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년 7월 6일, 잉글랜드 왕국의 법률가•저술가•사상가•정치가•가톨릭교회의 성인 토머스 모어 (Sir Thomas More) 반역죄로 처형
토머스 모어 경 (Sir Thomas More, 1478년 2월 7일 ~ 1535년 7월 6일) 또는 성 토마스 모어 (라: Sanctus Thomas Morus, 영: Saint Thomas More)는 잉글랜드 왕국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 (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 (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 (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 (1515 ~ 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 (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 (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 (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 (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 (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 (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 (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 (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 (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1537년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토마스 모어 (Thomas More, 순교자)
.출생: 1478년 2월 7일 (잉글랜드 런던)
.사망: 1535년 7월 6일 (잉글랜드 런던)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신분: 인문주의자, 순교자
.활동연도: 1477 ~ 1535년
.자녀: Margaret Roper, Cecily Heron, Elizabeth Dauncey, John More, Margaret Clement
.Spouse: Alice More (m. 1511–1535), Jane Colt (m. 1505–1511)
– 인문주의자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 (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에서의 왕위지상권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 시성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월 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잉글랜드 성공회의 교회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대한성공회의 교회력에도 이름이 수호성인으로 올라와 있다.
– 종교개혁 탄압
토머스모어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개신교인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를 통한 평화와 사회정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윌리엄 틴데일을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한 죄로 “모든 이단의 우두머리”라며 정죄하였고, 그의 저서들과 성경을 거두어 성 바울 성당 앞에서 불태웠다. 틴데일은 현상수배 되었다가 1535년 체포되어 이듬해 브뤼셀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개혁 지지자들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다. 이후 토마스 모어가 자신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선량하게 살아왔다고 항변하자 토머스 크롬웰은 이 위선을 지적하며 폭발하고 만다.
‘유토피아’에서 종교적 자유나 이상 등을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어는 종교재판 (정확히는 특별재판)으로 개신교도들을 화형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대법관 재직 당시 그는 종교개혁에 영향받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신학교수 40명을 체포하여 6명을 화형시켰다. 모어는 개신교 (루터파)를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교회와 사회 모두의 평화와 화합을 위협하는 질병”으로 보았다. 특히 모어는 루터파 신학의 영향받은 윌리엄 틴데일의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철저히 막았다. 사실 가톨릭에서 번역한 영어 성경과 1516년에 발간된 에라스무스판 헬라어-불가타 비교 성경은 용인했다. 하지만 가톨릭의 영어 성경은 라틴어 중역인데다 지나치게 축자역이라 가독성이 형편없이 떨어졌고, 헬라어 원문 성서는 라틴어도 못 알아 먹는 사람이 절대다수인데 헬라어는 전문학자급이나 접근이 가능했다. 솔직히 에라스무스팬이라서 보라고 장려한 헨리 8세도 못 알아본다.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 (성공회)를 가톨릭에서 독립시켰는데 어떻게 모어의 개신교 사냥이 가능했나 하는 의문이 들수 있는데, 헨리 8세는 교황과 정치적 이유로 틀어졌을 뿐 대륙의 루터주의나 개혁신학은 이단으로 보았다. 훗날 헨리 8세와 토머스 모어와 갈등을 빚은 것은 “평신도가 교회의 교권을 침범할 수 있는가?”의 명제에서 모어는 이를 부정한 반면 헨리 8세는 루터파의 논리를 받아들여 구약시대 유대왕국 왕들이 대제사장들보다 서열이 앞섰고, 앞서 교황이 아닌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공의회를 소집했으며, 초기 교부들이 주장한대로 각 지역 주교들의 개별적 권한을 중요시 한다는 주장에 따라 “관할권을 벗어난 로마 주교의 불법적이며 초법적 통치를 마감하고, 영국내에서 영국교회의 보호자는 영국의 군주가 맡는다.”는 발상이었다. 토머스 모어는 교회의 보호자의 역할은 세속군주가 한다는 주장에는 토를 달진 않았지만 교회의 머리는 어디까지나 교황이고 몸과 수족은 추기경단이며 사제가 아닌 평신도는 세속군주라도 이를 침범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맞선 것이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십대시절
토머스 모어는 1478년 2월 7일에 영국 런던에서 법관 존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당시 캔터메리 대주교이자 종교계의 큰 지도자였는 존 모턴의 시중드는 아이로 들어갔다. 그의 추천으로 인해 모어는 14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하고 뉴인 법학원에 들어갔다.
