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대한민국 시인 김광균 (金光均, 1914 ∼ 1993)의 시 모음
시인 김광균 (金光均, 1914 ∼ 1993)
1914 경기도 개성 출생.
1930년 시 ‘야경차’를 <동아 일보>에 투고하여 발표한 이후, 1936년에 <시인 부락>의 동인으로 참여하는 한편, 1937년에는 <자오선>의 동인으로 시 《대화》를 발표하였다.
1938년에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설야》가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강협과 나발》 《화속 화장》 《밤비와 보석》 《반가》 등이 있다.
- 추일 서정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케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 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채
한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황량한생각 버릴곳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 回想 – 김광균
그 집이 생기면서
고향이 생겼다
아이들마다 잘 자라고
놀러오는 좋은 친구들이
그 집의 경력을 만들었다
굴뚝에서 타래 타래 올라가는 연기에
밥냄새가 풍겨서 달아가는 데서
그 집의 정이 두터워졌다
마을 어느 봉우리에서도
한가운데가 되는 점에다
작은 집을 큰 집으로 고쳐 세우면서
백년을 내다본
그분들은 다 가고
우리에게는 고향까지 없어졌다
어깃굿지만 나 차례가 와서
내가 할말은 모두 그것이다
- 누님 – 김광균
애들만 먼저 태워
시퍼런 바다에 띄워좋고 보니
집이 간 데 없어 발길이 돌아서지 않았다
아침마다 남쪽에 절하신다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남북 적십자회담 때에는
안된다는데도
실오리에나마 휘망을 붙이고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시던
어머님은
어느 울타리에서나
누님이 불쑥 나올 것만 같아
저 울타리안에는 누가 사는지
들여다볼 수 없을까
거지가 지나도
혹시나 해서
찬찬히 여겨 보신다던
그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누님 이야기는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어데선가에서 눈도 바로 못 감았으니…..
어머님하고 영혼끼리
고행집에라도 가서 만났으면
현몽이라도 있을 법한데…..
- 황혼가(黃昏歌) – 김광균
여기
낯익은 솔밭 사이사이에
들국화 가즈런―히 피어 있으나
하늘 한구석은 그냥 비어 있고나.
백만장안에 누가 살기에
오늘도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도 없이
해가 지느냐.
저물어 가는 나의 호수
호수 속 자욱―한 안개 속에서
등불이 하나 둘 깜박거린다.
우리 집 조그만 들창에도 불이 켜지고
저녁밥상에 어린것들이 지껄이리라.
내 그곳에 또 어두운 밤을 맞이하고
날이 밝으면
퇴색한 옷을 입고 거리로 가리라만
인마(人馬)와 먼지와 슬픔에 덮인
도시를 뚫고
나의 남은 반생의 길은 어디로 뻗쳐 있기에
낮과 밤이 들려주는 노래는
다만 한 줄기 오열뿐인가.
- 파도가 있는 해안에 서서 – 김광균
어두워 가는 해안의 별빛 조으는 곳에
흐릿한 은선(銀線)을 저어 가는 상선(商船)의 돛대는 잠기어 가고
고독한 노을에 덮인 부두의 황혼에 서서 멀―리
고개 숙인 마음에
저물어 가는 파도 소리는 목메어 온다
창백한 해양의 물결에 잠긴 작은 항구의 가슴을 떠나
밤마다 안개에 덮인 푸른 바다의 월광을 굴러가는
낙엽의 탄가(嘆歌)에 젖은 희미한 뱃노래는
지금 어두운 밤바다 위를 헤매고
처량한 음계 위에 스러져가는 파도의 노래 위를
고향을 찾아가는 갈매기의 늘어진 두 날개는 애처롭다
밤새도록 서리에 젖은 등대의 시선을 쫓아
끝없는 비극 속에 누워 있는 먼― 선로(船路)의 가는 곳에 오늘밤
전도한 수평선 위에 적막한 애상을 그리는 마음이
해안을 스쳐가는 낙엽 속에 고요히 휘파람을 분다
날카로운 시각에 허물어진 그리운 우리들의 항로여
푸른 바다를 스쳐가던 화려하였던 그 시절의 애처러운 회억(回憶)이여
이즈러진 현실의 어두운 장렬(葬列)을 떠나 보낸 포구는 말이 없고
육지를 떠나 헤어져 가는 발자취 속에
긴― 성조(星條)의 애화(哀話)를 속삭이던 어두운 물결도 이제는 대답이 없다
-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 없고나 – 김광균
주안묘지 산비탈에도 밤벌레가 우느냐,
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
나는 살아서 달을 치어다 보고 있다.
가물에 들끓는 서울 거리에
정다운 벗들이 떠드는 술자리에
애닲다.
네 의자가 하나 비어 있고나.
월미도 가까운 선술집이나
미국가면 하숙한다던 뉴–욕 하–렘에 가면
너를 만날까
있더라도 <김형 있소> 하고
손창문 마구 열고 들어서지 않을까.
네가 놀러 와 자던 계동집 처마 끝에
여름달이 자위를 넘고
밤바람이 찬 툇마루에서
나 혼자
부질없는 생각에 담배를 피고 있다.
번역한다던
<리촤-드·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
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델 갔느냐.
철쭉꽃 피면
강화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좋아하던 <존슨> <부라운> <테일러>와
맥주를 마시며
저 세상에서도 흑인시를 쓰고 있느냐.
