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271년 12월 18일, 쿠빌라이 칸이 몽골 제국을 원 (元)나라로 개칭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1260년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은 중국 북부지역을 정복하고 1271년 12월 18일, 몽골제국을 원 (元, 대원대몽골국; 大元大蒙古國) 나라로 개칭한다. 몽골제국 보르지긴 가문의 수장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떠올랐다.

몽골인들은 몇 십년 동안 중국 북부 지방을 다스리기는 하였으나 1271년에 쿠빌라이 칸이 전통적인 중국 양식으로 왕조를 개창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국가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이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남진하여 송나라를 애산 전투에서 꺾었고, 중국의 유일한 지배 왕조로 떠오르게 되었다. 중국을 모두 통일한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다른 칸국들과 관계를 끊고 현재의 중국과 몽골 지역들을 다스렸다. 원나라는 처음으로 이민족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사례이며, 1368년에 명나라 군대에 의하여 본거지인 몽골 지역으로 쫒겨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쫒겨난 이후에도 원나라 황족들은 북원을 세워 황조를 지속해나갔으며, 알탄 칸 재위기에는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의 국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몽골 제국이 중원을 지배하고 통치한 시기를 말한다. 몽골족의 정복 왕조 원나라는 중국 대륙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영역을 지배하다가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朱元璋)에게 쫓겨 북쪽으로 이전한 뒤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원은 송나라를 멸망시킨 이민족의 정복 국가이며, 중국 대륙을 자체 병탄·병합하였다. 이후 주원장의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나 쇠퇴하게 된다.

– 원 (元) 나라 개요
.개국: 1271년 12월 18일
.멸망: 1368년
.수도: 대도 (동절기), 상도(하절기)
.지배층: 몽골인, 색목인
.피지배층: 한인, 남인
.인구: 약 87,587,000명 (1351년)
.황제: 원 11대, 북원 3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카안 (황제)
.언어: 중세 몽골어, 중세 중국어, 티베트어 등
.문자: 몽골 문자, 파스파 문자, 한자
.종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유교, 백련교
.종족: 몽골족, 한족, 회회인, 티베트인
.통화: 교초 (交鈔) 등
제5대 칸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대재건원 만물질시 (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고, 서역의 4대 칸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
중세 몽골어로 ‘다이운 여커 몽골 울루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 (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다. 황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와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쩐흥다오의 전략에 말려들어 물러났으며 잘 안 알려졌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진다. 북원은 겨우 3대에 천원제가 대칸 자리를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하며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몽골”로서는 이후 한참 더 존속하다가 청나라에게 내외몽골이 차례로 복속될 때까지 독립해 존재했다.
한족을 정복 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으로 강제 편입시킨 건 이 왕조가 유일하며 또한 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 한반도 전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종교는 티베트 불교이다. 티베트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불리우며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이고 탄트라 좌도 밀교이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인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 국가였기 때문에 원나라 때는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하였고 원나라가 사라지고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도 사라졌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청나라에서 몽골인과 티베트인이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보니 다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가 활성화된다.

○ 원나라의 역사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 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다. 그러면서도 중국화된 명칭과 제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원나라가 성립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 중국과의 전쟁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 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뛰어난 경제력을 갖춘 것은 물론, 상당한 방위력에 금나라 멸망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 충분히 원나라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그대로 유지시켰을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몽케 칸의 대에, 남송의 재상인 가사도(賈似道)에게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두 차례의 태풍과 기상악화로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 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보호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원나라는 군인이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마침내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구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구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일명 가미카제의 도움),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이 쩐 왕조에게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패배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로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인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다. 이 상황을 가리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는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다.

– 쇠퇴기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다음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진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태평왕(太平王) 엘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엘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지배에 대한 한족들의 불만과 공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 명나라의 건국
1348년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크토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대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 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다만 이 과정을 단순히 한족의 승리, 몽골민족의 패주라는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문제가 있다. 즉 화북에서는 먼저 황하의 개수 등에 의해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일로 인해 원나라의 구심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다. 주원장이 아직 화남평정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배경이 되었다. 또한 한족의 관리 중에는 앞에서 나온 가노를 시작으로 원 왕조에 충성을 다하여 명나라군과 반란세력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많았고, 1367년 명나라군에게 붙잡힌 호부상서 장욱은 주원장의 항복권고에 대해 “몸은 강남에 있어도, 마음은 삭북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청나라의 역사학자 조익은 원나라에 순사한 한족의 관리의 숫자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남송 다음으로 많았다고 지적하였다.
– 북원
북원에서는 1388년 토구스 테무르의 자손이 끊어지면서 쿠빌라이 가문의 대칸 세습이 끝나고, 쿠빌라이 왕조인 원나라는 단절되었다. 차하르 칸국은 나름 힘을 길러 다얀 칸 때에 이르러 대원황제를 다시 선포하며, 명나라에서 오는 한족 이주민들을 시켜 귀화성이라는 중국식 도시를 짓게 하기도 했다.

○ 원나라의 영향
원나라 시대에는 민족성 다양성에 힘입어 다양한 문화적 발전이 일어났다. 소설과 연극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특히 백화문을 사회 각계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 중앙아시아와 중원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며, 동양과 서양 간 교류도 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 몽골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문화권들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고, 수없이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중화권으로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 중국의 문화에도 대변화가 일어났다.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무역과 상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페르시아, 중동 등에서 뻗어있는 무역로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시장 경제를 촉진하였다. 원나라 황실은 불교를 신봉했는데, 특히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원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온 무슬림들은 중동의 발달한 천문학, 약학, 의복, 식생활들을 동아시아에 전파하였으며, 당근, 튤립, 레몬, 멜론, 설탕, 솜 등의 고급 작물들도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서양의 악기들도 도입되어 중국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는 이슬람교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아시아 지역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와 로마 가톨릭도 관용적인 원나라의 종교 정책에 힘입어 중국으로 진출했고,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불교도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도교는 원나라의 박해를 받아 세가 주춤하기는 하였다. 유교도 중요시되었다. 원나라는 선대 황조들의 본을 받아 유교적인 관료제를 채택하였고, 유교적인 과거제를 통하여 관리들을 임용하였다. 이는 금나라 통치 시절 이후 북부 중국에서 단절되었던 유교적 학풍을 되살렸던 것으로, 한족 통치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실시했던 것이다. 원나라에서는 워낙 넓은 영토를 통치하다 보니 탐험 문학도 발달하였고, 지도학, 지리학, 과학도 크게 발전하였다.
