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대한민국의 시인 오탁번 (吳鐸蕃, 1943 ~ 2023)의 시 모음
오탁번 (吳鐸蕃, 1943년 7월 3일 ~ 2023년 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와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7년 제12회 한국문학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23년 2월 14일에 별세했다. 향년 79세

○ 폭설 暴雪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좃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_ 시향 / 2006년 봄호
○ 철새
우리 혼인생활 30년에
밑줄 그을 만한 뜨거운 사랑 없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를 만한
기쁨 없었지만
아내여 미운 아내여
다음 생에서 또 만나
하늘을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날개를 접고
가을 논에 흩어져 있는 햅쌀을
냠냠냠 쪼아먹는
기러기 눈빛을 한
철새나 될까 몰라
아내여 미운 아내여 _ 벙어리장갑 / 문학사상사, 2002, 73쪽
○ 우포늪
우포늪이 토해 내는 울음소리를 듣고
귀 밝은 하늘이 내려왔다
그 후 하늘은
1억 4천만 년 동안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영 않고
우포늪에서 살고 있다
흰뺨검둥오리 알이
하늘빛을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미하는 실잠자리들이
물수제비 그리며
우포늪을 간지럽힌다
먼 북극의 빙하가
늦잠 자는 하늘을 깨우느라고
바다로 툭 떨어진다
산란하는 붕어가
물풀 사이로 숨는다 _ 벙어리장갑 / 문학사상사, 2002
○ 아빠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에헴, 아빠는 어릴 때
잉크가 어는 방에서 공부를 했다!
아빠는 이글루에서 살았나? _ 벙어리장갑 / 문학사상사, 2002, 35쪽
○ 저녁연기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저녁연기 같은 것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시란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답한 산문시 같은 산문 위의 ‘저녁연기‘로 시가 되었다
○ 기차 汽車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 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 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 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울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_ 시집 『손님』 (황금알, 2006)
○ 그냥커피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_ 밥냄새 /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 밥냄새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_ 밥냄새 /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 죽음에 관하여
1
왼쪽 머리가
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
나뭇가지 휘도록 눈이 내린 세모에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나는 넘어졌다
하루에 링거 주사 세 대씩 맞고
설날 아침엔 병실에서 떡국을 먹었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가
첩자처럼 병실을 드나들었다
수술 받다가 내가 죽으면
눈물 흘기는 사람 참 많을까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비로소 저를 미워할까
나는 새벽마다 눈물지었다
2
두통이 가신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듯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뜩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_ 벙어리장갑 / 문학사상사, 2002, 88~9쪽
○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냐?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의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가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술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_ 생각나지 않는 꿈
○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 겨울강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얀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의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든다 _ 오탁번 시전집 / 태학사, 2003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