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대한민국의 시인•소설가 월탄 (月灘) 박종화 (朴鍾和, 1901 ~ 1981) 시 모음
*나그네의 길
저녁의 밥거리를 맨들랴하는
마을마다 일어나는 푸른연기는
이몸이 길것는 시름노래와
날러흐터져 어느곳으로.
들방아 찟는 젊은여자의
곱다란 간으른 노래소리여
나그네의 마음이 어즈러워라.
거리에 가득한 달의넉꿈을
이몸은 말을달려 깨우랴하니
쏘다지는 아지못할 더운눈물이
긋칠줄을 몰으고 소사흐른다.
– 이해와 감상 : 1~3연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나그네’가 되어 먼 길을 가는 주체의 슬픔이 드러난다. 4연에서 나그네의 서러움은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를 때 더 깊어진다. ‘길 걷는 시름 노래’에서 ‘길을 걷는 시름’은 나그네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길’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떠나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주체의 운명, 즉 나그네의 삶 자체이다. 마을에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의 일상이 소리를 통해 전해져온다. 그러므로 주체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 주체가 선 ‘거리’는 나그네의 여정(旅情)이 아닌 그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이 된다.
*밀실로 돌아가다
달 먹는 거리에 피리소리 같은
저 젊은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그것이 참 삶의 노래리까,
퍼런 곰팡내 나는 낡은 무덤 속에
썩은 해골과 같은
거리거리마다 즐비하게 늘어선 그것이,
삶의 즐거움이 흐르는 곳이리까
아- 나는 돌아가다, 캄캄한 내 밀실로 돌아가다.
(중략)
오- 검이여 참 삶을 주소서,
그것이 만일 이 세상에 얻을 수 없다 하거든
열쇠를 주소서
죽음 나라의 열쇠를 주소서
참 ‘삶’의 있는 곳을 찾으려 하여
명부(冥府)의 순례자- 되겠나이다.
- 이해와 감상 : 화자가 생각하기에 거리의 사람들은 사실 “퍼런 곰팡내 나는 낡은 무덤 속에/ 썩은 해골”과 같은 존재일 뿐이며, 그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 또한 ‘참 삶의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거리를 떠나 만수향 냄새가 나는 자신의 캄캄한 밀실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검님께 ‘참 삶’을 달라고 기도한다. 만약 ‘참 삶’이라는 것이 현재 속한 이 세계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죽음 나라로 넘어가 ‘참 삶’을 찾는 순례자가 되겠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지점에서 죽음이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동시에 ‘참된 삶’을 얻게 해 주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死)의 예찬(禮讚)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때 아니다.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번쩍거리는 진리는 이곳에 있지 아니하냐.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분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직 못할 한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고웁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고 웃으나
바람 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 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참을 얻을 수 없나니
분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 이해와 감상 : 박종화의 초기 시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이 작품은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의 퇴폐적·세기말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탈리아의 작가 ‘단눈치오’의 탐미적 소설 「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다고 한다. 『백조』류의 ‘병적 낭만주의’의 전형으로 시사(詩史)적 의의가 있다.
이 시는 현실 도피성 문학의 대명사로, 현실을 떠난 죽음의 세계에서 진리와 영원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음에 대한 표면적 현상만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본질적 성격을 노래함으로써 생의 부정이 아닌 생의 차원 높은 긍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자가 희구하는 죽음의 세계는 ‘장엄한 칠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로 ‘영겁’ 위에 ‘생명’, ‘참’,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참다운 생명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고자 하나, 그곳은 구도 정신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 높은 경지이다.
*청자부 (靑磁賦)
선 (線)은
가냘픈 푸른 선은ㅡ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 (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에
사월 훈풍 (薰風)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陰影)을 더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翡翠)여
가을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하늘 한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玉)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七寶)무늬
꽃무늬 백학(白鶴)무늬
보상화문(寶相華文) 불타(佛陀)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라
진흙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청자기!
– 이해와 감상 :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청자나 석굴암 대불 등을 소재로 삼아 시를 쓰는 일이 심심해 보일 수도 있으나, 어떤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라가 없어져 버리고 나랏말을 공공연히 사용할 수 없었던 시절, 수천년래의 우리 문화가 종언을 고할 위험 앞에 있었던 시절, 또는 무엇이 우리의 것이며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 지에 대해 고뇌하던 시절에 위와 같은 종류의 소재로 시를 쓰는 일은 큰 의의가 있었다.
이 시는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작품이다. 제 1연에서는 전체적인 청자의 맵씨있는 선을 그리고 있으며, 제 2연은 신비로운 비취빛을 가을하늘에 비유하여 찬탄하고 있다. 이어 제 3연에서는 경이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청자가 천년이나 묵은 것임을 간결하게 환기한 후 제 4연에서는 청자의 다양한 종류를 열거하였으며, 제 5연에서는 그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청자를 장식한 세부적인 무늬의 종류를 열거하였다.
박종화 (朴鍾和, 1901 ~ 1981, 월탄)
서울 출생으로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시 전문지 《장미촌》에 〈오뇌의 무도> , 〈우유빛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1921년)하였고, 1922년 문학잡지 《백조》 동인에 참여하며 홍사용, 박영희 등과 함께 일명 백조파를 형성했다. 시집에는 〈흑방비곡(黑房秘曲)), 〉(1924년), 〈청자부(靑磁賦)〉(1946년) 등이 있다.
초기에는 낭만적인 분위기의 시를 쓰다가 점차 한국의 역사와 문화 유산에 관심을 돌리면서 역사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1938년), <다정불심〉(1942년), 〈대춘부〉(1938년), <임진왜란〉(1957년), 〈목 매이는 여자〉, <아랑의 정조〉, 〈대춘부〉, <여인천하〉, 〈자고 가는 저 구름아〉(1965) 등을 발표했다.
박종화의 외아들이 소설가 현진건의 딸과 결혼하여 두 사람은 사돈 관계이며,박종화의 호를 딴 월탄문학상이 제정되어 있다. 문학비, 묘소 : 경기도 장흥면 부곡1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