원나라 대에 중국에서 발명된 물건들도 많이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정제된 질산 칼륨, 인쇄술, 도자기, 카드 게임, 약학 등이 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에서는 활발한 무역에 힘입어 칠보와 유리 공법이 발달하였다. 원나라는 뒤이어 중국을 통치한 명나라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초대 황제 주원장은 몽골이 군사적으로 중국을 통치한 방법에 감탄하여 이들의 군사 기지들과 요새들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정도였다.
서양인들이 동양으로 여행을 왔다가 남긴 첫 기록물이 바로 원나라 시대에 나왔다.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동방견문록이 바로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시대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저서에 ‘칸발리크’라는 도시를 다녀왔다고 적었는데, 이 것이 바로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였다. 동방견문록은 당시 동방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던 서양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국적인 분위기와 생생한 묘사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책 내용을 분석하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다녀온 시기는 1299년으로 보인다. 다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가장 핵심적인 건축물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았고, 전족 등에도 한마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에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동방견문록이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모험에 기반하여 쓴 것이며 대부분이 매우 정확하고 독특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나라 정부는 다양한 공공 사업을 벌였다. 쿠빌라이 칸의 핵심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천문학자 곽수경이 있었는데, 그는 원나라가 태음태양력을 정확히 365.2425일로 계산하는 것에 업적을 남겼다. 이는 현대의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한 것과도 26초의 오차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정확한 수치였다. 원나라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도로와 수로 사업도 활발히 벌였다. 기근을 대비하기 위하여 제국 전역에 곡식창고들이 지어졌고, 수로를 건설하여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량을 늘렸던 것이다. 원의 수도였던 대도에는 거대한 인공 연못, 언덕, 산, 공원들과 함께 거대한 칸의 궁전이 지어졌고, 이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전해진다. 대도는 이 때 대운하의 종착점으로 기능하며 경제적인 부를 누렸는데, 이는 대운하가 원나라 시대에 재정비되어 내지와 해양을 연결하며 중국 내부의 무역, 일본, 고려, 심지어는 유럽까지도 활발하게 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인 여행가들은 이 대운하를 통하여 새로운 작물들, 수수새속, 이국적인 요리법 등을 들여와 중화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처음으로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 전역을 통치한 경우였다. 이전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도 중국 북부 지역을 통치하기는 하였으나, 그때도 여전히 한족이 세운 송나라가 남부 지역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 역사학계는 보통 원나라를 몽골 제국의 후신으로 보며, 이 때를 몽골의 최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몽골인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몽골족들은 이같은 세계관에 입각하여 원나라를 ‘생명, 행복, 평화, 힘의 근원이자 이 외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라고 찬양할 정도였다. 다만 중국의 역사학계는 이같은 관점에 딱히 동의하지 않는다. 주류 중국 역사학자들은 원나라가 송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짧게 등장했던 왕조 정도로 보고, 몽골족이 세웠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원나라를 중국의 왕조로 평가하지 않는 역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원나라 시대에 한족이 전혀 제대로 융화되지 못했고 오히려 2등 시민으로 대우받았으며, 이 시기에 중국이 점차 경제적, 기술적으로 퇴보하였다고 여긴다.
원나라 황실의 색은 백색이었다. 금속을 상징하는 색깔인데, 이같이 나라의 상징색에 원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나라 시절부터 거슬러 온 것이다. 원나라가 이처럼 진나라의 선례를 따르고자 했던 것은, 원이 송나라와 같은 정통 한족 황조들을 이은 나라가 아니라 진나라와 같이 활발하게 정복 사업을 펼쳤던, 소위 진취적인 나라들을 이었다고 여기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전통의 용무늬 장식은 일 칸국에게도 전파되었다. 일 칸국은 중국식 호칭인 ‘황제’도 그대로 가져다 썼고, 심지어는 중국식 관료제도 일부 차용하기도 하였다. 일 칸국은 황제의 옥새에도 한자를 새겼고, 자신들을 중국식으로 점차 동화시켜나갔다.
몽골제국의 제 5대 카안, 쿠빌라이 칸 (Qubilai Qa’an, 1215 ~ 1294)에 대하여
쿠빌라이 카안 (Qubilai Qa’an, 1215년 9월 23일 ~ 1294년 2월 18일)은 대원의 제5대 카안 (재위, 1260 ~ 1294)이자, 칭기스 칸 (Činggis Qan, 1162 ~ 1227)의 손자이다. 본명은 ‘쿠빌라이’, 묘호는 세조 (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는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 (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는 세첸 카안 (Sečen Qa’an)이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다.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 (大元)으로 개칭하고 대도 (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 · 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종족을 실력 위주로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또 한편, 카안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을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 쿠빌라이 세첸 카안 (Qubilai Sečen Qa’an)
.출생: 1215년 9월 23일, 몽골 제국
.사망: 1294년 2월 18일, 대도 (매장지: 부르칸 칼둔)
.연호: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94년
.이름: 휘쿠빌라이 / 묘호: 세조(世祖)
.칸호: 세첸 카안(Sečen Qa’an, 薛禪可汗; 설선 가한)
.존호: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시호: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왕조: 대원 / 가문: 보르지긴
.부모: 부친 – 툴루이, 모친 – 소르칵타니 베키
.배우자: 소예순성황후, 남필 황후
.자녀: 자녀: 친킴, 제국대장공주, 토곤, 코코추 칸, Nangjiazhen, Wuluzhen, 아야치 황자, 후게치 외
.종교: 티베트 불교
*지위: 몽골 카안
.재위: 1260년 5월 5일 ~ 1271년 12월 18일
.대관식: 중통(中統) 원년 3월 24일
(1260년 5월 5일)
*지위: 대원 카안
.재위: 1271년 12월 18일 ~ 1294년 2월 18일
.대관식: 지원(至元) 8년 11월 15일
(1271년 12월 18일)
.전임: 뭉케 카안 / 후임: 테무르 울제이투 카안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로 묘호는 세조 (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휘는 보르지긴 쿠빌라이 (Borǰigin Qubilai, 孛兒只斤 忽必烈; 패아지근 홀필렬 혹은 흘필렬). 고려 원종의 사돈, 충렬왕의 장인, 충선왕의 외할아버지. 계국대장공주의 증조 할아버지. 또한 덕녕공주는 쿠빌리아 카안의 4세손이 된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4남이자 전대 카안 (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동생.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카안이자 원나라의 시조다.
