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16년 11월 14일,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 ~ 1716) 별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년 7월 1일 ~ 1716년 11월 14일)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다.
–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출생: 1646년 7월 1일, 신성로마제국 작센 선제후령 라이프치히
.사망: 1716년 11월 14일, 신성로마제국 작센 선제후령 하노버
.시대: 17 ~ 18세기 서양철학 / 학파: 합리주의
.연구분야: 수학, 형이상학, 논리학, 신정론, 세계공통어
.학력: 알테 니콜라이슐레 (졸업, 1655 – 1661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철학 / B.Sc., 1661 – 1662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철학 / M.Sc., 1662 – 1664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법학 / M.Sc., 1664 – 1665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철학 / P.hD., 1665 – 1666년), 알트도르프 대학교 대학원 (법학 / P.hD., 1666년)
.연구과목: 수학, 물리학, 지질학, 의학, 생물학, 발생학, 예방의학, 수의학, 고생물학, 심리학, 공학, 언어학, 사회학, 형이상학, 윤리학, 경제학, 문헌정보학, 역사학, 정치학, 외교학, 음악 이론, 완전한 언어, 우주론
.직업: 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법률가, 외교관, 사서, 언어학자, 역사학자, 신학자.
.주요업적: 미적분학, 단자론, 최선의 세계, 최선의 상태, 라이프니츠의 원주율 공식, 라이프니츠 조화삼각형, 라이프니츠 행렬식, 라이프니츠 적분법칙, 충족이유율, 도식적 추론, 미분 표기법, 페르마의 소정리 증명, 운동에너지, 결정문제, 교대급수판정법, 연속법칙, 동차성 선험법칙, 보편표의문자, 조합론 학위논문, 미적추론자, 보편과학
.영향받음: 성경,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주의,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모니데스, 쿠자누스, 수아레즈, 브루노, 데카르트, 홉스, 미란돌라, 토마시우스, 가상디, 말브랑슈, 스피노자, 보쉬에, 파스칼, 하위헌스, 베르누이, 바이겔, 가브리엘 바그너, 니콜라스 스테노, 라몬 룰, 콘푸키우스, 콘웨이 자작부인
.영향줌: 볼프, 테텐스, 모페르튀, 비코, 플라트너, 보시코비치, 보네, 디드로, 흄, 후설, 칸트, 가브리엘 바그너, 보날드, 러셀, 하위슨, 바리스코, 카이틴, 괴델, 하이데거, 라로체, 샤틀레 후작부인, 프로베니우스, 니체, 라베소, 베르그송, 레셔, 도스 산토스, 들뢰즈, 타르드, 아도르노
.특이점: 라이프니츠는 책을 쓸 때 라틴어 (40%), 프랑스어 (30%), 독일어 (15%)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
라이프니츠는 철학과 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이작 뉴턴과는 별개로 무한소 미적분을 창시하였으며, 라이프니츠의 수학적 표기법은 아직까지도 널리 쓰인다. 라이프니츠는 기계적 계산기 분야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계산기에 자동 곱셈과 나눗셈 기능을 추가했고, 1685년에 핀 톱니바퀴 계산기를 최초로 묘사했으며, 최초로 대량생산 된 기계적 계산기인 라이프니츠 휠을 발명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기반이 되는 이진법 수 체계를 다듬었다.
철학에서 라이프니츠는 낙관론으로 유명하다. 라이프니츠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신이 창조할 수 있는 최선의 우주라고 결론지었다. 라이프니츠는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와 함께 17세기 최고의 3대 합리주의론자 중 한 명이다. 라이프니츠의 업적은 현대 분석철학을 앞당겼지만, 한편으로 그의 철학은 스콜라 철학적인 면도 있다.
