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의 수학자 · 물리학자 · 천문학자 아이작 뉴턴 (Sir Isaac Newton, 1643 ~ 1727) 출생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 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이다. 그의 뉴턴 역학으로 인류사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에 대한 기여가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에 대해 방정식을 미분계수와 접선을 반복해서 구하여 근에 근사하게끔 하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이 수학적으로 잘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든 역학을 출판하였다. 사실상 물리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모든 물리학 이론에서 수학적 모델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또한 17세기에 과학적 방법이 등장하고 과학이 시작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7세기 말경 뉴턴은 물체에 가해지는 힘이 속도가 아니라 가속를 일정한 비율로 증가시킨다는것이 증명되었다.
뉴턴은 1687년 물체의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을 ‘프린키피아’라는 책에서 증명했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 (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출생: 1643년 1월 4일, 영국 링컨셔주 울즈소프
.사망: 1727년 3월 31일 (84세), 영국 런던 켄싱턴
.국적: 영국
.작위: 기사 (Knight Bachelor)
.분야: 수학, 물리학, 천문학, 연금술, 자연철학, 기독교 신학, 경제학
.소속: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출신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도 교수: 아이작 배로 (Isaac Barrow), 벤저민 풀린 (Benjamin Pulleyn)
.지도 학생: 로저 코츠, 윌리엄 휘스턴 (William Whiston)
.주요 업적: 뉴턴 역학, 뉴턴 운동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 기하광학, 뉴턴의 방법, 퓌죄 급수, 뉴턴 유체, 뉴턴-코츠 공식, 뉴턴의 냉각 법칙
.수상: 왕립학회 회원
.종교: 개신교 (성공회 또는 청교도)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과학혁명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이다. 고금 3대 수학자 중 한 사람, 2대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카스 석좌 교수, 그리고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자 최후의 연금술사인 동시에 신학자이며 종교학자이다.
사후 30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다. 수학에서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 뉴턴 역학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뉴턴 역학 (고전역학)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등장 전까지 과학계의 가장 큰 거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외에도 뉴턴은 고전 광학의 확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광학이 물리학의 영역에 포함되게 된다. 그는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뉴턴의 물리학 체계를 집대성한 명저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가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단위로 힘의 단위인 N (뉴턴)이 있다. 1kg의 물체를 1m/s2으로 가속시킬 때 드는 힘이 1N. 간단하게 느낄려면 약 100g짜리 물건을 들어올렸을때 손에 느껴지는 힘이 약 1N이다.
17-18세기에 살았음에도 84세까지 매우 오래 살았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심지어 취미도 없이 연구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뉴턴의 조수였던 험프리 뉴턴은 “내가 알기론 그는 어떤 오락을 즐기거나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 자신의 연구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헛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긴 생애 만큼이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친구 에드먼드 핼리도 85세까지 장수했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
아이작 뉴턴은 1643년 1월 4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 (yeoman)의 아들로 태어났다. 뉴턴은 뉴턴의 아버지의 별세 3달 후에 태어났다. 조산아였던 그는 몸집이 매우 작았다. 뉴턴이 3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그는 외가에 맡겨지게 되었다. 뉴턴은 재혼한 의붓아버지, 바나바스 스미스는 목사였다. 뉴턴은 그의 양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보였고, 이는 뉴턴 자신이 지은 “19살까지의 죄 목록”에도 적혀 있다. 뉴턴의 어머니는 재혼 후 아이를 3명 더 낳았으나, 뉴턴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8년 후, 두 번째 남편이 죽고 나서야 돌아왔다.
– 대학 시절
1661년 6월 뉴턴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 대학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뉴턴은 이를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현대 철학자의 철학으로 바꾸고, 천문학 역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천문학자의 이론으로 대신하였다. 1665년 그는 이항정리를 일반화하였다.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폐교하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 ~ 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된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뉴턴이 했던 기여들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는 새 망원경을 만들어 왕립 학회에 제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왕립 학회는 그것에 감명받아 1672년에 뉴턴을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1672년에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무지개 색과 똑같았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색광으로 변했다.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색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또,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의 빛은 각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단,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을 인정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 전부터 싹이 터 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낸 뉴턴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어떤 사람들은 뉴턴의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할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수학의 왕자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1717년,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밀봉된 두 유리 용기에 온도계를 넣었더니. 진공 속에 넣은 온도계가 다른 온도계만큼 빠른 속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뉴턴은 이것을 공기보다 더 적게 존재하는 미묘한 에테르를 통해 열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 정치 활동
뉴턴은 국회의원 (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국장 (1696년) 등의 사회 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훅이 죽은 뒤, 뉴턴은 런던 왕립학회의 의장 (1703년)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1705년에 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 신앙생활
뉴턴은 성공회신자였지만 그의 생활은 청교도적 이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다. 그래서 그를 소시니안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3-5세기에 기독교가 초기시대의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으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연대기를 연구하였다.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혜성들의 아름다운 체계는 이지적이고 능력 있는 분의 계획과 주관 아래에서 만이 가능하다. 이 분은 세계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분은 주 하나님으로 불린다. 하나님은 영원히 존속하며 어디든지 존재한다.”