1260년, 카안 자리에 올라 카간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부카와의 내전을 벌여 1264년에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 아리크부카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 그래도 쿠빌라이 카안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 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 이러한 영광이 있지만 카미카제 대삽질로도 유명하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카안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추진력이 없어졌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군주이기도 하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수흐바타르 광장에서는 오고타이 칸과 함께 앉아있는 칭기즈 칸의 동상을 양 옆에서 호위하는 식으로 쿠빌라이의 동상이 서 있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반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의 넷째 아들이며 몽케 칸의 동생이었다.
1251년부터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이때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정벌을 맡겼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 정복 준비와 대리국 정벌
그는 자신의 영지인 경조 (京兆), 산시성 (陝西省) 시안(西安)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 (雲南省)에 있던 대리국 (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1253년 가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 (大理城)을 정복했다. 그러나 정복 직후인 1254년 초 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 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들을 감지하고 되돌아가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에게 이 지역의 위수 (衛戍)를 맡겼다. 대도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7년 몽케 칸의 지휘 아래 출정에 참여하여 남송 공략을 준비하였으나 1259년 몽케가 갑자기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몽케 칸의 전사 소식과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크 부케가 스스로를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복귀하였다.
– 즉위 초반
.아리크 부케의 도전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 (上都)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 (Kuriltai, 大會議)를 임의로 개최하여 몽골족 부족장들을 소집, 그해 5월 5일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리크 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고 쿠빌라이를 찬탈자라 공격하였다. 후에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시비, 논란은 그의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까지 날조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거절하고 끝까지 항거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었다.
.파스파 문자 제정
파스파 문자 (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 (元) 국사 (國師)인 파스파 (八思巴)가 쿠빌라이 (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 · 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 (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정복 활동
.고려 복속
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제1차 일본 원정 실패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 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송 정복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 (臨安; 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 (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 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과 티베트를 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월남 공략 실패와 2차 일본 원정 실패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북방 지역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하였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또한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참파 공략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는 성과를 올렸다.
– 생애 후반
계속 된 정벌과 정복 사업의 강행으로 젊은 장정들이 사라져 노동력이 황폐해졌고, 군비 조달로 인한 재정난의 증대는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인들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는데, 이슬람교도 출신 서역 상인들과 위구르인 상단 등 주로 색목인 (色目人) 계통의 상인들의 중국 진출을 허용함과 동시에 이들 색목인 출신 신흥 관료를 발탁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와 그의 사주를 받은 두아 등 고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79세를 일기로 대도에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 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과 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에 뛰어났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 작품
일본에 보내는 친필 국서 (1264년)
○ 가족관계
조부 : 추존황제 태조(太祖) 칭기스 칸
조모 : 추존황후 광헌익성황후(光獻翼聖皇后) 옹기라트씨
아버지 : 추존황제 예종(睿宗) 툴루이 칸
어머니 : 추존황후 헌의장성황후(顯懿莊聖皇后) 케레이트씨
– 형제
뭉케 칸 – 몽골 제국의 4대 대칸
훌라구 – 일 칸국의 초대 대칸
아릭 부케- 몽골제국의 대립 대칸
– 후비
.제1오르도
첩고륜 대황후(帖古倫 大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원비(元妃)
.제2오르도
소예순성황후(昭睿順聖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정후(재위 : 1260년 ~ 1281년) , 본명은 찰필(察必)
남필 황후(南必 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계후(재위 : 1283년 ~ 1294년)
.제3오르도
탈랄해 황후(塔剌海 皇后)
노한 황후(奴罕 皇后)
.제4오르도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
.그 외
속가답사 황후(速哥答思 皇后)
백요올진 황후(伯要兀眞 皇后)
활활륜 황후(闊闊倫 皇后)
알자사 황후(斡者思 皇后)
욱실진 황후(旭失眞 皇后)
타로별진 황후(朶魯別眞 皇侯)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팔팔한 비자(八八罕 妃子)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아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올내홀내 비자(兀乃忽乃 妃子)
– 자녀
.아들
도르지 황자(朶兒只 皇子) – 소예순성황후 소생. 요절함
명효태자(明孝太子) 진금(眞金) – 소예순성황후 소생. 원나라 제2대 황제 성종(成宗)의 아버지
진왕(秦王) 망갈라(忙哥剌, ? ~ 1280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북안귀정왕(北安歸定王) 노무간(那木罕, ? ~ 1292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운남왕(雲南王) 후게치(忽哥赤, ? ~ 1271년)
아야치 황자(愛牙赤 皇子)
서평왕(西平王) 오그룩치(奧魯赤, ? ~ 1303년)
영왕(寧王) 쿠쿠추(闊闊出, ? ~ 1313년)
진남왕(鎭南王) 토곤(脫歡, ? ~ 1301년)
쿠틀룩테무르 황자(忽都魯帖木兒 皇子)
테미치 황자(鐵滅赤 皇子) – 남필 황후 소생. 요절함