해방 후
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 땅 진흙 밭에
너를 묻고 온 지 스무날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 녹동 묘지에서 – 김광균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어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꽃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났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 잡초들 – 김광균
아 밝은 태양 맑은 물
바람 센 여의도 강뚝
말라서 흙이 갈라질세라
덮은 풀을이여
이름도 없는 잡초 처음엔 꽃인데
다시 한번 꽃이 되고파라
가물에 논밭처럼
바닥이 드러난 강
얕은 줄 모르고
더듬더듬 건너는
무거운 철 橋脚
현재에서 미래로
아파-트에 눌려
산도 가고 물도 갔다
花信 등진 저 아낙네들
지나간 고운 날을 삼키며
쑥을 캐는 눈시울이 따가워선가
가난이 얼굴 바닥에 탄다
- 번영의 폐수 – 김광균
번영이 버린 물
바다에 흘러 들어
고기 병신되어
벌레가 된 것을
어미가 물어다 먹인
새끼 제비가 죽은 것을 보고 놀라
갑자기 눈이 어두운 어미 제비도
전봇줄에 앉아 울다가
떨어져 죽었다
참새에게는 쌀을 주고
제비에겐 벌레를 준
하늘을 원망하여
바다는 고요했고
새는 곡했다
늦가을 강남 갈 제비도 없고
삼월 삼짇날 강남서 올 제비도 없으니
놀부 흥부는 제비 잘 사는 나라로
이민이나 가시지
- 戀歌 – 김광균
사랑하는 사람들아
내 말이 그렇게 역겨운가
나는 이렇게 자물쇠를
가득 달고 다닌다
팬도라의 상잘가봐
한 구멍도 열지 못하니
녹아서 본래 없던 것처럼
텡 속이 비어서
가을 벌레처럼 울려는 것도 아니오
물에 빠져 울려는 것도 아닌데
여보 그 고이 가꾼
잔디나 좀 빌려 주시구려
당신 만진 강아지나 데리구 놀며 가게…..
오랫동안 독감에 걸려 코만 풀다가
겨우 쳐다보는 하늘
개똥물같은 별리 展示
쥬스나 한잔 더 주시구려
돌아가서 자게….. 시대에 코를 골면서…..
- 戀身 – 김광균
잡초라도 돼야
봄에 새싹이라도 돋지
귀뚜라미라도 돼야
가을의 외롬을 위로하는 친구가 되지
두견이라도 돼야
먼산 님의 넋이 진토 아님을 전하지
神마저 없다 마시라
빈 우주에 혼자는 못 서지
말똥벌레 이건 또 누군가
애들 발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살아서 사랑하는 법 自愛를 他愛로…..
- 꽃 – 김광균
갈라진 일도 오라가라 함도 없이
거기 섰다가
꿈처럼 가던 길 다시 돌아와
비인 자리에 고이 피네
만물 속에 홀로 웃는 미소
사랑의 증건가
옛 빛 새로 있음
꽃은 빛 꽃은 마음
꽃의 아름다움
마음의 아름다움
그렇다
떨어진들 어떠리
우리 사이엔 겨울에도 꽃이 있는 걸
- 패전 – 김광균
계속해서 방송은
자유월남의 패전을 보도한다
방이 다 축 눌어진다
자유의 패전이 아니고
부패의 패전일 뿐
문득
바깥 창이 열린다
서울이 떠들썩한다
유월이 한달 건너뛰어 달겨든다
死守하라 어서 決議하라
나라에 天地共存하여 봄
봄은 모든 新生의 根源
마른 가지에 새싹이 튼다
사랑과 그리움에 먼저 빛을 주어
피는 꽃
푸른 산에 흐르는 회상의 음악
나비들이 난다
떠나지 말아요 보따리를 풉시다
집도 없고 사랑도 없고
친구도 없고 희망도 없고
정다운 것들이 다 물러서요
서로 맺었던 가는 실오리마저
산산히 끊어져
남은 하루가 타서 죽어요
- 희망 – 김광균
잔잔한 물결
내가 태어난 바닷가에서
나는 우연히 희망을 만나
어둠에 앞서가는 한 줄기
밝은 길을 따라 나섰다
깊은 물은 배를 타고
높은 산은 차를 타고
물은 건너고
굴은 뚫고 나가니
새 하늘 열리며
마음에 바람이 일었다
나무잎 풀잎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어둠이 없었다
나는 피로하고 고독했다
별에 발돋움할 뿐이다
到達이 아니라 희망은
未達이니만
마지막까지
인생의 다함 없는 노자다
- 내 배는 – 김광균
잘 되리라 잘 살리라 복 되리라
인경이 잉잉 울 제 묵은 닭이 꼬꾜 울 때
나는 노래 부른 일천구백육십사년의 첫날
매화꽃 장단에 하늘이 훤하더니
해는 둥둥 떠서 홍옥 – 첫사랑
홍역같이 이글이글 구미는
돌고 돌아도 떡은 천신도 못하고
믿음이 망령이라 너덜너덜 거덜이 나서
가는 길 사랑이라 사랑도 없이 가는 길 눈물이라 눈물도 없이
남쪽 늘어진 궁둥이에 달린 피난의 항구
밤엔 또 어떻게 해 놔서 배가 딩딩하구마
밀교한 이튿날 아침처럼 어쩐지 종구 야릇해서
새끼들 대마도가 밤에 쑥 들어왔다쟎나
갈매기는 바다가 좁다고 한강에 모여 울고
신문도 틀렸지 뭐유 강아질 호랑이로 기르다가
밤에 조용히 반란을 당했다나
아예 고기는 먹이지 말고 생선만 먹이랬는데…..
