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대한민국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 (朴寅煥, 1926 ∼ 1956) 시 모음

시인 박인환 (朴寅煥)은 1926 강원도 인제생. 경성 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수료. 1945년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등과 알게 되었고, 김경린, 김수영 등과 어울렸다. 1946년 12월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였고, 47년엔 <신천지>에 ‘남풍’을 발표, 1949년 김경린, 임호권, 박인환, 양명식 등 5인의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다.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얼굴 –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싫은 까닭이다
깃을 꽂고 산들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제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행복 – 박인환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 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거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띠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 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 벽 – 박인환
그것은 분명히 어제의 것이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헤어질 때에
그것은 너무도 무정하였다
하루 종일 나는 그것과 만난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접근하는 것
그것은 너무도 불길을 상징고 있다.
옛날 그 위에 명화가 그려졌다 하여
즐거워하던 예술가들은
모조리 죽었다.
지금 거기엔 파리와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격문과 정치 포스터가 붙어 있었을 뿐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것은 감성도 이성도 잃은
멸망의 그림자
그것은 문명과 진화를 장해하는
사탄의 사도
나는 그것이 보기 싫다.
그것은 밤낮으로
나를 가로막기 때문에
나는 한점의 피도 없이
말라 버리고
여왕이 부르시는 노래와
나의 이름도 듣지 못한다.
○ 거리 – 박인환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 갔다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 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의 수목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 세 사람의 가족 – 박인환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플랫폼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 낙하 – 박인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 불행한 신 – 박인환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새없이 내 귀에 울려 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 구름 – 박인환
어린 생각이 부서진 하늘에
어머니 구름 작은 구름들이
사나운 바람을 벗어난다.
밤비는
구름의 층계를 뛰어내려
우리에게 봄을 알려 주고
모든 것이 생명을 찾았을 때
달빛은 구름 사이로
지상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새벽 문을 여니
안개보다 따스한 호흡으로
나를 안아주던 구름이여
시간은 흘러가
네 모습은 또다시 하늘에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전형
서로 손 잡고 모이면
크게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괴로움으로 흘러가는 구름
그러나 자유속에서
아름다운 석양 옆에서
헤매는 것이
얼마나 좋으니.
○ 검은 강 – 박인환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 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루운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退却)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 센티멘탈 쟈니 – 박인환
주말 여행
엽서 —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 싫은 예술가
오늘도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유사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목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아 센티멘탈 쟈니
센티멘탈 쟈니
○ 태평양에서 – 박인환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도 없고 태양도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키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 어린 딸에게 – 박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와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벼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럼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 한 줄기 눈물도 없이 – 박인환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전
제트기 박겨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각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 고향에 가서 – 박인환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 가을의 유혹 –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차처럼 또는
낙엽보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누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 전원 – 박인환
1
홀로 세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의 걸어온 길을
나의 굼길에서 부딪혀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한칸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우수수 낙엽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2
?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 전선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디론지 떠났다
비 나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새없이
눈앞으로 지낸다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는다
○ 열차 – 박인환
폭풍이 머문 장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플로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운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은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툰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 남풍 – 박인환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찌기 외복을 빼앗긴 토민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에서
쟈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쿠멜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은 온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 죽은 아포롱 – 박인환
- 이상 그가 떠난 날에
오늘은 3월 열 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오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이라고
– 박인환 (朴寅煥)
1926 강원도 인제생. 경성 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수료.
1945년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등과 알게 되었고, 김경린, 김수영 등과 어울렸다.
1946년 12월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였고, 47년엔 <신천지>에 ‘남풍’을 발표
1949년 김경린. 임호권. 박인환. 양명식 등 5인의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

박인환 (朴寅煥.1926.8.15∼1956.3.20)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ㆍ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ㆍ이한직(李漢稷)ㆍ김수영(金洙暎)ㆍ김경린(金璟麟)ㆍ오장환(吳章煥)ㆍ김기림(金起林)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김병욱(金秉旭)ㆍ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ㆍ김규동(金奎東)ㆍ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ㆍ김경린ㆍ양병식(梁秉植)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30세로 요절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세형(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유적지】
(1) 생가터 : 강원도 인제군 남북리 303번지에서 살았다는 이야기(확인 불명)
(2) 시비 : 군축령에 세워졌던 시비는 도로 확장 관계로 철거, 군청 창고에 보관

【작품세계】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1940년대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이 제창한 반자연(反自然)ㆍ반서정(反抒情)의 기치에 1940년대 후반의 시대고(苦)가 덧붙여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도시적인 동시에 인생파적인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기타 동인의 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 인식과 새로운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소재는 주로 해방 후의 혼란, 6ㆍ25, 도시생활에서 취했으며, 현대 도시 문명의 퇴폐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우수(憂愁)를 표현하였다.
