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린필드 모임 “인문학의 주제 : 사람 (Saram) 3”, “호주와 한국의 130년 우정을 통해본 인문학” 주제로 실시 후 전반기 종강
리드컴 다음 수요모임은 6월 14일 (수, 오전 10시) [5월 18일 강연 전문 포함]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 5월 목요모임은 5월 4일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를 강사로 “인문학의 주제 : 사람 (Saram) 3”를 주제로, 5월 18일에는 주경식 교수 (호주기독교대학 교수 및 AVII 디렉터)를 강사로 “호주와 한국의 130년 우정을 통해본 인문학”을 주제로 각각 대면과 비대면 모임을 병행해 가졌다.
리드컴 수요모임은 5월 10일과 24일 (수) 오전 10시, 홍길복 목사를 강사로 모임을 가졌다.
5월 4일 린필드 모임 강사로 선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는 “인문학의 주제 : 사람 (Saram) (3)”란 주제로 강연하며 서두에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화두는 ‘균형잡힌 사람’, ‘중용적 인간형’입니다. ‘바람직한 사람이란 어떤 인격을 지닌 사람일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라고 서두에 언급한 후 “오늘의 추천도서는 데이비스 브룩스(David Brooks)가 지은 ‘인간의 품격’ (The Road to Character)입니다. (김희정 옮김, 부키, 2015년) 우리는 이 책을 주교재로 삼아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 브룩스는 이 책의 서두에서 히브리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처음 두 장에 주목합니다. 그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출현하는 아담 (Adam–그 뜻은 고유 명사 ‘아담’이 아니라 보통 명사로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을 분리하여 해석합니다. 창세기에 출현하는 인간 창조 스토리에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인간형, 두 가지 판이한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아담은 ‘아담I’로 명명하고 2장에 나오는 아담은 ‘아담II’로 이름을 붙였습니다.”라며 아담I은 ‘목적 지향적 인간’, 아담II는 방법이나 수단보다는 목적과 이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보았다.
5월 18일에는 주경식 교수 (호주기독교대학 교수 및 AVII 디렉터)를 강사로 “호주와 한국의 130년 우정을 통해본 인문학”이란 주제로 모임을 가졌다. 이날 주경식 교수는 서두에 “호주의 마을 곳곳에 한국식 이름의 길 이름이 있다. 바로 ‘가평 길’ (Kapyong Street)이 그 것이다. 왜? 호주의 도로명에 한국의 지역이름인 ‘가평’ (Kapyong) 이름이 사용되었을까? 그것도 호주 전 지역에 걸쳐 10 개나 되는 ‘가평 길’ (Kapyong St)이 있고, 2 개의 ‘가평 다리’ (Kapyong Bridge)가 존재하고 있다.”며 “현재까지 호주 전 지역에 걸쳐, 시드니에 3곳 (벨로즈, 맥마스터 비치, 바르디아), 콥스하버 1 곳, 캔버라에 1곳 (캠프벨), 브리즈번 2곳 (카불처, 코코다 부대), 골드코스트 1곳 (아룬델), 타운스빌 1곳 (라바락 부대내), 퍼스 1곳 (카라카타) 이렇게 10개의 ‘가평 길’이 확인되었고, 아들레이드 1곳 (북부고속도로), 멜번 1곳 (하이델베르크 보훈병원) 등 두 개의 ‘가평 다리’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며 그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왕립 호주연대 3대대 (약 960 명)가 가평 504지에 배치되어 10배가 넘는 중공군 118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것” 때문이라고 했다. “조용한 은둔의 나라 코리아 (Korea)를 위해 호주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달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자유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해석했다. 또한 호주군을 파병한 로버트 멘지스 총리의 고모 벨레 멘지스 (Belle Menzies, 1856 ~ 1935)는 “130년 전인 1891년에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온 최초의 여자 선교사였다.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으로 한국에 온 그녀는 미오라 고아원 사역과 함께 1895년 한강 이남 최초의 여학교이자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알려진 일신여학교를 설립했다”며 호주와 한국의 130년 우정을 통해본 인문학적 가치를 나누며 강연을 마무리하고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현재 린필드에서는 목요일 (1, 3주 목요일 오후 7시)에, 리드컴에서는 수요일 (2, 4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모임을 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다음 린필드 목요모임은 전반기 종강으로 방학후 2023년 8월 3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후반기 개강모임을 갖는다. 리드컴 수요모임은 6월 14일 (수) 오전 10시, 새벽종소리 명성교회 새신자실 (31 East St. Lidcombe)에서 대면으로 모인다.
