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83년 1월 23일, 프랑스의 소설가 ‘마리앙리 벨’ (Marie-Henri Beyle) 필명 ‘스탕달’ (Stendhal, 1783~1842) 출생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필명이며, 본명은 ‘마리앙리 벨’ (프: Marie-Henri Beyle)이다.
필명 ‘스탕달’ (프: Stendhal, 1783년 1월 23일 ~ 1842년 3월 23일)로 더 잘 알려진 앙리 벨은 그르노블에서 태어나 파리 1구에서 뇌졸증으로 사망한, 소설 ‘적과 흑’, ‘파르므의 수도원’으로 특히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이다.
프랑스 육군 중사 예편한 그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시조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이래 이탈리아 예찬자가 되었으며, 독특한 연애관에 의한 최초의 소설 ‘아르망스’를 써서 문단에 등장했다.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불리는 ‘적 (赤)과 흑 (黑)’을 써서 왕정복고기의 특권계급에 도전했고, ‘파르므의 승원(僧院)’에서는 전제군주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본명은 마리 앙리 벨 (Marie Henri Beyle) 스탕달은 필명이다. 발자크와 함께 프랑스 근대소설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스탕달은 프랑스 동남부의 주요도시 그르노블에서 고등법원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열렬한 왕당파였고, 가정교사는 예수회 신부였다. 이런 보수적인 가정 분위기에 질린 스탕달은 계몽주의자이자 자유주의적인 지식인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제도를 바꾸고, 시류를 틈타 외조부는 에콜 상트랄이란 학교를 세웠는데, 스탕달은 이 학교에서 공부한 후 파리의 이공계 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곧 중퇴했다.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군대에 입대해 이탈리아 원정군 장교로 밀라노로 가기도 했다. 군 생활을 마친 후 스탕달은 파리에서 극작가가 되기 위해 수련을 쌓았다. 그러나 다시 육군성에 들어가 참사원 서기관의 직책에 오르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가 되면서 서기관을 사퇴한 후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예술 등의 비평문을 쓰며 지내다가 1826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추방된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신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주재 영사로 발령받았지만 업무보다는 주로 사교계 출입에 열중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842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사후 이탈리아를 제 2의 고향으로 여겼던 그의 바람에 따라 묘비에 밀라노인이라는 묘비명이 적혀졌다. 저서로는 ‘적과 흑’, ‘파르므의 수도원’ 등이 있다.
– 스탕달 (Stendhal)
.본명: 마리앙리 벨 (Marie-Henri Beyle)
.출생: 1783년 1월 23일, 프랑스 그르노블
.사망: 1842년 3월 23일 (59세), 프랑스 파리 1구
.직업: 문학가 / 언어: 프랑스어
.국적: 프랑스
.활동기간: 1818 ~ 1840년
.장르: 소설, 수필
.약력: 1800년 프랑스 육군성 입대 / 1830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주재영사 / 1831년 교황령 치비타베키아 영사
.문학 사조: 사실주의
.영화: 적과 흑, The Charterhouse of Parma, All About Loving, The Red and the Black
발자크와 함께 프랑스 근대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스탕달은 1783년 프랑스 그르노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자신과는 성향이 매우 달랐던 가족과의 불화 속에서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소설 외에 문예평론 · 여행기 · 평전을 남겼다. 문필활동 말고는 나폴레옹시기에 군인 · 군무원을, 7월혁명 이후에 외교관을 지낸다.
1800년 용기병 소위로 임관받아 이탈리아로 떠난 이후 스탕달은 나폴레옹 제정의 관료로서 몇 차례의 승진과 함께 출셋길에 오르고 나폴레옹 원정군을 따라 알프스를 넘지만, 1814년 나폴레옹 몰락과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문필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회화사’, ‘아르망스’ 등을 집필했다. 1819년 메칠드와 생애 최고의 연애를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경험은 뒷날에 평론 ‘연애론’ (1822)을 탄생시킨다. 1921년 파리로 돌아와 문필활동을 계속하며 1825년 ‘라신과 셰익스피어’를 발표하여 낭만주의운동의 대변자가 된다.
첫 소설 ‘아르망스’ (1827)는 성적 불능자를 주인공으로 한 특수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7월혁명 이후 대표작 ‘적과 흑’ (1830)을 출간하며 처음으로 ‘스탕달’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그 밖에 미완성 장편소설 ‘뤼시앙 뢰방’ ‘라미엘’, 사후에 ‘이탈리아 연대기’로 간행되는 ‘카스트로의 수녀원장’ 등 중·단편들을 모은 ‘한 만유자의 메모’ (1838)를 발표한다. ‘이탈리아 연대기’의 연장인 ‘파르마의 수도원'( 1839)은 그의 생애를 매듭짓는 걸작이 된다.