라이프니츠는 물리학과 공학에 많은 공헌을 했고, 생물학, 의학, 지질학, 확률론, 심리학, 언어학, 정보과학분야에서 나중에 나올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리고 정치학, 법학, 윤리학, 신학, 역사학, 철학, 언어학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방대한 분야에 걸친 라이프니츠의 공헌은 다양한 학술지와 수만개의 편지, 그리고 출판되지 않은 원고에서 발견되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남긴 연구는 방대한 양에 달하지만, 바쁜 생활 탓인지 연구를 편지나 메모 등 형태로 남긴 게 많다. 철학만 보더라도 생전에 발간한 게 ‘변신론’ (1710) 뿐이며, 사후 출판 가운데서도 그의 사상을 정리한 책은 별로 없다. 그의 철학의 특징은 그 이전의 여러 가지 사상적 대립을 모두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조화시킨 점이다. 데카르트적 물체관과 피에르 가상디의 원자론, 기계관과 목적관, 섭리와 자유, 경험론과 이성론, 나아가 근세사상과 스콜라 철학의 조화까지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모나드론’, ‘형이상학 서설’, ‘인간오성신론’이 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는 달리, 라이프니츠는 대학에서 철저한 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의 철학 학사 논문을 감독한 제이콥 토마시우스 교수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평생에 걸친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그가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루터교 대학에서도 존경을 받은 기독교 스페인 사람인 프란시스코 수아레스의 저서를 열심히 읽었다. 라이프니츠는 르네 데카르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아이작 뉴턴과 로버트 보일의 새로운 방식과 결론에 깊게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의 업적을스콜라 철학의 틀에 갇힌 채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의 방식과 관심거리들은 종종 20세기의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을 예견했다.
○ 생애 및 활동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는 1646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률가이자 라이프치히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으나 라이프니츠가 6세 때 돌아가신다. 어린 라이프니츠는 아버지가 남긴 장서와 서재를 놀이 공간 삼아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서적 등 많은 고전을 읽고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예나 대학에서 수학 강의를 들었으며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법학을 공부했다. 1666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박사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옮겨 1667년 『법학에서 복잡한 사례들에 관하여 (De casibus perplexis in jure)』라는 논문으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으며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독서와 공부를 통해서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법학, 논리학, 신학, 역사학, 언어학, 자연과학, 공학 등에서 수많은 기여를 한 인류 최고의 지성이다. 미적분 계산법의 발견과 사칙연산이 가능한 계산기의 발명 그리고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기반이 되는 이진법 수 체계는 수학자로서의 업적이고, 에너지 보존 법칙의 발견과 뉴턴의 물리학에 대적할 만한 새로운 운동이론인 동역학을 고안한 것은 물리학자로서의 업적이다. 뉴턴과 달리 시공간의 상대성을 주장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예견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자연의 프랙털 (fractal)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는 오늘날 프랙털 우주론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논리학자로서 라이프니츠는 일반학 기획과 보편기호법에 대한 연구 그리고 논리 계산법을 통해 현대 기호논리학의 시작을 알리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신구교의 통합, 광산 개발, 학술원 설립, 중국 선교사와의 서신 교환 등 많은 분야에서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 라이프니츠는 철학, 역사, 수학, 정치학,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매우 많은 저작과 서신을 남겼고,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저작들도 많다. 미발간 저작들이 모두 출판되고 연구된다면, 그가 인류 지성사에 남긴 업적과 영향도 더 많아질 것이다.
1703년에서 1705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신인간지성론』은 로크의 『인간지성론』에 대한 비판서이자 자신의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쓴 저작이다. 이 책에서 라이프니츠는 로크의 경험론적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합리론적 인식론의 주요 원리와 이론을 제시하고 그 인식론을 떠받치고 있는 그의 형이상학 체계를 소개한다. 독자들은 본유 관념 혹은 본유 원리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미세 지각 이론, 논리적 추론과 증명에 의한 지식, 무한 개념과 연속성의 법칙 등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말년에 그가 사망할 때, 그의 장례식에는 오직 그의 하인만이 왔다고 한다.
○ 수학자로서의 라이프니츠
그 당시의 삼각함수, 로그함수의 수학적 개념은 추상적이였는데, 라이프니츠는 1692년과 1694년에 이를 명료화 시켰다. 또한 가로좌표, 세로좌표, 기울기, 현, 그리고 수직선과 같은 기하학적 개념들을 함수의 그래프로부터 이끌어 내었다. 18세기에는 함수와 이런 기하학적 개념들 사이의 연관성이 약해졌다.