바람일세 바람 바람에 날리는 가루가루
밀가루 세멘가루 설탕가루 쌓인 포대
포대에 펄펄 날리는 깃발 기는 높이 날고
큰 학생은 방에서 놀기만 하는데
미나리 강회에 벌어진 장단 이어
이어 가는 세월 아침이라 정초 저녁이라 정초
연말도 새해 무슨 새해가 이렇게 오래 뜨는 건가
여보시오다 서울 댁이야 다 아시겠지
내사 슬슬 물이나 타서 술로 만들어
서방님 출세 불공이나 드리는 기오
천심높이는 천심깊이오
아는 한이오 모르는 한이오
내 배는 지하실 자꾸 딩딩하구나
- 10年 戀情 – 김광균
백년 생각한 것을
줄여서 10年이시던가
다시 펴고 살고파
짝사랑 십년세월
모란꽃 피는 꿈인데도
그 한마디 모질까봐 어려워
어딜 디디는지 허황하기만…..
<온 몸은 귀먹은 납덩이>
가라는 줄도 모르고
몰래 따르다가
비탈에서 만나
고이 닦는 자리인데
세월이 쉬이 무너져
그만 묻힌 분
그대 사랑한 하늘로 가고파
두고 두고 생각하니
그 하늘도 여긴 것을…..
- 해바라기의 감상 – 김광균
해바라기의 하얀 꽃잎 속엔
퇴색한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길가의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보라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흐트리고 느껴울었다.
아버지의 무덤우에 등불을 키러
나는
밤마다 눈멀은 누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빛이 파아란 산길을 넘고
- 밤비 – 김광균
어두운 장막 너머 빗소리가 슬픈 밤은
초록빛 우산을 받고 거리로 나갈까요
나즉히 물결치는 밤비 속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포와를 가면
바람에 지는 진달래같이
자취도 없는 고운 꿈을 뿌리고
눈부신 은실이 흩어집니다
조각난 달빛같이 흐득여 울며
스산-한 심사 우에 스치는 비는
사라진 정열의 그윽-한 입김이기에
낯설은 흰 장갑에 푸른 장미를 고이 바치며
초라한 가등 아래 홀로 거닐면
이마에 서리는 해맑은 빗발 속엔
담홍빛 꽃다발이 송이송이 흩어지고
빗소리는 다시 수없는 추억의 날개가 되어
내 가슴 우에 차단-한 화분을 뿌리고 갑니다
- 오후(午後)의 구도(構圖) – 김광균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물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창 밖에
나직이 조각난 노래를 웅얼거린다.
천장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이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 항로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기인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울 적마다
어두운 커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메어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 소리뿐
.노대(露臺) : 발코니.
적막한 해안을 바라보며 고독한 오후의 서경을 회화적 필치로 그리고 있다. 고요한 꽃망울, 흰 물거품, 하이얀 기적, 눈부신 호선(弧線), 장미 등의 시어를 동원하여 항구의 풍경을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기교에 치우친 나머지 공존할 수 없는 ‘아네모네의 꽃망울’과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을 공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제3, 4연에서 보듯 시인 특유의 체질적 감상성이 드러난 ‘감상(感傷)’, ‘처량’ 등의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
제1연은 해변의 고즈넉한 풍경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있다는 표현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계절감에 어긋나는 이러한 표현은, 그러나 그의 마음의 풍경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파도 소리를 조각난 노래라고 하듯 시인의 소리까지도 모양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제2연은 항구의 오후의 모습으로, 증기 기관의 흰 연기와 고동을 울리며 북양 항로로 떠나는 기선의 깃발이 반원의 선을 그리며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다. 북양 항로는 이국적 정취를 부각시킨다. 제3연은 기선이 돌아온 황혼녘의 풍경으로 회한과 추억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인 특유의 서정성에 기인한 감상적(感傷的) 분위기가 조장되고, 보표(譜表)를 그리듯이 날고 있는 갈매기의 모습에서 적막감을 느낀다. 제4연은 화자가 외부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다. ‘추억의 벽 위’에 나타난 내면 공간은 다만 감상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 성호 부근(星湖附近) – 김광균
1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멀―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이 시는 화화적 이미지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1은 달빛 내려 비친 겨울 호수의 모습을, 2는 황혼 무렵의 차창 밖 풍경을 그리고 있다. 1연은 차가운 겨울 호수에 호젓이 달이 비취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달을 양철이라는 금속성에 비유하여 차가운 겨울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2연은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거니는 화자의 고독한 모습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3연은 화자의 회상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의 영상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추억이란 의식까지도 시각화하여 ‘화려한 꽃밭’과 ‘눈부신 꽃’의 따스하고 밝은 이미지로 호수를 변형시켜 나타내고 있다. 빙설처럼 빛나는 영상으로 그려 낸 시인의 독특한 형상 능력이 돋보인다. 4연은 추운 겨울의 얼어붙은 강물을 보면서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5연은 황혼 무렵 차창에 서리는 풍경을 보면서 추억 속의 고향을 떠올리고 있다. 차갑고 날카로운 겨울 호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해 하던 화자는 호수에 얽힌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에 빠져들며서 차츰 어두운 분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에 따라 달빛 비치는 겨울 호수의 차가운 이미지는 이내 화려하고 따스한 이미지로 변형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뿐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차창에 서리는 황혼’의 붉은 노을이 되어 ‘희미한 날개를 펴고’ 화자를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한국적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계열의 본보기로 널리 예시되는 작품. 거의 모든 시행에 비유가 쓰이고 있다.
제1행 ∼ 3행 : 가을날 값어치가 없이 흔하게 떨어지는 낙엽은, 마치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에 있었던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와 같이 시세가 없는 것이고, 또는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처럼 황량하고 쓸쓸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낙엽이 ‘망명 정부의 지폐’와 ‘도룬 시의 가을 하늘’로 비유되었다. ‘낙엽’이 인생의 황혼이나 죽음에 비유되지 않고, 당시 시사적인 사물에 비유, 충분히 독창적인 표현을 보이다. 이와같이 낙엽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전통적인 발상이나 견해를 이탈하여 오늘의 문명과 그 신선한 감각을 창조, 수용하려는 태도는 모더니즘의 기본적 자세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망명 정부의 지폐’나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은 20세기의 사물이며, 도회적인 소재로서 등장하고 있다.