– 사망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뉴턴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썼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밤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신 (神)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여 있으라 하시니 어둠이 모든 빛이 되었다.”
○ 업적
– 미적분학에 기여
적분은 고대에 무한대 (無限大), 무한소 (無限小), 극한 (極限)을 생각하여 원의 넓이 구의 부피 등을 계산하는 구분 구적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카르타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이 있다. 14세기 인도 수학자의 저작에는 삼각함수의 테일러 급수가 완전한 형태로 등장하며, 함수의 미분이 등장한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무한소를 다루며 함수를 미분하여 극대와 극소를 구하는 방법을 창안하였다. 미분과 적분을 한데 묶어주는 핵심적 정리인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는 뉴턴이 활동하기 이전에 증명되지 않은 채 알려져 있었고, 아일랜드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 (James Gregory, 1638 ~ 1675)가 처음 증명을 출판하였다. 영국 수학자이자 뉴턴이 다니던 케임브리지 수학과 교수인 아이작 베로우 (Isaac Barrow, 1630 ~ 1677)도 증명을 출판하였다.
뉴턴은 미적분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라이프니츠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 이는 수학사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함수의 근을 구할 때 미분을 해서 접선을 반복해서 그어 근에 수렴하게 하는 방법인 Newton’s method 같은 것을 만들었다.
– 뉴턴 물체의 운동에관한 3법칙
뉴턴의 운동법칙 (Newton의 運動法則)은 물리학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기본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역학의 기초인 뉴턴의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르는데,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제2법칙은 가속도의 법칙이며 제3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1.어떤 물체 (질량)에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되지 않으면 그 물체는 원래의 운동상태를 지속한다. 이것을 “관성의 법칙” 라고 한다.
2.물체에 힘을 작용하면 그 물체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데, 그 가속도의 크기는 “가속도의 작용하는 힘의 크기에 비례”하고, 그 물체의 질량에 반비례한다.
3.어떤물체에 작용하는 힘에는 그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인 “반작용”이 작용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 중력의 발견
뉴턴의 과학적 발견은 정밀하며 중력의 힘을 수학적 물리량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의 시대에 그는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밝힌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력의 역제곱 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중력 인력은 힘을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따라 다르다. 사과가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이 달을 계속 그 접선 방향으로부터 지구를 향해 떨어지도록 하는것이 분명하다. 갈릴레오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실험들을 수행하면서 뉴턴은 지표면에서의 중력의 힘이 사과를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그의 책 1권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을 공식화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달을 이용하여 중력을 연구할수 있는지 설명했다. 만약 이 힘이 매우 작다면 달을 직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무 세다면 달의 경로를 너무 많이 휘게 하여 달이 자신의 궤도로 부터 지구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만류인력의 법칙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중력은 물체가 무겁든, 가볍든 크든, 작든 모든 낙하 하는 물체를 똑같이 가속시키기 때문이다.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된 전제들을 가지고 천체현상으로부터 물체를 태양이나 몇몇 행성으로 향하게 하는 중력을 유도해 낸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에서 자연 철학의 두 개의 주류의 통합을 달성했다.