라이프니츠는 선형 방정식의 계수를 배열 (오늘날의행렬)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다.
행렬을 이용하면 그 방정식의 해를 찾는 것이 쉬워지는데, 이 방법은 후에 가우스 소거법으로 명명되었다.
라이프니츠의불 논리와 수리논리학의 발견 또한 수학적 업적의 일부이다.
– 미적분
라이프니츠는 아이작 뉴턴과 같이 무한소를 사용한 계산법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다고 알려졌다. 라이프니츠 공책을 보면 그가 처음으로 y = f(x)의 그래프 밑의 면적을 계산하는데 적분계산법을 도입한 날이 1675년 11월 11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 날 지금도 쓰는 표기법 몇 개를 만들었는데, 그 예로 라틴어 similis의 S를 길게 늘인 적분기호, 라틴어 differentia에서 유래한 미분기호 d가 있다. 이 제안이 그의 가장 큰 수학적 업적이다. 미적분학에서 곱셈 법칙은 현재 “라이프니츠의 법칙”으로 불리고, 적분 기호 안에 있는 함수를 어떻게 미분해야 되는지 설명한 이론은 라이프니츠의 적분 규칙이라고 불린다.
라이프니츠 증명은 대부분 기하학적 직감에 의한 사실이었다. 라이프니츠는 무한소라고 불리는 수학적 존재를 밝혀냈고, 역설적이게도 이것을 대수적 성질에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1711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라이프니츠는 존 케일, 뉴턴 등 다른 사람들과 미적분학을 뉴턴과 독립적으로 발견했는지, 원래 뉴턴의 아이디어를 다른 표기법으로 썼는지 긴 논쟁을 하였다.
19세기에 극한에 대한 정의와 실수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오귀스탱 루이 코시, 베른하르트 리만,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와 그 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더 엄격한 미적분학이 나왔다. 코시는 계속 미적분학의 기본으로 무한소를 사용했지만, 바이어슈트라스에 의해 무한소는 천천히 미적분학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해석학 밖, 특히 과학과 공학에서는 무한소가 계속 사용되었고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1960년에 에이브러햄 로빈슨은 모형 이론을 이용하여 라이프니츠의 무한소의 엄밀한 정의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 위상기하학
프랙탈 기하학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자기유사성과연속의 성질을 기반으로 브누아 망델브로가 창시한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직선은 곡선과 같고, 어떠한 부분도 전부와 닮았다.”라고 쓴 것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2세기씩이나 먼저 위상수학을 예견한 것이다. 패킹에 대한 일화로, 라이프니츠는 그의 친구이자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인 데스 보스에게 원을 하나 그려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안에 접하는 세 개의 합동원을 최대의 반지름을 가지도록 그리라고 했다. 그러면 이 세 개의 원 사이에 하나의 원을 그릴 수 있고,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자기유사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라이프니츠는 유클리드 공리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같은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 과학자와 공학자로서의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의 저술들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발견들을 찾고, 현재의 지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날에도 연구되고 있다. 물리학에 관한 그의 대다수의 저술은 게르하르트의 ‘Mathematical Writings’에 포함되어 있다.
– 물리학
라이프니츠는 그 당시 떠오르던 정역학과 동역학에 상당한 공헌을 했으며, 때로는 데카르트와 뉴턴의 생각에 반대했다. 뉴턴이 공간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공간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여 운동에 관한 새로운 이론 (동역학)을 고안했다. 라이프니츠 물리학의 중요한 예시 중 하나는 그가 1695년에 저술한 ‘Specimen Dynamicum’이다.
자연의 본질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생각들은 정역학, 동역학과 잘 들어맞지 않았고, 아원자 입자가 발견되고 양자 역학이 고전 역학을 밀어내기 전까지는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그는 뉴턴과의 논쟁에서 공간, 시간과 물체의 운동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예견했다. 종종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라이프니츠 법칙도 물리학의 다양한 분야의 증명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율은 오늘날 우주론에서 인용되고 있고, 동일성 원리는 양자역학에서 인용된다. 오늘날 우주론의 한 갈래인 프랙탈 우주론옹호자들은 라이프니츠를 선구자로 여긴다.