해방 후 <신시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후반기] 동인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전후문단의 총아로 군림했던 박인환, 10년간의 문단 생활을 통하여 숱한 일화와 화제를 뿌리다가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박인환에 대해서 우리는 그 풍문들에 갇혀 그의 시세계의 실상을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1950년대 풍운아, 앙팡테리블, 문단의 게릴라 명동 백작 등등 박인환에게 부여된 수많은 익명의 형상들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박인환의 참모습이 오히려 가려진 형국이다.
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가 고백했듯이 어떤 시대보다 혼란하고 불안정한 연대에 살다가 31세의 짧은 나이로 비극적 생애를 마감했다. 젊은 나이에 청소년기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내고, 해방 후의 극심한 좌우익의 혼란 상황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을 종군 기자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박인환의 30년간의 삶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세계는 격동의 현대사를 조망하는 하나의 관측구의 의미를 갖는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두 가지 베일로 가려져 있다.
하나는 문단사적인 베일이고, 또 하나는 모더니즘의 베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문단의 풍운아였던 만큼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나 문단의 화제에 의해서 박인환의 시가 재단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단인과 시인은 다르다는 점이다. 경박한 포즈로 문단 주변에 화제를 뿌렸을망정 시세계 역시 경박하라는 법은 없다. 또 하나는 박인환의 시를 모더니즘의 자로만 평가하려는 경향이다. 이 역시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자처했던 박인이었던 만큼 자연스런 결과였는지 모르나 분명 또 다른 시세계가 그의 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댄디한 풍모 뒤에 깊은 우수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암울한 리얼리즘의 시세계가 모더니즘의 이면에 펼쳐져 있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가려진 이러한 두 가지 베일을 벗겨내야 한다. 그 동안 박인환에 대한 기존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모더니즘 쪽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195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박인환은 모더니즘의 세계로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기수로 자처했지만 실로 모더니즘의 정신과 기법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박인환 역시 모더니즘에는 실패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8ㆍ15 직후에 씌어진 비판적 리얼리즘 시나 6ㆍ25 체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 인식의 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1950년대적인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절망과 좌절의 불안과 고독 등 실존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1950년대 전후문학의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도시 문명을 소재로 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 해방 현실과 6ㆍ25 체험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계열을 시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축이 박인환 시세계를 형성하는 기본 구도이다.
일제 강점기 8ㆍ15와 6ㆍ25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몸으로 문학과 예술의 혼을 불태워 한국 문학사의 새 길을 밝히고자 했던 박인환. 만 30세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새시대의 문화 공간과 정신사적 지표의 중심에 서서 화전민 세대로서 이 땅의 척박한 문화 풍토를 개간코자 했던 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문학사는 그만큼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를 한국 문학사의 뒤안길에서 숱한 화제와 풍문들을 뿌려 한국 문학의 신화를 잉태했던 박인환, 그래서 그의 문학은 그의 삶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그의 시에 보이는 도저한 허무의식과 죽음 의식은 1950년대를 풍미한 실존적 정신 상황에 그대로 직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학은 가장 당대적인 것이고 박인환 자신 역시 전문 문단의 대표적인 개인이요, 문제적인 개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위안으로서의 문학, 박인환 문학의 본질은 그것이다. 전쟁의 극한 상황과 허무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당대인들에게 한줄기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건넴으로써 조그마한 정신적 안식처를 마련해 준 것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었다.
시인의 역할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고 삶의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라면 박인환은 시인으로서 그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 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1950년대 정신 풍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아노미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지금도 정서적 공감 속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박인환의 꿈과 좌절 뒤에는 이카로스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초날개를 만들어 비상의 날갯짓을 하다 지중해 바다에 추락한 이카로스의 꿈과 좌절 그래서 그는 한국문단의 이카로스일 수밖에 없다. [후반기]의 열망과 만 30세의 요절이 박인환의 꿈과 좌절을 상징하고 있다. 박인환의 꿈과 문학은 완료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 그가 살던 시대와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삶과 문학을 살피는 일은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일이 된다.

【연보】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3년제 입학
1945년 광복 후 학교를 중단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
1948년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를 폐업.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 제1집을 발간. 자유신문사에 입사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5인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경향신문사에 입사. 동인 그룹 [후반기] 발족.
