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90년 12월 23일, 프랑스 이집트학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출생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년 12월 23일 ~ 1832년 3월 4일)은 프랑스의 이집트학 연구가로서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샹폴리옹은 우연히 형이 읽어 준 책을 통해 나폴레옹이 이집트 유물을 발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한 살이 되던 해, 과학자 푸리에의 집에서 로제타석에 쓰여 있는 상형 문자를 보게 되면서 상형 문자를 해독하겠다는 큰 꿈을 갖는다. 상형 문자에 관련된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조금씩 상형 문자에 다가가는 샹폴리옹. 하지만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고, 상형 문자에 대한 엉터리 책과 상형 문자를 해독했다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샹폴리옹에게 시련으로 다가온다. 그러던 1822년 9월, 샹폴리옹은 그토록 염원하던 상형 문자를 풀 단서를 발견하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의 업적은 축하한다. 십여 년 동안 상형 문자의 해독에 열중하던 샹폴리옹은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에서 자신의 업적을 되새긴다. _ 제임스 럼포드의 ‘상형 문자의 비밀을 찾아서’ 요약
–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출생: 1790년 12월 23일, 프랑스 Figeac
.사망: 1832년 3월 4일, 프랑스 Paris
.국적: 프랑스 (French)
.자녀: Zoraïde Chéronnet-Champollion
.형제: Jacques Joseph Champollion-Figeac
샹폴리옹은 프랑스의 옥시타니 로트주 피작(Figeac)지방에서 7명의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7년 동안 그르노블(Grenoble)에서 지냈으며 유년 시절부터 언어학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었다. 16살이 되던 해에 12개의 언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천재였으며 16살, 대학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콥트어(고대 이집트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0살이 되던 해에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아베스타어 등 심지어 중국어까지 할 수 있었다. 1809년에 그르노블 대학에서 역사학 부교수가 되었고 그의 동양학, 특히 콥트어에 관심이 많은 결과인지, 그 결과 당시 발견된 로제타석에 적힌 글의 해독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22~1824년간을 로제타석의 해독에 매달리게 된다. 끊없는 연구 끝에 필레에서 발굴된 오벨리스크 하나를 참조할 수 있었고 로제타석에 오벨리스크의 문자를 대입해 마침내 이집트어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작품 ‘Précis du système hiéroglyphique’은 현대 이집트학을 탄생시킨다. 그의 이집트학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영감을 받은 것이고 샹폴리옹은 프랑스 대학교에서 이집트학 교수가 되었다.
○ 생애 및 활동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 Francois Champollion, 1790 ~ 1832)은 어학의 천재로서 11세 때 헤브라이어, 12세 때 아랍어 · 시리아어 · 칼디어를 학습하였다. 그르노블대학에서는 고대사와 코프트어를 공부하였으며, 약관 (弱冠)으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1808년 로제타석(石)의 사본을 입수하여 상형문자 해독에 착수, 1814년 “고대 이집트 사람은 모음 (母音)을 쓰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 같다”라는 탁월한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1822년 카르투시 가운데의 상형문자는 알파벳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주장하여, 피레섬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클레오파트라의 상형문자 사본과 로제타석의 프톨레마이오스의 그것과 비교 ·대조하여, ‘P ·O ·L’에 상당하는 기호가 공통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러, 이것을 길잡이로 하여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28∼1829년에는 직접 이집트를 방문하여 많은 각명(刻銘)을 해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유년 시절부터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6세에 대학에 들어가기 전 이미 콥트어 (고대 이집트 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07년 17세의 샹폴리옹은 파리 국립고등학교에서 ‘파라오가 다스리던 때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소년의 통찰력과 확고한 논리에 압도당해 발표가 끝나자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0세 되던 해에 샹폴리옹은 모국어인 불어를 포함하여 콥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아베스타어, 아랍어, 영어, 페르시아어, 중국어 등 12개 언어를 구사했다.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글자를 해독하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독에 몰두했다.
그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내용은 성직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칭송한다는 것이므로, 이집트 부호들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어떤 부호가 ‘프톨레마’를 나타내는지 알면 적어도 몇 개의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샹폴리옹은 부호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부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옳았다.
샹폴리옹은 1821년에 고고학자 뱅크스가 영국으로 가져간 필레섬의 오벨리스크에 적힌 부호들과 견주어 보았다. 이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씌어져 있어 ‘제2의 로제타스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그리스어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나왔는데, 상형문자에도 로제타스톤의 것과 똑같이 타원에 둘러싸인 부호가 있었다. 그 부호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나타내는 부호였다. 이 발견은 상형문자 해독을 위한 첫 성공이었다.
