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35년 11월 30일, ‘미국 문학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 (Mark Twain) 본명 :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 (Samuel Langhorne Clemens, 1835 ~ 1910) 출생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 (Samuel Langhorne Clemens, 1835년 11월 30일 ~ 1910년 4월 21일)는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의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로 1835년 미주리 주에서 태어나 미시시피 강가의 작은 마을 해니벌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열두 살에 인쇄소 견습공 생활을 시작했고, 1857년에는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이 되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터지자 남군에 들어갔으나 2주 만에 빠져나와, 네바다 주 공무원으로 부임하는 형을 따라 서부로 가는 역마차 여행에 동행했다. 금광을 찾겠다는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실패하고, 언론계로 관심을 돌려 네바다 주와 캘리포니아 주의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면서 ‘마크 트웨인’ 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뱃사람 용어로 강의 안전수역을 나타내는 ‘두 길 깊이’ 를 뜻한다. 1865년 유머 단편 ‘캘리베러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를 발표해 일약 범국민적 명사가 되었으며, 1869년에는 유럽과 팔레스타인 성지 여행기 ‘철부지의 해외여행기’를 출간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1885년 걸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발표, 작가로서의 최절정기를 맞이했다. 1894년에는 투자 실패와 경영하던 출판사의 도산으로 파산하고 말았지만, 1년간 세계 순회강연을 해서 빚을 청산했다. 1910년 뉴욕에서 일흔다섯의 나이로 타계했다. ‘미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문학적 업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물질문명과 종교와 전쟁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불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미시시피 3부작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미시시피 강의 추억’과 딸들을 위해 쓴 ‘왕자와 거지’를 비롯해, 익살 넘치는 여행기 ‘철부지의 해외여행기’, ‘고난을 넘어’, ‘도보 여행기’, ‘적도를 따라서’,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풍자한 ‘도금시대’, ‘바보 윌슨의 비극’, ‘아더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 ‘전쟁을 위한 기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필명: 마크 트웨인 (Mark Twain Sarony.jpg
.출생: 1835년 11월 30일, 미주리주 플로리다
.사망: 1910년 4월 21일 (74세), 코네티컷주 레딩
.직업: 작가, 강연자
.국적: 미국
.필명: 마크 트웨인
.장르: 소설, 역사 소설, 아동문학, 넌픽션, 여행기
.사조: 작가
.배우자: 올리비아 랭던 클레멘스
.자녀: Langdon, Susy, Clara, Jean
.학력: 1907 옥스퍼드대학교 명예박사
.경력: 열두 살에 인쇄소 견습공 생활, 1857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 1865 유머 단편 ‘캘리베러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발표, 1869 유럽과 팔레스타인 성지 여행기 ‘철부지의 해외여행기’ 발표, 1885 ‘허클베리 핀의 모험’ 발표, 1894 투자 실패와 경영하던 출판사의 도산으로 파산, 1895 세계 순회강연
.주요 작품: 허클베리핀의 모험, 톰소여의 모험
마트 트웨인의 본명은 새뮤얼 클레멘스 (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미주리주에서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4세 때 가족을 따라 미시시피 강가의 해니벌로 이사왔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후 인쇄소의 견습공이 되어 일을 배우고, 각지를 전전하였다. 1857년 미시시피강의 수로안내인이 되었는데, 해니벌로 이사한 뒤부터 이 시기까지의 생활과 경험은 후일 작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필명인 마크 트웨인은 강의 뱃사람 용어로 안전수역을 나타내는 ‘두 길'(한 길은 6피트)을 뜻한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터져 수로안내인 일자리를 잃고 남군에 들어갔으나 2주일 만에 빠져 나와, 관리로서 네바다주로 부임하는 형 오라이언이 권하는 대로 서부행 마차여행에 동행했다. 그 후 광산기사와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만담과 만문(漫文)의 명수 아테머스 워드를 알게 되었고, 또 작가인 F.B.하트와도 사귀었다.
처녀 단편집 『캘리베러스군 (郡)의 명물 뛰어오르는 개구리 : The Celebrated Jumping Frog of Calaveras County』를 1867년에 출판하게 되고, 야성적이며 대범한 유머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유럽과 성지를 도는 관광여행단에 참가하여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하였다가, 귀국한 후에 다시 정리하여 『철부지의 해외 여행기 : The Innocents Abroad』 (1869)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서 그는 유럽의 역사와 예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전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마크 트웨인은 다른 어떤 미국 작가보다도 적극적으로 문학의 힘을 발견했고, 미국적 장면과 모국어의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이다. 헤밍웨이 “모든 미국 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웨인이 성공적으로 미국 생활을 포착해 낸 것은 그의 경력과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남북전쟁 전 미국의 건립 시기에 중부에서 태어난 트웨인은 현대식 국가의 형성기에 살았으며, 서부 개척지의 관습뿐만 아니라 복잡한 동부의 거실이나 회의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 및 세계 문학에서 대작으로 손꼽히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사회부적응자인 허크가 도망 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면서 시작된다. 이 모험은 인종과 미국의 비극적 결함이라는 핵심 문제와 관련된 트웨인의 사회 풍자를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의 항해가 허크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된다. 따라서 짐의 인간성을 대변하며, 또 위엄성 및 자유에 대한 주장을 대신하여 지옥에 가려는 허크의 결정은 그들의 모험을 심화시켜준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진정한 미국 신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톰소여의 모험 : The Adventures of Tom Sawyer』 (1876) 『미시시피강의 생활 : Life on the Mississippi』 (1883) 등의 걸작을 썼으며, 특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 :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은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아의 정신과 변경인 (邊境人)의 혼(魂)을 노래한 미국적인 일대 서사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서 왕궁의 코네티컷 양키』, 『왕자와 거지』, 『불가사의한 이방인』 등은 중세 봉건주의 시대의 유럽을 무대로 하는 통렬한 사회 풍자물이다.