.딸
조국대장공주(趙國大長公主) 월렬(月烈) – 생모미상(生母未詳), 조무양왕 애불화(趙武襄王 愛不花)에게 하가(下嫁)
창국공주(昌國公主) 오로진(吾魯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패화(孛花)에게 하가(下嫁)
창국대장공주(昌國大長公主) 다륜(茶倫) – 생모미상(生母未詳), 첩감간(帖監干)에게 하가(下嫁)
노국장공주(魯國長公主) 완택(完擇)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라진(斡羅眞)에게 하가(下嫁)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낭가진(囊家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랄진(斡剌眞), 첩목아(帖木兒), 만자태(蠻子台)에게 하가(下嫁)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생모(生母)는 야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고려 충렬왕 왕거(高麗 忠烈王 王昛)에게 하가(下嫁)
공주(公主) – 남송 공제 조현(南宋 恭帝 趙㬎)에게 하가(下嫁)
○ 쿠빌라이 칸 관련 작품
《호조 토키무네》 (2001년, NHK 대하드라마) – 파삼찰포(巴森扎布)
《무신》(2012년, MBC)
《칭기즈칸의 후예 (建元风云)》(2013년, 후난위성TV)
《마르코 폴로》(2014년-, 미국 넷플릭스)

○ 평가
몽골에서는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영웅의 한사람으로 존경받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애산 전투 직후 남송의 군사들과 귀족들을 학살, 남송을 잔인하게 멸망시킨 학살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탐원공정과 동북공정 이후에는 그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서 그에 대한 중국내의 평가는 달라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고려를 복속화시킨 침략자의 한사람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였으나, 1990년대 이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 고려와의 관계
고려 원종은 내전 도중에 즉위 전의 쿠빌라이에게 접근했다. 항복하러 가던 중에 몽케 칸이 죽었는데, 쿠빌라이가 즉위하리라 보고 일부러 쿠빌라이에게 접근하였다는 말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종은 쿠빌라이와 여몽전쟁을 끝내고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돌아와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권을 되찾았다. 흥미롭게도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를 고구려(고려) 그 자체(후신)로 생각하여, “당태종도 못 정복한 고(구)려의 후손이 제발로 항복했다”며 좋아했다고. 당시만 해도 아리크 부카와 대권 경쟁 중이었고, 정통성 측면에서 아리크부카 쪽이 좀 더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40년이나 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와서 항복해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보태서였다. 대외적으로 쿠빌라이 쪽을 계승자로 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고려가 속절없는 모습인 듯하자 “고구려가 강력하다고 했건만 고려는 어찌 이리도 나약하단 말인가?”라고도 말했다. 전자의 고구려 관련 발언에 비해 사람들이 이 말은 잘 모르는데, 카다안의 침입 자체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딸 제국대장공주를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보내 고려의 왕비가 되게 했다. 사실 이건 몽골에게 있어서 굉장히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원종이 제안했다고 하지만 원나라에서 황금씨족 직계 공주는 본래 몽골인하고만 혼인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고려 왕족만은 유일한 예외로 자기 막내딸을 고려 왕비로 만든 것이다.
제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을 낳았다. 충선왕은 외가인 원나라에서 오래 지내며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쿠빌라이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고려 왕비 (제1비)의 자리를 원나라 여황족이 차지했다.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면,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가 대단했다.
이때 쿠빌라이가 고려에 약속한 ‘세조구제’ (世祖舊制)로 고려는 몽골에 40년이나 대항하고서도 직할 통치를 안 받은 유일한 나라였다.
의외로 원 간섭기 시절에도 몽골이 고려에 끼친 영향력은 정치적인 영향력 외에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대체로 몽골은 자국이 정복한 나라를 향해서 이른바 6사라는 6가지 조건을 관철시키는데 그 6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호구 조사를 할 수 있게 할 것.
.몽골군에 식량과 조부를 바칠 것.
.몽골군의 정복 활동에 군사를 지원해 동참할 것.
.다루가치를 주둔하게 할 것.
.역참을 설치하도록 할 것.

그런데 이 6가지 조건 중에서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은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입질 정도밖에 없다. 먼저 다루가치는 원 간섭기 초반인 충렬왕 대에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왜냐하면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속국들의 경우, 다루가치가 속국의 왕들보다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속국을 좌지우지하는데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고려의 경우에는 국왕이 원황제의 부마이기 때문에 다루가치보다 그 서열이 높았다. 때문에 다루가치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또 군사를 지원하라는 조군 역시 충렬왕 때 2차례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역참 설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호구 조사와 조세 수납은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아예 건들지도 못했다. 당시 고려는 이것마저 공개할 경우 몽골에 벌거숭이처럼 모든 걸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해 구우일모의 예까지 들어가며 반대했다. 그래서 몽골은 당시 고려의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 경제 규모가 어떤지 군사력은 어떤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몽골은 고려 국왕과 장인-사위의 관계를 형성해 한 가족으로 묶는데 성공했고 그를 통해 정치적으로 고려를 자국에 예속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관제를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군사기구 역시 손을 대는 등 상부 구조 지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하부 구조에는 극히 제한적인 영향력밖에 행사하지 못했다. 호구 조사부터 고려의 반대로 아예 해보지도 못했으니 그 이상의 지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세조구제’는 그 뒤로도 원나라에 고려를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쿠빌라이 칸과 조우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 작가 · 상인,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Marco Polo, 1254 ~ 1324)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동방견문록’을 지은 작가로, 마르코 폴로 (이: Marco Polo, 1254년 9월 15일 ~ 1324년 1월 8일)는 17세 시절 (1271년)에 고향을 떠나 아시아를 탐험하고 1292년에 향리로 돌아왔다.
17살 때 상인인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숙부인 마페오 폴로를 따라 원 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곳에서 서방인 (색목인)을 우대하던 쿠빌라이 칸의 정책 덕분에 17년 간 관리로 일하면서 중국 각 지역을 돌아다녔으며,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 여행을 책으로 묶어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다.

