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90년 4월 17일, 인쇄공으로 시작해 발명가 · 언론인 · 정치가 등을 겸한 일명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 ~ 1790) 별세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 ~ 1790년 4월 17일)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특별한 공적 지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프랑스 군 (軍)과 동맹에서 중요한 역할했고, 미국 독립에서 중추였다.
그는 계몽사상가 중 한 명으로서, 유럽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피뢰침, 다초점 렌즈 등 발명하였다.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 (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 (100달러) 두 명뿐이다.
“Any society that would give up a little liberty to gain a little security will deserve neither and lose both.”
약간의 안전을 얻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자유도 안전도 가질 자격이 없으며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모토
미국의 정치인,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 (The 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 인쇄공으로 시작해 외교관, 과학자, 발명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 정치 철학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스파이 등 온갖 직업들을 다 겸했다.
비록 대통령을 지내진 못했지만, 미국에서 지금도 대통령급 이상으로 인지도 있는 인물이며 미국 달러화 중 100달러에 도안으로 채택된 인물이기도 하다. 10달러의 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초대 재무장관)과 함께 달러화 도안 인물 중 단 둘뿐인 대통령이 아닌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대통령 출신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출생: 1706년 1월 17일, 영국령 미국 보스턴
.사망: 1790년 4월 17일 (84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정당: 무소속
.자녀: 윌리엄 프랭클린, 프란시스 프랭클린, 사라 프랭클린
.국적: 잉글랜드 왕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제6대 행정위원회 위원장
.임기: 1785년 10월 18일 ~ 1788년 11월 5일
.전임: 존 디킨슨 / 후임: 토머스 미플린
*미국의 제1대 스웨덴 주재 대사
.임기: 1782년 9월 28일 ~ 1783년 4월 3일
후임: 조나단 러셀
*미국의 제1대 프랑스 주재 대사
.임기: 1778년 9월 14일 ~ 1785년 5월 17일
.후임: 토머스 제퍼슨
*미국의 제1대 우정장관
.임기: 1775년 7월 26일 ~ 1776년 11월 7일
.후임: 리차드 배쉬
*펜실베이니아주의 하원의장
.임기: 1764년 5월 ~ 1764년 10월
.후임: 아이작 노리스

1706년 1월 17일 뉴잉글랜드 보스턴에서 17남매 중 15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 때문에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양초와 비누공장을 하던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열두 살에 형이 운영하는 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열여덟의 나이에 영국으로 건너가 인쇄 기술을 배워온 뒤, 1728년부터 인쇄업을 시작하였다. 17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지를 인수하여 발행하였다. 1732년 12월, 1733년도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처음으로 발행하여 1758년도 달력까지 발행하였다. 그는 회원제 도서관과 병원을 만들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아카데미 창설, 미국철학협회 창립 등 폭넓은 교육문화 활동을 벌였다.
평소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토 (Junto)’라는 독서토론 클럽을 결성하여 바람이나 일식, 월식, 지진 등 자연과학에 대해서 토론하고 연구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742년에 개방형 난로인 ‘프랭클린 난로’를 개발하였다.
1752년 6월에는 연을 이용하여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하였고, 피뢰침을 발명하였다. 영국 왕립협회는 그 공로를 인정하여 프랭클린을 왕립협회 회원으로 임명하고, 코플리 상을 수여하였다.
1748년 인쇄업에서 은퇴한 뒤, 필라델피아의 시의회 의원,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회의 의원을 역임하였다.
1755년에 영국에 대한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이듬해에 프랭클린은 토마스 제퍼슨 등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또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 관계를 이끌어내었다.
1788년에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고, 1789년에는 자서전을 정리하여 영국의 지인들한테 보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과학 실험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790년 4월 17일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평생을 통하여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 (功利主義)에 투철한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가장 지혜로운 미국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서로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과 ‘자서전’이 있다. 뛰어난 기지와 경구가 넘치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는데, 프랭클린은 “나의 출판업 중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낸 작품”이라고 밝혔다.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은 18세기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산문으로 손꼽힌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그를 가리켜 “신대륙에 있어서 자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문필가”라고 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
대장장이이자 농부인 토머스 프랭클린과 제인 화이트의 아들이자,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1657년 12월 23일 영국의 노샘프턴셔주 엑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아비아 폴저는 제분업자이자 교사인 피터 폴저와 전에 계약 하인 (Indentured servant)이었던 메리 모릴의 딸로서 1667년 8월 15일 매사추세츠주 낸터킷에서 태어났다. 폴저의 자손 J.A. 폴저는 19세기에 폴저스 커피를 설립했다.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2명의 부인과 함께 17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엑튼에서 대략 1677년 그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앤 차일드와 결혼했고 1683년 보스턴에 그녀와 함께 이주했다. 그들은 이주하기 전에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이주 후 4명을 더 갖는다. 그녀의 죽음 후에, 조사이어는 새뮤얼 윌러드의 주례로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 (Old South Meeting House)에서 1689년 7월 9일 아비아 폴저와 결혼했다. 그들의 8번째 아이인 벤저민은 조사이어 프랭클린의 15번째 아이이자 10번째 막내 아들이었다.
1706년 1월 17일에 보스턴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10살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능숙한 인쇄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또한 글쓰는 솜씨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723년, 그의 나이 17세 때에 프랭클린은 가출하여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인쇄업자로서 성공했고, 1730년에는 24살의 나이로 인쇄소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1732년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 정치활동
1731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736년에 펜실베이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되어서 1751년부터 1764년까지 국회의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시 체신장관 대리로 일하였으며 (1737 ~ 53), 그 결과로 전 식민지의 체신장관 대리로써, 우편 업무에 관한 사항을 많이 개선시켰다 (1753 ~ 74).
– 과학
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서, 프랭클린은 과학에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면서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 (프랭클린 스토브)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아주 많은 실험을 행하였다.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번개를 구름에서 끌어내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뾰족탑을 세우자고 제안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또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면의 재현으로, 그의 피뢰침이 발명되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 (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 되었고, 코플리상을 받았다. 그해 전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 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다. 57년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 말년
중년부터 비만과 통풍으로 고생하던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흉막염으로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공인으로서, 특히 거의 평생을 살아온 도시 필라델피아에 기여한 면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굉장히 장수하면서 식민지에서 공화국까지 미국 초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존경을 받아 장례식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 전체 인구가 3만이 안 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파가 모였던 것이다.
사후에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미국적인 정신을 담아서 뭇 미국인들의 귀감이 되어 현재까지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로 남아있는 미국 수필문학의 고전이다.

