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4년 12월 26일, 신성 로마 황제로 시칠리아 왕 · 독일 국왕 · 예루살렘 국왕을 겸한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1194 ~ 1250) 출생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1194년 12월 26일 ~ 1250년 12월 13일)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으로는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 1220년 ~ 1250년 12월 13일)이다. 시칠리아 왕 (재위 : 1197년 ~ 1250년), 독일 국왕, 예루살렘 국왕도 겸했다. 이탈리아 역사계에서는 이탈리아 이름인 페데리코 2세 (Federico II)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의 외아들로 이탈리아 예지에서 태어난후 이탈리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다. 결혼한 지 9년만에 마흔살이 된 왕비가 아들을 낳자 출생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197년 세살때 아버지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이듬해 어머니 어머니 쿠스탄차 1세가 죽자 시칠리아의 통치권을 물려받아 피디리쿠 1세로 즉위하였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에 많이 살고 있던 이슬람인이나 유대인과 어울리면서 편견에서 해방된 사고를 가졌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이슬람의 과학을 배우기 위해 공부한 아랍어에 능통했다.
특히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에 관심이 있어 이탈리아 나폴리에 대학을 세우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팔레르모 궁전 안에 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에 여러 철학자와 과학자 및 문학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때 시인들은 토스카나 방언 (이탈리아어의 모체)으로 시를 쓰며 시칠리아 학파를 형성했다. 황제 스스로도 시를 지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뒤 예루살렘 왕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이라는 칭호도 얻었다.또한 그는 고대 로마 제국과 같은 제국을 세우기 위해 시칠리아 왕국에서 독립된 법전을 만들고 나폴리 대학도 만드는 등 교황의 신권정치를 배제하여 이탈리아를 독립시키고 절대주의적인 체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멜피헌장). 그리하여 자신이 없는 독일에 아들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세우고 독일을 속주 상태로 두기위해 독일의 성직자 그리고 세속제후들과 성스러운 제후와의 협정과 제후들의 이익을 위한 협정을 맺지만 결국 이두 협정이 그의 구상을 망치고 아들 하인리히의 반란까지 부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평소에 식사는 검소적이며, 음주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열었던 연회는 호사스러울 정도였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먼저 살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궁정생활을 보냈다. 프리드리히의 용모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의 유럽 사람들은 전부 칭찬했다고 하지만, 이슬람의 연대기 작자는 그를 「벗겨진 붉은 머리에 아는 것도 없어서 노예였다면 절대 가격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풍채가 좋지 않는 인물로 기록했다.
–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출생: 1194년 12월 26일, 예지
.사망: 1250년 12월 13일, 토레마죠레
.매장지: 팔레르모 대성당
.가문: 호엔슈타우펜가
.부모: 부) 하인리히 6세, 모) 쿠스탄차 1세
.배우자: 콘스탄차 다라곤 왕녀, 이사벨 2세, 잉글랜드 왕녀 이사벨라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 신성로마황제 / 이탈리아왕
.재위: 1220년 11월 22일 – 1250년 12월 13일
.대관식: 1220년 11월 22일
.전임: 오토 4세 / 후임: 콘라트 4세
* 로마인의 왕
.재위: 1212년 – 1120년
.대관식: 1212년 12월 9일 (마인츠)
1215년 7월 25일 (아헨)
.전임: 오토 4세 / 후임: 하인리히 (7세)
* 시칠리아 국왕
.재위: 1198년 – 1250년
.대관식: 1198년 9월 3일 (팔레르모)
.전임: 하인리히 6세 / 후임: 코라도 1세
* 예루살렘왕
.재위: 1225년 – 1228년
.대관식: 1229년 3월 18일 예루살렘
.전임: 이사벨 2세 / 후임: 콘라드 22세
여러차례 파문을 당했는데, 고집 세고 급진적인 성격 때문에 교황들과 반목하였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여성편력으로 20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으며 상식밖의 언행으로 인해 기인이라는 평가도 있지민 타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넓은 편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좋아했으며, 시대에 앞장선 근대적인 군주같은 행동때문에 스위스의 역사가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왕좌에 있는 사람 중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평가했다. 중세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군주로 평가되어, 같은 시대에 쓰여진 연대기에서는 「세계의 경이」라며 극찬을 했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국의 왕녀 콩스탕스[2]의 아들로 이탈리아 제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6세는 선대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뒤를 이어 강력한 슈타우펜 제국을 건설하려 했으나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프리드리히 2세의 나이는 불과 세 살이었다. 하인리히 6세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196년 두 살 짜리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왕에 앉혀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한 시점에서 프리드리히는 불과 세 살의 어린 나이였는데다가 제위를 두고 벨프 가문과 오랜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당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이 황제 선출에 개입하려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제위 계승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차기 황제를 뽑기 위한 선제후 회의가 다시 열렸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로 선출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대신 그의 삼촌 필리프를 다음 황제로 내세웠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국왕이 되어 시칠리아에서 자랐다. (1198년)