– 초기 정치 이력
토머스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리스어·라틴어·신학 등을, 뉴인 법학원에서 법률을 배웠다. 그때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졸업 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504년 하원 의원에 선출되고, 1510년 런던 부시장·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510년 ~ 1518년, 시티 오브 런던의 주 장관 대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책무를 지닌 자리에 있는 동안 공정하고 유능한 공무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517년 모어는 왕의 조력을 위하여 임시 섭정과 ‘개인 공무원’이 되었다.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게 파견되는 외교 사절을 맡은 모어는 1521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모어는 헨리 8세의 비서와 조언자가 되면서 정부의 유력자로 떠올랐으며, 외국 외교관, 왕실 회계국 부장관 그리고 왕과 그의 대법관이자 요크 대교구장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1523년 모어는 잉글랜드 하원의 의장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의장으로서는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위한 청원을 표명하였다. 그는 나중에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집사장으로 근무하려고 하였지만, 1525년 북잉글랜드의 행정을 수반한 사법을 감독하는 직책인 랭커스터 공령 상서에 위임되었다.
– 토머스 모어와 헨리 7세, 8세
뉴인 법학원에 들아간후, 1500년에 23세의 나이로 변호사가 되었다. 4년후인 1504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수입을 늘리려는 헨리7세의 세금정책에 반대하다가 의원직을 잃었다. 그 후로는 역사와 철학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많은 저술을 탄생시켰다. 특히 1518년에 낸 <리처드 3세>라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의 원본이 되었다. 1505년에는 제인 콜트라는 자신보다 10살 어린 여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지주의 딸이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모어는 그녀에게 라틴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 7시까지 공부하고 매일아침 미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이를 돕고 양로원을 세우고 전속법률가가 되어 가는 한 시민을 위해 변호 활동을 하여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515년, 그의 아내인 제인 콜트가 죽자, 바로 엘리스 미들턴이라는 여성과 재혼하였다.
1509년, 헨리7세를 이어 헨리8세가 국왕으로 즉위한후, 그는 1510년에 런던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1515년엔 플랑드르로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약 7개월동안 머물렀는데, 통상조약을 잘 체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유토피아’의 2권을 쓰기 시작하고, 귀국을 하여 1권을 쓴뒤 1516년에 그 책을 완성하였다. 헨리 8세는 그의 업무처리 능력을 잘 평가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유능하고 공정한 공무원으로 불렀다. 1529년에는 헨리8세는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였다.
– 결혼과 가족
1505년, 27살의 모어는 그보다 열살 어린 첫 번째 아내 제인 콜트와 결혼하였다. 전기 작가 윌리엄 로퍼에 의하면 모어는 자신의 의붓아들과 콜트의 두 번째 누이의 결혼을 원하였지만, 제인 앞에 그녀의 어린 누이 가운데 한 명이 결혼한다면 그녀에게 창피를 주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세 딸과 아들 하나,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친자식에 더하여 모어는 고아 소녀 마거릿 긱스를 입양하였다.
제인이 1515년에 죽자 모어는 거의 즉시 재혼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이들은 엄마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엘리스 미들턴으로 7년째 미망인이었다. 그녀와 모어 사이에는 어떤 아이도 없기는 하였지만, 그녀의 딸을 입양하여 같은 엘리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모어는 자신의 새 아내를 “nec bella nec puella” (“진주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의 아내 엘리스가 아름다움과 젊음에 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에라스무스는 그녀의 코를 가리켜 “하피의 갈고리 부리”라고 냉정하게 기술하였다. 두 사람의 성격이 매우 달랐다는 사실에도 모어와 그의 아내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가 제인과 그의 딸을 교육했던 것처럼 그녀를 교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자신에게 쓴 묘비명에는 의붓어머니임에도 제인이 그의 네 자녀를 관대함과 사랑으로 보살핀 것을 크게 칭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이 누구를 제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단언하였으며, 죽음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 주요 저서
.리처드 3세의 역사
.유토피아 : 모어의 ‘유토피아’는 1, 2권으로 구성된다. 제1권은 현실비판, 제2권은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1권에서 모어는 먼저 ‘저 좋을 대로’ 사는 르네상스인의 이상을 제기한다. 그러나 ‘저 좋을 대로’란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를 뿐 부나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 마키아벨리와 모어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모어는 군주에 대해서 명예롭고 평화적인 일이 아니라 전쟁 수행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하고, 왕의 자문관도 왕에게 아부한다고 비판한다.
