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테이아(Apatheia)와 아타락시아(Ataraxia)
○ 개념
– 아파테이아(Apatheia)
아파테이아는 그리스어로서 사전적 의미는 “정념(情念)이나 외계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를 의미미한다. 아파테이아는 스토아학파의 생활 이상이었는데, 이 상태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강조하였으며 그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잘 다듬고 불필요한 잡념과 망상 등을 완전히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 아타락시아(Atarxia)
아타락시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말한 정신적 평정의 상태를 뜻한다. 아타락시아는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말하는 행복(쾌락)의 필수 조건으로서 일체의 종교적 미신을 척결하고 이성의 인식에 입각한 현자만이 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 아파테이아(Apatheia)와 아타락시아(Ataraxia)에 관하여
‘물질’이 가치의 중심이 되고 이것을 소유할 때 질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타나는 현대사회문제 또는 고통은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낼 수 있을까?
각 시대에 벌어지는 윤리적 상황에 대한 반동은 여러 인문학적성찰의 결과물을 만들어냈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도 그러하거니와 (비판할 요소들도 많이 있겠지만) 현대의 지나친 물적 욕심과 만족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본다면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많은 귀감이 된다.
헬레니즘 철학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인류사에서 긍정적 측면이든 부정적 측면이든 전쟁은 항상 많은 변화를 가지고 온다. 부정적 측면이라면 전쟁을 통한 상흔이랄까? 긍정적 측면이라면 과학기술, 의학의 발전 또는 새로운 사상의 등장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이런 측면들이 헬라스 사상에도 나타나게 된다. 아테네 도시국가의 몰락은 시민들 여러 고통을 야기 시켰다. 삶의 고통이 심해지면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지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는 공통점일까? 정체성이란 한 개인의 존재근거라 생각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대 아테네인들이 겪었던 정체성 상실은 사회 구성인들 또는 사회전체와 여러 특성을 공유하지 못함을 의미할 것이며, 이는 자아의 영역까지 파고들어가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시대상황이 변화하고 그리스인이 개인 대 사회에 대한 정체성을 마련할 수 없었던 만큼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헬레니즘 철학은 개인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더 이상 사회로부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고 평온함을 찾을 수 있을 것에 대한 탐구는 좀 더 실천적인 삶의 기술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이런 상실의 문제는 개인으로 하여금 철학은 ‘사회는 존재하지만 한편으로 고립된 존재’로 비춰지고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체계를 마련하게 되는데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그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의 중심개념인 아타락시아(ataraxia)가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행복하고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바라고 고통 받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즐겁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일까? 재물이나 명예를 많이 얻음으로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일까? 쾌락주의라는 말은 다소 즐기기만 하는 불건전한 부분으로 보여 질 수 도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나로서도 과거 에피쿠로스학파 소속이었던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카르페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는 문구를 이해함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는데 에피쿠로스 철학은 이런 오해를 버림으로서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 철학에선 이러한 것은 고통으로 여긴다. 또한 이를 늘리는 것 보다는 자신의 욕망자체를 줄임으로써 오히려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쾌락이 갖는 범위가 애매하기 때문인 듯하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했던 쾌락은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그러한 쾌락들과는 구분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쾌락의 종류를 먼저 구분하는 것에서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는데 첫 번째로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 두 번째로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것. 세 번째로 비자연적인 것으로 나눈다. 에피쿠로스 철학에선 이러한 쾌락을 욕구하는 정도가 지나칠 경우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고 본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이런 고통을 피하는 것이 하나의 목표이다. 우리 삶에서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나친 쾌락을 일삼을 경우에는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던가? 이러한 것을 경계하고 억제해야한다. 즉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말하는 쾌락은 단순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쾌락을 요구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헬라어로 아타락시아(αταραξία) 마음의 평정, 안정을 얻게 된다. 에피쿠로스학파에 있어서 육체적 감각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유지하여 정신적인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이 아타락시아이다. 그런데 이러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을 뒷받침 하는 개념은 무엇일까?
