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기형도 (奇亨度, 1960년 3월 13일 / 음력 2월 16일 ~ 1989년 3월 7일)는 대한민국의 시인 겸 언론인이다. 유고 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있다.
그는 독특한 색채의 시를 많이 썼는데,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가 주를 이룬다. 당시의 정치적 색채가 짙은 민중시, 노동시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기형도 전집에서는 “기형도의 언어들은 유예된 죽음의 언어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시인으로 대표되는데 7, 80년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 가난과 고통을 글에 녹여낸 한편 일면의 따뜻함과 희망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 (1984)이라는 시는 한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기도 안양의 한 변두리 동네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였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서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폐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시인 기형도

기형도 (奇亨度, 1960년 3월 13일 / 음력 2월 16일 ~ 1989년 3월 7일)는 대한민국의 시인 겸 언론인이다. 유고 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있다.
옹진군 연평도에서 공무원인 기우민의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기우민의 고향은 황해도였고 그곳에서 교사를 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 연평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연평도에서는 면사무소 공무원을 하였다. 간척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크게 실패하고 1965년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 (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주했다. 소하리의 집은 아버지가 직접 지은 것이다. 근처에 기아자동차 공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안양천을 따라 둑방길이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창고가 자리잡고 있다. 소하리의 이러한 풍경은 그의 시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가 살던 마을에는 안개가 자주 끼었고 안개 속을 뚫고 노동자들이 일터로 향했다.
기형도가 살던 곳은 소하리였지만 학교는 서울로 통학하였다. 서울의 시흥초등학교, 신림중학교를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69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어머니가 생계를 꾸렸다. 시장에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기형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유성호는 윤동주를 닮고 싶어한 기형도의 시작 활동에 녹아 있는 어린 시절은 윤동주의 동화 속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절박한 삶의 모습이었다고 평한다. 기형도는 녹녹치 않은 살림을 걱정하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5년 공장을 다니던 바로 위의 누나가 사망하였다. 몸져 누운 아버지와 일찍 죽은 누이는 기형도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다. 누이가 죽은 뒤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다녔으나 대학 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연세문학회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연세대학교 학보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하였다가 공안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1981년 휴학하고 방위로 소집되어 안양에서 근무하였다. 이 시기 경기도 안양의 문학동인지 《수리》에 참여하였다. 1983년 복학하여 〈식목제〉로 《연세춘추》가 시상하는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다.
졸업 전인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문학사상》, 《현대문학》, 《한국문학》과 같은 문학지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심야 영화 영화를 관람하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기형도는 평소에도 혈압이 높았으며 자신이 오래살 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기형도는 심야 동시상영 극장을 자주 다녔고, 전날에도 작가 김태연과 다음날 자정에 극장에서 보자고 통화하였다. 당시 파고다극장 심야 상영을 마친 뒤 극장 안을 정리하던 경비원이 발견하였다. 파고다극장은 건물은 그대로 있지만 고시원으로 변했다. 기형도는 장례를 치른 후 안성의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세례명 “그레고리오”가 새겨져 있다. 기형도의 무덤은 문학을 동경하고 시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성지다. 2년 뒤에는 그의 아버지도 그의 옆에 묻혔다. 시인의 요절과 죽음의 그림자 짙게 드리워진 시집은 이후 기형도 신화를 빚어냈다.
같은 해 5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으며, 유고시집의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다. 김현은 당시 중앙일보에 월간 시평을 쓰고 있었는데 1988년 6월에 기형도의 시를 평론한 원고를 기고하였다. 문화부에서 월간 시평을 담당하고 있던 기형도는 자신의 시에 대한 평론을 차자 자신이 정리할 수가 없어 김현에게 전화를 걸어 원고 수정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김현은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을 썼으며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은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라고 썼다. 김현 역시 1년여 뒤 사망하였다.
1990년 산문을 모아 《짧은 여행의 기록》이 출간되었고 1994년 미발표 유고 시를 모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나왔다. 1999년 《기형도 전집》이 정리되어 나왔다.
2017년 광명시는 기형도문학관을 개장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