– 광학
뉴턴은 프리즘을 연구했었는데, 프리즘으로 하는 초기 실험에서 뉴턴은 다른 색들은 꺾이거나 다른 각도로 굴절된다는 “굴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즘과 벽 사이에 바늘 구멍이 있는 다른 카드를 놓고 완전 적색 또는 청색의 광선이 분리되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프리즘은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굴절시켜 다른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는 청색 빛이 적색 빛보다 더 굴절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프리즘이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뉴턴은 “빛은 다른 굴절성의 광선들의 집합이다”라고 정리했다. 뉴턴은 새로운 빛과 색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두개 더 독창적인 실험들을 고안해냈다. 첫번째는 프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스펙트럼의 경로에 렌즈를 놓는 것이다. 렌즈를 이용해 다른 색 광선들을 합성시키면 원래의 흰색 빛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톱니바퀴를 렌즈와 벽 사이에 놓고, 그 톱니가 렌즈로부터 나오는 다른 색 빛의 광선들이 초점에 도달하기 전에 방해하도록 했다. 결과는 벽에 있는 점은 흰 빛이 차단되면서 통과되는 다른 색 광선들에 따라서 변하였다.
– 고전물리학의 정립
페스트가 런던에 퍼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피난하던 시기 (1664 ~ 1666)의 산책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우선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알려진 만유인력의 존재 자체를 뉴턴이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측정되는 중력과 천체운동에 필요한 구심력이 같은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당시 학자들도 다들 알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행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였다. 행성의 공전 주기니 궤도니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요하네스 케플러 등에 의해 관측되어 케플러의 3대 법칙으로 정립되었는데, 뉴턴이 한 것은 이를 갈릴레이 역학으로부터 발전시킨 뉴턴 역학 (뉴턴의 운동법칙)과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을 수학적 표현으로 정립해낸 것이다.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뉴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에 대한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유인력과 사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이제는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심지어 그의 모친의 자택에 있던 사과나무를 여러 번 옮겨 심은 사과나무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기증받아 심어져 있다. 한국내에만 11곳 이상에 심겨졌으며 (일부는 고사했다), 접목이므로 종자는 원본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참고로 원본 나무도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다.
16세기 잉글랜드의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으로 돈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학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 계산이 맞지 않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었다. 그러다 에드먼드 핼리, 크리스토퍼 렌 (1632 ~ 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 그리고 아이작 뉴턴의 최악의 라이벌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 계산을 정확히 해내나 내기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핼리는 같은 왕립협회 회원이던 아이작 뉴턴을 캠브리지 대학에서 만난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이 문제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뉴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계산해 봤더니 원이 아니고 타원이던데?”
말 그대로 핼리는 정줄을 놨고, 뉴턴에게 이걸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왕립 협회에서 로버트 훅과 크게 다툰 이후로 침묵하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1684년에 핼리의 권유로 ‘프린키피아’를 발표한다.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면, 뉴턴은 물체의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연구결과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구심력을 정의했으며, 행성의 궤도가 원뿔곡선이고 태양이 초점 중 하나에 있으며, 궤도에서 케플러 제3법칙이 성립하면 중력은 거리의 역제곱꼴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도출해냈다. 케플러 제1법칙에 의해 행성의 궤도는 타원 궤도이고, 케플러 제2법칙에 의해 행성의 공전 속도는 태양에 가까울수록 빨라지지만, 등속 원운동 취급한 상태로 역제곱꼴이라면 궤도에서 케플러 3법칙이 성립한다는, 진행방향이 다른 전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
그렇게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친 고전 물리학은 뉴턴에서 집대성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공로 때문에 지금까지도 뉴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맥스웰과 함께 물리학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리학의 1/3 (고전역학)은 뉴턴이, 1/3 (전자기학, 통계물리)은 맥스웰이, 1/3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완성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 뉴턴식 망원경
기존의 볼록렌즈 두 개를 합쳐 증폭시키는 방식과 다른, 반사경을 이용한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반사경을 이용한 망원경을 뉴턴식 망원경이라 부른다.
뉴턴이 반사망원경을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학 분야의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사 망원경은 뉴턴식 이전에 그레고리식 반사 망원경이 설계 개념으로 먼저 나와 있었는데, 당시 광학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곡면거울을 요구했기 때문에 뉴턴은 당시의 기술로 만들수 있는 방식을 계산, 제시한 것이다.
당대 ‘빛은 순수한 백색이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을 때, 그는 프리즘 연구를 통해 다양한 색의 빛의 굴절과 반사 등을 실험해보았고, 다른 색의 빛은 다른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굴절 망원경이 색수차가 발생한다는 것을 예측했다. 하지만 반사는 이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색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반사 망원경을 발명하게 된다. 상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과 같은 구경의 굴절 망원경보다 상이 어둡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작하기도 훨씬 쉽고 싸다는 장점이 있다.