제4 ∼ 7행 : 가을의 들, 그 들판에는 꾸부렁한 한 줄기 들길이 꼬불꼬불 마치 구겨진 넥타이처럼 늘어지게 뻗다가, 청명한 가을 햇살이 마구 쏟아지는 머언 곳으로 사라져 갔고, 조그만 담배 연기처럼 멀리서 연기를 뿜으며, 오후 두 시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시골의 들길이 ‘넥타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폭포’로, 기차 연기가 ‘담배 연기’로 각각 비유되었다. ‘넥타이·담배연기’는 모두 문명 속의 소재들이며, 거기에 ‘급행 열차’까지 등장, 재래적인 서정을 일변시킨다. ‘폭포’ (강렬한 낙하)도 본래는 하나의 대자연에서 온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일광의 폭포’ (은유)로 표현되었을 때, 그 독특한 비유는 전혀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서정이 主情에 흐르지 않고, 객관화되었으며, 구김살 없는 회화시로서 참신성을 과시하고 있다. 오후 두 시의 들을 달리는 급행 열차. 따가운 가을 햇빛 속에서 가느다란 연기를 멀리 내뿜는 그 모습은, 의인화되어 한가하고도 적막한 애수의 시정을 물씬 풍기고 있다.
제8 ∼ 12행 : 들의 한 편에는 잎이 다 떨어진 포플라 나무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공장의 지붕이 허옇게 솟구쳐 있는데, 그 위에는 쇠로 만든 울짱 한 가닥이 꾸부러져 바람에 시달리고, 또 그 위 푸른 하늘에는 유리 모양으로 투명한 셀로판 (cellophan)종이로 접어 만든 것 같은 엷고 번쩍이는 구름이 한 장 떠 있었다. -급행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 뒤, 시인의 시선은 포플라가 서있고 공장이 세워져 있는 그 건물의 지붕과 하늘로 옮겨졌다. 여기서도 앙상한 포플라 나무가 ‘근골 (筋骨)’로, 뾰족한 공장의 지붕이 ‘흰 이빨’로, 흰 구름이 ‘셀로판지’로 각각 은유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앞에서 본 것처럼 새로운 비유이며, 도회적인 것으로 다분히 이국적 정취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김광균을 가리켜 소리조차도 모양으로 번역하는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의 소유자라고 한다. 가을의 이미지를 이토록 유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그 솜씨에 우리는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언어로써 이미지를 그리는 회화시의 표본이다.
제13 ∼ 16행 : 나는 왕성하게 울고 있는 풀벌레 소리들을 나의 인기척으로 끊기게 하며, 호올로 가을의 황량한 생각을 버릴 곳이 없어, 무료한 행동으로 돌을 집어 허공에 팔매질을 한번 했더니, 문득 기울어지는 풍경들의 배경 저쪽으로 돌을 고독하게 반원을 그으며 사라져 간다. -비로소 재치가 넘치는 작품으로서 수채화적 색감보다는 크레파스 그림이며, 비유 상징에 의한 참신성 있는 새말들을 써서 감각적 수법의 지성미를 발휘하였다. 즉 가을을 맞이하여 무엇에도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허탈하고 고독한 현대 지성인의 정신을 가을의 애수에 융합시켜 놓은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감정이 그림 속에 용해되어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회화적 수법’의 시다.
- 와사등 (瓦斯燈) –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차단-한 : 차디찬
제1연 : 차디찬 가스등이 한 개 빈 하늘에 걸리어 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홀로 어디로 가라는 신호인 것이냐. -‘차단-한’은 ‘차다(寒)+遁한’의 구조, ‘찬(冷)’의 뜻인데, 촉각과 시각이 아울러 표상된 시어다. 이 시는 제목부터가 특이하다. ‘가스등·가로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와사등’이라고 표현, 생소한 풍물의 인상을 준다. 즉 서울을 읊은 시인데도 제목부터가 마치 이국의 도시를 보는 듯 표현했다. 이는 도시적 공간에서 다시 나아간 이국적 정서물의 공간이며, 그것은 일몰과 밤으로 귀결되어 절망을 상징하고 있다. 당시 식민지라는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첫 행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는 것부터가 회화적 특징이 잘 드러난 표현이다. 전신주의 위에 가로등이 외롭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비인 하늘’과 연결, 얼마나 선명하고 고독한 시각적 표현인가 ···· 따라서 ‘와사등’은 절망의 본체, 지은이의 상징이며, 현대를 사는 지성의 고민 그 ‘얼굴’이다.
제2연 : 긴긴 여름날의 해가 황망히 날개를 접어 해가 지는 때에, 늘어선 도시의 고층 건물은 마치 공동 묘지의 창백한 묘비와 같이 황혼에 물들어 있고, 찬란한 불야성의 야경이 무성한 잡초처럼 헝클어져 있는 채로, 사념은 아예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었다. -고층 건물이 ‘묘석’으로, 찬란한 야경이 ‘잡초’로 직유되었다. 찬란한 문명의 도시는 결국 공동 묘지의 묘석과 잡초로 비유되어 거대한 죽음의 도시, 죽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황혼에 보는 도시, 서구의 정신사에서 보는 세기의 종말 의식이 채색되었고, 정신적인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국적 정서와 함께 생생한 도시적 감각이 일품이라 하겠다.