초기의 헬라스철학자들은 자연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중에 오늘날 현대 과학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의 원자론인데 에피쿠로스는 이 이론의 대표적인 추종자이다. 핵심개념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 져있다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영혼도 가장 완전한 형태의 입자로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굉장히 획기적인 발상이었다고 보는 는데, 반면에 운동의 문제에 있어서 에피쿠로스는 이상하게도 원자들이 수직으로 하강한다는 것으로 초기의 원자론과는 약간의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였다. 그런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에 따르면 그 성격이 결정론적임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에 이르게 된다. 윤리설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는 사실상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목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피쿠로스의 방향 전환은 만물이 구성되기 위한 최초의 원인을 고려해야했는데 그것을 ‘원자의 빗나감’으로 설명한다. 원자들이 빗나감으로서 원자의 운동에 따른 인과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보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서 생성되는 관점은 스토아학파와의 중요한 차이점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원자론에 입각하여 확보된 자유의지는 인간의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미심쩍은 사건이나 가정들로부터 일종의 해방과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는 죽음에 대해선 자연적인 현상이고 죽게 되면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들은 흩어져 직접적인 감각경험들이 사라지므로 어떠한 고통도 쾌락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원자론에 입각한 사건의 구조 설명은 이 이론에 의하여 과학 법칙적 설명이 가능하므로 미심쩍은 사건에 대해서 전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세 번째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과법칙에 대해서 조금은 선택권이 주어져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최고의 선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이러한 쾌락에 대한 개념과 원자론적 사고의 의미는 단순한 감정의 섣부른 해석으로부터 오는 부정적 사고를 극복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제거한 상태를 유지함이다. 그것이 바로 평정심, 아타락시아라고 말 할 수 있다.
헬레니즘 철학에서 아타락시아와 더불어 유사한 가치를 추구했던 아파테이아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에서 나타난다. 이들의 도덕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적인 개념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원자론과 같은 유물론적 성향과는 달리 좀 더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가까워 보인다. 스토아학파의 윤리관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들의 세계관을 먼저 파악해야한다. 스토아학파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초기 자연 철학자들의 “세계 또는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헤라클레이토(Herakleitos)가 제시한 이론의 일부를 받아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를 이루는 근본 원질(substance)과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고 구조적으로 배열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의 대답은 필연적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의 근본적인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 이였던 것 같다. 이런 법칙을 움직이는 힘을 <불>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신>과 <이성>과 함께 동일시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도출되는 바는 인간의 지닌 이성이 곧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동일하므로 이두가지를 거스르는 일은 도덕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적 법칙은 신의 목적, 이성적 목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 모두 자체는 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건드릴 것은 없다. 즉 어떤 일이 발생함은 선으로서 필연적 결과로 이어질 이라는 결정론적 관점은 스토아학파 철학의 중심내용중 하나이다.
앞으로 발생할 일들이 모두 정해져있다고 가정해본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질까?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러한 측면은 마치 인간이 단지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이지만 최대한 고대인들이 처한 상황과 사고방식을 고려하고자 노력해볼 때 이것은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는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일을 조작하려드는 것 인데 이는 무의미한 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은 한낱 가치 없는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가치 행위자체는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쾌락과 고통의 구분은 단지 일종의 판단의 착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감각적인 것을 통한 판단능력의 명료성을 부정하는 것은 에피쿠로스학파와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토아학파에게 있어서 가치란 무엇일까?
앞서 밝혔듯이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중요한 가치는 쾌락이지만 스토아학파에 있어서는 이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자연적 법칙을 파악하여 일치되는 삶을 이룸에 있어 그것들이 일련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면 모종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추구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의 충동, 즉 정념은 자연일반의 법칙을 파악하는데 실패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과도한 충동으로 인하여 어떠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에 있어 맹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스토아학파에서는 이러한 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여기는 듯하다. 정리해보면 가치와 감각을 수용하는 영역에 있어서 그것이 자연의 법칙, 이성과 일치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가치기준이 성립할 수 있으며 곧 덕으로 가득한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계속해서 이성과 대립하고 있으면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스토아학파의 도덕철학의 핵심은 이런 과도한 충동의 요인을 제거하게 될 때 평온한 상태에 이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이성이며, 신의 섭리이고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학파가 갖는 결정론적 관점은 인간의 자유를 확보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감정을 컨트롤 하고 또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점은 스토아학파의 모순점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은 이런 태도에 대한 선택은 인간 안에 내재해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함에 있어 그들이 추구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쾌락들과 충동들을 벗어난 초탈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을 아파테이아(απάθεια)라 한다. 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보다 좀 더 비판할 점이 많고 보완되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긍정적인 면을 조망해본다면 현실에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의 고통이나 스트레스의 기준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에 그 정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늘 이런 것 때문에 고통 받고 있지 않던가.