망원경 중앙에 반사용 평면거울, 즉 반사경이 있어 상을 가릴 것 같은데, 반사경이 상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사경이 “가리는” 빛의 구간이 확대되기 이전의 부분, 즉 빛을 모으는 부분이기 때문. 개구면의 일부를 가린다 해도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통해 들어온 빛만 모아 상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반사용 평면경이 개구면의 일부를 가리더라도 상의 전체적인 밝기가 줄어들 뿐, 상의 일부가 가려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단, 반사 망원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의 상 흐려짐 현상이 도넛 모양이 되는 특성이 있다. 소위 ‘도넛 보케’이라고 하며, ‘보케’가 개구면의 형상대로 형성되는 광학적 원리 때문에 생긴다.
– 라이프니츠와의 미분 논
미분법을 누가 먼저 발명했나 하는 문제로 라이프니츠와 크게 싸웠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영국 왕립과학협회에 제소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고자 했고 뉴턴은 회장 권한으로 이 문제를 ‘공정한 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 출신 위원에게는 아예 의견 개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게다가 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남몰래 뉴턴이 직접 썼으며, 이 보고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써서 익명으로 왕립과학협회 회보에 싣기까지 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죽었을 때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뉴턴이 여러 외압을 넣은 결과와 동일하게, 실제로도 뉴턴 쪽이 라이프니츠보다 명백하게 먼저 발명했다. 그가 미분을 발명한 것은 1665~6년으로, 1676년에 발명한 라이프니츠보다 10년이나 빠르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거나 연구에 사용하기만 했으며, 1671년 작성한 미분에 대한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논문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60년 후였는데, 이때는 이미 뉴턴이 사망하고도 10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분쟁에는 매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미분 자체를 발표하기 전에 서로에게 자기 결과를 자랑했다는 점이다. 두 명 모두 미분을 발명했지만 서로 그것을 모르던 상태에서 먼저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분의 기본 개념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막연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본 라이프니츠는 답장에서 뉴턴에게 자신의 미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편지를 보냈다. 따라서 누가 미분을 발명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기 지도를 받아서 미분을 재구성한 주제에 자기가 먼저 미분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배은망덕한 이라고 생각했고, 라이프니츠는 기껏 존경하는 과학자에게 자기 결과를 설명했더니 그걸 싹 빼앗아가고는 오히려 자기를 악당으로 모는 파렴치하고 권위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누가 진정한 발명자인가를 넘어선 깊은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도 뉴턴의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미분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서 불완전한 상태이던 미분을 완성했을 수도 있기는 하다. 뉴턴도 이때까지 미분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라이프니츠의 연구 결과를 보고 자신의 미분을 다소 손질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뉴턴이 먼저 발표를 냈고 그 뒤로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발견한 미분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뉴턴이 먼저 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미분과 뉴턴의 미분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했다. 그런데 후에 어느 영국 수학자가 ‘이것은 뉴턴의 표절이다’라는 의견을 내며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저 둘은 가만히 있었는데 제3자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 의혹이 생기기 전까지는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표절 의혹으로 영국 학계와 독일 학계는 싸움이 났다.
추가로, 뉴턴이 단순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당대의 대학자라서 라이프니츠가 영국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 이전에 흔히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 급수”라고 불리는 식을 1674년에 발견했는데, 문제는 이미 제임스 그레고리라는 당대의 영국 수학자가 1671년에 발견했던 식이었기 때문에 라이프니츠가 이 식을 독자적으로 발견했음에도 이때 영국인들의 뇌리에는 라이프니츠는 표절범이라는 의심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과 뉴턴의 반응이 더 큰 효과를 일으켜 당시의 영국인들에게 라이프니츠는 표절이나 일삼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더한 사실은, 이미 madhava라는 인도의 수학자가 약 200년쯤 전에 아크탄젠트 급수를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은 예상치 못하게 큰 여파를 불러일으켰는데, 영국 학회와 독일 학회의 싸움으로 인해 양국간의 학문적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수학계는 얼마간 대륙에 비해 뒤떨어지고, 이 사건을 통해 표절 문제를 명확히 한 현대의 논문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미분의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해석에서는 다소 의견이 갈린다. 뉴턴이 먼저 발견하기는 했지만, 많은 수학자들의 견해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발명했으니 두 사람 모두 발명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분법이 완전히 무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페르마가 접선의 기울기를 구하는 불완전한 방법을 연구한 적이 있고, 뉴턴의 스승인 아이작 배로는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의 일반화된 형태를 증명했다. 당대에 나름 싹이 틀 만한 토양이 갖춰져 있던 셈이며, 따라서 두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개발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뉴턴의 각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승자는 라이프니츠가 되었다. 물리학자인 뉴턴의 방식보다는 수학자인 라이프니츠의 방식이 더 수학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현대의 미분은 거의 라이프니츠의 기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뉴턴은 물리학자답게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연구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에서 접선을 연구하다가 각각 미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dy/dx 방식이 바로 라이프니츠 방식이고, 뉴턴의 방식 처럼 함수(변수) 위에 점을 쓰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dot notation. 다만 f(x)라는 기호를 처음 쓴 것은 오일러이므로, 뉴턴이 현대처럼 f'(x)라고 썼을 리는 없다.