○ 시드니인문학교실 모임 안내
– 린필드 목요모임 (1, 3주 목요일)은 6-7월 방학후 8월 후반기 개강 모임
.후반기 개강일시: 2023년 8월 3일 (목) 오후 7시 ~ 9시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주제: 인문학의 주제 – 사람 (Saram) 3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임)
.문의: 주경식 (0401 017 989, [email protected]) / 임운규 (0425 050 013, [email protected])
– 리드컴 수요모임 (2, 4주 수요일) 6월 모임
.일시: 2023년 6월 14일 (수) 오전 10시 ~ 12시
.장소: 새벽종소리 명성교회 새신자실 (31 East St. Lidcombe)
(대면모임)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문의: 천옥영 0422 712 235
시드니인문학교실 (2023년 5월 18일 강의) 강연 전문
시드니인문학교실
호주와 한국의 130년 우정을 통해본 인문학
1. 인문학의 주제, 인간과 역사
인문학은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존재, 더 나아가서 인간의 삶, 인간의 생각 (사고, 思考)과 인간다움의 본질 등 인간의 근원문제에 관해 성찰하고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변적, 비판적, 그리고 분석적으로 접근해서 인간 본질의 정수를 다루고 성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때로 인문학은 인문과학 (人文 科學)의 줄임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때 인문과학에서 다루는 분야는 바로 “문사철”, 문학, 역사, 철학이다. 이러한 분야들을 통하여 인간됨, 인간본질의 정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의 근원문제등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목표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인식을 높이고 인류적 가치와 이해관계를 향상시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문학은 역사와 문화의 유산을 보존하며,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에 대해 탐구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해석과 이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고민은 단일한 정답이나 자연과학처럼 공식적인 이론을 추구하기 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존중하며, 이러한 성찰과 논의를 통해 인간 삶의 경험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과 비판적 사고를 수행하여 ‘인간됨의 정수’를 밝히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단순한 지식의 증진을 넘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인간성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탐구의 주제는 호주와 한국의 130년의 우정을 통해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의 보편적 가치와 역할을 살펴보고 이것을 통해 인간됨의 본질을 성찰해 보고자 한다.
2. 호주의 길에도 철학이
한국은 2014 년부터 주소 표기를 전면 개정했다. 이전의 지번(번지) 주소 표기에서 도로명 표기로 바꾼 것이다. 기존의 지번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사용) 주소를 이용하여 건물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고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지번 배열이 무질서하게 이루어져 행정상 문제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호주를 포함해 대부분의 서구 도시들은 주소가 도로명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호주는 도로 (길)명 주소로 집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호주의 길 (도로)에 붙는 도로명을 보면 여러 종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Road (Rd)는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가는 대체적으로 큰 길, 큰 도 에 붙여진다.
Street (St)는 주로 한 마을 안에 있는 길 이름으로 집과 빌딩이 있는 일반적인 도로명이다. Drive (Dr)는 주로 스트릿 (Street)보다 작은 도로로 빌딩보다는 집이 있는 곳에 있는 길이다. Avenue (Ave)는 자갈을 깔거나 돌로 만들어진 스트릿 (Street), 또는 길 양옆에 나무가 심어 져 있는 길로 주로 부자 동네에 많은 이름이다. Way는 시티나 다운타운이 아닌 작은 동네에 있는 작은 도로이다. Court는 아주 짧은 길을 일컫는다. Glade는 나무가 많은 숲이나 삼림 안에 열려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Highway (Hwy)는 고속도로 등 아주 넓고 교통량이 많은 넒은 길을 의미한다. 이외에 Motorway, Freeway, Expressway 등도 있다. Boulevard (Blvd)는 Avenue와 비슷하지만 Avenue 보다 넓은 길을 의미한다. 길 중간에 꽃과 나무 등 조경이 잘되어 있고 경치가 좋은 길을 의미한다.