펠레섬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부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부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다’고 믿은 샹폴레옹은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 부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부호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군데 다 있는 발음기호이니, P, O, L 이고, 그 기호들이야 말로 P.O.L의 발음 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1822년 9월 14일 결국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를 다 밝혀냈다. S와 m까지 부호가 나타내는 음가를 푼 그는 문득 곱트어에서 태양신을 Ra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거기다가 이집트 말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람세스 (Ramses)가 되었다. 곧이어 토트메스 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때 샹폴리옹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가 소리글자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로 보아 뜻글자로 해독하려 했다. 이 잘못은 기원 후 5세기 호라플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천300년간 그대로 되풀이되어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시대에 자기들 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플론의 풀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그림과 다름없는 부호들, 그것을 그림 문자로 보아, ‘굽이치는 선’ 세 개가 ‘물’을 나타내고 ‘깃발’이 ‘신’을 나타낸다는 풀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발상적 상상력을 발휘한 샹폴리옹으로 인해 1799년에 발견된 로제타스톤은 23년만에 그 베일을 벗은 것이다. 진정한 비결은 소통과 교류그 후 샹폴리옹은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서 옛 이집트의 파라오 이름과 통치 기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파피루스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이것을 자료 삼아 이집트에 통일 왕조가 세워진 때를 기원전 5867년이라고 계산했다. 샹폴리옹은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집트를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모든 신전, 왕궁, 무덤의 비문이 그의 풀이와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풍부한 언어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로제타스톤에 쓰인 고대 이집트 어를 풀었다. 샹폴리옹의 상상력은 ‘언어’라는 지식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여러 언어, 고고학자들과 함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해결의 실마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상상력’으로 오래된 난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키르셔 같은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를 비롯해, 스승 드 사시와 그의 제자인 오케만과의 만남, 토마스 영과 같은 선의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수수께끼를 푸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로제타스톤을 푼 것은 샹폴리옹에 앞서 연구한 사람들의 공로가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를 서로 나누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지식의 폭과 깊이가 더해졌다.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천재라 할지라도 주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1814년 영국인 토마스 영이 이집트 민중문자의 해독을 끝냈고, 이집트 상형문자 해석을 시작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이 일을 확장하여, 로제타 돌을 해석하였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부터 해석하였고, 테두리가 둘러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냈다. 그것은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형문자쪽의 테두리가 둘러진 단어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후 그의 형제에게 가서 이를 해석했다고 알렸다.
185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프톨레마이오스 학회에서 로제타 스톤의 영어 번역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3명의 학부생 찰스 R. 헤일 (Charles R. Hale), S. 헌팅턴 존스 (S. Huntington Jones)와 헨리 모턴 (Henry Morton)이 번역을 맡았다. 이 번역은 재판까지 금세 모두 팔렸지만, 학술적인 가치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출판을 중단했다.
– 이집트 상형문자
토마스 영은 스웨덴 외교관 요한 아케르블라드의 조사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을 최초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그는 몇몇 문자를 번역할 수 있었지만 완전한 해독에는 이르지 못했다. 영의 작업은 후에 샹폴리옹이 해독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1822년 샹폴리옹은 마침내 처음으로 해당 문자의 정확한 해독에 성공하고 고대 이집트어의 문법을 밝혀낸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 Francois Champollion, 1790 ~ 1832)은 유년 시절부터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6세에 대학에 들어가기 전 이미 콥트어(고대 이집트 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07년 17세의 샹폴리옹은 파리 국립고등학교에서 ‘파라오가 다스리던 때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소년의 통찰력과 확고한 논리에 압도당해 발표가 끝나자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0세 되던 해에 샹폴리옹은 모국어인 불어를 포함하여 콥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아베스타어, 아랍어, 영어, 페르시아어, 중국어 등 12개 언어를 구사했다.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글자를 해독하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독에 몰두했다. 그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내용은 성직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칭송한다는 것이므로, 이집트 부호들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어떤 부호가 ‘프톨레마’를 나타내는지 알면 적어도 몇 개의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샹폴리옹은 부호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부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옳았다.
샹폴리옹은 1821년에 고고학자 뱅크스가 영국으로 가져간 필레섬의 오벨리스크에 적힌 부호들과 견주어 보았다. 이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씌어져 있어 ‘제2의 로제타스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그리스어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나왔는데, 상형문자에도 로제타스톤의 것과 똑같이 타원에 둘러싸인 부호가 있었다. 그 부호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나타내는 부호였다. 이 발견은 상형문자 해독을 위한 첫 성공이었다.