일반적으로 뉴턴 방식으로 쓴 공식을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외국에서 쓴 미적분 책에는 간혹 나오고, 물리학을 한다면 시간에 대해 미분한 양으로 다른 양을 미분해야 하는 경우 처럼 역학 문제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이 잔뜩 들어 있는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할 때 쓰는 양을 줄이려고 쓴다.
.변분법과 최속강하곡선
미분과 관련한 뉴턴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변분법이다 (뉴턴만의 업적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방정식이 조건을 만족하는 변수를 구한다면, 변분법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를 구한다. 좋은 예시가 바로 최속강하곡선 (사이클로이드) 문제로, “어느 고정된 두 지점을 연결된 궤도 위를 물체가 중력 가속도에 의해 이동할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달하는 궤도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문제다. 쉽게 설명하자면,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을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착하는 미끄럼틀 모양을 구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뉴턴은 이 문제를 하위헌스의 법칙과 논증 기하학을 이용하여 답을 구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미적분학 관련 논쟁이 있었고 베르누이는 뉴턴을 시험해보기 위할 겸 이 문제를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답을 구하라고 한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베르누이의 풀이를 보면 미적분학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뉴턴은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미적분학으로 풀지 않고 기하학적 기법으로 답을 구하였다 (‘프린키피아’도 스스로 고안한 미적분학 기법보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나간다).
이때 뉴턴은 익명으로 답을 제출했지만, 풀이가 워낙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이름이 저절로 밝혀졌다.
변분법은 라그랑주 역학으로 이어지게 되며, 라그랑주 역학은 해밀턴 역학을 거쳐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역학까지 이어지게 된다.
– 기타 / 역설
.구멍-반점 이론
뉴턴은 빛의 부분 반사에 관한 이론중 하나인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구멍-반점 이론이란, 유리나 물 등의 물체에서 빛이 일부는 투과되고 일부는 반사되는 부분반사현상을 구멍에서 빛이 통과되고 반점에서 빛이 반사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뉴턴은 “어떤 유리라도 깨끗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는데, 이는 뉴턴이 유리를 ‘닦는다’라는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리를 닦는다는 것은 미세한 가루들을 문질러 유리면을 긁어내는 것으로 미세한 흠집이 생기는데, 이 미세한 흠집을 빛이 통과한다는 것은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뉴턴-랩슨 방법
.유율법
.역설
뉴턴을 골치아프게 한 역설 두 가지가 있었으니, 벤틀리의 역설과 올베르스의 역설이 그것이다.
○ 뉴턴에 대한 일화들
독실한 청교도 신자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라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성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성도 (Saint)들이 부활하여 하늘에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심판 날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땅에서 살 것이며, 단지 1000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노벨렌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여러 세기 후에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가 주위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들이 뿌리 깊이 퍼져있는 것을 몹시 비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 환난이 오기 전에 복음 전파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은 취미로 연금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는데, 연구 기록물이 노트 3권 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크롬웰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영국을 덮쳐서 큰 피해가 난 적이 있는데, 고향에 있던 10대 후반 뉴턴이 살던 곳에서도 폭풍우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뉴턴은 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나와 널뛰기를 하면서 바람의 강도를 측정했다고 한다.
밤하늘을 관측할려고 연에 등불을 달아 올렸다가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평생 동정이었다. 뉴턴 자신도 동정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정도로 여성혐오증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기에게 여자를 소개해준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그 친구와는 몇 년 후 화해하여 관계를 회복했다. 후대의 같은 영국 수학자이자 전산학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도 여성혐오자였지만, 튜링처럼 동성애자이기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모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뉴턴의 아버지가 죽은 뒤 뉴턴을 낳고 3살 무렵에 집을 나가 11살에 새아버지와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모친, 새아버지와 평생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며,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는 어머니를 보고 결혼 제도 자체를 혐오했을 가능성도 높다. 다만 여자를 싫어했지만 자신의 조카가 집안일과 빨래를 도와주는 건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또한 동생들과의 사이도 그럭저럭 좋았다고 한다.