정리해보면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는 최소한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평정상태를 일컫고,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는 인간의 모든 불필요한 정념들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얻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무엇일까? 나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공통점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공통점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먼저(긍정적인 측면에서)우리가 이 두 철학을 통한 긍정적이고 실천적인 배움은 바로 지나친 욕구들에 대한 절제에 있다. 물론 그리스철학에서 절제와 중용의 덕은 강조되어 왔기 때문에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엔 이러한 덕들이 도시국가에선 사회 그리고 정의와 연결되었던 반면에 헬레니즘시대에는 개인의 평온함을 지향했던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중요한 인간의 신념을 통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질적인 삶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나고 고통을 완화 시킬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윤택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목표임에 틀림이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통한 진리의 구조적인 설명을 통해 선함을 구축하려고 했다면 선을 추구함에 있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감관에 따르는 심리들에 대한 해악들을 자신의 내면의 태도변화에서 찾았다는 점은 (윤리학에 있어) 헬레니즘 시기의 큰 전환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부정적인 측면에서) 이들 철학은 현실에 안주하는 측면으로 해석 되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은 마치 쓸모없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변화에 대응하지 않는 듯한 태도는 공허한 인간상을 나타내는데 이런 측면에서도 과연 인간의 자유가 확보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소극적인 쾌락이나 자연법칙에 순응과 개인이나 사회전반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서만 대하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들은 다양한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스토아학파의 경우에는 어떤 일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태도 노력자체를 부정하였음으로 여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도 그러한가? 에피쿠로스학파는 은둔하는 삶을 좋은 삶으로 여기는데 이것을 달리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개인에 있어서든 사회에 있어서든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구실을 찾지 못한다. 과연 이런 태도가 자유의지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퇴보인데 이런 요소가 이 두 학파에게 있어서 큰 오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두 학파의 공통점은 철학은 당시 염세주의적 시대상황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에 접근해나가는 방식은 달랐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고통에서, 스토아학파에서는 비이성적인 욕구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이러한 두 견해는 행복에 대한 다른 관점을 말해주는데 이 두 학파에서 이야기하는 ‘본성’은 그 의미가 다르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선은 쾌락이고 고통은 악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배척한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그들에게 행복이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피하는 삶이다. 여기서 다루는 대부분의 고통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대상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은둔하는 삶을 추구한다. ‘떠나있음’은 속세(외부)로부터 단절을 의미하는 근거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삶이라고 본다. 반면에 스토아학파에서는 행복의 관점을 내부에서 찾는다. 이들에게 있어 본성이란 이성 또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외부의 요인들은 이미 결정되어있기 때문에 그에 맞도록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변화 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행복은 선택의 결과보다는 인과관계에 따르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상태들은 다시 역으로 드러나는데 아타락시아는 외부에서 들어온 고통을 피함으로써 얻은 내부의 마음의 평정을 얻는 상태이며, 아파테이아는 내면의 태도를 변화시켜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감정이 절제된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각각 입출력의 방향이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상반된 입장은 다음과 같은 비판으로서 그 차이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일관된 필연성의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에 근본원인은 우연성에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우연성을 고려하는 반면에 스토아학파에서는 결정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정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태도의 자유에서도 어떤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동일한 사건에 있어서 스토아학파는 반드시 그 사건에 순응하는 답안을 요구한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세계가 이성적 법칙 내에서 필연적 인과관계에 따라간다면 인간은 그저 필연성에 따라가는 기계와 같을 뿐이다. 이러한 연결고리에 갇힌 인간은 그 존재가치가 무엇일까? 목적이 없는 존재는 과연 상정될 수 있을까? 에피쿠로스학파는 이러한 요소를 가정함으로써 자유의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쾌락과 고통에 범주를 너무나 단순화 시킨 나머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을 줄여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쾌락과 고통은 하나의 대립적인 것으로서 생각하기보다는 상호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지녀야 할 것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통하여 비극과 고통 속에서 하나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이야기할 수 없더라도)구체적인 쾌와 고통의 감정을 구체화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두 학파의 철학은 어려운 시대에 사려하는 덕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그 환경에 맞는 일종의 심리에 최면을 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삶의 고난이 있을 때 종종 이런 최면이 그것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런 맥락에서 아타락시아와 아파테이아의 핵심철학은 우리의 삶의 행동에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처럼 어쩌면 삶은 실제로 언제나 비극일지도 정말로 고통의 연속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헬레니즘의 철학에서 발견한 보석은 우리들로 하여금 또다시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을 발휘 시켜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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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