펠레섬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부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부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다’고 믿은 샹폴레옹은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 부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부호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군데 다 있는 발음기호이니, P, O, L 이고, 그 기호들이야 말로 P.O.L의 발음 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1822년 9월 14일 결국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를 다 밝혀냈다. S와 m까지 부호가 나타내는 음가를 푼 그는 문득 곱트어에서 태양신을 Ra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거기다가 이집트 말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람세스(Ramses)가 되었다. 곧이어 토트메스 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때 샹폴리옹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가 소리글자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로 보아 뜻글자로 해독하려 했다.
이 잘못은 기원 후 5세기 호라플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천300년간 그대로 되풀이되어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시대에 자기들 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플론의 풀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그림과 다름없는 부호들, 그것을 그림 문자로 보아, ‘굽이치는 선’ 세 개가 ‘물’을 나타내고 ‘깃발’이 ‘신’을 나타낸다는 풀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발상적 상상력을 발휘한 샹폴리옹으로 인해 1799년에 발견된 로제타스톤은 23년만에 그 베일을 벗은 것이다.
그 후 샹폴리옹은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서 옛 이집트의 파라오 이름과 통치 기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파피루스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이것을 자료 삼아 이집트에 통일 왕조가 세워진 때를 기원전 5867년이라고 계산했다. 샹폴리옹은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집트를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모든 신전, 왕궁, 무덤의 비문이 그의 풀이와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풍부한 언어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로제타스톤에 쓰인 고대 이집트 어를 풀었다. 샹폴리옹의 상상력은 ‘언어’라는 지식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여러 언어, 고고학자들과 함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해결의 실마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상상력’으로 오래된 난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키르셔 같은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를 비롯해, 스승 드 사시와 그의 제자인 오케만과의 만남, 토마스 영과 같은 선의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수수께끼를 푸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로제타스톤을 푼 것은 샹폴리옹에 앞서 연구한 사람들의 공로가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를 서로 나누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지식의 폭과 깊이가 더해졌다.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천재라 할지라도 주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 Works
L’Égypte sous les Pharaons, ou recherches sur la géographie, la religion, la langue, les écritures et l’histoire de l’Égypte avant l’invasion de Cambyse. Tome premier: Description géographique. Introduction. Paris: De Bure. 1814.
L’Égypte sous les Pharaons, ou recherches sur la géographie, la religion, la langue, les écritures et l’histoire de l’Égypte avant l’invasion de Cambyse. Description géographique. Tome Second. Paris: De Bure. 1814.
De l’écriture hiératique des anciens Égyptiens. Grenoble: Imprimerie Typographique et Lithographique de Baratier Frères. 1821.
Lettre à M. Dacier relative à l’alphabet des hiéroglyphes phonétiques employés par les égyptiens pour écrire sur leurs monuments les titres, les noms et les surnoms des souverains grecs et romains. Paris: Firmin Didot Père et Fils. 1822. See also the wikipedia article Lettre à M. Dacier.
Panthéon égyptien, collection des personnages mythologiques de l’ancienne Égypte, d’après les monuments (explanatory text to illustrations by Léon-Jean-Joseph Dubois). Paris: Firmin Didot. 1823.
Précis du système hiéroglyphique des anciens Égyptiens, ou recherches sur les éléments premiers de cette écriture sacrée, sur leurs diverses combinaisons, et sur les rapports de ce systéme avec les autres méthodes graphiques égytpiennes. Paris, Strasbourg, Londres: Treuttel et Würtz. 1824.
Lettres à M. le Duc de Blacas d’Aulps relatives au Musée Royal Egyptien de Turin. Paris: Firmin Didot Père et Fils. 1824.
Notice descriptive des monuments Égyptiens du musée Charles X. Paris: Imprimerie de Crapelet. 1827.
Lettres écrites d’Égypte et de Nubie. Vol. 10764. Project Gutenberg. 1828–1829.
- Posthumous works
Monuments de l’Egypte et de la Nubie: d’après les dessins exécutés sur les lieux sous la direction de Champollion le-Jeune, et les descriptions autographes qu’il en a rédigées. Volume 1 & 2. Paris: Typographie de Firmin Didot Frères. 1835–1845.
Grammaire égyptienne, ou Principes généraux de l’ecriture sacrée égyptienne appliquée a la représentation de la langue parlée. Paris: Typographie de Firmin Didot Frères. 1836. See also the wikipedia article Grammaire égyptienne
Dictionnaire égyptien en écriture hiéroglyphique. Paris: Firmin Didot Frères. 1841.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