○ 업적
– 정치적 업적
정치가로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 · 군사적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믹국석대여 1참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기초한 ‘미국독립선언문’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서명을 하였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헌법에 기도에 대한 문항을 넣으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 인쇄공 프랭클린
1706년 1월 보스턴에서 가난한 양초장이인 청교도 조슈아 프랭클린 (Josiah Franklin)의 아들로 17자녀 중 15남으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글을 일찍 배웠지만 돈이 없어 학교는 2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형 제임스 프랭클린의 인쇄공 도제로 5년을 지낸다. 이때 시에 빠져 시쓰기에 열심이었던 벤저민에게 아버지가 했던 ‘시인되면 평생 거지로 산다’라는 말을 듣고 시 공부를 접는다.
1721년 형이 주간지 “뉴잉글랜드 커런트”를 창간하자 다음해에 16살의 프랭클린은 신문에 기고문으로 14편의 사회평론을 작성하다가, 형 제임스가 쓴 글로 출간금지를 당하자 형은 벤저민에게 사장 격으로 신문 발행인을 맡겼지만 서로 충돌이 끊이지 않으며 곧 일을 그만두었는데, 사이가 아주 안좋아진 형 제임스가 모든 동네 인쇄소에 벤저민을 부정적으로 소문내 일을 못하게 해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한동안 어렵게 지낸다.
이후 정착해 인쇄업을 하던 프랭클린은 영국 런던에서 인쇄사업을 벌려서 실패하고 미국에 돌아와 1728년 인쇄소를 차리면서 그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사업이 커지면서 펜실베이니아 지폐 인쇄권까지 얻게 되고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창간한다. 프랭클린은 이 신문에 세계 최초로 만화를 삽입하고 도서관에 비치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러 인쇄사업이나 사회사업을 벌리고 청교도적인 근면함과 저축으로 급기야는 부동산 투자를 할 정도로 큰 돈을 벌게된다.
서점 주인, 인쇄소 주인, 출판사 사장 등으로서 미국의 초창기 문학을 이끌었던 미국 초기의 유명 문인. 그의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1732년부터 1757년까지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펴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달력, 일기예보, 명언, 시, 심지어는 수학문제 등 잡다하게 많은 내용을 실은 연보였다. 그렇지만 프랭클린이 직접 쓴 속담이나 명언들도 많아서 당시 식민지 미국의 언어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발명가 프랭클린
그는 한 번도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연구욕과 탐구심이 왕성해 미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1737년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기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사회에 전기를 알리는 장본인이 되었다.
1748년에는 이미 성숙기에 들어선 출판사업을 아예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이나 과학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초점 렌즈, 소방차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목재를 연료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때문에 운송비용과 목재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염려해서 기존의 벽난로보다 열효율이 좋고 안전한 펜실베이니아 화로를 발명했다. 그 이후 펜실베이니아 화로의 문제점을 개선한 개방형 난로를 발명했는데, 개방형 난로는 지금도 “프랭클린 난로”라는 이름으로 땔감이 아닌 가스 등을 사용해 쓰이고 있다.
이렇게 여유롭게 연구를 이어오다 1752년에는 비 오는 벌판에서 연을 날려가며 실험한 끝에 그 유명한 피뢰침을 발명해냈다. 연줄 끝에 금속제 열쇠를 묶고 그 열쇠를 관찰하여 번개가 전기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화재 사고에 대해 관심도 많아서 필라델피아 소방회사라는 미국 최초의 소방서를 만들었으며, 피뢰침도 낙뢰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요도용 카테터 발명자이기도 하며 물리학, 기상학, 해양학, 경제학 등에도 어느 정도의 발자취를 남겼으며, 음악에도 능해 하프, 바이올린, 기타 등을 다룰 줄 알았으며, 글라스하모니카를 발명했고, 직접 작곡한 현악 4중주 곡도 있다. 체스를 무척 좋아했다. 1775년에는 미국 우체국의 초대 우정공사 총재를 지냈으며, 그가 만든 시스템은 아직도 사용 중이다.
참고로 단순히 발명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대인적인 면모가 돋보이는데 그는 펜실베이니아 화로나 피뢰침 같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했다. 물론 영국인들은 왕의 반역자라 칭하면서 그가 발명한 끝이 뾰족한 표준 피뢰침 대신 끝이 둥근 피뢰침을 사용했지만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지 영국에서도 결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받아주고 메달까지 주는 등 사실상 업적을 인정해 주었다.

