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92년 10월 31일,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지킨 이탈리아의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 부르노 (Giordano Bruno, 1548 ~ 1600) 복권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1548년 ~ 1600년 2월 17일)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이며 신비술사 · 철학자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스스가 가진 우주론적 신념을 지키고 기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행하다가 화형을 당한 지식의 순교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그는 근대 합리론의 시원적 개념을 제공한 인물 중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인격신, 성모 마리아 예배, 삼위일체 등을 부정하고, 천체론에서는 태양중심설을 제기하면서 당시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카톨릭에 정면 도전함으로써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철학자이다.
가톨릭교회는 해묵은 숙제를 하나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유죄판결을 바로잡는 것이다. 1633년 종교재판 이후 3백여 년 동안 미뤄온 이 숙제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풀었다. 그는 1979년 갈릴레오 재심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그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리고 갈릴레오 재판이 오류였음을 인정하고 그의 복권을 선언했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 신앙과 이성 사이에 전개된 비극적인 오해와 불신의 시대를 마감한다는 상징적인 조치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이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 잔재 청산을 호소하며 사회운동이 시작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루노에 대한 재판 과정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사형 선고는 부당”이라는 재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로써 1979년 공식적으로 사형 판결이 취소되었다. 브루노가 처형된 지 무려 379년 만이다.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출생: 1548년, 이탈리아 놀라
.사망: 1600년 2월 17일, 이탈리아 로마 캄포 데 피오리
.본명: Filippo Bruno
.영향을 준 인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영향을 받은 인물: 갈릴레오 갈릴레이,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나폴리 근처의 놀라에서 태어난 브루노는 1565년에 도미니쿠스 교단에 입단하여 신학공부를 하지만, 예수와 성모마리아 예배에 대해 의심을 품는 비정통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교단과 갈등을 빚고, 1576년에 나폴리 교회에 의해 이단자로 고발되고 만다. 결국 브루노는 도미니쿠스 교단 및 카톨릭 교회를 떠나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제네바를 거쳐 프랑스 툴루즈로, 다시 파리로 간 브루노는 프랑스 왕 앙리 3세의 보호를 받으며 기억술에 관한 3권의 책과 이탈리아어로 쓴 희극 ‘양초제조공’을 출판한다. 1583년 브루노는 런던으로 가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하며 교수직을 얻고자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저술활동에 몰두한다. 이때 그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게 되는데, 1585년까지 런던에 머물면서 ‘성회 수요일 만찬’, ‘원인과 원리와 일자’,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등을 포함한 6편의 대화록을 발표한다.
1591년 모체니고의 초청을 받아 베네치아로 간 브로노는, 종교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태도 때문에 이단으로 고발되고 결국 종교재판소에 의해 체포된다. 이후 로마로 인도된 브루노느 로마 교황청 감옥에 수감되어 7년 동안 재판을 받는다. 심문과정에서 그가 삼위일체와 인격신을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설명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그를 회개할 줄 모르는 완강한 이단자로 선고한다.
1600년 2월 8일 브루노는 캄포데이피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당하고 만다. 브루노의 이론은 17세기의 과학,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18세기 이후에는 많은 현대 철학자에게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는 사상의 자유를 상징하며 19세기 유럽 자유주의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로, 서구사상사의 주요인물이자 현대문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브루노는 1548년 나폴리왕국의 놀라(Nola)라는 곳에서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필리포였다.1562년 나폴리로 가서 그리스·라틴의 고전문학, 논리학, 변증론 (논증법)을 연구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도미니코회의 수사로 활동했으나, 후에 개신교인 칼뱅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어 무신론적 범신론으로 기울게 된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1576년에 나폴리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전설을 말하거나 학문을 가르쳤다. 라틴어 · 희랍어에 능통하였고 다방면에 박식하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피치노나 피코 등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마술이나 점성술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591년 베네치아 공화국 (현재의 이탈리아의 일부)에서 잡혀 8년 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몇몇 사소한 신학적 오류를 시인했지만, 자신의 기본 교의의 신학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다. 종교재판소의 재판관들은 브루노에게 자신의 이론을 무조건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브루노는 그러나 자신의 견해가 신과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와 양립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은 철회할 것이 전혀 없다고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 교황청 이단 심문소로부터 이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브루노는 1600년 2월 8일 사형 선고를 받을 때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 (그를 사형하려는 로마 교황청측) 쪽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라는 내용의 발언으로 유명하다.
○ 우주관
브루노의 발언이나 주장 가운데 가장 이단으로 여겨진 부분은 그의 세계관과 우주관이었다. 그의 우주관은 말하자면,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무한 우주론을 부정하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쉽게 주장할 수 없었다.
브루노의 무한 우주론은 지동설과 같지 않지만, 지동설의 기본 전제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관계가 있다.
브루노의 화형은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문화 활동이 가능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것이다.