– 활력 (vis viva)
라이프니츠의 활력은 현대물리학에서의 운동에너지의 2배인 mv2이었다. 그는 특정한 역학계에서 에너지의 총량이 보존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물질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여겼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국가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활력 개념은 영국의 뉴턴과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옹호하는 운동량 보존과 경쟁 관계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 두 나라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에너지와 운동량 모두 보존되며, 물질의 본질에 대한 두 접근 방식 모두 유효하다.
– 다른 자연 과학
.지질학발생학생명과학 및 고생물학 : 라이프니츠는 비교해부학과 화석을 통해 변형설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얻었다. 그의 주요한 업적은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 ‘Protogaea’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최초로 유기체 이론을 연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의학 : 라이프니츠는 당대의 의사들에게 학설은 자세한 비교 관찰과 검증된 실험에 기반해야 하며, 견고한 과학적 사실과 형이상학적 관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 사회 과학
.심리학 : 라이프니츠는 의식과 무의식 상태의 구분을 제안했다.
.공중 위생학 : 라이프니츠는 역학과 수의학을 총괄하는 행정상의 기관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공중 위생과 예방책을 가르치기 위해, 일관성 있는 훈련 과정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경제학: 라이프니츠는 세금 개혁과 국민 보험을 제안했고, 무역수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라이프니츠는 오늘날의 게임 이론과 비슷한 이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회학 : 라이프니츠는 의사소통 이론의 기반을 닦았다.
– 공학
갤런드는 1906년에 라이프니츠의 실용적인 발명품들과 공학 연구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저술들을 모아 책을 출간했다. 한글로 번역된 저술은 거의 없지만, 라이프니츠가 실용적인 삶을 추구한 성실한 발명가, 공학자이자 응용 과학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라이프니츠는 ‘실천을 가진 이론’ (theoria cum praxis)라는 좌우명을 따르며, 이론을 실생활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응용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라이프니츠는 바람을 동력으로 하는 프로펠러, 물 펌프, 채광 기계, 수압 프레스, 등불, 잠수함, 시계 등을 설계했다. 그는 데니스 파핀과 함께 증기 기관도 만들었다. 심지어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1680년부터 1685년까지는, 독일 하르츠 산에 있는 은광을 괴롭혀 온 만성적인 홍수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 계산이론
라이프니츠는 최초의 컴퓨터 과학과 정보 이론가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다듬었고 전 생애에 걸쳐 그 체계를 사용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라그랑주 다항식과 알고리즘 정보 이론을 예견했다. 라이프니츠의 논리 계산학은 임의의 튜링 기계가 임의의 입력으로 연산하게되는 만능 튜링 기계의 발명을 앞당겼다.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창시자인 노버트 위너는 라이프니츠의 저술에서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기반인 피드백 개념을 찾았다고 1934년에 말한 바 있다.
라이프니츠는 1671년에 사칙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기 시작했고, 수 년에 걸쳐 발전시켜 나갔다. ‘단계 계산기’라고 불린 이 발명품은 상당한 관심을 끌었고 라이프니츠가 1673년 왕립 협회에 선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받아올림과 받아내림을 완벽하게 자동화시키지는 못했으므로 큰 성공은 아니였다.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몇 년간 머무르면서 많은 수의 비슷한 기계들을 만들었다. 쿠튀라는 라이프니츠의 출판되지 않은 1674년작 원고에서 몇몇 대수적 연산까지도 수행할 수 있는 기계의 묘사를 찾았다고 말했다.
라이프니츠는 나중에 찰스 배비지와 에이다 러브레이스에 의해서 만들어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라이프니츠는 1679년에 펀치 카드의 초기 형태인 공깃돌로 이진수를 표현하는 방식의 기계를 고안했다. 현대 컴퓨터는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공깃돌을 레지스터와 전위차에 의해 생기는 전자의 흐름으로 대체했지만, 돌아가는 방식은 라이프니츠가 1679년에 상상한 것과 비슷하다.