○ 약력
– 학력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지 경영
1752년 전기유기체설 제창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선정
17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연합안 제안
1757년 영국에 파견, 식민지에 자주과세권 획득
1766년 영국에서 인지조례 철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
17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 임명
1783년 파리조약 미국대표 일원
1785년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
1787년 헌법회의 펜실베이니아대표
1790년 84살에 세상을 떠남

○ 주요 저서
– 대표 저서 1 : 자서전 (Autobiography)
.배경
벤저민 프랭클린의 저서 중 가장 주목 받은 작품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 덕에 이르는 길이다.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미국의 객관적인 계몽주의 정신의 표상이었던 그는 청교도와 비슷한 Plain style로 글을 썼으며 문학에 반하는 정신으로 문학은 항상 실용적인 목적으로 창작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자서전은 그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 나가는 작품이다. 자서전 중간 부분에는 에이블 제임스 씨가 프랭클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등장한다. 이 편지는 프랭클린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또 후에 벤저민 보건이 프랭클린에게 보낸 편지내용이 등장한다. 앞에 나온 에이블 제임스가 보낸 편지 내용과 마찬가지로 벤저민 보건도 프랭클린에게 자서전을 꼭 쓰라고 설득한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으로 인해 행복과 위대함을 얻는데 출신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개인의 인격에 영향을 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사회나 가정의 행복을 촉진시키며, 많은 젊은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프랭클린이 쓴 자서전을 읽게 되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벤저민 보건은 프랭클린을 설득한다.
.특징
자서전의 특징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생지침으로 삼았던 13가지 덕목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철학은 “평소에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의 13가지 덕목들의 계율들을 정의하였다. 조그마한 수첩을 만들어 매일 저녁에 그 날 하루의 행동을 생각하고, 각 계율과 관련하여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해당란에 흑점을 찍도록 하는 등의 자세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자서전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시작하며, 두 번째 부분은 1784년에 프랑스 대사관에서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현대에도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최근에는 벤자민이 휴대하고 다녔던 수첩형식을 착안하여 만든 “프랭클린 플래너”라는 일정 관리수첩이 성행하기도 한다.

– 대표 저서 2 : The Way to Wealth
“The Way to Wealth”는 1758년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이 쓴 글이다.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Poor Richard’s Almanac)의 서문이며, 바른 저축과 소비의 미덕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노력하였다.
소개되는 몇가지 조언들은 “근면함과 인내심으로 생쥐는 돌을 뚫으며, 밧줄을 갉아 두 동강 낸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게으름과 나태로 인한 낭비를 지적하면서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묘지에서 충분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에서 잠을 배우지 못합니다.” 라고 하며 본인이 경험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교훈을 겸허히 수용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 저서들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는데, 프랭클린은 “나의 출판업 중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낸 작품”이라고 밝혔다.
.자서전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은 18세기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산문으로 손꼽힌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그를 가리켜 ‘신대륙에 있어서 자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문필가’라고 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