이외에 길의 모양에 따라 Circus, Circle, Circuit, Close: 길이 동그랗거나 막힌 곳을 말한다. Square, 이 길은 말 그대로 네모나 모양의 길을 의미한다. 이렇듯 호주의 길 (도로)은 같은 길이라도 특징과 의미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길 (도로) 이름 앞에 붙는 명칭은 주로 사람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길 이름은 Smith 또는 William 이름이 들어가는 길이름이다. 그런데 호주 마을의 길 이름이 서구인들의 이름 대신 한국의 지명인 ‘가평’ (Kapyong)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3. 호주에 웬 가평 길 (Kapyong Street)이
호주의 마을 곳곳에 한국식 이름의 길 이름이 있다. 바로 ‘가평 길’ (Kapyong Street)이 그 것이다. 왜? 호주의 도로명에 한국의 지역이름인 ‘가평’ (Kapyong) 이름이 사용되었을까? 그것도 호주 전 지역에 걸쳐 10 개나 되는 ‘가평 길’ (Kapyong St)이 있고, 2 개의 ‘가평 다리’ (Kapyong Bridge)가 존재하고 있다.
현재까지 호주 전 지역에 걸쳐, 시드니에 3곳 (벨로즈, 맥마스터 비치, 바르디아), 콥스하버 1 곳, 캔버라에 1곳 (캠프벨), 브리즈번 2곳 (카불처, 코코다 부대), 골드코스트 1곳 (아룬델), 타운스빌 1곳 (라바락 부대내), 퍼스 1곳 (카라카타) 이렇게 10개의 ‘가평 길’이 확인되었고, 아들레이드 1곳 (북부고속도로), 멜번 1곳 (하이델베르크 보훈병원) 등 두 개의 ‘가평 다리’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 시드니 벨로즈 (Belrose)에 있는 가평 스트리드 (Kapyong St)
이억 만리 호주에서 한국의 지명인 ‘가평’이 호주의 길이름과 다리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움과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 아들레이드 북부 고속도로 (Northern expressway)에 있는 가평다리
4. 가평 Kapyong, 희생과 영광
사실 호주 군인들을 포함 그들의 가족 그리고 호주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평, Kapyong’ 이라고 하는 한국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평’이라 는 단어가 ‘희생과 영광’을 상징하는 말로 호주인들에게는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주는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이어 영연방 국가로 두 번째로 연합군을 보낸 한국의 혈맹국가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한지 이틀 후 6월 27일 곧바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정되었다. 그 후 호주 정부는 한국과 수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이 안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곧바로 병력을 파견한다. 특히 호주는 영국과 뉴질랜드보다 몇 시간 전에 파병을 공식 발표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일환으로 호주는 먼저 6월 30일 영연방 극동 해군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던 2척의 구축함을 파견하였고 그리고 뒤이어 7월 1일 왕립호주 공군(RAAF) 소속 제 77 전투비행대대를 미 극동공군 사령부로 급파하였다. 그리고 9월 27일 에는 960명의 왕립호주연대 제 3대대가 제 1진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연합군과 합류하여 북한국과 싸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호주는 한국전쟁 기간중 2개 보병 대대와 항공모함을 포함한 9척의 함정, 그리고 1개 비행대대와 1개 수송기편대를 파견하 는 등 연인원 1만 7,164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로버트 멘지스 호주 수상은 연설에서 “우리의 참전 결정은 결코 유엔헌장의 규정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그 정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히며 국제평화를 추구하고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 호주 제 12대 총리 로버트 멘지스 총리 △ 윈스톤 처칠 수상과 함께 있는 로버트 멘지스 수상
당시 제1진으로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던 왕립 호주연대 제 3대대는 10월 10일 개성 북동쪽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영유리전투, 정주-박천 전투, 가평전투와 마량산전투 등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 중 호주군이 참가한 전투중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전투는 바로 가평전투이다.
5. 가평 (Kapyong)으로 이어진 호주와 한국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팽덕회 사령관이 이끄는 중공군 118사단은 4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전략적으로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고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려고 했다.
