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처음으로 십자군 소집 제창
십자군 전쟁 (十字軍戰爭, Crusades)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에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좁은 의미의 십자군이라고 하면 성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서 진행된 전쟁들을 가리키나, 넓은 의미에서 중세의 기독교회에서 주동한 다른 전쟁들을 십자군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760년경을 전후하여 처음 사용례가 나타난다.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을 소환한 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본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있던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위한 군사원조가 그 명분이었다. 우르바노 2세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우르바노 2세 및 우르바노 2세의 소환에 응하여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의 진정한 동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르바노 2세의 대전략은 아마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지중해 동해안에는 4개의 십자군 국가들(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졌다. 우르바노 2세의 선동에 서유럽의 모든 계층이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이것이 이후 다른 모든 십자군들의 선례가 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의용병들은 공개적으로 서원을 세우고 교회의 면벌부를 수여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단체 승천하게 될 것을 기대하거나 자신의 모든 죄를 신이 사해줄 것을 희망한 이들도 있었다. 종교적 동기 외에도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 교황 우르바노 2세 (Pope Urban II Illustration)
교황 우르바노 2세 (Papa Urbano II)는 제159대 교황 (재위: 1088년 3월 12일 ~ 1099년 7월 29일)이다. 본명은 오동 드 라주리 (프: Odon de Lagery)이다.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1099)을 계획했으며, 오늘날 로마 교황청 조직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교황 우르바노 2세 (Pope Urban II)
.본명: 오동 드 라주리
.출생: 1035년, 프랑스 왕국 라주리
.선종: 1099년 7월 29일, 교황령 로마
.교황 임기: 1088년 3월 12일 ~ 1099년 7월 29일
.전임자: 빅토르 3세 / 후임자: 파스칼 2세
오동은 프랑스 태생으로, 샤티용쉬르마른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 1064년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었다. 그리고 1080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오동은 그레고리오 개혁의 열정적인 지지자이자 가장 유명한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1084년 독일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을 때 이런 그의 면모가 특히 두드러졌다. 그는 퀘들린부르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대립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레고리오 7세를 계승할 가장 적합한 교황 후보로 이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1085년 그레고리오 7세의 뒤를 이을 교황으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아빠스인 데시데리우스가 선출되어 교황 빅토르 3세로 즉위하였다. 빅토르 3세가 짧은 재임 기간을 마치고 선종한 후, 1088년 3월 테라치나에서 회합을 가진 추기경들과 기타 고위 성직자들은 구두 투표로 오동을 후임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프랑스인으로는 두 번째 교황이다.
우르바노 2세는 즉위하자마자 독일과의 전쟁, 프랑스에서의 갈등, 대립교황, 위협받고 있는 동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문제들을 당면하였다. 동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문제의 경우, 그는 대규모 성지 순례 (이 때만 하더라도 십자군이라는 말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음)를 해결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황은 1095년 3월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 (이슬람교도)에 맞설 군사적 원조를 요청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절을 접견하면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소집된 지역 공의회(클레르몽 공의회)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프랑스의 주교들이 참석하면서 첫 모임은 클레르몽 시 외곽의 야외에서 치루어야만 했다. 같은 해 11월 노트르담 두 포르 성당에서 연설을 가진 우르바노 2세는 처음에는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의 쇄신을 주문하다가, 11월 27일에는 민간인들까지 포함하여 더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연설하였다. 이 때 우르바노 2세는 시노드에 참석한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거룩한 땅과 동방 교회들을 셀주크 투르크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탈환해야 한다면서 매우 열정적으로 호소하였다.
○ 클레르몽 공의회
클레르몽 교회회의는 1095년 11월 18일부터 11월 28일까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합동 주재로 열렸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회의이다. 이 교회회의를 주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1월 27일 되는 날, 공의회 연설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1095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셀주크 투르크측에 위협을 느끼고 서방측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황제의 서신은 피아첸차 교회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전해졌다. 그 후 11월,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교회회의는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열렸으며, 약 300여명의 성직자가 참석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교회 내 클뤼니 개혁과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파문에 관한 문제를 놓고 논의하였다. 11월 27일, 우르바노 2세는 공의회 교부들 앞에 동방 문제를 언급하였다. 교황은 서방의 그리스도교회가 이슬람교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를 해방시키고, 이슬람 제국의 공격으로 인하여 위험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해야 한다고 열변을 하였다.
–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문
예루살렘, 안티오크 및 그밖의 도시들에서 크리스트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 튀르크인들의 진출은 그칠 줄 모르고 이미 일곱차례나 크리스트교도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가오고 있다. 성지의 형제들을 구하라. 서유럽의 크리스트교 교도들이여.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근동의 크리스트교 교도의 구원에 힘써라. 신은 그대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신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사함을 받으리라. –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
○ 1차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은 1095년 예루살렘으로 출병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이다.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1095년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지원을 호소한 데 있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쟁쟁한 군웅들을 앞세우고, 총사령관으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데마르 주교가 있었고 은자 피에르도 따라갔다.
제1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먼저 니케아를 공격하고 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에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는 가장 존재감 없고 중립적인 고드프루아가 되었으나, 얼마 못되어 죽었다. 보에몽은 아데마르의 후임인 다임베르트와 짜고 예루살렘을 노렸으나 다임베르트는 일찌감치 온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에게 밀려나고, 보에몽은 무슬림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며 공식적으로 끝이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