의병의 확산
장제스가 머뭇거리는 사이, 민중은 먼저 싸우기 시작했다. 동북지역에서는 자발적인 항일의병과 학생 운동, 민병대 조직, 언론을 통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국민당군보다 민병대가 더 격렬하게 일본군과 싸우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족을 배반한 정부, 대신 싸우는 민중”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졌고, 국민당의 정통성과 지도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 공산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을 “진정한 애국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3) 공산당의 생존과 장정 (長征)
한편, 공산당은 국민당의 토벌작전 (다섯 차례에 걸친 대공세)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를피해 1934년 부터 1935년 까지 약 1만 2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정’을 단행하며 살아남은 일부 세력이 중국 서북부의 연안 (옌안) 지역에 도달한다. 이 장정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지도력을 재편하고 마오쩌둥이 당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당은 옌안에서 농민 기반을 다지며 항일 무장세력인 농민들과 함께 ‘항일 구국’을 외치며 세를 확장해 갔다.
4) 시안 사건 (1936): 적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팔로군 (八路軍)’을 조직하고, 공산당과 일본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장제스를 움직인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1936년 12월, 장제스가 시안에서 자신의 부하인 장쉐량 (張學良)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시안 사건 (西安事變)’이다. 장쉐량은 “왜 동북을 뺏긴 일본은 놔두고, 같은 중국인인 공산당만 치느냐”며 장제스에게 항일 전선 형성을 강요했다.
결국 장제스는 석방되는 조건으로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전선을 구성하는 데 동의했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제 2차 국공합작 (第二次國共合作)으로 이어졌다.
5) 중일전쟁의 발발과 항일 민족 통일 전선 (1937 ~ 1945)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 (노구교)에서 벌어진 충돌은 전면전으로 확산되었고, 중일전쟁 (抗日戰爭)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명목상 공동의 적, 일본에 맞서 협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화합이 아니라, 불신 속의 공존이었다. 각 당은 독자적인 군대, 행정구역, 정치 조직을 유지한 채 싸웠고, 사실상 ‘함께 싸우면서 따로 움직이는 이중 권력 체제’였다.

△중일전쟁 (1937년 7월 7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국민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면전을 벌였고,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며 장기전에 대비했다. 반면 공산당은 농촌에서 ‘항일 근거지’를 세우고 토지 개혁과 민중 동원을 통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6) 국민당의 실책, 공산당의 약진
중일전쟁의 장기화는 국민당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장제스 정권은 전쟁 수행능력의 한계를 드러냈고, 부패, 인플레이션, 전쟁 지휘의 혼란으로 민심을 잃기 시작했다. 반면, 공산당은비교적 작은 자원으로 규율 있는 조직력과 민중과의 밀착, 토지 개혁, 자발적 저항운동을 통해 ‘민중 속의 당’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이 시기를 “공산당의 체계적인 정치 훈련, 교육, 군사력 강화에 집중했다. 골육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
-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한 나라, 두 혁명. 최후의 승자는 누구인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8년간의 중일전쟁이 끝났다. 이제 중국은 다시 자신들의 손에 미래를 결정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문제는 명확했다. 두 개의 중국, 두 개의혁명 세력, 하나는 장제스의 국민당, 다른 하나는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그것이었다.
중국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두고, 마지막이자 가장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국공내전 (國共內戰, 1946 ~ 1949)이다.
1) 전쟁 직후의 힘의 균형: 국민당이 우세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전쟁 직후 우세했던 쪽은 국민당이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을 우선 접수하면서 대도시와 철도, 항만 등 핵심인프라를 장악했다. 군사력도 약 43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국제 사회에서는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반면 공산당은 연안 (옌안)을 중심으로 한 농촌 근거지, 소수의 게릴라 부대, 제한된 자원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강점은 조직력과 민심, 그리고 마오쩌둥이 그동안 연안에서 쌓아올린 정치적·군사적 전략이었다.
2) 정치 협상과 결렬: 다시 칼을 뽑다
전쟁 직후 미국의 중재로 “중국 정치 협상 회의 (1946년 초)”가 열렸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양측은 연립정부 구성, 평화적 정권 이양 등 이상적인 방안을 논의했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결국 1946년,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당은 대규모 정규군을 동원해 공산당 근거지를 포위하고, 도시와 교통 요충지를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역전되었다.
3) 국민당의 패착, 공산당의 전략
국민당의 문제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다룰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 전쟁 후 복구는 커녕 행정은 부패했고,
- 물가는 폭등하고,
- 국민당 고위층은 사치를 일삼았으며,
-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특히 하층민과 농민, 도시 노동자들은 공산당이 척결 등의 구호에 더 큰 공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세우는 토지개혁·빈부격차 해소·부패반면 공산당은 유격전을 병행한 점령 전략, 농민 기반의 세금 감면과 토지 분배, 그리고 철저한 당 중심 통치 체계를 통해 민중을 끌어들였다. “해방군은 우리 편이다”라는 인식이 농촌 사회 전반에 퍼졌고, 이는 결정적 승부처가 되었다.
4) 전략적 대반전: 국공내전의 3 대 전역
1947년 말부터 공산당은 본격적인 대공세에 돌입한다. 1948 ~ 49년 사이에 벌어진 3대 전역 (三大战役) — 랴오선 전역 (요동), 화이하이 전역 (중부), 핑진 전역 (북경) — 은 국민당군의주력을 궤멸시키고, 북중국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장제스는 전략적으로도 연이어 실수를 범했고, 무엇보다도 국민당 지도자의 부패, 군내부의 탈영, 항명, 투항 등이 속출하면서 전선은 급격히 붕괴됐다. 공산당은 한때 ‘도망자’였지만, 이제는 ‘해방자’로, 국민당은 ‘정통 정부’였지만 ‘부패한 독재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5) 장제스의 후퇴와 마오쩌뚱의 승리
1949년 1월, 북경 (당시 베이핑)이 공산당에게 무혈 입성으로 넘어갔고, 국민당은 점점남쪽으로 밀려났다. 같은 해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며, 공산당이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장제스는 잔존 세력을 이끌고 대만으로 후퇴했고, 거기서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하며 분단중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중국, 두 개의 정권. 중국은 다시 한번 세계 역사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 결론: 혁명의 완성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 황제를 몰아낸 자리에 누가 앉았는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 위에서 외쳤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혼란의 종착점처럼 보였지만, 실은 또 다른 격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두 번의 큰 혁명을 겪었다. 하나는 황제를 무너뜨린 신해혁명, 다른 하나는 체제를 뒤엎은 공산혁명이 그것이다. 하지만 공화는 완성되지 않았다.
쑨원이 꿈꿨던 ‘인민의 나라’는 군벌과 부패에 가로막혔고, 마오쩌뚱이 세운 ‘인민의 공화국’은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절대 권력으로 변해갔다.
공산당의 승리는 민심과 조직력의 산물이었지만, 정권을 잡는 것과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토지를 나누고 권력을 탈환했지만, 그것이 모든 인민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는가? 혁명은 완성되었는가, 아니면 아직도 진행 중인가? 수억 명의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이 바라던 세상은 과연 도래했는가? 1949년은 끝이 아니라 분기점이었다. 그 이후 중국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이라는 거대한 실험과 변화를 거쳤다. 이제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는 ‘누가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인가’, ‘공화는 실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도서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9
강준영 외, 『20세기 중국사』, 서강대학교출판부, 2010
조너선 D. 스펜스, 강주헌 역, 『중국 근현대사』, 까치, 2015
미야자키 마사카츠, 오근영 역,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램덤하우스, 2007

주경식 교수 (Ph.D)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