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샤를 페기 (Charles Péguy, 1875 ~ 1914)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프랑스인들이 없어진다면 곤란하다.
내가 하는 일들을 이해할 사람이 아주 없어질 것이므로
사람들아, 지구상의 여러 사람들이 너를 가볍다고 말한다
너는 기민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독선적인 사람들이 너를 가볍다고 말한다
너는 빠른 백성이기 때문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이 떠나기도 전에 이미 다다랐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나로서는 너를 신중히 달아보았던
바 네가 전혀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오, 대성당을 창시한 백성인 너를 나는 믿음에
이ㅆ어서 결코 가볍다고 보지 않았다.
오, 십자군을 창시한 백성인 너를 나는 사랑에 있어 결코 가볍다고 보지 않았다.
희망에 대해선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게 좋다. 희망은 오로지 너희들만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 Dieu parle(fragments)
C’est embatant, dit Dieu. Quand il n’y aura plus ces Francais,
Il y a des choses que je fais, il n’y aura personne poyr les comprendre
Peuple, les peuples de la terre te disent leger
Parce que tu es un peuple prompt.
Les peuples pharisiens te disent leger
Parce que tu es un peuple vite.
Tu es arrive avant que les autres soient partis.
<ais moi je t’ai pese, dit Dieu, et je ne t’ai point trouve leger.
O peuple inventeur de cathedrale, je ne t’ai point trouve leger
en foi.
O peuple inventeur de la croisade, je ne t’ai point trouve leger
en charite.
Quant a l’esperance, il vaut mieux ne pas en parler,
Il n’y en a que pour eux.
*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현대사회를 비판한 페기는 생애에 걸쳐 참된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지성인이었다. 학생 때에도 그는 간첩 누명을 덮어쓰고 처형 직전에 몰린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오를레앙은 잔다르크가 영국군을 대파한 역사의 현장이다. 오를레앙 산천에 깃든 잔다르크의 정신을 타고난 것일까. 페기는 어릴 적부터 정의감이 충만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41세나 되는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 참전해 반인권 전쟁 세력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프랑스인들이 없어진다면 곤란하다/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할 사람들이 아주 없어질 것이므로/ 지구상의 인간들이 너를 가볍다고 말한다/ 너는 기민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페기의 시는 프랑스인의 놀라운 자긍심으로 가득하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조국의 위기를 외면하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 리 없다. 우리는 어떤가?
– 프랑스의 시인•철학자 샤를 페기 (Charles Péguy, 1875 ~ 1914)
샤를 페기 (Charles Péguy, 1875년 1월 7일 ~ 1914년 9월 30일)는 1875년 1월 7일 오를레앙 (루아레)에서 태어나 1914년 9월 30일 빌루아 (센에마른)에서 순국한 프랑스의 작가, 시인, 수필가이자 예비역 장교이다. 그는 피에르 드루아와 피에르 보두앵이라는 필명으로도 알려져있다.
샤를 페기 (Charles Péguy)는 1875년 1월 7일 오를레앙 (루아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가 의자 수선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오를레앙에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교수가 될 생각으로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895년 사회주의가 현대세계의 빈곤과 결핍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여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또 죽을 때까지 깊은 신앙심만은 버리지 않았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 의식은 거부했다.
이 무렵 그는 인상적인 3부작 <잔 다르크>(1897)의 초판을 써 종교적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인 자신의 원칙을 주장하고 선언했다. 당시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드레퓌스의 무죄석방을 위한 싸움에 주저 없이 뛰어들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힘썼다. 페기는 책방을 운영하면서 그곳을 드레퓌스 지지운동의 중심지로 만드는 한편, 잡지 [카예 드 라 캥젠]을 발간하여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 잡지는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뒤 15년 동안 프랑스 지성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나톨 프랑스, 앙리 베르그송, 장 조레, 로맹 롤랑 등 프랑스의 지도적 문필가들이 이 잡지에 기고했다.
페기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몇 권의 수필집을 냈지만, 그의 완숙성이 잘 드러난 중요한 작품들은 시였다. 대표적인 시로는 <잔 다르크의 희생의 전설>(1910) <성스러운 순결의 신비>(1912) <이브>(1913) 등이 있다. 특히 <잔 다르크의 희생의 전설>은 <잔 다르크>의 몇몇 장면을 확대하여 신비적으로 명상한 시이다. <이브>는 그의 말년의 명상과 기도가 정점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는 시로, 4,000개의 알렉산더격 시행으로 된 장엄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그는 인간의 조건을 그리스도교 계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페기는 육군 중위로 전선에 나갔다가 첫 번째 마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저작으로 작품 <잔 다르크>(1897) <잔 다르크의 희생의 전설>(1910) <성스러운 순결의 신비>(1912) <이브>(1913), 논문 <나의 조국>(1905) <나의 청춘>(1910) <잔 다르크의 신비한 사랑>(1910), 시집 <노트르담의 장식 융단>(1913) 등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