○ 재판과 처형
로마에서 그는 7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노나 탑에 갇혔다. 그는 8년 동안 가혹한 심문을 당하며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예수회의 추기경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주재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해야할 이유가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철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사형 선고가 내릴 때, 그는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자신을 기소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보다 오히려 더 클 것이다” 선고가 내려진 직후 예수회 사제들은 브루노의 턱을 쇠로 된 재갈로 채우고, 쇠꼬챙이로 혀를 꿰뚫었으며, 또 다른 꼬챙이로 입 천장을 관통시켰다. 1600년 2월 19일 일요일. 브루노는 망토를 입은 ‘자비와 연민단’이라는 무리가 이끄는 수레에 실린 채 구경거리가 되어 로마 거리를 돌아다녔다. 예수회 사제들은 그를 발가벗긴 뒤 불태워 죽였다.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 중 하나는 1940년 발견된 요약집이다. 그가 지은 책과 그가 증언했던 데 대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죄목에는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리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 그리고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들에 대한 것이었다. 루이지 피르포 (Luigi Firpo)는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전한다.
.기독교 믿음과 교리에 배치되는 의견.
.삼위일체를 부인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함.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의견.
.성체와 미사에 대한 다른 의견
.복수의 세상이 있으며, 그들의 영원성을 주장함.
.윤회와 인간 영혼이 짐승에게 들어간다고 믿음.
.마법을 연구하고 점을 침.
.마리아의 처녀성을 부인함.
브루노는 베네치아에서 변호에서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유지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브루노는 세상이 하나뿐이 아님을 믿었으나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그 생각을 포기하라고 강요당했다.
○ 브루노의 동상 건립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등의 지식인들은 1899년 사상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브루노를 기리며 그가 화형 당한 로마의 캄포데 피오레 광장에 동상을 건립했다. 이에 분개한 교황 레오 13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항의의 금식기도를 했다.
브루노의 동상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 복권
가톨릭교회는 해묵은 숙제를 하나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유죄판결을 바로잡는 것이다. 1633년 종교재판 이후 3백여 년 동안 미뤄온 이 숙제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풀었다. 그는 1979년 갈릴레오 재심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그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리고 갈릴레오 재판이 오류였음을 인정하고 그의 복권을 선언했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 신앙과 이성 사이에 전개된 비극적인 오해와 불신의 시대를 마감한다는 상징적인 조치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이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 잔재 청산을 호소하며 사회운동이 시작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루노에 대한 재판 과정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사형 선고는 부당”이라는 재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로써 1979년 공식적으로 사형 판결이 취소되었다. 브루노가 처형된 지 무려 379년 만이다.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 저서들
희극 ‘양초제조공’
성회 수요일 만찬
원인과 원리와 일자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 Works
De umbris idearum (The Shadows of Ideas, Paris, 1582)
Cantus Circaeus (The Incantation of Circe, 1582)
De compendiosa architectura et complento artis Lulli (A Compendium of Architecture and Lulli’s Art, 1582)
Candelaio (The Torchbearer or The Candle Bearer, 1582; play)
Ars reminiscendi (The Art of Memory, 1583)
Explicatio triginta sigillorum (Explanation of Thirty Seals, 1583)
Sigillus sigillorum (The Seal of Seals, 1583)
La cena de le ceneri (The Ash Wednesday Supper, 1584)
De la causa, principio, et uno (Concerning Cause, Principle, and Unity, 1584)
De l’infinito universo et mondi (On the Infinite Universe and Worlds, 1584)
Spaccio de la bestia trionfante (The Expulsion of the Triumphant Beast, London, 1584)
Cabala del cavallo Pegaseo (Cabal of the Horse Pegasus, 1585)
De gli eroici furori (The Heroic Frenzies, 1585)
Figuratio Aristotelici Physici auditus (Figures From Aristotle’s Physics, 1585)
Dialogi duo de Fabricii Mordentis Salernitani (Two Dialogues of Fabricii Mordentis Salernitani, 1586)
Idiota triumphans (The Triumphant Idiot, 1586)
De somni interpretatione (Dream Interpretation, 1586)
Animadversiones circa lampadem lullianam (Amendments regarding Lull’s Lantern, 1586)
Lampas triginta statuarum (The Lantern of Thirty Statues, 1586)
Centum et viginti articuli de natura et mundo adversus peripateticos (One Hundred and Twenty Articles on Nature and the World Against the Peripatetics, 1586)
De Lampade combinatoria Lulliana (The Lamp of Combinations according to Lull, 1587)
De progressu et lampade venatoria logicorum (Progress and the Hunter’s Lamp of Logical Methods, 1587)
Oratio valedictoria (Valedictory Oration, 1588)
Camoeracensis Acrotismus (The Pleasure of Dispute, 1588)
De specierum scrutinio (1588)
Articuli centum et sexaginta adversus huius tempestatis mathematicos atque Philosophos (One Hundred and Sixty Theses Against Mathematicians and Philosophers, 1588)
Oratio consolatoria (Consolation Oration, 1589)
De vinculis in genere (Of Bonds in General, 1591)
De triplici minimo et mensura (On the Threefold Minimum and Measure, 1591)
De monade numero et figura (On the Monad, Number, and Figure, Frankfurt, 1591)
De innumerabilibus, immenso, et infigurabili (Of Innumerable Things, Vastness and the Unrepresentable, 1591)
De imaginum, signorum et idearum compositione (On the Composition of Images, Signs and Ideas, 1591)
Summa terminorum metaphysicorum (Handbook of Metaphysical Terms, 1595)
Artificium perorandi (The Art of Communicating, 1612)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