– 도서관학
독일 하노버와 볼펜뷔텔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라이프니츠는 도서관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볼펜뷔텔의 도서관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10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건물을 설계했고, 이 건물은 의도적으로 도서관이 되도록 설계된 최초의 건물로 여겨진다. 또한, 옥스퍼드 대학 Bodleian 도서관의 색인 체계가 그 당시 현존하는 유일한 색인 체계였는데,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다른 색인 체계를 독자적으로 고안했다. 그리고 색인을 쉽게 하기 위해서, 출판사들에게 매년 출판 되는 모든 책의 제목을 표준 규격에 맞춰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이프니츠는 이 체계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이래 모든 인쇄물을 포함하기를 바랐다. 이 제안은 그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미국 국회도서관과 영국 국립 도서관의 후원 아래 20세기 영어 출판사들 사이에서 비슷한 체계가 규격화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의 이상언어이론과 논리 계산학은 각각 에스페란토 같은 인공어와수리논리학을 예견한 것으로 여겨진다.
– 학사원 설립 노력
라이프니츠는 연구에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영국 왕립 학회나 프랑스의 파리 과학 아카데미 같은 국립 과학 학사원의 설립을 지지했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여행을 통해 독일 드레스덴과 베를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과학 학사원 설립을 직접적으로 추진했다. 단 한 곳에서만 결실을 맺었는데, 그 결과가 1700년에 설립된 베를린 학사원이다. 라이프니츠는 죽을 때까지 그 학회의 회장을 맡았다. 이 학회는 후에 독일 과학 학회가 되었다.
○ 철학자로서의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걸로 유명하다. 그는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그에 대한 답으로 “왜나하면 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사물들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고 달리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법률가로서의 라이프니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철학자도 라이프니츠 같이 많은 실용적인 일을 한 사람은 없다. 라이프니츠의 법률, 윤리, 정치에 관한 저서는 영어권 철학자들에게 오랜 기간 동안 간과되어 왔으나, 최근에 바뀌었다.
라이프니츠는 토머스 홉스 같은 군주정치나 폭정의 변호인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18세기 미국, 존 로크의 정치적 관점,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관점에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였다. 다음의 라이프니츠가 바론 J.C. 보이네버그의 아들 필립에게 1695년에 보낸 편지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나는 국왕의 권력과 복종에 대한 질문에 대해 왕자 (王者)에게는 국민들이 저항할 권리를 가지라고 설득하는 것이 좋고, 반대로 국민들에게는 나라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나는 원칙적으로 혁명의 사악함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악하다는 그로티우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왕자가 도를 넘어서서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위험 속에 도시의 안녕을 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경우는 매우 희귀하지만 이 구실 아래 폭력을 인정하는신학자는 이것을 자제해야 한다. 과한 행동은 부족한 것보다 훨씬 위험한 것을 알아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1677년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모여 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운영되는 유럽 연맹에 불려갔다. 그 동안 라이프니츠는 유럽 연합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했다. 또한 그는 유럽이 하나의 종교를 채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제안을 1715년에 번복했다.
○ 업적
– 미적분학
가장 유명한 업적은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에 미적분 이론을 발명한 것. 이것으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뉴턴이 먼저 발명했고, 라이프니츠의 발명시점은 몇년 뒤다. 그러나 발표 시점을 보자면 뉴턴이 늦었다. 뉴턴이 발표를 미루고 있던 시점에서 적극적인 성격의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을 발명하자마자 바로 독일 학회에 발표하였다. 뉴턴은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영국왕립학회의 과학자들에게 라이프니츠의 표절 여부를 조사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하지만 뉴턴의 지시를 영국학회가는 이의를 제기했고, 당시 세계 과학을 주름잡는다고 생각했던 영국학회는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이론을 베꼈다고 독일학회에 항의하였다. 결국 나중에 국제 소송에선 영국과 독일의 과학자들 사이의 힘겨루기처럼 커졌는데, 이것은 곧 단순히 누가 이론을 발명했는지 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닌 어느 국가가 과학의 선두주자인가에 초점을 둔 사건이었다.