이처럼 발상과 기법의 참신함 때문에 작가 생전에는 많은 이해를 얻지 못하지만, 죽은 뒤 스탕달의 작품은 점점 많은 독자를 얻어 세계적인 명작으로 발돋움한다. 스탕달은 1842년 파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는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다.
○ 생애 및 활동
필명 ‘스탕달’ (프: Stendhal)은 1783년 1월 23일,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애정을 주지 않는 완고한 아버지, 위선적이고 까다로운 숙모, 엄격하기만 한 가정교사 신부 밑에서 굴욕적이고 증오에 찬 소년시절을 보냈다. 대신 어머니 쪽 친척인 가니용 가의 사람들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는데, 그 중에서도 외할아버지로부터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6세 때 나폴레옹 군에 입대하였으나, 1814년 나폴레옹이 추방되자 군대를 그만두었다. 모차르트·로시니의 음악과 이탈리아 미술을 좋아하였으며, 각지를 여행하면서 소설 · 평론 · 여행기 등을 썼다. 정열적인 이탈리아의 풍물을 사랑하였고, 자신처럼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자기의 행복을 쫓는 정열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대표작으로 ‘적과 흑’ ‘파르므의 승무원’ 등이 있다. 그는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아무리 보기 싫은 것이라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발자크와 함께 리얼리즘 (사실주의)의 개척자로 알려졌다. 생전에는 거의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프랑스 19세기 최대의 작가로 손꼽히며, 그의 문학을 ‘벨리슴’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신병으로 1842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대부분의 삶을 이탈리아에서 보낸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제 2의 고향으로 사랑하며 묘비명에 자신을 ‘밀라노인’이라고 표기하게 했다.
– 감성적 인생
스탕달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가정과 사회에서 행복을 얻는 전통적 비결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결코 따르지 않은 (또는 따르지 못했던) 한 사람의 생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일정한 주소나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집도 자식도 없었고, 심지어는 애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08년에 누이 폴린 (그는 폴린에게 모든 것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고, 마르세유와 독일에서 많은 편지를 써보냈음) 마저 결혼한 뒤에는 가족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고 대다수 사람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도 오늘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문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진정한 공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앙리 벨의 가장 근본적인 삶 (그의 생각과 환상, 감정의 전기)은 ‘스탕달’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속에서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젊은이의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들은 서로 다른 무대 속에 펼쳐진 앙리 벨의 환상이며,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소설 주인공인 젊은이의 매력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매혹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의 주인공들 (‘적과 흑’의 쥘리앵, ‘파름의 수도원’의 파브리스, ‘아르망스’의 옥타브)은 각기 다른 사회에 나타나 다른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만, 그들의 욕망과 감수성 및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스탕달이 상상하는 스탕달 자신이며, 따라서 이 소설들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는 이런 소설로써 자신의 감정을 달랬다.
○ 평가
스탕달의 전기작가들은 그의 성격과 그가 종사한 직업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면서, 끊임없이 ‘실패’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는 연인으로도 실패했고, 군인으로도 실패했으며, 작가라는 천직에서도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그를 발자크·플로베르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하고 있다. 젊은 독자층, 특히 프랑스·영국·미국의 젊은 독자들은 발자크나 플로베르보다 스탕달한테서 훨씬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스탕달의 글은 수많은 역설적 갈등과 욕망이 뒤섞인 그의 인간성과 생각을 놀랄 만큼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는 ‘행복한 소수’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 비굴함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 감각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고 봉사하는 세계에 반항하는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탕달은 세계를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세계와 싸울 때는 세계가 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저서들
.연애론 – De l’amour (1822)
.라신느와 셰익스피어 – Racine et Shakespeare (1823~1825)
.아르망스 – Armance (1827)
.로마 산책 – Promenade dans Rome (1829)
.적과 흑 – Le Rouge et le Noir (1830)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 Vie de Henri Brulard (1835~1836)
.파름므의 수도원 – La Charteuse de Parme (1840)
○ 기타 : 스탕달 증후군 (Stendhal syndrome)
‘스탕달 증후군’ (Stendhal syndrome)은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러움증, 심하면 환각을 경험하는 현상이다. 실제로 적어도 한 달에 한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급격한 정신적 혼란을 느껴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에 실려온다고 한다.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미술품을 감상하다가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스탕달은 자신이 겪은 현상을 그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기오까지의 여행’에 묘사했고 “스탕달 증후군”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왔다. 19세기 초반부터 우피치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다가 어지러움을 느끼거나 기절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었지만, 1979년에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그라지엘라 마게리니 (Graziella Magherini)가 이런 현상을 경험한 약 100여 건 이상의 여행객들의 사례를 조사하면서 유명해졌다.
스탕달 증후군은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다른 활동을 즐기는 것의 균형을 맞추면 이 증후군을 피할 수 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