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642년 11월 24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타스만 (아벨 태즈먼)이 태즈메이니아섬 발견
호주 (Australia) 태즈메이니아 (Tasmania) 주는 1642년 11월 24일 섬의 목격을 최초로 보고한 유럽인이었던, 네덜란드 탐험가 아벌 타스만 / 아벨 태즈먼 (Abel Janszoon Tasman)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통치자였던, 그의 후원자 안토니 판디먼의 이름을 따서 그 섬을 안토니 판디먼의 땅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름은 후에 영국에 의해 판디먼의 땅으로 축소되었다. 1856년 1월 1일 그곳의 최초 유럽인 발견자에 경의를 표하여 공식적으로 개명되었다.
태즈메이니아는 최초로 태즈메이나아의 원주민이 거주를 하였다. 대략 10,000년 전에 해수면의 상승으로 태즈메이니아는 본토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분리되어 섬이 되었다. 태즈메이니아에 원주민들은 9 인종 그룹으로 나뉘었다. 1803년 영국의 정착 시기에, 원주민 인구는 5,000명과 10,000명 사이로 집계되었다. 전쟁, 학대, 어떤 면역도 없었던 상황에서 낯선 전염병의 유입으로, 인구는 1833년까지 300명으로 감소되었다. 원주민 인구의 거의 대다수가 조지 오거스터스 로빈슨에 의해 플린더스 섬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트루가니니 (Truganini, 1812년 ~ 1876년, 여성)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순혈통의 태즈메이니아 에보리진으로 간주된다.
1642년 11월 24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타스만이 최초로 태즈메이니아의 발견을 보고하였다. 1772년 섬에 마르크-조셉 마리온 두 프레스네 (Marc-Joseph Marion du Fresne)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상륙했다. 1777년 선장 제임스 쿡 또한 섬을 발견했고 수많은 다른 유럽인 뱃사람들이 상륙하면서 다채로운 지형상의 특징들이 알려졌다.
섬을 주장하는 프랑스를 막는 목적으로 존 보웬 하에, 시드로부터 조그만 일행이 보내진 것에 의해, 1803년 더웬트 강 어귀 (Derwent estuary)의 동쪽 제방 상 리스돈 후미 (Risdon Cove)에 영국인에 의한 최초의 정착이 이뤄졌다. 신선한 물이 훨씬 풍부했던 곳인 더웬트의 서쪽 부분 설리번의 후미 상 1804년 섬의 남쪽 5km에 선장 데이비드 콜린스 (David Collins)에 의한 대안 정착이 이뤄졌다. 최후의 정착은 당시 영국 식민지 비서관 로드 호바트 (Lord Hobart)의 이름을 따서 후에 호바트로 축약된, 호바트 타운 혹은 호바톤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리스돈에 정착은 후에 멈추었다.
초기 정착자들은 거의 유죄 판결을 받은 자나 농업과 다른 산업을 발전시킬 직무를 갖는 군대 감시인이었다. 수많은 다른 유죄 판결을 받은 정착자들에 기초한 이민이 특히 서쪽 해안에 맥콰리에 항구 (Macquarie Harbour)와 남동쪽에 아서 항구 (Port Arthur)에 하쉬 페날 콜로니 (Harsh Penal Colonies) 같은 제 2의 감옥을 포함하면서 반 디에멘의 땅에서 이뤄졌다.
1825년 12월 3일에 반 디에멘의 땅은 사법 설립과 입법부를 갖은채 뉴 사우스 웨일즈로부터 분리된 식민지로 공표되었다.
– 네덜란드 탐험가 아벌 타스만 (Abel Janszoon Tasman)의 생애
1603년 네덜란드 흐로닝언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입사해 근무 도중 1639년 ~ 1641년 필리핀, 타이완, 일본 연안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고 탐험하였다.
1642년 ~ 1643년의 항해에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즈메이니아 섬과 뉴질랜드, 뉴기니 섬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1644년 ~ 1648년에는 다시 대륙 연안을 탐험했고 통가와 피지, 비스마르크 섬들을 이 방면에 관한 많은 지리학 지식을 넓혔다. 그러나 당시 향료 무역에만 열중하던 네덜란드 당국자들의 무관심으로 그가 발견한 지역은 방치되었다.
1659년 10월 22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병사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