그리고 수학적 완성도는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현재 전 세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미적분의 기호나 이론은 모두 라이프니츠가 만든 체계를 쓰고 있다. 평균변화율과 거기서 도출되는 순간변화율, 극한으로 미분계수를 정의하는 개념 자체가 뉴턴이 아닌 라이프니츠가 고안하고 정리한 개념이다. 뉴턴은 수학자이기 이전에 물리학자라서 물리학 위주로 미적분을 정리했다. 뉴턴이 미적분을 발명한 이유도 고전 역학을 정리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적 편의성에서도 뉴턴은 라이프니츠에게 뒤쳐졌다. 당시 뉴턴이 만든 미적분의 기호는 오직 뉴턴만 알 수 있는 복잡한 식이었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논문은 ‘하나의 변수를 다른 변수에 대해 미분한 값’을 어떤 기호로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변수에 대한 함수란 건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적분기호를 실제 쓸 때 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 사람들이 논리적 흐름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기술되었다. dy/dx라는 적합한 기호의 틀들을 만들어 내는 데 관심을 두면서 연구를 진행하여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이해를 시키기도 하고 인정을 받았으나, 뉴턴은 그냥 미분을 어퍼스트로피로 끝내서 표현 (y’)하는 등 미적분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기호와 틀의 보편성천재 아닌 사람도 쉽게 이해할 만하게 만들기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또한 뉴턴의 성격 자체가 너무 내성적이라 일일이 학자들이 미적분에 대해 궁금해하는 편지를 보내도 아무런 답장이나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뉴턴식 미분 표기는 별로 쓰이지 않고, 뉴턴 본인이 만든 고전역학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을 표현할 때나 쓰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발명하였고, 이를 토대로 최초의 기계식 사칙연산 계산기를 발명했다.
– 논리학
또한 라이프니츠는 현대논리학의 창시자가 될 뻔했다. 그는 수학에서 기호들을 통해 명제들을 나타내고 증명을 하듯이 애매성과 모호성이 제거되고 인간의 사유 구조를 그대로 반영해 모든 학문에서 쓸 수 있는 보편언어 (인공언어)의 구성을 계획했고 심지어 200여년 뒤에야 나온 논리학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이미 제기했다. 사실상 미적분과 더불어 라이프니츠의 가장 큰 업적.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출판되지 않고 책상 서랍 속에 처박혀 수백 년이 지나서야 발견된다. 만약 그의 논리학에 대한 작업들이 온전히 출판되어 학계에 알려졌다면 논리학의 혁명은 200년쯤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현대 컴퓨터 이론의 시초인 셈이다.
양상 논리에서 가능세계의 개념을 최초로 철학에 도입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를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창조했으며, 이에 대한 논의에서 가능세계의 개념이 생겨났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든 진리를 수학 법칙처럼 무조건 참이 되는 필연적 진리와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우연적 진리로 나누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에 의해 모두 최상의 완전함이 실현되었으며 따라서 우연적 진리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 필연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 물리학
또한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이라고 판단한 뉴턴과 달리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봤다는 점에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예측을 남들보다 더 빨리 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힘을 근원력과 파생력으로 나누었는데, 근원력은 단자의 목적이고, 파생력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 파생력이 우리가 흔히 느끼는 힘이며, 코나투스라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 신학과 형이상학
신학자와 철학자로서 중요한 업적은 단자론 (모나드론, monad論)이다. 단자론의 주요 내용은 먼저 근본이 되는 실체인 단자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고, 이 단자들 중에 이성을 가진 단자인 정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인식의 원리를 규명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모나드론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부분이 없는 극도로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들의 결합체이다. 개별 모나드들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하게 완전히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상태, 즉 지각과 욕구를 가진다. 지각은 모나드의 일시적인 상태고, 욕구는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하는 내부적인 힘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모나드는 물질적 실체가 아닌 정신적 실체이다. 우리가 보는 물질적 세계는 모나드들이 보는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보는 현상들이 순전한 가상은 아니다.
