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25년 2월 8일,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표트르 1세 / 표트르 대제 / 피터 대제 (Peter the Great, 1672 ~ 1725) 타계
표트르 1세 벨리키 (Peter the Great, 러: Пётр I Великий,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재위 1682 ~ 1725년)였다. 표트르 1세는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국으로 성립했다.
표트르 1세는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이자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임페라토르)로 표트르 대제 (표트르 벨리키, Пётр Великий)라고 불린다. 표트르는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 (Peter the Great), ‘페터 대제’ (독어권, Peter der Große), ‘피에르 대제’ (불어권, Pierre le Grande), ‘페드루 대제’ (포루투갈어권, Pedro o Grande)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서유럽과의 교류 단절 및 중세 수준 문화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이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정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여러모로 훗날 소련의 산업화를 주도한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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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트르 1세 (Peter the Great)
.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별호: 대제 (Вели́кий)
.출생: 1672년 6월 9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사망: 1725년 2월 8일 (52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조: 로마노프 왕조
.가문: 로마노프가
.부모: 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모) 나탈리야 나리시키나
.배우자: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1689년 결혼 / 1698년 폐위), 마르타 스캅론스카야 (1712년 결혼 / 1727년 사망)
.자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카테리나 페트로브나 여대공 (요절), 안나 페트로브나, 러시아 여제 옐리자베타, 마리아 페트로브나 여대공 (요절), 마르가리타 페트로브나 (요절),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 (요절)
.종교: 러시아 정교
*제1대 러시아의 황제
.재위: 1721년 11월 2일 ~ 1725년 2월 8일
.전임: (신설) / 후임: 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 제11·12대 러시아의 차르
.재위: 1682년 5월 7일 ~ 1721년 11월 2일
.대관식: 1682년 6월 25일
.전임: 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 / 후임: (폐지)
.공동재위자: 이반 5세 알렉세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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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 초기
.정치적 야인시대
1672년 표트르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시키나 사이에서 알렉세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이복형인 표도르 3세가 일찍 죽자 정신지체 장애인인 둘째 형 이반 5세 대신 귀족과 러시아 혁명 전까지 러시아 정치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동방 정교회의 지지를 얻어 차르에 올랐으나, 이복누이 소피야 공주가 주동한 쿠데타로 표트르를 지지한 귀족들이 숙청된 탓에 실권을 잃고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렘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영국, 네덜란드 등 서유럽 선진국가들에서 온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최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에 편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러시아 대귀족의 딸인 예브도키야 로푸히나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전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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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군주가 되다
그러던 중 1689년 루스 차르국은 흑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으나 패배했고, 이를 계기로 귀족층이 소피야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을 기회로 자신을 따르는 소년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소피야를 정교회 수녀원에 유배보내고 국사를 장악하게 된다. 1695년 오스만 제국과 재개된 아조프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있지 않은 루스 차르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시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 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해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 5세가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루스 차르국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 통치와 개혁.
.서유럽의 기술공부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기술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부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으며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친히 배웠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서유럽화 정책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했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 (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또한 젊은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히게 했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 전쟁
.스웨덴과의 대결
바다로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이 필요했던 표트르는 1700년 스웨덴의 칼 12세에 대항해 덴마크, 폴란드가 맺은 동맹에 참가하여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에는 전사왕 (戰士王)으로 자칭할 정도로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난 칼 12세의 스웨덴 군에게 크게 패했으나 (1700년 나르바 전투), 표트르는 포기하지 않고 군을 재정비하여 다시 스웨덴에 도전, 1709년 폴타바에서 칼 12세가 친히 지휘하던 스웨덴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폴타바 전투). 스웨덴으로의 퇴로가 끊긴 칼 12세는 남쪽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따라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루스 차르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표트르는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트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칼 12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7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고 불리던 까국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항코 해전 (1714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해 핀란드를 강타했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숙적 칼 12세도 1718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했고,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2세의 처남 프레드리크 1세는 러시아에 강화를 요청해 1721년에 대북방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루스 차르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표트르에게는 임페라토르(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 만년
.토목 공사와 철권 통치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했다.