제3연 : (밤이 되면) 피부의 바깥에는 어둠이 스며오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는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죽음의 도시’의 밤이다 (그것은 공동 묘지의 밤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의 ‘어둠’은 절망인 것이며, ‘낯설은 거리’ (낯설은 도시)였으리라. 자연을 상실한 인간이 지니는 향수가 짙을수록 눈물겨웠던 것이고, 거기 현대인의 우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은 공감각적 이미지가 드러난 시구. 공감각적 이미지 (심상)은 서로 다른 감각 현상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수법인데, 이 시구에서는 피부에 닿을 수 있는 감각은 촉각뿐인 것을 거기에 ‘어둠’이라고 하는 시각적 현상을 ‘스미는’이라는 말로 피부에 연결시키고 있다.
제4연 : 쓸쓸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나는 어디서 그렇게도 무거운 비애를 짊어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나의 그림자가 이다지도 어두워. -이른바 현대적 군중 속의 고독이다. 그것이 ‘비애’란 단어에 집약되었고, 이 시 전체적 느낌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현대인의 불안, 절망, 공포의 비애가 군중 속에서 더욱 고독한 것임을 표백하고 있다.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는 회화적 표현의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절망’이 ‘그림자’와 ‘어두워’로 상징, 시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내부의 상황을 회화화한 본보기가 된다.
제5연 :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에, 차디찬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구나. 결구. 제1연의 시행을 바꾸어 써서 결구를 삼았다. 희망도 이상도 상실한 현대인, 그 방황과 절망 의식이 ‘슬픈 신호’ 앞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현대 지성의 아픈 고민이 표백된 모더니즘의 시다. 즉 도시적인 것이 주는 절망감을 ‘와사등’이라고 하는 시각적 이미지로부터 시작하여, 회화적인 수법으로 형상화하였고, 그것은 한국시의 새로운 영역 확대와 모더니티를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데셍 – 김광균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고가선 : 고압 전류를 송전하는 전선
1930년대 이미지즘 시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이 작품은 <데생>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느낌을 준다. 지성과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의 경향으로 감정은 지성에 의해 극도로 억제되었으며, 객관적인 태도와 회화적 수법에 의해 산뜻한 감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1은 황혼녘의 지평선을 배경으로 한 모습이고, 2는 그 시각에 보는 하늘과 구름과 땅 위의 풍경이다. ‘데셍’을 하고 있는 시인은 먼저 초점을 멀리 두고서 화면을 크게 잡아 노을의 마지막 잔광 (殘光)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향료를 뿌린 듯’ 곱게 깔린 노을 위로 어둠이 서서히 덮여 오면서 그 아래 세워져 있는 전신주는 어둠 속에 파묻혀 가고, 마침내 멀리 보이는 고가선 위에 별이 하나 둘 떠오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다음에는 화면을 축소하여 하늘과 땅 위의 인상적인 부분들만 묘사하고 있다. 어둠이 구름에 섞인 풍경은 마치 보랏빛 색종이에 한 다발 장미꽃을 그려 놓은 것처럼 붉게 타오른다. 이렇게 해서 그림의 윗 부분을 완성시킨 후,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이동시켜 지상의 사물을 감각적으로 관찰한 다음, 다시 붓을 들어 아랫 부분의 여백에 어두워 가는 목장과 주위의 능금나무와 깃발을 그리고 있다. 잠시 후, 그 아름다운 사물들이 이내 어둠 속에 묻힐 것이 안타깝고, 황혼녘의 풍경들이 못내 쓸쓸하다고 느끼는 시인은 외로운 감정이 되어 들길을 마저 그려 넣으면서 그림을 완성시킨다. ‘데생’은 형태와 명암을 주로 하여 단색으로 그린 그림을 뜻하지만, 그의 ‘데생’은 저녁 풍경 묘사로만 그친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내면 의식 세계가 투영된 수준 높은 그림이 되었다.
-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추회 : 지나간 잘못을 뉘우침
.차단한 : 차디찬
이 <설야>는 강설의 이미지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과 추억으로 다양하게 구사된 감각적인 시이다. 서글프고 서러운 밤에 내리는 눈, 그 눈이 도회인의 소시민적 감정에 잔잔히 물결치면서 부드러운 서정을 나타내고 있다.
제1연 :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은) 어느 머언 곳에서 돌아오는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처럼 이 한밤을 소리없이 흩날리며 달려 오는가. ‘눈’이 ‘그리운 소식’으로 비유되었다. ‘내리는 눈은 그리운 소식처럼 정답게 내린다.’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지적 경향이 아직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전인 초기 작품으로, 이것은 재래식 서정풍의 표현이다.
제2연 : (내리는 눈발은 밤이 깊을수록) 처마 끝에 켜 있는 호롱불의 불빛을 희미하게 하며, (내가 잊지 못하는) 서글픈 옛 추억의 자취인 것처럼 내린다. -1연의 ‘눈=그리운 소식’처럼, 다시 ‘눈=서글픈 옛 자취’로 비유되었다. 일종의 병렬식 구성이다. ‘호롱불 여위어 가며’는 내리는 눈빛으로 인하여 호롱불 빛이 희미하게 보임을 나타낸 표현이지만 거기엔 밤이 깊어가는 시간의 흐름까지 결합되어 있다. 끝의 ‘흰 눈이 내려’는 미종결형으로 끝나 있는데, 이런 미종결형은 은은히 길게 여운을 남기는 시적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제3연 : (이렇게 하얀 눈이 내리는 밤) 하이얀 나의 추억은 저절로 가슴이 막히어, 마음의 허공에 추억의 등불을 켜고, 나 홀로 깊은 밤의 뜰에 내리어 서면. -‘하이얀 입김’의 ‘입김’ 원관념은 ‘추억’이다. 그리운 소식 (1연)과 같고, 서글픈 옛 자취 (2연)와 같은 눈이기에, 나의 추억과 환상의 상념은 드디어 나로 하여금 뜰로 내려서게 한다. 1연 ~ 3연까지 전체적으로 눈송이를 보고 느끼는 감각이 지극히 세련되어 있다. 일체 군소리가 없이 차근차근 이어오고 있으며, 눈과 상념이 입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제4연 : (사륵사륵 내리는 눈은) 머언 곳에 있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같은 착각을 느낀다. -이 시에서 가장 뛰어난 감각적 표현이다. 단 한 줄로 독립시킴으로써 시의 집중과 강조를 도모하며, 또 그것도 ‘옷 벗는 소리’의 ‘소리’라는 명사로 맺음으로써 야무지고 탄력성 있는 효과를 높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이 오는 모습이 시각적인 사물인데도, 청각적 이미지로 작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뛰어난 감각적인 표현이란 말은 이를 두고 일컫는 것인데, 사르륵 사르륵 내리는 눈을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한 것은 얼마나 현대적인 감각인가······. 그 확산은 관능으로 이어져 참신감을 더한다. 저속한 취미를 충분히 벗어나면서, 짙게 확산하는 이런 관능적 표현으로써 이 시는 강설의 이미지가 새로운 차원의 이미지로 승화되었다.
