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99년 12월 31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Archives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 1602 ~ 1799) 해체
연합 동인도 회사 (聯合 東印度會社, Archives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 네: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흔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인도네시아어: Perusahaan Hindia Timur Belanda)는 네덜란드에서 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에 세운 칙허 회사이다. 다국적 기업이며, 처음으로 주식을 발행한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하다.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Archives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
.형태: 공개 회사
.산업 분야: 무역
.창립: 1602년 3월 20일
.해체: 1799년 12월 31일
.본사 소재지: 네덜란드 공화국 암스테르담
.창시자: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설립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2년 후인 1602년에 설립하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임과 동시에 17세기 세계 최대의 회사였다.
조선에 억류된 서양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헨드리크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일한 선원이었다.
○ 동인도 회사 설립
네덜란드 상인은 동인도 물산을 리스본에서 발트해 상품과의 교환으로 획득하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되자, 동인도와의 직접무역의 기운이 높아져 먼저 1594년 암스테르담에 장거리 회사 (네덜란드어판)가 설립되었다.
그 후 동종의 회사 설립과 합병과정을 거쳐 1600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연달아 홀란트 등에 약 10개의 동인도 기업회사가 난립했다.
이 때문에 각 기업간의 불이익이 초래되었고,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통합이 필요하게 되어 의회의 요구에 따라 동인도 무역의 여러 회사는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통합되었다.
○ 동양무역의 번성
16세기에는 향료무역을 경영한 포르투갈인이 몰루카 제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16세기 말 네덜란드 상인이 자와 섬의 반탐에 상관을 열고 개척의 기초를 이룩했다.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자 이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양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 (자카르타)에 총독정청을 두어 포르투갈, 영국 세력을 쫓아내고, 17세기에는 동양무역에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였다.
일본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여 당시 국제 결제 수단이었던 은화의 수입원을 마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동양 국가들 간의 국제 무역 또한 장악하였다 (로마 가톨릭을 전도를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는 달리,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를 탄압하던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거래상대로 여겼다).
점령지역에서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여 많은 수탈을 행했다. 자와 (자바)의 토후를 지배하고,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을 값싼 월급으로 고용했으며,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상품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남방의 향료, 커피, 쪽 (藍), 설탕의 획득에는 원주민의 봉건적인 공납이나 약탈이라고 보는게 정확할 매상을 강요하였고, 가장 중요한 정향 (丁香), 육두구 (肉荳蔲)는 생산지를 한정시켜 노예재배제를 실시하였다.
○ 쇠퇴
회사의 번영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세계적 지위의 상징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대립에서 점차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영국 세력에게 압도되어 1799년 동인도회사는 해산, 네덜란드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때, 자와는 영국에게 점령되어 래플즈에 의해 식민정책의 대개혁이 단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다시 네덜란드의 통치가 시작되어 강제재배제가 시행되었다.
즉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번영과 경제적인 회복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뉴기니, 발리, 보르네오, 수마트라 등이 네덜란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 말부터 원주민의 자각이 높아져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전후 원주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 역사 종합
당시 무역 항로 중에서 최대 이익을 내는 항로는 인도, 중국, 동남아 항로였다. 후추는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고 중국의 차와 도자기도 역시 값비싸게 팔려서 네덜란드의 한 무역 회사가 포르투갈의 독점 상품이었던 동남아시아 향료 무역에 진출했다. 처음 진출한 시기는 1595년으로, 이 해의 첫 항해는 투자자들에게 무려 4배의 수익을 안겨 줄 정도였다.
이 모습을 본 유럽 각국의 다른 회사들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앞다투어 뛰어들어 출혈 경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1600년 영국 상인들은 서로 연합하여 영국 동인도 회사를 결성했다. 이에 영국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뛰어드는 것을 본 네덜란드 정부는 이에 대항을 함과 동시에 영국과 스페인과의 관계를 파탄내 버렸다. 독립을 한 대가로 대 스페인 무역이 중단돼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어 돈벌 기회가 널려있는 곳에 더 투자도 할 생각으로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네덜란드 의회는 대규모 무역선단을 꾸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재정만으로는 조금 무리가 있어서 고민하던 차에 네덜란드의 부자들과 국민들에게 한푼 두푼 투자 받아서 대규모 선단에서 나오는 이익을 나누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다.