대공세를 펼치며 남하하던 중공군은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하고, 4월 23일 밤 10시경 중공 군 118사단 선두 연대는 가평을 신속히 점령할 목적으로 가평 계곡을 따라 진격하던 중 호주군의 방어에 기세가 꺾였다. 왕립 호주연대 3대대 (약 960명)가 가평 504지에 배치되어 10배가 넘는 중공군 118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주춤했던 중공군은 이튿날인 24일 새벽 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해 왔다. 그 후 밤새 호주군 3대대와 중공군의 밀리고 밀치는 전투는 24 일 아침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급히 철수했다.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 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호주군 1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을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는 전쟁 역사에 믿기 어려운 전과를 올린 것이다. 한국 전쟁사에서는 당시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가 가평에서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국 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타운스빌 제3대대 박물관에 있는 기념비 △제 3대대가 미국 투르만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이 전투로 가평 전투에 참여한 왕립 호주연대 제 3대대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훈장을 받았다. 이후로 왕립 호주연대 제 3대대는‘가평대대’ (Kapyong Battalion)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리고 ‘가평, Kapyong’은 호주인들에게 ‘희생’과 ‘영광’이라는 단어로 기억 되고 있는 것이다. 호주는 한국전쟁에서 34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을 잃었고, 1천 216명이나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6.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로버트 멘지스 총리와 한국의 인연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상이 이루어졌다. 한국인들에게는 6.25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6.25 전쟁을 한국 전쟁 (Korean War)으로 부르고 있다. 호주 역시 6.25 전쟁을 ‘Korean War’- 한국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은 한국 전쟁을 부르는 또 다른 별칭이다. 우리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아픔이지만, 서구에서는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6·25 한국전쟁이 제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해 생겨난 별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참전국의 숫자나 사상자의 규모 그리고 전쟁기간으로 따져볼 때 제 2차 세계대전이후 벌어진 전쟁 가운데 매우 큰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호주는 한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병력을 파병한 은인 의 나라이다. UN 군의 일원으로 총 16개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호주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결정하고 육군은 2개 보병대대 (왕립호주연대 3대대와 2대대), 해군은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프리깃 1척, 공군은 1개 전투비행대대 (77전투비행대대)와 1개 수송비행편대 등, 육해공군 전군에 걸쳐 연인원 1만 7천 164명의 군사들을 보낸 나라이다.
조용한 은둔의 나라 코리아 (Korea)를 위해 호주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달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자유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서구사 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더더구나 1950년대에는 일반적인 호주인이라면 한국을 잘 모를 때이다. 그렇지만 호주의 제 12대 수상이자 가장 오랫동안 호주의 수상을 지낸 로버트 멘지스 (Robert Gordon Menzies, 1894-1978) 총리는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고모 벨레 멘지스를 통해 한국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벨레 멘지스 (Belle Menzies, 1856~1935)는 130년 전인 1891년에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온 최초의 여자 선교사였다.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으로 한국에 온 그녀는 미오라 고아원 사역과 함께 1895년 한강 이남 최초의 여학교이자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알려진 일신여학교를 설립했다.
△ 벨레 멘지스 (Belle Menzies,1856~1935) 1891년부터 1924년까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 선교사
벨레 멘지스는 낙후된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지원하여,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 (PWMU)의 파송을 받고 1891년 10월 부산에 도착했다. 그후 멘지스는 부산의 좌천동에 정착하여 여성 및 아동교육과 구제의 일을 수행하며 고아들을 위한 사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1893년 부산 지방 최초의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바로 미오라 고아원이었다. 미오라 (Myoora)의 의미는 호주 애보리진 말로 ‘휴양지’ ‘안식처’란 뜻이었는데 고아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
뿐만 아니라 벨레 멘지스는 한강 이남의 최초의 여학교를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일신여학 교’ 였다. 이 학교는 이 학교는 1893년에 시작된 고아원 설립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날로 새롭다’는 뜻의 일신여학교는 여성 교육이 무시되거나 경시되던 때에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벨레 멘지스는 2022년 5월에 호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훈장을 받았다. 작년에 세 명의 호주 여성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독립유공훈장을 받았는데 첫 번째가 벨레 멘지스 교장이고 같은 일신여학교 교사였던 마가렛 데이비스, 데이지 호킹이 독립유공 훈장을 받았다.