– 오토 4세와의 대립
그가 시칠리아에서 자라는 동안 제위에 올랐던 삼촌 필리프는 암살되어 사망했고(1208년), 선제후 회의에서 제후들의 지지를 받은 벨프 가문의 오토 4세가 제위에 올랐다. 오토 4세는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보름스 화의의 무효화와 토스카나 백국 반환 거부 등을 주장하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1210년 11월 18일 오토 4세를 파문하곤 대체자로 시칠리아의 어린 국왕 프리드리히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를 뽑는 선제후 회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7인의 선제후 중 성직 선제후 3인과 세속 선제후 1인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황제 선거에 영향력을 휘둘렀다. 독일의 제후들 역시 덴마크의 발데머 2세가 홀슈타인과 포메라니아 지역을 침공해 오는 때에 이탈리아에만 상주하는 황제를 불신하여 1211년 말엽 뉘른베르크 의회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의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듬해인 1212년 여름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를 떠나 북상하였고 알프스 고갯길을 지키는 오토의 군대를 우회하여 9월경 슈바벤 남부의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호엔슈타우펜 황가의 적통 후계자가 나타나자 대부분의 독일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편으로 넘어갔고 오토는 쾰른으로 후퇴하였다. 1212년 12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지지와 함께 재차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궁지에 몰린 오토 4세는 삼촌인 잉글랜드의 존 왕과의 동맹에 매달렸다. 마침 프리드리히의 동맹인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프랑스 내의 영지를 수복하고자 했던 존은 1213년 프랑스 해군을 괴멸시키곤 이듬해 앙주에 상륙하였다. 존의 협공 요청에 오토 4세는 명성 회복을 위해 응하였고 플랑드르 백작과 함께 프랑스 북부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1214년 7월 2일 로슈 오 무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은 패배하였다. 그 사실을 모른채 진군하던 오토 4세는 3주간 강행군 끝에 국토를 횡단한 필리프 2세와 만나 부빈 다리에서 겨루었다. 잉글랜드와 연대하지 못한 독일군은 대패하였고 오토 본인도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부빈 전투)
전투 이후 필리프 2세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독수리 뱃지 (황제의 상징)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부빈 전투 이후 아헨과 쾰른이 프리드리히에게 항복하였고 오토는 자신의 영지인 브라운슈바이크로 후퇴하였다. 1215년, 잉글랜드에서 마그나 카르타가 체결될 무렵 오토는 재차 파문되었고 결국 황제위를 포기한채 부르고뉴 왕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자 7월 25일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 왕으로의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함께 십자군 종군을 서약하였다. 1217년 5차 십자군이 출정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1세를 포함한 귀족들을 파견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1218년 5월 오토 4세가 사망했을 때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의 황제 대관식을 추진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와 교황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 즉위
1220년, 제국 내의 서임권을 교황에게 양도하고 보름스 화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마침내 로마로 향할 수 있었다. 그해 11월 22일, 로마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 아들 하인리히는 로마 왕이 되었다. 여담으로 즉위식 당시 칙령을 통해 ‘이단을 처벌해서 화형을 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이를 두고 중세 말부터 시작한 종교재판의 광풍의 계기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이후 자신은 시칠리아에 머물고 장남인 하인리히를 독일왕으로 공인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성속 영주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영방국가 체제 발전의 길을 열었다. (1222년) 로마에서의 즉위식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1221년 8월에 십자군 종군을 서약했는데 호노리오 3세의 지속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미루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2세의 당도를 믿고 5차 십자군이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의 예루살렘 반환 제안을 거절하고 버티다가 결국 격퇴당하기도 하였다. 1223년 3월, 페렌티노에서 프리드리히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과 교황을 만나 1225년 6월 24일을 출정일로 확정하였다.