제5연 : (밤은 깊어가고) 희미해지는 눈발, 이것은 어느 잃어버린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억과 회한이 이렇게도 가쁘게 설레는 것인가. -‘눈=추억의 조각’으로 결합 비유되었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회한 깃든 과거의 추억은 더욱 새로와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의 저류에 흐르는 것은 ‘그리움’이다. 그것은 추억과 관계되어 있고, 도회인의 우수와도 통한다.
제6연 :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홀로 차가운 의상 모습을 하고, 하얀 눈은 내리고 쌓여, 내 슬픔 또한 그 위에 서리고 있다. -주제연이다. 슬픔 많은 청상 (靑孀)같이 차디찬 흰 옷을 입고, 나부끼는 눈송이는 뜰에 내려 쌓이고, 그 위에 내 슬픔도 쌓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화되고 결백한 ‘눈=슬픔’이 함께 놓이는 시적인 경지이기도 하고, 서정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전편을 통하여 눈이 「그리운 소식 (1연)→서글픈 옛 자취 (2연)→추억의 조각 (5연)→차디찬 의상 (6연)」으로 결합, 이 시의 수사법은 비유법으로 일관되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차디찬 의상’은 눈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 은수저 – 김광균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이미지즘 경향의 회화적 수법을 앞세운 이전의 시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김광균의 이 시는 자식 잃은 아버지의 뜨거운 부정 (父情)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시는 해방공간의 정치성 짙은 시들과는 달리 김광균의 시적 관심사가 다시 시인의 내면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김광균이 문단에 처음 작품을 선보인 것은 불과 16세이던 1930년 동아일보 지면이었다. 그리고 첫 시집 {와사등}이 출간된 것이 25세 때인 1939년이고, 두 번째 시집 {기항지}가 나온 것이 33세 때인 1947년이었다. 결국 그는 서른 이전의 나이에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한국 시사에서 확보했을 뿐 아니라, 해방을 전후해서 이미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거의 소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후 그는 시작 생활을 중단하고 실업계에 투신하여 역량있는 실업인으로 활약하다가 문단 고별 시집인 {황혼가} (1957)를 출간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 생활을 재개하여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예전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는 두 번째 시집 {기항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후기 작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항지} 발문에 ‘내 나이 스물 여섯부터 서른까지의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참고한다면, 이 시는 예전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으로 서른 이후에 창작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의 이 시는 화자인 아버지가 저녁을 먹으며 아이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한밤중에 만난 죽은 아이의 환영과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아이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시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비통한 심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시어는 ‘눈물’ 하나밖에는 없다. 그러나 간결한 3연의 구성과 단문으로 행을 마감한 시 형식 속에는 자식을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아픔이 흠뻑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연은 화자가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저녁 식사 시간, 화자는 문득 아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어디를 간 것이라고 믿어 왔지만, 저녁 밥상을 받고 아이의 빈 자리를 보며 그제서야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는 아이의 방석에 놓인 주인 없는 ‘은수저’를 보며 화자는 눈물을 흘린다. ‘저무는 산’과 ‘잠기는 노을’은 하강·소멸의 이미지로서 아이의 죽음을 상징하며, 아기를 ‘애기’로 표현한 것에서 더 짙은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은수저는 ‘수복강녕 (壽福康寧)’을 빌며 그가 아이의 돌잔치 때 선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화자는 그 은수저에서 더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이다. ‘은수저’에서 ‘애기’를 떠올리고, 다시 그것은 ‘부정 (父情)’으로 확대됨에 따라 마침내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2연은 한밤중에 화자가 아이의 환영 (幻影)을 만나는 모습이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는 들창을 열고 바람 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던 중, 불어 오는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방실방실 웃으며 방안을 들여다 보는 아이의 환영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화자가 반가와하기도 전에, 아이는 벌써 문을 닫고 총총히 사라져 버린다. 3연은 아이가 죽음의 세계로 떠나가는 모습이다. 화자는 ‘먼 들길’로 제시된 죽음의 세계로 ‘맨발 벗은’ 채 울면서 가고 있는 ‘애기’를 목메어 부르지만, 아이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그림자마저 아른거’릴 뿐이다.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던 2연의 ‘애기’가 3연에 와서는 사자(死者)의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 있다. 아무리 목메어 부르며 그리워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이 곳 이승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아이임을 인정하고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데서 진한 육친애를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의 <유리창>과 동일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지만, <유리창>보다 화자의 감정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별다른 수사적 기교 없이 평이한 서술로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지만, 그것을 절제하고 여과하는 시인의 인간적 성숙도를 짐작할 수 있다.