– 이름에 대하여
마크 트웨인은 필명으로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 (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사실 그는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 말고도 ‘토머스 제퍼슨 스노디글래스’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지만 이 이름으로 낸 작품은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아서 쓰지 않게 되었다.
마크 트웨인이란 필명은 그가 젊은 시절 증기선에서 일하면서 증기선이 항구로 도착할 때 물속 깊이를 재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물 깊이를 패덤 (fathom; 1패덤 = 2야드 = 182.88 cm)이라는 단위로 측정하는데, 정확히 몇 패덤이라고 나오면 “By the mark~”로 알린다.
이때 2패덤이 나올 경우 “two”라고 하지 않고 “twain”이라고 한다.
즉, 정확히 2패덤이 나온다면 “By the mark twain.”이라고 말한다.
2패덤(약 3.66m)은 강을 지나가는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평균 깊이다.
한가지 더 알려진 가설로는, 마크 트웨인이 바에 가서 술을 마실 때, 그는 항상 술을 두 잔 시켰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바텐더에게 나를 보면 술을 항상 두 잔 내오라며 카운터에 2를 새겨놓으라고 (Mark down two) 부탁했는데 이에서 필명을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첫 번째 이야기보다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이제이어 셀러’라는 이름의 미시시피 강 수로 안내인이었는데, 그는 수로 안내인 생활에서 겪은 것을 토대로 잡다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새뮤얼 클레먼스가 그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익살스럽게 흉내 냈다.
그 뒤로 셀러는 다시 글을 발표하지 않았고 클레먼스가 마크 트웨인을 필명으로 썼다.
○ 생애 및 활동
1835년 미국 미주리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4살 때 가족이 미시시피 강변의 소도시 Hannibal (또는 St.Petersberg, Missouri주)로 이사갔다. 미시시피강 주변의 자연은 그의 유년기에 깊은 인상을 남겨 그가 후에 쓴 《톰소여의 모험》 등의 무대가 되었다.
11살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브라질을 탐험하고 미시시피강을 누비는 증기선의 키잡이 일도 하였다. 이 때 사용한 수심 깊이의 단위를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1840년대 미국 서부에서 금이 발견되어 소위 서부개척이라는 붐이 일어나자, 마크는 약간의 토지를 매입해 금을 찾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덕분에 빚이 늘어나 신문사 일을 했는데, 그가 일한 신문이 첫 단편들을 실어 마크 트웨인이 작가로서의 호평을 받게 해준 캘리포니언 지이다.
작가가 된 이후로는 그가 쓴 사실주의 글들에 대해 비판이 많이 들어왔는데, 특히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언쟁에 많이 말려들었다고 한다. 특히 이러한 언쟁은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바에서 일어났는데, 언쟁의 끝에 참지 못한 상대가 권총 듀얼을 신청하면 트웨인은 슬금슬금 도망쳐 나와 기차를 타고 다른 마을로 가 다시는 그 곳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아무리 까대도 상대가 상대를 않자 마크 트웨인은 신이 났는지 더 신나게 까댔는데 참다못한 상대가 결투를 신청하자 그제서야 시무룩해졌으나 결투 전 친구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이 일로 인해서 마크 트웨인은 결투를 몹시 싫어해서 결투하는 사람이나 결투를 부추기는 사람만 보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총으로 쏴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한다.
독설가적인 면모와 대조적으로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하고 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 올리비아를 매우 사랑하여 아내가 아프면 그는 이런 글을 나무에 걸어둘 정도였다.
“새들아, 너희들이 우는 것은 본능이니 울지 말라곤 하지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좀 멀리서 울면 안 되겠니? 지금 우리 아내가 잠을 자고 있단다.”