– 마르코 폴로 (Marco Polo)
.출생: 1254년 9월 15일,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출생으로 추정
.사망: 1324년 1월 8일 (69세),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에서 병사 후 Church of San Lorenzo에 매장
.직업: 작가, 상인, 탐험가
.언어: 이탈리아어, 베네토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활동기간1269년 ~ 1305년
.장르: 탐험 기행 문학
.부모: 아버지 니콜로 폴로(Niccolo Polo, 1230~1294)
어머니 니콜레 안나 데푸제(Nicole Anna Defuseh, 1234~1308)
.배우자: 도나타 바도에르(Donata Badoer, 1273~1354)
.자녀: 슬하 3녀, 장녀 판티나 폴로 (Fantina Polo, 1297~1368), 차녀 벨렐라 폴로 (Bellela Polo, 1299~1358), 삼녀 모레타 폴로 (Moretta Polo, 1301~1316)
.친지: 이복 숙부 마테오 폴로 (Matteo Polo, 1248~1265), 이복 숙부 마페오 폴로 (Maffeo Polo, 1252~1309)
.주요 작품: 동방견문록
.영향: 크리스토페로 콜룸부스와 바스쿠 다 가마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모두 각각 그의 영향을 받음
○ 생애 및 활동
마르코 폴로는 1254년 9월 15일,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아직 마르코 폴로가 출생하기 5개월 전에 실크로드 원정을 떠나서 1259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으며 마르코 폴로의 삼촌인 마페오 폴로와 1260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킵차크 칸국, 부하라를 거쳐 쿠빌라이 칸의 조정에 머무른 뒤 1269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아버지를 아직 한 차례도 목도치 못한 어린 시절의 마르코 폴로는 1261년 조부 상(할아버지 장례)을 치렀고, 1268년 계조모 상 (새할머니 장례)을 치렀으며 그 후 1269년 당시 15세였던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 (당시 39세)와 이복 숙부 마페오 폴로 (당시 17세)를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함께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1271년 당시 17살 된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 (당시 41세)와 숙부 마페오 폴로 (당시 19세) 이 둘과 함께 모두 다시 본격적으로 중국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 후 1275년 11월에서 1292년 2월까지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서 원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골 · 부르마 · 베트남까지 다녀왔다. 그 후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 제노바와의 해전에서 가리 함대에 민간 종군원으로 예속되어 출전하였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탈출하여 1295년에 고향으로 재귀환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고향 베네치아에서 이미 1294년에 병으로 하세하였다. 마르코 폴로 그는 제노바 전쟁 포로 시절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 국가 거류 시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구술로써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치아노 (Rusticiano, 루스티켈로 다 피사)가 그의 해박한 발언 및 구술 관련 여행담을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 주저 ‘동방견문록’
원제 ‘백만가지 이야기’, ‘세계 불가사의의 서’는 13세기 루스티켈로 다 피사가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여행담을 기록한 책으로, 흔히 ‘동방견문록’으로 불린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 그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문화인 한자 (漢字), 차 (茶)에 대한 언급도, 뿌리깊은 악습인 전족 (纏足)에 대한 비평도 없다. 또한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기독교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교가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인 양 헐뜯고 있는데, 실제 역사 속의 이슬람은 인두세만 낸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기독교는 유대교와 함께 더불어 성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존중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에 대한 언급도 “지팡구”는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 상인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당시 아랍인에게 황금향으로 알려진 나라는 지팡구가 아닌 “실라” (아마도 신라)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동방견문록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 긍정적인 역할은 했지만, 편견과 허구도 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동방견문록의 허구적인 면은 학자들로부터 마르코가 실제로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동방견문록 또한 자신이 실제로 여행하고 겪은 일을 쓴 기행문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이거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동방견문록이 허구라고 추정하고 있다.
.만리장성, 중국의 기술이나 관습 등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흡한 점.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고, 황제의 칙사를 지냈다고 하나 중국 문헌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동방견문록에 언급되어 있는 마르코의 여행 경로는 실제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기행 중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
.여행 중 마르코 본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본인의 기행문이라고 보기엔 내용 구성이 어색하다는 점.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러한 의구점은 마르코 폴로가 일부 지역에 대해 자신의 바람과 더불어 입소문을 함께 사실로써 기록해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현재 학계에서 해당 내용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여전히 동방 여행에 대해서는 사실이라고 여기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 관련작품
.영화, 쿠빌라이 칸, (1965년)
1965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가니스탄 합작 영화인 Marco the Magnificent가 있다. 국내 개봉 포스터나 금성비디오에서 쿠빌라이 칸이란 제목으로 낸 비디오는 오마 샤리프나 안소니 퀸, 오슨 웰즈 같은 배우들을 주연처럼 내세우지만 이들은 조연 및 단역으로 나오고 독일 배우인 호스트 부흐홀츠 (1933~2003)가 마르코 폴로를 연기했는데 1967년에 ‘마르코 포로’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개봉했다. 당시 안정적이던 시절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찍다보니 지금은 탈레반이 테러를 가해 부서진 바미안 석불이 그대로 나온다.
.호조 도키무네, (2001년, NHK 대하드라마)
.마르코 폴로, (2014, 넷플릭스, 시즌 1·2)
○ ‘동방견문록’에 대하여
–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 동서문화사 / 2016.11.30)
‘동방견문록’은 모두 248절로 이루어졌으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덟 개 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저자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여 직접 보고 겪어서 쓴 ‘동방견문록’을 통해 유럽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단절되어 있던 동?서가 이 ‘동방견문록’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던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동방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그리하여 동서양은 더욱 가까워지고 문화교류를 통해 유럽 근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동방견문록’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교적 단조로운 문체와 더불어 ‘상투적인 표현’을 지적받았고, ‘허풍쟁이 마르코 이야기’라고 깎아내려지며 단지 어린이용 옛날이야기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19세기 이후 번역자들의 노력으로 재평가되었다. ‘동방견문록’은 다른 것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규모에서 비롯되는 내용의 풍부함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세계 일주라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그 여행의 의의와 더불어 내용의 풍부함을 통해, 그의 업적에는 이중적인 중요성이 있다.