계속해서 모나드론에 따르면 각 모나드들의 자발적인 활동은 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 조화된다. 경험적으로 보이는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물질세계는 사실 관념이지만, 모나드들의 관념은 모두 조화되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해도 별 상관없다. 즉, 모나드들은 자발적이라 인과관계나 상호작용 같은 건 없지만, 신에 의해 서로서로 맞아 떨어지게 조정되어 있으므로 일상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위와 같은 모나드론은 상당한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데카르트식 기계론에 반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식 목적론과 데카르트로부터 이어받은 합리론 전통, 그리고 기독교적 신앙을 합쳐 그 극단으로 끌고나간 철학이라고 보면 된다. 라이프니츠와 같이 정신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유심론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는 변신론인데, 이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는다는 주장, 그리고 신이 왜 인간을 완벽하지 않으며 악한 존재로 만들었냐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욕망 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 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하며 세계를 최선의 형태로 만든다. 이를테면 악은 음악에 있어서 순간의 불협화음적 요소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존재이다.
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 받는 악이 뒤따르게 되며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세상이 오히려 의지가 없는 세상보다 최선의 세상이며,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볼테르가 라이프니츠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사람의 낙관주의를 비판스하기 위해서 쓴 소설이 다름 아닌 캉디드다.
– 인터넷에 대한 아이디어 제시
또한 학문의 발전을 위한 방법으로서 전 유럽이 공유하는 경험적 자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제시했으며, 이에 따른 부차적 효과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단결 또한 기대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 도구로써 라이프니츠는 세계 최초로 인공어와 컴퓨터의 개념을 떠올렸다. 단순히 말만 한 게 아니라 그는 실제로 ‘Stepped Reckoner’라는 계산기를 발명했다. 20세기에 인공어, 컴퓨터가 실제로 등장했음은 물론이요 인터넷의 발명으로 전세계가 공유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고 있으니,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무려 300년이나 앞서갔다고 할 수 있겠다.
○ 평가
논리학을 형이상학을 여는 열쇠로 사용한 철학자의 가장 좋은 예. – 버트런드 러셀
우리의 재능을 라이프니츠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저서들을 집어 던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죽을 수밖에 없다. – 드니 디드로
그는 자신의 위대한 수학적 재능을 많은 분야에 낭비하였다. 그가 수학만 파고들었다면 훨씬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 가우스
○ 저술 활동
라이프니츠의 저술은 출판 되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주어진 연도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출판한 연도가 아니라 저술이 끝난 연도이다.
•1666. 결합법론; Loemker §1 and Parkinson (1966).
•1671. 새로운 물리학의 가설; Loemker §8.I.
•1673. 철학자의 신념 (라 : Confessio philosophi).
•1684. 극대·극소를 위한 새로운 방법; Struik, D. J., 1969. A Source Book in Mathematics, 1200–1800. Harvard University Press: 271–81.
•1686. 형이상학 서설; Martin and Brown (1988), Ariew and Garber 35, Loemker §35, Wiener III.3, Woolhouse and Francks 1.
•1703. 이진법에 관한 설명 (라 : Explication de l’Arithmétique Binaire); Gerhardt, Mathematical Writings VII.223. 온라인 영어 번역 by Lloyd Strickland.
•1710. 변신론; Farrer, A.M., and Huggard, E.M., trans., 1985 (1952). Wiener III.11 (part). 온라인 영어 번역.
•1714. 모나드론; Nicholas Rescher에 의해 영어로 번역됨, 1991. The Monadology: An Edition for Students. University of Pittsburg Press. Ariew and Garber 213, Loemker §67, Wiener III.13, Woolhouse and Francks 19.Latta의 온라인 영어 번역; 라이프니츠의 원고 복사본과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판
•1765. 인간오성신론; 1704년에 저술 마침. Remnant, Peter, and Bennett, Jonathan, trans., 1996. 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Wiener III.6 (part). 온라인 영어 번역 by Jonathan Bennett.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