1951년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 종군 기자로 활동. [후반기] 동인 활동.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
1953년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의 해산이 결정됨
1955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 대한해운공사 퇴사. <박인환선시집(選詩集)>간행
1956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작품】
<거리>(1946.국제신보) <남풍>(1947) <군상(群像)>(1947)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1948)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신천지) <지하실>(1948.민성)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5人 합동시집) <열차>(1949.개벽) <인천항>(1949) <종말>(1952) <눈을 뜨고도>(1954) <밤의 미래장>(1954) *<목마와 숙녀>(1955) <투명한 버라이티>(1955.현대문학) <죽은 아포롱>(1956.동아일보) <뇌호내해>(1956.문학예술) <침울한 바다>(1956.현대문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1949.합동시집) <박인환선시집>(1955.산호장), <목마와 숙녀>(1976.근역서재)

<박인환의 시세계> – 이동하(문학평론가)
한국의 근대시사 가운데서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1960년의 4ㆍ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덜 논의된 부분에 속한다. 그 이전의 시, 즉 20년대에 나온 시나 30년대에 나온 시들은 학계와 비평계 양쪽에서 거듭거듭 다루어졌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앤솔러지도 심심찮게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시인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 그리고 4ㆍ19 이후의 시들 역시,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20년대 혹은 30년대의 시와 다를 바 없다. 이 시기의 시들은 아직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비평계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아 왔다는 점, 그리고 신작시집이나 시선집의 형태로 일반 독자들에게 거듭거듭 소개되어왔다는 점으로 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친숙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해방에서 4ㆍ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과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 몇몇 ‘스타 시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의 시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 의해서나 일반 대중에 의해서나 거의 외면되어 오다시피 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많은 시와 시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흘러 다니는 사태가 빚어지게 되었다. 왜 이 모양이 되고 말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 해방에서 4ㆍ19에 이르는 시기 자체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소 모호한 위치에 놓인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보수적인 학계의 시각에서 보면,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가깝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런가 하면, 비평계나 일반 독자층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멀기 때문에 동시대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또 너무 멀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 이 시대의 시는 놓여 있는 셈이다.
둘째,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이나 해방 이후에 등단했다 하더라도 예외적인 위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몇몇 시인들(여기에는 앞서 이름을 들었던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뿐 아니라 그 밖에도 몇 명이 더 추가되어야 마땅하다)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에 나온 시작품들은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을 결여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하필 그 시대에 재주 없는 사람들이 시단으로 많이 몰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 활동한 시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까닭에 우리말을 다루는 데는 지극히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체로 성년의 문턱으로 접어들거나 청년기를 끝내갈 무렵에 4ㆍ19의 대지진을 만나 심각한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바로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셋째, 아무리 위에서 말한 시기상의 모호성과 이 시대 시 자체의 매력 없음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역시 완전히 빼놓을 수는 없는 또 한 가지 원인으로서, 우리 시대 비평가들의 지나친 편식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이유란 학계와 일반 독자층을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만 비평계를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동시대적인 관심을 촉발하지 않더라도, 또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일단은 성실하게, 폭넓게 읽고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는 것이 비평가의 직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시기에 활동한 시인들 중 해방 전에 등단한 사람들과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 소수만을 주목하고 나머지는 내몰라라 방치해온 대다수 비평가들의 자세는 결코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나는 해방에서부터 4ㆍ19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시가 다른 시기의 우리 시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밖에 모아오지 못했으며, 그 결과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부유하는 사태가 현출되었음을 말하고 그렇게 된 이유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본 셈이거니와, 박인환(1926∼1956)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예증해주는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그와 같은 판단이 가능하다.
첫째, 박인환이 시작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거리>라는 작품을 [국제신보]에 발표하여 데뷔한 1946년 12월부터 <죽은 아포롱>을 발표한 1956년 3월까지에 걸쳐 있으며, <죽은 아포롱>이 발표된 지 3일 후에는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거니와, 이로써 볼 때 그의 시적 생애 전체가 해방에서 4ㆍ19까지에 이르는 시기 안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이 시기를 떠나서는 전혀 논의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둘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지금껏 전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특히 일관된 프로그램에 근거하여 다수의 시인론을 기획, 청탁, 수록한 논문집 혹은 평론집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언급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고 순전히 그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자발적 관심에 기초하여 논문이나 평론이 씌어진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셋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이처럼 희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에 대한 가십 차원의 풍문은 대단히 풍부하고 또 화려한 편이다. 박 인환은 아마 이 점에 있어서는 1950년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1.2위를 다투는 존재일 것이다. 마리서사 시절의 낭만과 관련된 풍문들, 후반기 동인회를 둘러싼 얘기들, 환도 후 감상적 실존주의와 폐허의식의 물결에 휩싸인 명동을 누비고 다닌 이른바 명동백작 시절의 에피소드들, 박 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인 작품 <세월이 가면>에 얽힌 얘기들, 영화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얘기들, 그리고 그의 불행한 요절에 관련된 얘기들, 이런 풍문 차원의 얘기들이 그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정작 그의 시작품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인 것이다.