– 목차
서장
1 머리글
2 니콜로와 마페오,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세계탐험에 오르다
3 니콜로와 마페오, 솔다이아를 떠나다
4 폴로 형제, 사막을 가로질러 부카라에 다다르다
5 폴로 형제, 대칸의 궁정으로 향하는 사신의 종용에 응하다
6 폴로 형제, 대칸 궁정에 도착하다
7 대칸, 폴로 형제에게 그리스도 교도의 사정을 묻다
8 대칸은 폴로 형제를 사절로서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다
9 폴로 형제, 대칸에게서 권위의 황금 패자(牌子)를 받다
10 폴로 형제, 아크레 도착
11 폴로 형제, 마르코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다
12 폴로 형제와 마르코, 아크레를 떠나다
13 폴로 형제, 로마 교황에게로 가다
14 폴로 형제, 마르코를 데리고 대칸 도성인 케멘푸에 도착하다
15 세 사람, 대칸을 알현하다
16 마르코, 대칸의 사절이 되어 출발하다
17 마르코, 사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18 세 사람, 대칸에게 귀국허가를 요청하다
19 세 사람, 대칸 곁을 떠나다
제1장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횡단
20 소아르메니아
21 투르코마니아 지방에 대해서
22 대아르메니아
23 조르지아 인과 국왕, 그들의 사정
24 모술 왕국
25 대도시 발다크 함락
26 발다크에 일어난 산의 대기적
27 그리스도 교도들, 칼리프 말에 경악하다
28 사교는 꿈 속에서 구두장이 신도가 산을 움직이리라는 계시를 듣다
29 그리스도 교도 신도가 용케 산을 움직이다
30 유서 깊은 도시 타우리스
31 성(聖) 바르사모 수도원
32 광대한 나라 페르시아
33 신을 찬양하려고 찾아온 세 성자
34 페르시아 여덟 왕국
35 도시 야스디
36 케르만 왕국에 대해서
37 도시 카마딘
38 거대한 경사지대
39 황량한 마른 땅을 가다
40 유서깊은 대도시 코비암
41 제2의 사막을 건너다
42 ‘산속 노인’과 부하 자객들
43 ‘산속 노인’은 자객을 어떻게 훈련시켰나
44 ‘산속 노인’의 토벌
45 도시 사푸르간
46 유서깊은 대도시 발라크
47 타이칸 지방, 그 지방 산들은 소금으로 되어 있다
48 발라샨의 보석과 명마
49 파샤이 지방
50 케스무르 왕국
51 보칸 지방
52 파미르 고원
53 벨로르 지성
제2장 중국의 서북 변경
54 카슈가르 왕국
55 대도시 사마르칸
56 야르칸 지방
57 대도시 코탄
58 펨 지방
59 차르찬 지방
60 롭 사막
61 탕구트 대주(大州)
62 카물 지방
63 이코구리스탄 지방
64 친기탈라스 지방
65 수쿼르 지방
66 캄프초 시
67 에치나
68 카라코룸
69 타타르 인이 프레스터 존에게 반기를 든 경위
70 칭기즈, 타타르 인의 제1대 칸이 되다
71 칭기즈 칸, 부하를 소집하여 프레스터 존을 공격하다
72 프레스터 존, 군을 이끌고 칭기즈 칸을 요격하다

73 프레스터 존과 칭기즈 칸의 대결전
74 칭기즈 칸을 계승하는 여러 칸들
75 타타르 인의 신 및 그들의 율법
76 바르구 평원과 그 주민의 여러 습속
77 광대한 에르주울 왕국
78 에그리가야 지방
79 광대한 텐둑 지방
80 신다추 및 그 밖의 여러 지방
81 차가노르 시
82 수도 샨두와 칸의 화려한 궁전
제3장 쿠빌라이 칸의 통치
83 쿠빌라이 칸에 대해서
84 대칸의 삼촌 나얀이 꾀한 반란
85 대칸이 나얀 반격에 직접 나서다
86 대칸과 나얀과의 전투
87 대칸은 어떻게 나얀을 사형에 처했는가
88 대칸이 십자가를 변호한 연유
89 대칸이 그리스도 교도가 되지 않았던 이유
90 합전에 무훈을 세운 신하에 대한 은상
91 대칸의 용모와 품행
92 대칸의 아들들
93 대칸의 궁정에 대해서
94 대칸의 후계자 황태자의 궁전
95 신도시 타이두
96 타이두에서 일어난 카타이 인의 모반
97 대칸의 금위대
98 대칸이 주최하는 갖가지 대향연
99 대칸 탄신일의 대축연
100 대칸이 거행하는 원단절(元旦節) 성대한 축전
101 대향연에 배식이 허용되는 1만 2천 명의 중신들 및 대칸이 하사하는 연회복
102 대칸이 국민에게 사냥에서 잡은 것을 헌상하도록 명령한 것
103 대칸의 수렵용으로 훈련된 호랑이·표범·살쾡이 및 독수리에 대해서
104 사냥개 관리를 맡고 있는 두 형제
105 대칸이 짐승을 포획하는 실황
106 대도시 캄발룩, 그 많은 인구와 반입되는 다량의 사치 물자
107 대칸이 국민에게 사용하도록 한 지폐
108 대칸의 모든 정무를 총할하는 12 중신
109 수도 캄발룩에서 곳곳으로 통하는 공도(公道)
110 흉년 및 가축의 폐사 때 행하는 대칸의 구휼
111 대칸의 명령에 따라 공도 가장자리에 심은 가로수
112 카타이 인이 마시는 술
113 장작처럼 타는 돌
114 국민 구제를 위해 대칸이 비축하고 있는 막대한 저장 곡물
115 빈민을 위한 대칸의 막대한 시여
116 캄발룩의 점성사들
117 카타이 인의 계율과 관습
제4장 윈난으로의 사절행
118 이제부터 카타이 지방 이야기. 먼저 풀리상긴에 대하여
119 대도시 탁주
120 타얀푸 왕국
121 카이추 고성 이야기
122 프레스터 존이 ‘금왕’을 포로로 한 경위
123 황허 강
124 대도시 켄잔푸
125 카타이와 만지의 국경인 한중 지방
126 아크발루크 만지 지방
127 광대한 신두푸(청두) 지방
128 티베트 지방
129 계속해서 티베트 지방
130 카인두 지방
131 카라잔 지방
132 계속해서 카라잔 지방
133 카르단단 지방
134 대칸에 의한 미엔·방갈라의 정복
135 대칸 군대와 미엔 왕과의 전투
136 계속해서 미엔 왕과의 전투

137 경사 지대
138 미엔
139 방갈라 지방
140 칸지구 지방
141 아뮤 지방
142 톨로만 지방
143 친티구이 지방
제5장 대운하 연안 공도를 따라 푸젠으로 가는 여정
144 카찬푸 시
145 창글루 시
146 창글리 시
147 툰딘푸 시
148 카타이 인의 풍습
149 계속해서 카타이 인의 풍습
150 신구이 마투
151 대도시 린구이
152 핀구이 시
153 친구이 시
154 대칸의 만지 지방 정복
155 코이간주 시
156 파우긴 시
157 카인 시
158 틴구이 시
159 얀구이 시
160 남긴
161 사얀푸 시
162 신구이 시
163 카인구이 시
164 찬기안푸 시
165 틴구이구이 시
166 수주 시
167 킨사이 시
168 칸이 킨사이에서 징수하는 거액 세수입
169 대도시 타핀주
170 콘차 왕국
171 푸주 시
172 차이툰 시
제6장 남해 경유 귀국 항로
173 인도―먼저 인도 항로 선박에 관하여
174 지팡구 섬
175 외딴 섬에 남겨진 대칸 군대가 적지의 도시를 점령하다
176 우상 숭배의 여러 모습
177 참바국
178 대자바 섬
179 손두르 섬과 콘두르 섬
180 펜탄 섬 및 그 밖의 섬들
181 소자바 섬
182 펠렉 왕국
183 바스만 왕국
184 사마트라 왕국
185 다그로얀 왕국
186 람브리 왕국
187 판푸르 왕국
188 네쿠에란 섬
189 안가만 섬
190 세일란 섬
191 대마아바르 지방
192 무트필리 왕국
193 사도 성 토머스 유체를 안치한 성전
194 브라만교의 발상지 라크 지방
195 계속해서 세일란 섬
196 카엘 시
197 코울람 왕국
198 코마리
199 엘리 왕국
200 말라바르 왕국
201 고주라트 왕국
202 타나 왕국
203 캄바에트 왕국
204 세메나트 왕국