물리학보다 연금술, 성경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했다고 한다. 사실 그것들이 본업이고 물리학은 취미 생활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후대에 소위 이단으로 간주되는 학자로 고대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이 전부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금술, 성경 연구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연구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노트 90%는 그 주제였다. 덕분에 친구인 핼리가 뉴턴의 관심을 물리학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연금술을 연구하고도 장수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연금술에서는 수은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절에 물질의 특성을 확인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직접 먹어보는 방식이었다. 뉴턴은 특별한 부작용은 겪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년에 우울증에 걸린 것이 수은 중독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시기는 사실상 연금술이 유행한 마지막 시기로,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찰스 2세도 열심히 연구하다가 말년에 부작용을 겪었다.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추천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1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 수위에게 한 “문 좀 닫아주시오!”였다고 한다.
뉴턴은 ‘광학’ 제4권에서 물리학 전체를 포괄하고 자신이 선택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통일 이론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그가 책상에 촛불을 켜둔 채 외출했다가 그가 기르던 개인 다이아몬드가 초를 물어서 던져버리는 바람에 아직 공개하지 않은 그의 연구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뉴턴은 조폐 공사의 사장에도 임명되었는데, 그는 화폐 위조범을 잡아 처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뉴턴은 젊은 시절에 약혼한 여성이 있었으나, 그가 연구와 일에 매우 몰두하였기 때문에 결혼까지 이어가지는 못하였고, 평생동안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시 (詩)를 “일종의 천재적인 쓸모가 없는 소리” (a kind of ingenious nonsense)로 여겼다.
뉴턴은 손으로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공작에 재능이 있었는데 (참고로, 어린 시절에도 뉴턴의 공작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에 학교가 끝난 후, 자신이 직접 만든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었는데, 뉴턴의 솜씨를 샘낸 한 아이가 돌을 던져서, 물레방아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화가 난 뉴턴이 그 아이를 흠씬 팼다는 일화도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일 시절에 휴대할 수 있는 초롱불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덕분에 새벽마다 의무적으로 감사성찬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하러 가던 학생들이 편하게 대학교 내 성공회 교회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뉴턴은 남해 회사 주식 사건으로 인해서 2만 파운드를 잃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다” (I can calculate the movement of the stars, but not the madness of men)라고 말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뉴턴이 어떤 학자와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풀리지 않던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바람 좀 쐬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학자는 약속을 깜빡 잊은 뉴턴 때문에 혼자 식사를 하고, 결국 뉴턴을 만나지 못한 상태로 집으로 갔다. 문제를 푼 후 뉴턴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빈 그릇을 보고, “아! 내가 식사를 이미 한 걸 깜빡했군.”이라고 말했다는 황당무계한 일화가 있다.
연구하는 도중에 배가 고파진 뉴턴은 하인에게 계란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인이 계란을 가져왔지만, 풀고 있는 문제에 너무 집중을 하는 바람에 끓는 냄비에 계란이 아니라 시계를 넣었다는 일화도 있다.
– 신학자 뉴턴
뉴턴은 과학 분야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의 신학 관련 문헌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문 신학자로 간주될 정도로 신학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상가들과 신학이나 종교에 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뉴턴은 표상과 이데아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것은 고전~중세 신학의 연구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삼위일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후 요한 1서 5장 7절에 의도적으로 첨가된 구절도 뉴턴이 증명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이는 영국 국교회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당시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행위는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갇히거나 까딱하다가는 사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뉴턴은 자신이 공들여 쓴 ‘삼위일체 반박 논문’의 출판을 생이 끝날 때까지 주저하였다.
결국 그가 죽은 후에 방대한 종교 문헌 중 4가지만 사후에 출판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20세기 들어 경매를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경매 이후 뉴턴의 신학과 종교, 연금술에 관한 원고는 전 세계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측정과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뉴턴이 남긴 기록을 단어 수로 본다면 과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100만 단어, 연금술에 관해서는 55만 단어, 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140만 단어로 추정된다. 양으로만 따지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라 불러야 할 수준. 뉴턴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과학, 신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 조폐국 감사, 국장으로서의 뉴턴
1696년 조폐국 감사 자리를 시작으로 1699년부터 조폐국장의 자리를 25년이나 맡았는데, 임기 중에 금속 비율 등을 바꾸어 화폐를 개혁하기도 했다. 특히 동전의 테두리를 깎아 팔아먹거나 동전을 하나 더 만드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동전에 테두리와 톱니를 만들어 넣은 것은 이 사람의 업적이다.