.종교 논쟁
– 헨리 8세의 혼인무효
1502년 헨리의 맏형 아서가 죽으면서 헨리가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의 법적 상속인이 되었다. 그리고 1509년 그는 스페인과의 동맹을 지키려는 목적에 따라 형의 미망인 아라곤의 캐서린, 곧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를 위해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성서 구절에 의거하는 교회법에 위반되지 않으려고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관면을 받았다. 아서와의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캐서린의 진술이 관면을 받는 데 부분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오랫동안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생활은 무난하였다. 그러나 캐서린이 후계자인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는 결국 캐서린 왕비의 시녀인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 매혹되었으며, 나중에는 앤 볼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1527년 헨리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캐서린과 그의 혼인을 무효로 해줄 것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탄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교황이 성서 말씀보다 우위에 설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율리오 2세가 내린 관면 역시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는 울지의 대법관직을 사임시키고 1529년 10월 토머스 모어를 그 자리에 대신 앉혔다. 헨리는 그 다음에 교황은 단지 로마교회의 주교에 불과하며, 따라서 전체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지닐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 대법관 임기
모어는 헨리와 왕실의 특권을 주제로 한 문제에서 처음에는 왕의 새로운 정책에 온전히 협력하였다. 의회에서는 울지를 탄핵하고 헨리와 캐서린의 혼인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헨리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기 시작함에 따라 모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개신교 탄압
토머스 모어가 볼 때 이단은 교회와 사회 모두의 평화와 화합을 위협하는 질병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추기경 울지의 조력자로서 루터의 책들이 잉글랜드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것을 포함해서 개신교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이단의 설교에 반대하는 성법원에서 칙령을 반포하는 것을 도왔다. 많은 문예 반론이 그의 이름 아래 출판되었다.
모어는 대법관으로서 여섯 명의 루터교 신도를 화형에 처하고, 마흔 명의 다른 사람들을 교도소에 넣었다. 이 문제에서 그의 주요 관심은 남몰래 순회하며 개신교 측에서 영어로 번역한 성서를 퍼뜨리다가 1525년에 추방당한 루터교도인 윌리엄 틴들의 협력자를 색출해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1530년 6월 범죄자들을 주교들에 의해 조사받는 종래의 관습은 폐기되고, 왕이 추밀원을 열기 전에 데리고 오는 것이 실행되었으며, 추밀원에 의해 취해지는 조치는 더욱 엄격해졌다. 1531년에 책 행상인 리처드 베이필드를 스미스 필드에서 화형에 처했으며, 개신교 신자들을 화형으로 죽이는 탄압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직
1530년 모어는 헨리 8세의 혼인무효요청 편지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531년에 그는 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을 “그리스도의 법이 허락하는 만큼” 잉글랜드 교회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선언한 왕위지상령 (물론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서약을 강요당하자, 물러나려고 하였다. 1532년에 그는 왕에게 자신의 사임을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헨리 8세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 재판과 처형
헨리 8세가 벌이는 행동을 더는 참지 못한 모어는 1533년 잉글랜드 왕비로서 앤 볼린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앤의 왕비 신분을 인정하고 그의 행복을 바란다는 글을 보냄으로써 반역 혐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옛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우정 때문에 승리감에 도취한 앤을 은밀히 방해하였다. 대관식 참석 요청에 대한 그의 거절은 앤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1534년 4월 13일 모어는 의회에서 제정한 계승법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어는 앤을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왕비로 인정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의회의 인가를 받아 법률로 제정한 종교적 문제에서 교황권을 부정하는 조항의 머리말에 대해서는 서약을 거부하였다. 4일 후 런던 탑에 수용되었고 그는 거기서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등을 저술하였다.