205 케스마코란 왕국
206 남도와 여도
207 소코트라 섬
208 모그다시오
209 잔지바르 섬
210 아비시니아 지방
211 아덴 지방
212 에시에르 시
213 두파르 시
214 칼라트 시
215 호르무즈 시
제7장 터키국의 사정
216 대터키국
217 카이두 왕의 왕녀와 그녀의 용감한 행위
218 아바가 칸이 아르군 왕자를 보내 싸우게 한 이야기
219 왕위를 얻고자 아르군, 귀경길에 오르다
220 아코마트의 아르군 요격
221 아코마트 공격을 의논하는 아르군
222 아르군에 대한 장령들의 회답
223 아르군, 사자를 아코마트에게 보내다
224 아르군 사자에 대한 아코마트의 회답
225 아르군군과 아코마트군의 회전
226 아르군의 추대를 꾀하는 귀족들
227 아르군, 자유의 몸이 되다
228 아르군, 그의 삼촌 아코마트를 처형하다
229 귀족들, 아르군에 충성을 서약하다
230 아르군 죽고 가이카투 왕위에 오르다
231 가이카투 죽고, 바이두 왕위에 오르다
232 북방에 거주하는 칸치 왕에 대한 이야기
233 ‘영원한 어둠의 나라’
234 넓은 러시아국과 그 주민
235 대해로의 관문
236 서북 타타르국의 역대 제왕
237 훌라구와 베르케 사이에 벌어진 전쟁
238 베르케, 훌라구를 향해 진격하다
239 부하 장병에 대한 훌라구의 연설
240 훌라구군과 베르케군의 격전
241 계속해서 훌라구군과 베르케군의 격전
242 베르케의 용감한 분전
243 서북 타타르 왕국, 투다멩구 즉위
244 토크타, 노가이 소환하여 톨로부가의 죽음에 대한 해명 요구하다
245 토크타, 다시 사신을 노가이에게 보내다
246 토크타의 노가이 친정
247 토크타의 연설
248 노가이 왕의 분전
동방의 빛을 찾아서
동방 무역을 꽃피운 중세 베네치아
13세기 실크로드와 남해 항로
마르코 폴로의 세계 일주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길을 떠나다
《동방견문록》의 성립과 전래

– 저자소개 : 마르코 폴로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 여행길에 올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를 거치는 25년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그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베네치아군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는데, 감옥에서 소설가 루스티첼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르코 폴로의 경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글로 옮겨, 마침내 위대한 고전「동방견문록」이 탄생한다.
마르코 폴로는 1254년경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그가 태어날 때 중앙아시아의 중국에 있었으며, 그가 15세 때 돌아왔다.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1275년 원나라의 세조가 있던 카이펑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원나라에 간 이유는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요청으로 예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성유와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방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던 쿠빌라이 칸으로서는 그리스도교 (기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같이 여행을 시작한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은 모두 돌아가, 성유만 갖고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조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치, 외교 등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써 원나라를 위해서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고 · 버마 · 베트남까지 다녀왔다.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제노바와의 해전에 가리 함대에 속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켈로가 자신의 중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받아적어,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이 쓰여졌다. 하지만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었으며, 이는 유럽인이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서적은 유럽인의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세 동방 연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이다.
– 역자 : 채희순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 사범대 교수를 지냈다. 고등고시위원 역임했다. 지은책으로는 『동양사개론』, 『동양문화사』, 『대세계의 역사』, 『(고등학교)세계사』 옮긴책으로는 『맹자(역해)』, 『손자(역해)』, 『오자(역해)』, 『한비자(역해)』 『손자병법(역해)』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난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쓰지 않았다!”
경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아시아의 혼 유럽인들에게 신비로운 동양정신을 불어넣은 ‘동방견문록’ 한국최초 완역 결정판! 13세기 서양인의 눈으로 본 세계문화편람!
.운명적 만남이 낳은 위대한 불후의 고전
마르코 폴로는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 여행길에 올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를 거치는 25년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그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베네치아군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는데, 감옥에서 소설가 루스티첼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르코 폴로의 경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글로 옮겨, 마침내 위대한 고전『동방견문록』이 탄생한다.