뉴턴이 조폐국장을 맡은 일화 또한 흥미롭다. 원래 뉴턴과 친분이 있던 재무대신 찰스 몬태규가 월급 많이 주는 대신 할 일 별로 없는 명목상의 자리로 조폐국 감사 자리를 하나 줬는데, 그가 조폐국 감사 자리에 엄청난 열의를 보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거처를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옮기고는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조폐국 업무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시 유명했던 화폐 위조범 윌리엄 챌로너를 잡기 위해 정보원을 고용하고, 이러한 정보원과 만나기 위해 변장을 하고 술집에서 접선을 하기도 했다고.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정치적 뒷공작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전임 조폐국장이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자 후임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조폐국장으로서의 업적은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당시 영국은 금과 은을 모두 본위금속으로 사용하는 이중본위제였다. 이 경우 금과 은의 법정 교환비가 실제 시장에서의 교환비와 다르면,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된 금속만이 유통되게 된다. 당시 영국은 실제 시세보다 법적으로 금을 고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금화가 은화를 구축하여 이후 영국의 화폐 제도가 한참 동안 꼬여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당연히 뉴턴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비율 조정을 시도했지만, 이는 금화를 소유하고 있던 자산가들의 자산 가치를 줄여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사 실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뉴턴은 위조화폐 방지 업무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는 금화만이 유통되게 되었고, 법적으로 저평가된 은화는 외국에서 금화로 바꿔오게 된다. 문제는 금이 그 가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소액화폐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폐 활성화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영국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든 것이, 역설적으로 지폐 도입을 앞당기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폐를 사용하면서 신용화폐로의 발전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뉴턴 시기에 금을 고평가하여 사실상 금은 이중본위제를 포기하고 금본위제를 채택하였는데, 이중본위제 자체가 유지/관리하기 너무 어려운 체제이다 보니 단일 본위제를 채택한 것이 결국 금융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게 된다. 또한 은본위제를 채택하여 국제 시세보다 은을 고평가하고 있던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촉진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어차피 영국 국내에서는 은이 저평가되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국제 시세보다 은이 고평가되다 보니, 중국과의 무역이 수지타산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편전쟁 시기에 이르기 까지 영국과 중국이 엄청난 규모의 무역을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시대가 지나 영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무렵이 되면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가 세계 금융시장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다.
뉴턴의 조폐국 감사와 국장 시절을 다룬 책인 ‘뉴턴과 화폐위조범: 천재 과학자, 세기의 대범죄를 뒤쫓다’ (Newton and the Counterfeiter: The Unknown Detective Career of the World’s Greatest Scientist)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 뉴턴의 명언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춰질지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있기 때문입니다.”
“난 겨우 꼬맹이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업적이라는 건 그 꼬마가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질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네. 바다에는 더 많고 더 엄청난 업적이라는 게 많으니 자네들도 그 꼬마의 조개껍질을 덮는 엄청난 발견을 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 – 말년에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한 말.
“난 진리를 찾아 다니는 꼬맹이였지만, 내가 찾은 건 고작해야 바다에서 조개껍질 한 줌을 주웠을 뿐, 결코 진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리를 찾아 바다에서 더 크고 더 많은 무엇을 줍거나 발견할지 모른다. 그것이 뭔지 나도 모르지만 이 바다에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넘치고 많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버전으로 이렇게 유언을 책자에 쓴 경우도 있다.