1535년 7월 1일에 모어는 앤 불린의 아버지, 남동생과 삼촌뿐만 아니라 신임 대법관 토머스 오들리를 포함한 재판 심사단 앞에 온갖 심리적 압력을 받았다. 그는 계승법의 정당성을 부정한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되었다. 모어는 자신이 왕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명백하게 부정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왕의 강력한 자문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은 법무차관 리처드 리치를 증인으로 내세워 모어가 왕이 교회의 합법적인 지도자임을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고 증언하도록 했다. 모어는 이와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 1535년 반역법에 따라 그의 유죄가 인정되었다.
판결을 받기 전에 그는 “세속인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며 자신의 신념을 자신 있게 말했다. 처음에 그에게 거열형이 선고되었지만, 왕의 요구에 따라 참수형으로 바꾸었다. 처형날짜는 7월 6일이었다. 처형대에 올라간 그는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좋은 신하이기 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또 다른 말은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도끼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한 농담이다. 그에 따라 불편하지 않으려고 모어가 처형대의 받침 위에 놓인 자기 수염을 치우자 도끼가 그의 목을 내리쳤다. 모어의 시신은 쇠사슬의 성 베드로 경당에 묻혔고, 머리는 템즈 강에 내던져지기 전에 그의 딸 마거릿 로퍼에 의해 구출되어 런던 브리지 위에 놓였다. 캔터베리의 세인트 던스탠 성당에 그의 두개골이 안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최후
대법관 자리는 그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그 이유는 1532년 5월 15일,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영국 가톨릭 교회를 끊게 하고 자신을 영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로 선언하게 만들었다. 토머스 모어는 로마 가톨릭 지지자였는데, 헨리 8세는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설득하였으나, 모어는 뜻을 받들이지않았다. 1533년 앤 왕비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1534년 의회에서 통과된 왕위계승법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법은 캐서린과 헨리8세사이에서 태어난 메리공주의 왕위계승을 금지하고 앤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모어는 1534년 4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는 15개월 동안 런던탑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평소에 자신이 하던 저술활동을 계속하였지만 펜을 빼았기고 책도 들여오지 못하게 되어서 저술활동도 계속할수 없었다. 심문은 반복되었고 식사량은 줄었으며 관절염에 걸리는 등 몸상태가 나빠졌지만 그는 타협하지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1535년 7월 1일엔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5일 후, 그는 단두대로 향했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심지어 형리들에게 농담까지 하였다. 그는 그들을 일일이 포홍한 다음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네덜란드의 한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는 ‘토마스모어, 영국의 수상, 그는 눈보다 희고 순결한 영혼을 가졌다. 영국에서는 그의 천재성은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다시 찾을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페인의 찰스5세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모어는 1935년 5월 20일 교황 비오 9세에게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의 시성 13세때에 시복되었으며 1934년 영국인 로마 가톨릭 신자들의 집단 청원 후에, 존 피셔와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공인되면서, 반 (反) 종교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항거하는 정치의 수호성인으로 떠올라, 그 이미지가 다년간 이어졌다. 그의 축일은 피셔와 같은 6월 22일이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를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면서 이러한 추세는 계속됐다.
성공회를 비롯한, 세계기독교가 사용하는 개정성서정과 (RCL)에서는 7월 6일이 토머스 모어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이다.
○ 사상
토마스 모어는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저작에 영향받은 인문주의자로서 신학자 존 콜레트와 친구가 되었다. 또 1499년 이래 에라스무스와도 친교를 가졌는데, 에라스무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우신예찬’이 쓰여진 곳이 바로 토머스 모어의 집이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촉발되어 ‘유토피아’ (Utopia)의 처음 부분을 쓴 것이 외교관이었던 1516년 경이다.