『동방견문록』은 모두 248절로 이루어졌으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덟 개 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서장은 마르코 폴로가 어떻게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제1장은 대?소아르메니아와 투르크메니아를 거쳐 이라크와 페르시아에 이르는 서아시아를 다룬다. 제2장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미르를 넘어 타림분지를 거치는 중앙아시아에 대해 서술한다. 제3장은 쿠빌라이 칸 수도인 상도(上都)와 대도(大都)의 모습, 그리고 대칸의 통치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제4장은 중국 북부(카타이)와 사천·운남, 미얀마를 설명하며 제5장은 중국 동남부, 당시 ‘만지’라고 불리던 남송 영역을 다룬다. 제6장은 베네치아 귀국 길에 보고 들은 인도 각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마지막 제7장은 중앙아시아 대초원과 러시아, 북극지방을 설명한다. 이처럼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그즈음 알려진 모든 세계를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동방견문록』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13세기 서양인의 시각으로 쓴 세계문화편람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인류역사 최초 대위업
13세기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유럽과,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이슬람 문화권만을 ‘세계’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동방’은 단지 여러 구전이나 소문으로 어렴풋이 들려올 뿐, 구체적인 세계의 일부로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 아시아에서는 세계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왕조가 세워져, 유목과 농경이 조화된 화려하고 웅장한 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여행하여 그것을 직접 보고 겪었다.『동방견문록』을 통해 드디어 유럽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단절되어 있던 동?서가 이『동방견문록』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동방 왕국의 화려한 궁정생활, 신화에나 나올 듯한 신비스런 짐승들, 위대한 왕 프레스터 존, 어마어마한 금은보화와 각종 특산품, 거대한 도시와 신기한 풍습, 수십만 기마대가 펼치는 처절한 전투 등,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허풍쟁이로 치부했다. 어느 것에든 ‘수백만의…’하며 수를 부풀리는 그에게 ‘백만 선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324년 마르코 폴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친구들은 그의 손을 잡으며, 지금이라도『동방견문록』에 담은 이야기들이 거짓임을 밝히고 참회하라고 설득했다. 물론 마르코의 대답은 이러했다. “거짓이라니, 난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다 쓰지 않았어.”
이때 사람들은『동방견문록』이 인류역사 큰 획을 그은 세계고전으로 남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수많은 논란에도『동방견문록』은 필사본으로 온 유럽에 퍼졌고, 성경 다음으로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던 사람들은『동방견문록』을 읽고 동방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그리하여 동서양은 더욱 가까워지고 문화교류를 통해 유럽 근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서양인 시각으로 본 동양인
13세기는 몽골에 의한 중국 전역 통일이 완성된, 대원 정복 왕조의 통치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물론 이 시기에 대한 중국의 자료가 특별히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이 특수한 시기를 중국 이외의 시선으로 남긴 기록이 있다는 것에 그 중요성이 있다.
본디 이역 사람에 의한 중국 사정의 보고에는, 중국인이라면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간과할 법한 사항에 대해서도 이국인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관찰해서 서술한 것이 꽤 있다. 특히 마르코 폴로는 색목인(서역인)을 몽골인과 비슷하게 우대했던 원조의 독자적인 정책에 힘입어 말석이긴 해도 직접 정치계층에 낄 수 있었기에, 마땅히 그 보고는 보통 외국인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관찰만이 아닌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쿠빌라이 칸의 여름 수도가 되는 상도, 겨울 수도가 되는 대도의 궁전 각각의 구조, 대칸 궁정에서 개최된 향연을 비롯한 연간행사, 유림에서 대칸의 행궁과 사냥놀이의 묘사는 궁정에 드나들 수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으며, 이는 중국 문헌의 누락이나 결함을 보충할 자료이기도 하다.
마르코 폴로는 본디 상인이다. 따라서 그의 ‘동방견문록’은 타국의 색다른 성격과 풍속을 주로 기록했던 평범한 여행자들의 여행기와는 전혀 다르다.『동방견문록』은 그보다도 각지의 산물, 물가, 시장상황, 통화 등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면서 그 모습을 다루고 있다. 산물 중에서도 특히 황금, 은, 보석, 진주, 향료, 향수, 비단 같은 상품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마르코 폴로가 사치품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이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실익을 가져다줄만한 것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그와 관련된 사정을 부정확하거나 애매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이러한 사항을 면밀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실은 이런 기록이 있었기에 이 풍부하고 정확한 ‘견문록’이 내려올 수 있었다.
.사실과 구전을 바탕으로 한 놀랍고 신비로운 기록
『동방견문록』은 피사 출신 소설가 루스티첼로가 제노바 감옥에서 마르코 폴로의 구술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을 조본(祖本)으로 한다. 소설가의 손을 거쳤으므로, 소설과 비슷한 구절이 곳곳에서 보인다. 예를 들면 26~29절 그리스도교도 구두장이의 기적, 32~33절 사바의 성인 세 명이 받은 계시, 36절 토질과 인정의 관계에 대한 케르만 왕의 실험, 42~44절 ‘산속 노인’, 55절 사마르칸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 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 폴로나 루스티첼로가 『동방견문록』에 지어낸 이야기를 넣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산속 노인’이나 69~73절 프레스터 존 멸망의 전말, 제96절 아크메트 암살 이야기 등은 모두 소설같이 서술되어 있기는 해도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예를 들면 121~122절의 ‘금왕’과 프레스터 존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도 마르코 폴로는 그 지방의 구전을 바탕 삼아 서술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각지에서 전승된 이야기가 저자를 통해서 이러한 형태로 재연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동방견문록』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교적 단조로운 문체와 더불어 ‘상투적인 표현’을 지적받았고, ‘허풍쟁이 마르코 이야기’라고 깎아내려지며 단지 어린이용 옛날이야기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후 시대가 중세를 벗어남에 따라 이 책의 신빙성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오랜 세월 이런 취급을 받아온 『동방견문록』은 19세기 이후 번역자들의 노력으로 재평가되었다. G. 포티에의 1865년 프랑스어 판이 그 시초임과 동시에 가장 뛰어난 역작이라면, 1871년 이후 수년에 걸친 H. 유울의 영어판 및 1918년 이후 P. 페리오의 주석은 그 역작을 가장 훌륭하게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동방견문록』이 참으로 위대한 동양학자의 주석에 의해 수세기 만에 그 진가를 드러낸 것이다.
.세계를 하나로 이어낸 숭고한 업적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과 서를 잇는 교통노선을 오간 사람의 수는 실로 막대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이름 없는 자들이다. 이름 없는 자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름 없는 자라고 해도 그 지식은 본인을 통해 반드시 주변으로 퍼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대단히 한정적이고, 그 전승도 전해들은 각 개인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국 망각 속으로 묻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과 필사는, 정보를 올바르게 전승하여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다 같은 기록과 필사라도, 체험자 본인이 남긴 견문록이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가치가 높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으로 숭고한 그 기록들이 당시, 그리고 후세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가.『동방견문록』은 그중에서도 다른 것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규모에서 비롯되는 내용의 풍부함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세계 일주라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그 여행의 의의와 더불어 그 내용의 풍부함을 통해, 그의 업적에는 이중적인 중요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