그런데 돈을 받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투자를 받을 때, 이익을 나눌 때 표시를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 고민하던 네덜란드는 투자 받은 돈을 한 곳에 모아놓고 그 자금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는 종이 권리증서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서에는 동인도 회사 주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주식의 시작이었다. 이를 따라서 다른 유럽 열강들도 상인들과 왕실이 연합해서 주식회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여기서 주주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이익을 배당한다는 주식회사의 개념이 생겼다. 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다. 회사의 지분을 판매하는 주식이라는 개념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최초이며, 역사상 최초의 증권거래소도 네덜란드에서 바로 이 동인도 회사 주식을 거래하기 위해 생겼다. 즉, 근대 금융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큰 기여를 한 셈이다.
회사를 처음 설립할 때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였다. 현재 가치로 300만 유로 (원화로 약 43억 7백만원), 정부도 권한을 2만 5천길더로 환산을 해서 투자한 주주로서 참여해 네덜란드 국민들의 신뢰를 높였다. 그 외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출혈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독점권을 부여했으며 또 일개 회사 주제에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전쟁 발동권을 가진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처음 10년간은 투자자들이 조선, 건축, 아시아의 무역왕국 건립 등 장기적인 사업에 투자하길 원해서 전혀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영국 동인도 회사보다 은화 부족 현상을 훨씬 일찍 알아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산업 혁명 이전의 유럽이 천연자원도 모자라고 기술도 부족하여 아시아에 내다 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팔 물건이 없다 보니 당시의 국제 결제 수단인 은화를 주고 비단과 후추를 비롯한 사치품들을 구입해야 했고, 이것은 본국의 대규모 무역 적자로 이어졌다. 경쟁사였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 사치품들을 다시 유럽의 다른 나라에 내다 팔아서 무역 적자를 해소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 즉 아시아에서의 중계 무역을 생각해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후추 무역으로 얻은 자산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 말라카, 스리랑카,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 타이완 섬, 중국 광저우는 물론 페르시아에까지 상관을 설립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은과 구리가 많이 나서 네덜란드의 무역 적자를 상당 부분 해소해 주었다. 이 무렵 동인도 회사가 보급항으로 건설한 아프리카 남단의 상관이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다.
여기에 투자자들 중 갑자기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투자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익을 받고 주식 권리를 포기하려고 했고, 또 어떤 다른 사람은 동인도 회사의 미래를 유망하게 보고 주식 권리를 신규로 혹은 증액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이 둘의 주식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넓은 네덜란드에서 서로 이런 생각들을 의사 표시하지 못하고 있어서 거래가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이를 해결하려고 1609년에 생긴 것이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이고 여기서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순환하자 과부하를 막기 위해 1609년에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신용 대출도 있었다고 한다. 은행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은행에 간섭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했는데, 네덜란드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적대국에게도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줬다.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동인도 ‘회사’에 대한 소개지만 사실상 네덜란드라는 국가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라 같이 서술한다.
이렇게 은행, 증권거래소, 유한회사를 하나의 금융 체계로 통합시켜 폭발적으로 자본을 모았다. 전성기인 1670년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0,000명의 직원과 10,000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되었고, 회사의 주식은 배당금으로만 액면가의 40%를 배당하는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주가가 워낙 많이 올라서 상대적으로 배당금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못지않게 많은 해악을 점령지에 끼쳤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가 워낙 악명이 높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60년대 남명이 청나라에 멸망하면서 중국무역이 대폭 감소하고,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은 수입이 감소하자 회사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기존의 향료 무역으로부터 커피, 차, 도자기, 면직물 등으로 상품의 종류를 늘리고 상관의 숫자를 늘려 대응했지만, 경쟁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규모를 키우고, 1700년대 이후로는 신대륙에서도 향료, 설탕 등의 상품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의 수익이 줄어들게 되었다.
18세기 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러, 그 무렵 들어선 바타비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고, 1799년 해산하였다. 동인도 회사가 소유한 식민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역시 네덜란드의 직할령이 되었다.
구 동인도회사의 금융, 상업 부문은 네덜란드 무역회사(NHM)에 인계되었다. 이 회사는 현 ABN-AMRO 은행의 전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