작년 2월까지 독립유공자 숫자는 1만 7,06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1만 칠천 명 가량 되고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72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외국인 독립유공자가운데서도 여성이 받은 경우는 5명밖에 되지 않는 다. 미국, 중국 등 외국인 독립유공자들이 있지만 호주인으로 그것도 여성이 독립유공자 상을 받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며 호주로서는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919년 일신여학교가 주도한 만세 시위는 부산, 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시위에 참여한 일신여학교 한국인 교사와 학생 등 12명은 이미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당시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이곳에서 성경과 영어, 조선어 등을 포함한 근대 교육을 받으며 개화의식을 길렀고 남녀평등의식과 민족의식, 자주 독립정신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많은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와 여성 지도자들 (양한나, 박순천, 주경애, 공덕귀, 박차정-김원봉 아내 등)이 일신여학교를 통해 배출되었다.
한국 국가보훈처도 당시 호주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이 일제시기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 내는 모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부산 경남지역의 3.1 운동의 효시가 된 것을 인정한 것이 다.
1961년 로버트 멘지스가 수상으로 재직할 대 한국과 호주는 정부간 공식 수교가 체결됐다. 그러나 국가간의 공식적 수교가 맺어지기도 전에 호주와 한국은 이미 벨레 멘지스를 포함 한 많은 호주 선교사들의 희생과 인류애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다. 부산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풍습,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역주민들과 우정을 쌓아갔고 특히 생활이 어려운 한국인들을 돌보는 가운데 병원, 학교 등 사회기반 시설을 설립하여 한국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은자의 나라’ 한국을 위해 과감하게 로버트 멘지스가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고모 벨레 멘지스를 통해 듣게 된 한국을 알지 못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수교란 정치 경제, 외교적 이익을 담보하지 않고 체결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1960년에는 남한의 GDP는 북한보다 낮았고, 아프리가 가나와 비슷했다. 전 세계 국가중 가장 못사는 나라에 속할 정도로 어려운 처지였지만 호주는 인도적 정신으로 한국과 수교를 맺고 한국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1950년 한국이 6.25 전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두 번째로 용감하게 한국을 위해 병사들을 파병하고 1961년 한국의 국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한국과 수교를 맺은 로버트 멘지스 총리는 바로 1895년 부산에 일신여고를 세운 벨레 멘지스 선교사의 조카이기도 했지만 본인 자신이 휴머니스트였었다.
7. 호주와 한국의 130년 우정을 통해본 인문학적 가치
오늘날의 사회는 고도로 산업화, 기계화되면서 인간을 이러한 문명발달의 산물로 취급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인간을 기계와 같은 수단으로만 여기는 의식이 사회 문화 전반에 팽배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AI의 등장과, 버추얼 가상현실이 점점 인간의 현실에 많은 영향을 끼쳐가고 있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인문학의 목적을 다시금 곱씹게 한다.
인간에게 인간은 무엇인가? 과연 인류란 무엇인가? 인류는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이다.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을 받아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어려움과 위기에 빠져있을 때 인간적으로 돕고 존중해야만 한다. 이는 인종이나 지역, 또는 출신과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라면 반드시 공통적으로 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왜 필요할까? 그것은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 다. 인간은 혼자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의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자가 쓴 <인류의 기원>이라는 책에는 인류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게 된 배경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다치고, 노쇠한 약자들이 오래 살 수 있도록 젊고 건강한 사람 들이 돌봐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약자에 대한 배려와 공존에 대한 경험에 의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조지아 공화국의 드마니시 유적에서 178만 년 전에 살았던 늙은 남성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그 화석은 윗턱과 아랫턱의 뼈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늙은 남성의 이빨이 이미 죽기 전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이빨이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같이 거주하던 공동체 가운데 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뜻이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는 적어도 수만 년 이상 지구상에서 함께 존재하였으나 2만 5천년 ~ 4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은 지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원인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류는 현생 인류에 비해 뇌의 크기나 근육의 힘이 더 우세하였다는 점은 화석으로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였고,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건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인류애를 발휘하는 공동체에 훨씬 더 익숙했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개체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공존, 즉 인류애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주경식 교수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호주기독교대학 ACT 신학부 교수)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