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170년 12월 29일, 중세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 베케트 (Thomas Becket, 1118년 ~ 1170년) 순교
토머스 베켓 / 베케트 (Thomas Becket, 1118년 ~ 1170년)는 중세 서방 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이다.
– 토마스 베켓 / 베케트 (Thomas Becket)
.생사: 1118년 ~ 1170년
.축일: 12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캔터베리 (Canterbury)
.활동연도: 1118-1170년
.같은이름: 도마, 베케트, 베켓, 토머스
헨리2세는 자신의 친구 베켓을 대주교로 삼았으나 자신의 뜻에 어긋나자 기사들을 보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한다.
그 후 헨리2세는 공적으로 참회하고 토마스 베켓을 순교자로 시성한다.
영국의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 생애 및 활동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켓 (베케트)와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의 머튼 수도원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테오발드 대주교는 그가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프랑스의 오세르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61년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토마스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1166년 토마스는 성직자를 교회에서뿐만이 아니라 세속 법정에서도 재판할 수 있도록한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토마스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이를 묵인하였다.
이후 토마스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포고하였을 때, 토마스는 상스 교외의 성 콜룸바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토마스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70년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기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살해당한 정치적 이유를 살펴보면, 베켓은 종교재판관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때 헨리 2세가 원하는 수준보다 온건하게 죄인들을 처벌해서 심기를 건드렸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게 헨리 2세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의 ‘과잉충성’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머스 베켓은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머스 베켓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하였다.
○ 대중매체
–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을 썼다.
.저자: T. S. 엘리엇
.최초 발행일: 1935년
.장르: 운문극
.등장인물: 토마스 베켓, King Henry II, First Tempter, Second Tempter, Third Tempter, Third Knight 등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은 T. S. 엘리엇 (T. S. Eliot)의 운문극으로 1935년 초연되었다.
이 극은 1170년 헨리 2세 통치 기간 동안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대주교 토마스 베켓 (Thomas Becket)의 암살을 묘사했다.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의 대주교였던 토마스 베켓이 순교한 이후, 캔터베리는 기독교인들의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극은 1935년 캔터베리 축제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엘리엇이 위촉을 받아 쓴 작품이다.
엘리엇은 대주교의 순교 사실을 다루면서도 사건의 경위나 순교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베켓 자신과 그가 상대하는 세속적인 인물들의 정신적, 영적인 갈등을 통해서 기독교와 신앙의 본질을 탐색한다.
– 영화 ‘베켓’ (Becket, 1964년 작품)
감독) 피터 글렌빌, 주연) 리처드 버튼, 1964년
영국의 왕 헨리2세가 교회와 세금 문제로 싸움을 하는 도중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죽는다.
왕은 그 자리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토마스 베켓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한다.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켓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죄를 지은 성직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토마스 베켓은 성직자를 교회에서뿐만이 아니라 세속 법정에서도 재판 할 수 있도록 한 클라렌드 칙령을 거부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프랑스로 추방된다. 토마스 베켓은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교황은 이를 묵인한다.
토마스 베켓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헨리 2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그는 헨리2세의 기사들에 의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당한다. 그 후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참회하고 토마스 베켓을 순교자로 시성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