– 6차 십자군
그러나 1225년 여름이 되어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출정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에 호노리오 3세가 분노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는 2년의 시간을 더 주면 1천의 기사를 더 모집하겠다고 교황을 설득하였다. 1225년 7월 20일, 몬테카시노에서 산 제르마노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리드리히는 1227년에도 출정하지 않는다면 10만닢의 금화를 벌금으로 내거나 파문을 당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이로써 교황령 일부를 장악하던 독일군이 철수하였고 시칠리아 왕국 내 교황 재산도 환수되었다.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의 십자군 종군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와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둘은 1225년 11월 9일 브린디시 성당에서 결혼하였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동시에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법에 의한 절대정치를 시행했다. 그는 콘실리어리 (조언자)인 피에르 드 비녜 (생몰 1190 ~ 1249년)의 도움으로 나폴리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1231년에 멜피 헌법을 제정하는 등 시칠리아 왕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편지를 주고 받았고, 알 카밀에게 천체 관측기를 선물로 받을 만큼 이슬람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 특히 이슬람과의 교류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이전의 십자군 전쟁이 잇달아 실패하자 교황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시 대규모 십자군 원정을 기획하고 이번에는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황제가 직접 출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비종교적인 성향인데다가 이슬람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출병하게 되면 그 틈을 타 교황이 독일에서 세력을 넓힐 것이 뻔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출병을 미루고 있었다. 물불 안가리는 성격의 교황은 출병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마지못해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채 떠나기도 전에 병사들 사이에 장티푸스가 퍼졌고 황제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파문을 선언해버렸다.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한동안 느긋하게 시칠리아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파문 철회를 받기 위해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은 없었고 외교를 통해 원만히 예루살렘을 확보하려 했다. 마침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한 끝에 성전산에 대한 이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데 성공하여 1228년,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아 예루살렘 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지만 권위 없는 왕이었다.
황제는 성지 탈환에 성공하여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으나, 교황은 이슬람과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격렬히 분노했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었기에 교황은 여론에 떠밀려 아나니에서 그를 만나 파문을 철회했다. (1230년) 교황은 그를 ‘무함마드의 추종자’라 부른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아들’로 불렀다고.. 어찌 됐든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은 군사적 우위나 교황의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예시를 남기게 되었다.
– 하인리히의 반란
그러나 파문의 여파는 적지 않았는데, 그의 반대 세력들이 파문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도전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장남 하인리히 (7세)와 사이가 벌어져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장남 하인리히 (7세)는 시칠리아에 사는 아버지와 떨어져 독일에서 양육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가 9살 때 독일왕위에 앉힘으로서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인리히 (7세)는 장성하면서 이탈리아에 머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독일 내정을 담당했다. 하인리히 (7세)는 독일에서 마녀사냥을 하며 전횡을 일삼던 마인츠 주교를 견제하며 그와 충돌했으나, 이것이 파문을 철회받기 위해 노력하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고 말았다. 부자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결국 1234년에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켜 도전해왔다. 황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인리히 (7세)를 독일왕에서 폐위하고 두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차남 콘라트 4세를 독일왕에 앉혔다. (123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장남 하인리히 (7세)를 이탈리아에 유폐했는데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고 하인리히 (7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유폐된 상황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자비심 없는 냉혈한 아버지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최근 연구 결과 하인리히 (7세)가 나병에 걸린 것이 밝혀졌고 이 때문에 유폐가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이탈리아 전쟁 (기벨린 vs 구엘프)
한편 교황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1235년에는 마인츠에서 치안 법령 (평화 헌법)을 공포했고 롬바르디아 동맹을 쳐부술 결의를 하였다. 1237년에 크레모나 군과 함께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밀라노 군을 격파한 프리드리히는 자치도시(코뮌)의 상징인 카로치오를 파괴하였다. 1241년 8월에 그레고리오 9세가 선종하자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 2명을 포로로 잡아 새 교황을 뽑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241년 몽골군이 동유럽을 휩쓸고 헝가리까지 쳐들어오자 급히 기독교 제후들 및 사이가 좋지 않던 교회와 협력하여 십자군을 편성해 막을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1242년 오고타이의 죽음을 안 몽골군이 회군했기 때문에 한숨을 돌렸다.