- 외인촌(다시 읽는 한국시) – 조선일보(이어령)
하이얀 모색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 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6일.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시인 김광균의 이름이나 [외인촌]이라는 시를 모르는 사람들도 어쩌면 이 시 구절만은 외우고 있을지 모른다. 귀로 듣는 종소리를 눈으로 보는 분수로 나타낸 이 비유는 지금 읽어도 참신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청각에서 시각으로 시를 혁명하려던 30년대의 모더니스트들이 종소리에 파란 색칠을 해놓은 이 대담한 비유를 가만히 놔두었을리 없다. 모더니즘의 선교자였던 김기림은 말할 것도 없고, 시의 회화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시론의 로고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시구는 시각 이미지나 공감각의 샘플로 인용 되었을 뿐 시 전체의 구조를 통해 본격적으로 검증된 적은 거의 없었다. 공룡의 뼈나 발자국은 그 생체의 구조와 관련되었을 때만이 의미를 갖는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는 [외인촌]의 그 시 전체와 유기적인 연관을 지닐 때 비로소 제 생명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선 [분수]라는 말부터 보자. 분수가 내포하고 있는 일차적인 의미소는 [물]이다. 그런데 외인촌에는 이와 관련된 바다, 시냇물, 물방울과 같은 물의 물질적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마차가 사라지는 것까지도 [그림 속으로…잠겨간다]라고 표현한다. 잠긴다는 것은 두말 할 것없이 물체가 물속에 침몰하는 것을 뜻한다. 붉게 타는 노을 역시 불이 아니라 물과 관련되어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이다. 사라지는 것을 [잠긴다]고 하고, 타오르는 것을 [젖는다]고 한 것은 종소리를 분수(물)로 비유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외인촌의 풍경전체와 그 공기는 수족관처럼 투명하고 차갑고 조용하게 보인다.
그러나 김광균의 물의 물질성은 무거움을 상실한 가벼운 물, 상승하는 물, 그리고 수직의 공간성을 지닌 물이다. 그것이 [분수]의 분으로 그 두 번 째의 의미소를 이루고 있는 솟구치다이다. [외인촌]에는 […전신주 위엔] […벤치 위엔] […어두운 수풀 위엔] […언덕 위엔] […지붕 위엔] 등 [위]라는 장소성을 나타내는 전치사만 해도 무려 다섯 개나 등장한다. 그리고 직접 수직성을 나타내는 물질로는 [산마루] [전신주] [갈대밭] 외인묘지, 그리고 고탑과 성교당을 들 수 있다. 마을 전체가 [산협촌]으로 수직적 공간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고탑처럼 언덕 위에 솟아있는…]의 구절은 분수의 수직적 상방적 이미지에 선행하는 것으로, [날카로운] [솟아있는]의 수식어 등이 모두 그 높이와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분수]의 세 번 째 속성은 [도시적] [서구적] 근대문명의 의미소이다. 폭포나 냇물이 [자연의 물] [촌락의 물]이라고 하다면, 분수는 [인공의물] [도시의 물]이다. 그래서 외인촌의 [마차]는 달구지가 아니라 프랑스영화처럼 [파란 역등]을 달고 있으며, [산마룻길]에는 소나무가 아니라 [전신주]가, 그리고 꽃은 노변의 야생화가 아니라 [화원지]와 벤치 위의 흩어진 [꽃다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외인촌의 그 성교당 종소리는 자연히 산사의 범종 소리와 그 이미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낙산사나 통도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누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할 것인가.
이러한 분수의 물질적, 공간적, 문명적 이미지들이야말로 우리의 전통적인 시골마을과 색다른 외인촌의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축인 것이다.
그러나 솟구치는 분수의 이미지는 [흩어지는]이라는 용언에 의해서 다시 역동적 이미지의 복합성을 띠게 된다. 울리는 종소리는 솟구쳐 오르는 분수요, 여운 속에서 사라지는 종소리는 흩어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이다. 솟구치다와 흩어지다의 모순을 지닌 분수의 역동적 이미지는 외인촌 전체의 구조에 간여한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에 앞서 우리는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저 있다]라는 구절을 읽을 수가 있다. 종소리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시각화하여 꽃다발과 같이 흩어져 있는 것이다. 소녀들이 한낮에 남기고 간 그 웃음소리는 종소리의 사라진 여운보다도 더 들을 수 없는 부재의 음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흩어지다]의 속성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흩어진 꽃다발의 꽃잎은 흩어지는 분수의 물방울과 같고, 시들어 가는 꽃다발은 사라져 가는 종소리의 여운과 같다. 그리고 [벤치 위에는]은 [성교당의 지붕 위엔]과 대구를 이룬다. 그렇다면 벤치는 바로 옆으로 누운 성교당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수직의 높이를 잃고 수평화 할수록 [흩어짐]의 역동적 이미지는 강화된다.
그리고 [흩어진다]에 제일 잘 어울리는 것은 물이 아니라 가루이다. 물이 가루처럼 되어 가는 것이 바로 물방울이다. [흩어진다]는 용언 속에는 이렇게 분말화, 입자화의 내포적 의미가 숨어있다. [외인촌]은 그 물방울과 같은 [파란 역등] [가느다란 별빛] [작은 시내], 그리고 실제로 [물방울]이라는 말로 가득차 있다. 그런 것들은 가늘고 작고, 여전히 섬세하고 가벼운 의미작용을 나타낸다. 사람도 [소녀]이고, 집도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집]인 것이다. 물론 바람에 [흩날리는] [창을 내리고]는 하강하고 흩어지는 역동적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는 말이다.