“인류 역사상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 – 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말한 뉴턴에 대한 명언이다. 사람들은 흔히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학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를 놓고 사이가 나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에 대해서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평가
뉴턴은 “지금까지 태어난 가장 위대하고 유례없는 천재였다” – 데이비드 흄
뉴턴은 “과학사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거인”이다. – 스티븐 호킹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도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 알렉산더 포프,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으로 쓴 글
뉴턴은 광학에 종사하는 동안 거의 전적으로 빵과 포도주와 물을 먹고 살았다. – 현대 생리학의 창시자인 Haller의 증언. 또한 볼테르는 뉴턴의 동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 – 존 메이너드 케인스
“그 (뉴턴)는 인류 지성사의 전환점이었다. 뉴턴 이전에는 경험 세계의 심오한 특성들을 표현해줄 수 있는 물리적 인과율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양식의 사유와 연구, 실험방법을 결정해준 사람은 뉴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으며 오직 뉴턴이 그 길을 제시했다. 그는 핵심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이용 가능했던 실험 데이터를 독창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세세한 증명방법에 대해서도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뉴턴의 생애는 과학과 더불어 신학과 연금술이 평생 동안 함께 얽혀 있었다. 오히려 분량으로만 따지면 신학 관련 저술이 더 많다. 오늘날 알려진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보면 신학적 연구를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천문학에 손을 댔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천문학을 위해서 물리학 연구를 했고, 물리학을 위해 수학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진지하게 본업이 뭔지 따지면 오히려 종교와 신학 쪽이 더 맞는 것. 이것은 케인즈가 거시경제학 이론을 만들다 여름에 심심해서 뉴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알려지고, 유명해진 내용이다.
○ 주요 저서
1671년, 유율법 (Method of Fluxions)
1684년, 물체의 궤도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porum in gyrum)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뉴턴이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출판 비용 지원으로 1687년 7월 5일에 출판하였다.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할 뿐만이 아니라, 뉴턴 운동 법칙을 통해서 고전역학을 완성한 근대 과학의 명저로 꼽힌다.
1704년, 광학 (Opticks)
1707년, 보편 수학 (Arithmetica Universalis)
1728년, 고대 왕국의 연대기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1733년,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평론 (Observations upon 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Apocalypse of St. John)
1754년, 주목할 만한 성서의 두 변질에 대한 역사학적 해석 (An Historical Account of Two Notable Corruptions of Scripture)
– Published in his lifetime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 (1669, published 1711)
Of Natures Obvious Laws & Processes in Vegetation (unpublished, c. 1671–75)
De motu corporum in gyrum (1684)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
Scala graduum Caloris. Calorum Descriptiones & signa (1701)
Opticks (1704)
Reports as Master of the Mint (1701–1725)
Arithmetica Universalis (1707)
– Published posthumously
De mundi systemate (The System of the World) (1728)
Optical Lectures (1728)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1728)
Observations on Daniel and The Apocalypse of St. John (1733)
Method of Fluxions (1671, published 1736)
An Historical Account of Two Notable Corruptions of Scripture (1754)
– Primary sources
Newton, Isaac. The Principia: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Brackenridge, J. Bruce. The Key to Newton’s Dynamics: The Kepler Problem and the Principia: Containing an English Translation of Sections 1, 2, and 3 of Book One from the First (1687) Edition of Newton’s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Newton, Isaac. The Optical Papers of Isaac Newton. Vol. 1: The Optical Lectures, 1670–167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Newton, Isaac. Opticks (4th ed. 1730) online edition
Newton, I. (1952). Opticks, or A Treatise of the Reflections, Refractions, Inflections & Colours of Light. New York: Dover Publications.
Newton, I. Sir Isaac Newton’s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and His System of the World, tr. A. Motte, rev. Florian Cajori.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34)
Whiteside, D.T., ed. (1967–1982). The Mathematical Papers of Isaac Newt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 8 volumes.
Newton, Isaac. The correspondence of Isaac Newton, ed. H.W. Turnbull and others, 7 vols (1959–77)
Newton’s Philosophy of Nature: Selections from His Writings edited by H.S. Thayer (1953; online edition)
Isaac Newton, Sir; J Edleston; Roger Cotes, Correspondence of Sir Isaac Newton and Professor Cotes, including letters of other eminent men, London, John W. Parker, West Strand; Cambridge, John Deighton (1850, Google Books)
Maclaurin, C. (1748). An Account of Sir Isaac Newton’s Philosophical Discoveries, in Four Books. London: A. Millar and J. Nourse
Newton, I. (1958). Isaac Newton’s Papers and Letters on Natural Philosophy and Related Documents, eds. I.B. Cohen and R.E. Schofield.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Newton, I. (1962). The Unpublished Scientific Papers of Isaac Newton: A Selection from the Portsmouth Collection in the University Library, Cambridge, ed. A.R. Hall and M.B. Hal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ton, I. (1975). Isaac Newton’s ‘Theory of the Moon’s Motion’ (1702). London: Dawson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