그 후 대법관 시기의 경험에 의하여 영국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의 영향으로 지주나 장로가 플랑드르 지방과의 양모거래를 위하여 농장을 둘러싸고 양을 기르고, 촌락공동체를 파괴하고, 농민들을 방축하는 현상이 벌어지자 깊이 개탄하였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 유토피아, 제1권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모어를 인용하여 본원적 축적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를 여행한 기록 “신세계”를 깊이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모어는 자연에 따라서 살고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는 공동사회가 실재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연법과 자연상태가 선이라는 증명으로서 씌여져 있는 그의 이 주저는 유토피아라는 가공의 나라를 무대로 자유, 평등으로 전쟁이 없는 공산주의적인 이상사회를 묘사하였다. (하지만 유토피아에 제시된 공산주의적 모습은 ‘이상향’을 생각해보고 고민하는 것을 권유하기 위해 토마스 모어가 선택한 수단이다. ‘이상향’을 공산주의적 사회라고 토마스 모어가 생각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유토피아를 공산주의 공동체라고 해석하면 오독이 된다. ‘유토피아’국가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없는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이 사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쳐 소위 ‘유토피아 문학’을 이루었다.
○ 어록
.다른 어떤 덕보다도 인간에게 소중한 덕인 참된 인간성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근심을 덜어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선물하는 것이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먹는다. – ‘유토피아’에서, 인클로저 운동에 비판적인 의미로.
.나는 국왕의 충신으로 죽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의 종입니다. (I die the king’s faithful servant, but God’s first)” – 처형을 앞두고
○ 주요저서 ‘유토피아’ (Utopia, 1516년) 개관
‘유토피아’ (Utopia)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출판한 소설이자 정치 철학 저작이다. 전체가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권은 1515년에, 제2권은 1516년에 쓰여졌다. 제1권은 당시의 영국 사회에 대한 현상 비판이며, 제2권은 그것과 대비하는 의미로서 이상국인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절대왕정의 비판임과 동시에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기에 생기는 혼란을 훌륭하게 포착한 것이라 하겠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 유토피아 (Utopia)
.저자: 토머스 모어
.국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언어: 라틴어
.장르: 정치철학, 문학
.발행일: 1516년
– 내용
이야기는 모어가 국왕의 명령을 받아 브뤼셀로 가서 뛰어난 학자이고 모험가인 라파엘 히스로디를 만나는 데에서 시작한다.
제1권에서는 히스로디에 대해서 듣는 편의 한 사람인 피타스가 당신과 같이 학식이 높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다면 국정이 잘 되어갈 터인데 왜 참여하지 않느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여 히스로디는 유럽 특히 영국의 정치에 비판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는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은데 군주들은 전쟁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고 말하며, 또 영국에서 부랑자 (浮浪者)가 증대하는 원인으로 지주들이 양모 (羊毛) 가격 인상에 착안하여 밭을 망가뜨려서 담을 쌓아 목장 (牧場)으로 만든 결과 농민이 토지를 상실한 것 (양이 사람을 물어 죽인다)과 봉건 가신단 (封建家臣團)의 해체를 들고 있다. 그리하여 “재산의 사유 (私有)가 인정되고 화폐가 만능의 힘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국가의 바른 통치와 번영은 불가능하다”고 하여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하였다.
제2권에서는 유토피아 제도와 생활이 기술되어 있다. 이 국가는 공화국이며 기본적으로는 농업 국가여서 전 시민이 교대로 농업에 종사한다 (공무원으로 선정된 지식계급은 제외). 노동시간은 6시간이며 여가는 수양에 충당된다. 6시간으로써는 생산 부족을 초래한다는 반론 (反論)에 대해서는 영국과 달리 여기에서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나 승려들과 같은 대단히 많은 기식자 (寄食者) · 귀족 · 지주 (地主) 등도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는 없는 국민 개로 (皆勞)이기 때문에 생산은 오히려 남는다고 하였다.
2020년 현재의 지금의 경제상황은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으로써 읽어볼만한 책거리가 생겨났다. 결론은 유토피아라는 것은 금본위제와 같으며 없던 사회이며 가상으로 지어 억지로 통화를 유출을 한다는 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