토목 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아버지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암살하려다 발각되자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다. 하지만 표트르가 보낸 사신의 거짓말에 속아 귀국하여, 재판을 받고 황태자직을 박탈당했으며 1718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권력 승계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 (뒷날의 표트르 2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표트르는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황후의 혈통 (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도 문제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그러던 중 172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을 배를 타고 순시하던 표트르는 한 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2월 8일 사망했다. 황후 예카테리나가 제위를 계승하여 예카테리나 1세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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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1689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와 첫 결혼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1690년 2월 18일 1718년 6월 26일 (28세) 황태자,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1691년 10월 13일 ~ 1692년 5월 14일 (0세) 요절
.파벨 페트로비치, 1693년 ~ 1693년 (0세) 요절
– 훗날 예카테리나 1세가 되는 마르타 스캅론스카야와 두 번째 결혼
.표트르 페트로비치, 1704년 유년기에 사망, 요절
.파벨 페트로비치, 1705년 유년기에 사망 요절
.예카테리나 페트로브나, 1706년 ~ 1708년 (2세) 요절
안나 페트로브나, 1708년 1월 27일 ~ 1728년 5월 15일 (20세),.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과 결혼, 표트르 3세의 어머니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1709년 12월 18일 ~ 1762년 1월 5일 (52세) 후일 러시아 여제, 미혼
.마리아 페트로브나, 1713년 3월 20일 ~ 1715년 5월 27일 (2세) 요절
.마르가리타 페트로브나, 1714년 9월 19일 ~ 1715년 6월 7일 (0세) 요절
.표트르 페트로비치, 1715년 11월 15일 ~ 1719년 4월 19일 (3세) 요절
.파벨 페트로비치, 1717년 1월 13일 ~ 1717년 1월 14일 (0세) 요절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1718년 8월 31일 ~ 1725년 3월 15일 (6세) 요절
.표트르 페트로비치, 1723년 10월 7일 ~ 1723년 10월 7일 요절
○ 평가
러시아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을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이후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문화에서 ‘중세’란 표현은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는 ‘고대’라고 쓴다. 이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나 ‘차르’라고 하는 왕정 (슬라브족)일 뿐 다른 국가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아울러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의 실책 역시 존재한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 (동유럽의 최상류 봉건 지배층)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동원하여 무임금과 과도한 노역으로 도시 건설을 한 것이 비판받는다. 강제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달라고 간언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며 강행했고 도시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었다.
또한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농노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였다.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표트르 1세의 통치기 때부터 러시아의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 (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과 교회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이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하여 러시아의 농노제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난을 계기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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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가 습지에 세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이다.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에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발트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 (1914 ~ 1924년)와 레닌그라드 (1924 ~ 1991년)로 불리기도 했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2010년 기준으로 5,000,000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이다. 선박, 터빈, 발전기, 디젤 엔진, 트랙터, 공작기계, 계기류 (計器類), 각종 장치의 제조공장이 있고, 화학공업 (고무제품·과린산비료·화학합성 자재·염료·도료·향료), 섬유공업, 인쇄업 등도 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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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다.
모스크바에 이어 러시아에서 버금가는 큰 도시이다. 인구는 510만 명으로 모스크바 다음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큰 도시다. 면적은 1,439 km²이다. 북위 59도 56분, 동경 30도 20분에 위치한다.
2003년 5월 29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축제가 열렸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핀란드 만 주위로 8~9세기부터 러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은 노브고로드 대공국에 귀속되었으나 습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으므로 버려진 땅이었으며 이후 15세기에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1611년에 한번 스웨덴이 이 지역을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표트르 1세가 북방전쟁에서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곳의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도시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표트르 1세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이 요새 근처에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짓게 되었다.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만은 않았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이다. 또 매년 한 번씩 홍수가 터져서 곤혹을 치른다. 또 원래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바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석조 토대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도시를 지을 때 돌을 쏟아부어 습지를 메울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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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습지를 메우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는 돌을 충당하기 위해 도시를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칙령을 내렸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다.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이 때는 석조 건축물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다. 각종 물건들에도 세금이 붙었고 교회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켜 버렸다. 표트르 대제에 반하여 구 귀족 및 종교 세력의 편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1718년에 무자비하게 처형되고 만다.
18세기 초반부터는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51년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와 연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교통이 편리해짐으로써 이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각종 러시아의 혁명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중심이 되었다. (피의 일요일, 3월 혁명, 11월 혁명) 또 세계 2차대전 당시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 명이 아사 (餓死) 당하면서까지 지켜낸 도시라고 하여 영웅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 지구와 관련 기념물군은 1990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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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