분수의 마지막 의미소는 [푸른 종소리]의 그 푸른 빛깔이다. 외인촌의 시적 공간은 [하이얀 모색으로…] 시작하여 [파…란 역등], 그리고 [새빨간]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푸른 종소리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그 푸른 종소리의 [푸른 빛]은 분수(물)의 팔레트에서 선택된 물감의 하나일 뿐 외인촌은 먹으로 그려진 동양 산수화의 모노크롬과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다채색의 회화공간인 것이다.(그 자신이 외인촌의 풍경을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가 연출해 내는 [외인촌]의 그 시적 공간은 한국인들이 전통 공간 속에서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서구문명 즉 모더니티라는 이차원의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의 그 [외인촌]은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회색 범종 소리]의 우리들 내부의 마을 (내인촌)에 의해 차이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인촌은 파리나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바로 한국의 시골 속으로 들어와 있는 서양인들의 마을이므로 [외/내], [성교당/산사]의 그 공간적 대립항 역시 서로 오버랩 되어 질 수밖에 없다. 제목은 [외인촌]인데 본문 속에서는 그것이 [산협촌]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백한 하늘에 걸려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은 바로 뒤에 나오는 성교당의 그 종소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시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백한 하늘에 걸려있는 촌락의 시계]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이 없었다. 촌락의 시계와 야윈 손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리키는 열시가 밤 열신지 낮 열신지, 그리고 진짜 열시인지 열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조각달 (야윈 손)의 위치인지 조차 검증되지 않은 채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만을 공염불처럼 외웠다. 우리 촌락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외인촌의 종소리가 알리는 그 시간의 시차…. 그 시차적응의 긴장속에 김광균의 진정한 시적 공간이 숨어있는 것이다.
[분수처럼…]의 그 구절이 모더니즘이론의 표본이 된 것처럼 이제 [외인촌] 한 편의 시는 왜 우리가 지금 다시 한국 시를 읽어야 하는 지를 밝혀주는 좋은 본보기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시는 전편이 회화적인 수법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회화적인 수법을 하고 있다는 점은 <추일 서정>에 비하여 그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외인촌’-이 시에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 또는 두메산골이 이국땅과 같다는 뜻에서, 이국적 정취의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된 제목으로 볼 수도 있다-을 소재로 하여 저녁에서 밤까지의 시간적 배경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제1연 : 해지는 무렵의 아름다움 속에 집이 늘어 선 두메 산골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을 단 마차가 한 대 멀리 사라져 가고, 바다를 향하고 있는 산마루의 길에 언제나 우두커니 서 잇는 전신주 위에는 흐르던 구름이 한 점 새빨갛게 놀에 물들어 있었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깊은 두메산골에는 이미 어둠이 짙어져 역등을 단 마차가 잠기어 가고, 수평선이 보이는 산마루 길의 전신주 하늘에는 구름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시이다. 특히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의 표현은 널리 인용되고 .있는 뛰어난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지상에는 땅거미가 이미 내리고, 수평선으로부터 마지막 햇살이 공중으로 뻗어 한 점의 새빨간 구름을 만들었고, 또 그것은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라는 공간 설정이 선명하다. 시각에 의거한 매혹적인 그림인 것이다.
제2연 : 바람에 흔들리는 외인촌의 작은 집들이 창을 닫고, 갈대밭 속에 싸이어 잘 보이지 않는 돌다리 아래에서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날이 저물어 밤이 된 외인촌의 모습. 지상의 활동이 정지되고, 시냇물만이 흐르는 적막한 모습이다.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는 의인법의 표현.
제3연 : 밤 안개가 자욱한 화원지의 벤치 위에는 한낮에 놀던 소녀들이 버리고 간 천진난만한 웃음과 꽃다발이 시든 채 흩어져 있다.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가벼운 웃음’은 ‘웃음’이라는 음향을, 가시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다루어 표현한 이른바 공감각적 표현이며, 연형법을 살린 대목이다.
제4연 :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위에서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허한 하늘에 걸려 있는 마을의 시계가 낡은 바늘을 움직여 밤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옛 탑같이 높은 언덕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서는-. -밤의 사물이 외인 묘지에서 성교당으로 옮겨진 대목이다. 그리고 회화적 수법으로 일관한 이 시에서 유일한 이미지의 사용이 나타나고 있으니, 그것이 ‘시계 바늘'(원관념)을 ‘여윈 손길’로 표현한 시구다. 이 이미지는 의인법에 의한 표현 수법을 보이고 있다.
제5연 : 분수가 흩어지는 것처럼 시원스럽고, 싱싱하고 깨끗한 푸른빛 같은 종소리. -결구로서, 단 일행으로 독립시킨 이 결구는 절창으로 알려진 유명한 시구다. 근래에 이 시구를 4연에 포함시켜 놓은 이가 많은데, 여기서는 시집<와사등, 1939판>의 원작에 의거 독립시켰다. 그만큼 이 시구는 ‘소리조차 모양으로 바꾸어 놓은’ 전형적인 이미지즘의 시며 회화시의 한 특성을 가장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유법과 은유법, 시각과 청각이 한 시구에 집약되어 있는 것도 그 우수한 표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다시 말하며, 종소리란 누구나 널리 들을 수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속성을 ‘분수’처럼 흩어지는 모양과 푸른색을 통해 종소리를 형상화하였다. 청각적인 속성의 ‘종소리’를, 시각적인 ‘분수’와 ‘푸른 빛’으로 표현한 것은 청각과 시각의 공감각적 표현이다.
*시인 김광균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1930년 시 ‘야경차’를 <동아 일보>에 투고하여 발표한 이후, 1936년에 <시인 부락>의 동인으로 참여하는 한편, 1937년에는 <자오선>의 동인으로 시 《대화》를 발표하였다.
1938년에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설야》가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강협과 나발》 《화속 화장》 《밤비와 보석》 《반가》 등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