넷째, 그가 남긴 시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에는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내가 ‘전부’라 하지 않고 ‘대부분’이라 한 것은, 예컨대 <목마와 숙녀> 같은 예외적 존재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마와 숙녀>는 전문적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일반 독자들로부터는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은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존재이다. <목마와 숙녀>나 이진섭에 의해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세월이 가면> 정도를 제외하면, 박 인환의 시 가운데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다섯째, 박인환이 이처럼 상당히 한정된 수준의 성과밖에 남기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일부로서 우리는 그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에 속하며 또한 청년기에 4ㆍ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가 일본어로 교육받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 있는 우리말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은 사실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가 청년기에 4ㆍ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세계를 침착하게,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애쓰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고 추상적인 울분과 센티멘털리즘으로 시종했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 역시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다섯 가지 항목을 잘 음미해보면, 박인환이야말로 해방에서 4ㆍ19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우리 시의 전개과정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전형성에 도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앞으로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질 경우, 어쩌면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며, 그때에는 지금 내가 박인환에게 붙인 전형성의 패찰을 도로 떼어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문단수첩 – 박인환> – 이근배 : 동아일보(1990. 10. 19)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우리의 한 시대를 휘젓고 간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은 그가 낙서처럼 술집에서 썼다는 <세월이 가면>의 노래 속에서 더 널리 기억되기도 한다. 사실 명동의 네온사인은 한두 개의 이름만으로 찬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동, 돌체, 서라벌, 갈채 등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 말고도 휘가로, 모나리자, 동방싸롱 같은 다방들과 골목에 박혀있던 유명무명의 술집들이 명동의 혼을 키운 숱한 예술가들의 이름과 더불어 명동의 역사를 남기고 갔다.
그 명멸하는 불빛 속에서 명동적인, 너무도 명동적인 시인이 박인환이다. 그는 해방 직후 종로3가에 [마리서사(唜莉書肆)]라는 서점을 하고 있었는데 단골손님이던 소설가 송지영(宋志英)을 만나 1946년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여 시인이 된다.
1949년 김경린(金璟麟), 양병식(梁秉植), 김수영(金洙暎), 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모더니즘의 운동으로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을 시인 장만영(張萬榮)이 경영하는 [산호장]에서 출판하여 단조롭던 한국시단에 새바람을 불어넣는다.
박인환은 늘씬한 키에 잘생긴 얼굴로 단박에 문단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조병화(趙炳華), 김수영(金洙暎), 박태진(朴泰鎭), 김광주(金光洲), 전봉래(全鳳來) 등과 다방과 술집에서 마음껏 시인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조병화 시인은 그때의 풍경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시(하늘)가 실린 석간이 나오자마자 인환 군은 나를 찾아다녔다. 그러자 ‘휘가로’에서 만났다. ‘병화, 네 시 좋더라’하면서 신문을 내밀었다. 나는 그때 김기림씨와 자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시를 신문 지상에서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감동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 ‘휘가로’의 분위기, 나는 처음 문학의 기쁨을 황홀하게 느꼈었다.”고. 그렇게들 한 편의 시가 사건적이었고 아름다운 우정들이었다.
박인환은 6ㆍ25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다간 청진동집에 숨어 살면서 김광균, 이봉래, 김경린 등과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그해 겨울 가족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 가서 [경향신문] 기자로 부산을 오르내리면서 [후반기] 동인의 재건에 힘쓴다.
아무래도 박인환의 절정은 처삼촌의 힘을 빌려 화물선 ‘남해호’를 타고 타코마, 에베레트, 안나코데스, 포틀랜드 등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순항하고 서울에 귀환한 1955년 무렵이었다.
<박인환 시선집>을 산호장에서 출판하고 왕성한 시작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1956년 2월 어느 날 ‘휘가로’ 다방에서 만난 송지영, 이진섭 등과 옆 골목의 허름한 술집 ‘경상도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거기서 가수 나애심(羅愛心)이 와 있었는데 술기운이 오른 그들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시켜도 듣지 않았다. 그때 박인환은 주머니에서 백지를 꺼내 <세월이 가면>을 써 내려갔다. 음악 평론가인 이진섭은 즉석에서 작곡을 했고 그것을 나애심에게 노래부르게 한 것이다.
작사, 작곡, 노래가 모두 즉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 모였던 다른 술꾼들에게는 더 없는 횡재였을 것이다. 나애심이 가고난 뒤 이봉구(李鳳九)와 테너 임만섭(林萬燮)이 등장, <세월이 가면>은 다시 임만섭의 신곡 발표로까지 이어진다.
박인환은 그 뒤 류지에 쓴 <세월이 가면>을 김경린에게 보였다가 ‘이게 무슨 모더니스트의 시냐’고 핀잔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신(神)은 박인환의 시재(詩才)를 질투했음인가 그를 만 서른 살의 나이로 데려간다.
<세월이 가면>을 쓴 뒤 한달쯤 뒤인 1956년 3월 술집 ‘바카스’와 ‘신신바’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 ‘가슴이 답답하다. 생명수(약)를 다오’ 하고는 떠나고 만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