1243년 2년간의 공백 끝에 새로 뽑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다시 황제와 항쟁을 할 조짐을 보이자 롬바르디아의 겔프당과 치열한 전쟁을 펼친 끝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켜 버렸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리옹에서 공의회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파문했고, 주종관계를 말소한다고 선포하여 독일 제후들의 반란을 선동했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계속된 파문과 복권에 질린 독일 제후들은 교황권의 신장도 바라지 않았고 프랑스 왕 루이 9세도 프리드리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생각 외로 황권에 위협은 되지 못했다.
1248년엔 파르마에서 일어난 반란과 1249년에 서자 엔초가 볼로냐에서 포로로 붙잡히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교황도 황제도 자금이 부족하고 북이탈리아의 제후들도 격파되기 시작하여 (1250년 마르케 전투) 결국 양측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중재로 다시 화해를 하였다. 이후 1250년 12월 12일,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던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하였다.
○ 사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아들 콘라트 4세는 황제가 되지도 못한 채 4년 후 이탈리아에서 죽었고 콘라트 4세의 아들 콘라딘 역시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16세에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 영향
그의 죽음에 교황과 겔프파는 크게 안도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기벨린파 (황제파)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위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그의 적자와 서자들이 모두 남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다.
중세 시대를 산 사람으로선 보기 드물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무슬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 “최초의 계몽군주”라 부르기도 한다.
○ 자녀
여성 편력으로 20명이 넘는 자식들을 낳았지만 공식적으로는 4명의 여인을 통해 6남 5녀의 자녀를 낳았다.
– 아라곤 공주 곤스탄자(Gonstanza, 1179년 ~ 1222년)와의 소생(1남)
1남 하인리히(7세)(Heinrich(VII), 1211년 ~ 1242년), 로마인의 왕
–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Isabelle II, 1212년 ~ 1228년)와의 소생(1남 1녀)
1녀 마르가레타(Margareta, 1226년 ~ 1227년), 요절
1남 콘라트 4세(Konrad IV, 1228년 ~ 1254년), 로마인의 왕
– 잉글랜드 공주 이사벨라(Isabella, 1214년 ~ 1241년)와의 소생(3남 2녀)
1남 요단(Jordan, 1236년 ~ 1236년), 요절
2녀 아그네스(Agnes, 1237년 ~ 1237년), 요절
3남 하인리히(Heinrich, 1238년 ~ 1253년), 예루살렘 국왕 내정자
4남 프리드리히(Friedrich, 1239/1240년 ~ ?년), 요절
5녀 마르가레타(Margartha, 1237년 ~ 1270년), 튀링엔 백작부인
– 이탈리아 귀족 비앙카 란치아(Bianca Lancia, 1200/1210년 ~ 1244/1246년)와의 소생(1남 2녀)
1녀 콘스탄차(Constanza, 1230/1232년 ~ 1307년), 니스 황비
2남 만프레디(Manfred, 1232년 ~ 1266년), 시칠리아 국왕
3녀 비올란타(Violanta, 1241년 ~ 1270년), 카제르타 백작부인
○ 업적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 문화, 그리스 문화, 노르만 문화와 이슬람 문화에 기초를 둔 행정 체제와 통치 제도를 발전시켰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