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년 11월 13일, 아프리카 연안탐사와 대서양 탐험과 개척을 이끈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인펑티 동 엔히크 드 아비스 드 비제우 공작 (Infante Dom Henrique de Avis, Duque de Viseu, 1394 ~ 1460) 별세
인펑티 동 엔히크 드 아비스 드 비제우 공작 (Infante Dom Henrique de Avis, Duque de Viseu, 1394년 3월 4일 ~ 1460년 11월 13일)은 엔히크 항해왕자 (포: 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 여: Prince Henry the Navigator)로 널리 알려진 포르투갈 아비스가의 왕자 (Infante)이며 포르투갈 왕국 초창기의 주요 인물이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의 왕자이자 비제우의 공작이었던 그는 셋째 왕자로서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판트 (Infante)였으며, 그의 업적으로 인해 항해왕자 엔히크 (Henry the Navigator, Henrique, o Navegador)라고 불렸다.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항해왕자 헨리’, 스페인어식으로 ‘항해왕자 엔리케’라는 표기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서아프리카 연안탐사와 대서양 탐험과 개척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 인펀티 동 엔히크 드 아비스 (Infante Dom Henrique de Avi)
.휘: 동 엔히크 드 아비스 (Dom Henrique de Avis)
.별호: 항해왕자 (Navegador)
.출생: 1394년 3월 4일, 1460년 11월 13일
.가문: 아비스
.부모: 부) 주앙 1세, 모) 랭커스터의 필리파
.종교: 천주교
* 비제우 공작
.재위: 1415년–1460년
.전임: (신설) / 후임: 페르나두 드 비제우 공작
포르투에서 아비스 왕조의 시조 주앙 1세 (1357 ~ 1433)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전에 직접 참전하여 싸웠으며, 정복에 성공한 후 세운 공을 인정받아 두 명의 형들과 함께 세우타에서 기사로 서임받았다.
1418년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선을 보내어 항로를 개척하기에 힘썼다.
세인트빈센트 곶에 천문대와 항해 연구소를 세웠으며, 탐험 항해가들을 파견하여 보자도르 곶과 베르데 곶 등을 탐험하게 하였고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 등을 발견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446년에는 북위 약 15°에 있는 감비아 강에 도달하였다.
1460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시에라리온 (Sierra Leone) 인근 북위 6도 지점까지의 아프리카 서안을 탐사하는 업적을 쌓았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후대 마누엘 1세 (1469 ~ 1521) 시절에 인도 항로를 발견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엔히크는 사그레스의 ‘빌라 두 인펑티 (Vila do Infante, 왕자의 마을)’에 항해가와 지도업자들을 모아 이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게 하였다.
이 사그르 학파는 항해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여러 발견과 연구는 주앙 2세 (1455 ~ 1495) 시절에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에 기반이 되었다.
‘항해왕’ 또는 ‘항해왕자’라는 별칭은 19세기 독일 역사학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그의 전기를 쓴 영국의 작가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포르투갈 저술가들은 이런 별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엔히크 자신이 탐험과 발견을 위해 항해에 직접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엔히크는 생전에 탐험사업에 과도하게 투자를 했기 때문에 많은 빚을 남긴채 죽었다. 그래서 엔히크의 조카인 국왕 아폰수 5세는 엔히크의 사후에 미 개척된 지역에 대한 해양 탐사 사업에 더 이상 투자하지 않았다.
1437년에 그가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탕헤르 원정은 엔히크의 지휘능력에 문제로 인해 대실패로 끝났다. 이로인해 볼모로 잡혔던 막내동생이 학대받다가 끝내 모로코에서 숨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엔히크 자신도 명성이 실추되며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또한 기존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의 삶은 금욕적이지 않았고 습관적으로 약속을 잘지키지도 않았으며 큰형 국왕 두아르트로 부터 낭비벽이 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 년도별 주요 생애
주앙 1세의 막내 (셋째) 아들이자 두아르테 1세의 동생으로 1415년에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하자 세우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1418년에 무슬림 세력이 연합해 세우타를 공격하려고 하자 리스본에 있다가 군대를 준비해 세우타로 향했지만 수비 부대가 무슬림 세력을 격파했다.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주앙 1세가 원정을 중지시켜 리스본으로 돌아갔으며, 1419년에는 알가르브 총독에 임명되어 유럽 남서쪽 끝 사그르스에 거류지를 건설해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해 1420년부터 탐험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탐험대의 파견을 통해 포르투산투, 마데이라 섬 등을 발견했고 페레스트레루를 포르투산투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엔히크는 탐험가들이 마데이라 섬의 나무가 너무 울창하고 덤불이 무성해 평평한 땅을 만들 수가 없어서 나무를 불태운 것을 알고는 포도를 심으라고 해 이후부터는 마데이라가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1433년에 주앙 1세가 죽고 두아르트가 계승했고 당시에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는 펄펄 끓는 암흑의 녹색바다가 있고 악마가 살고 있다는 미신이 퍼져 그 곶을 함부로 탐험하지 못했는데, 엔히크가 보낸 질 이아네스 등의 탐험가가 1434년에 보자도르 곶을 넘어서 돌아오는데에 성공한 것을 보고받아 그 미신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1438년에 두아르트가 죽고 아들인 아퐁수 5세가 재위했는데, 아퐁수 5세가 어려서 어머니인 레오노르 데 아라곤이 섭정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그의 형인 페드루가 레오노르의 반대편에 서서 레오노르를 쫓아냈음에도 엔히크는 궁정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프리카 탐험에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1441년에 원정대가 사금 덩이와 흑인 2명을 잡아오면서 이는 해소되었으며, 1443년부터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 대한 항해와 교역권을 독점하게 된다.
여러 탐험가들의 발견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과를 얻으면서 1448년 9월 15일에 기니 연안에 대한 탐방, 교역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아프리카 탐험에 대한 독점권,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왕, 교회, 기사단, 부하, 해상왕국의 후계자 등에게 양도했다.
1460년 11월 13일에 사그르스에서 사망했다.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선 인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는 평생 포르투갈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인도 항로는 엔히크 왕자 사후인 1480년대에 들어서 개척된다.
하지만 엔히크 왕자가 시작한 아프리카 항로 개척이 인도 항로 개척의 씨앗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수긍하는 사실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