부인과 결혼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신문사에서 여행을 보내주며 여행에서의 영감으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그 여행 중 우연히 지금 부인의 오빠를 만난다. 당시 조금씩 유명세를 얻어가던 트웨인이었기에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오빠가 그를 자신의 선실로 초대하는데, 거기서 트웨인은 미래 부인의 사진 혹은 그림을 보고 반해 버렸다. 그리고 오빠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부인에게 청혼하지만, 부인은 장인의 반대 등으로 트웨인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러자 그는 비장의 수를 쓰는데 바로 마차에서 스스로 굴러떨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허리를 다쳐 며칠간 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동안 끈질기게 청혼을 한 결과 부인이 결국 받아들였다고 한다.
다만 선량한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았지만 4명의 자녀 중 3명을 병으로 일찍 잃었기 때문. 장남 랭던은 생후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이때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자서전에서 트웨인은 추운 겨울 날씨에 아들을 바깥에 데리고 나간 게 잘못이었다며 크게 자책했을 정도다. 큰딸 수지는 뇌수막염으로 1896년에 일찍 사망했다. 게다가 아내도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 심부전으로 190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죽은 지 5년 뒤인 1909년에 남은 막내딸 진마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트웨인의 동생도 증기선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나마 둘째 딸 클라라는 88세까지 장수했지만 그녀의 딸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다수의 가족들이 요절했기 때문인지 트웨인은 죽기 전 우울증에 시달리다 1910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편집인 하월스가 뉴욕의 장로교회에서 치러주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지인과 팬들 3천명이 조문객으로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가 핼리 혜성이 지나갈 때 태어나서, 살아생전 트웨인 자신은 “혜성이 다시 지나갈 때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이루어졌다.
○ 문학
마크 트웨인은 1865년 <뜀뛰는 개구리>로 문단에 등단하였고, 이어 <순박한 여행기>로 인기를 끌었다. 생활의 체험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그 속에 자연 존중, 물질 문명의 배격, 사회 풍자 등을 표현하면서 유머와 풍자에 넘치는 작품 경향을 보였다. 뒤에 인류에 대한 절망, 비관론자가 되어 <인간이란 무엇이냐> <보지 못한 소년> 등을 남겼다.
– 작품 세계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흔히 미시시피 3부작으로 통칭되는 《톰소여의 모험》, 《미시시피강의 추억》, 《허클베리핀의 모험》 등은 다분히 미국적이고 자유스러운 영혼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으며, 《아서왕과 코네티컷 양키》, 《왕자와 거지》, 《불가사의한 이방인》 등은 중세 봉건주의 시대의 유럽을 무대로 하는 통렬한 사회 풍자물이다. 이 중 19세기 미국인을 아서왕의 카멜롯으로 시간여행시키는 과학 소설 《아서왕과 코네티컷 양키》와 중세 오스트리아 성채에 나타난 초인 N.44의 이야기를 다루는 환상 소설 《불가사의한 병》이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말년에는 ‘노예 있는 자유국’ 즉, 자유주의나라이면서도 노예제도가 있는 미국의 모순을 폭로하고 바로잡기에 힘썼다.
– 사상
당대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지금 보면 굉장히 선구자적인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다. 남부연맹군, 정확히는 친노예제 민병대에 자진 입대해서 2주간 복부했다 탈영하는 병크도 있었지만, 그는 열렬한 노예폐지론자 (Abolitionist)였으며, 여성참정권을 주장했고, 소수인종에게 동정적이었다.
다만 《톰 소여의 모험》에선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혼혈인 조가 악역으로 나온 걸 두고 비난하는 분석도 있다. 허나 이것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이나 한계를 무시한 과잉 비난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는데, 마크 트웨인이 살던 시대와 소설의 배경은 1800년대 중후반이다. 이 시대에는 게으르고 무지하나 천진난만한 흑인, 무책임하고 도덕 관념이 없는 아메리칸 원주민 캐릭터가 문학적 요소로 자연스럽게 쓰이던 때다. 물론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깊던 마크 트웨인이 굳이 아메리카 원주민 관련 캐릭을 악역으로 설정했어야 되냐에 대해선 생각이 갈릴 수도 있지만, 그럼 그의 문학 작품에서 악역은 무조건 백인만 해야 된다는 논리도 당연하지 않다.
실제 마크 트웨인은 당대 기준 계몽주의자로 당시 유행하던 제국주의도 혐오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시절 조국인 미국이 필리핀으로 쳐들어갈 때만 해도 제국주의 국가 스페인에게서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키려는 전쟁으로 여겨 환영했지만, 갈수록 미군이 필리핀인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에 실망하고 분노하여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을 써서 미국을 학살자라고 분노어린 비난을 호되게 쏟아냈다. 때문에 이 책은 미국에서 24년간이나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 13년이 지난 1923년에서야 나오게 된다.
그 밖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중미에서 벌어지는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지배를 지독하게 싫어해 이를 풍자하는 글도 많이 썼다. 때문에 “열등한 필리핀을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며 필리핀 침략전쟁 및 학살을 옹호하고 또한 백인 우월주의 사상인 백인의 의무를 내세운 러디어드 키플링을 극도로 혐오했다. 하지만 키플링의 문학적 재능은 칭찬하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은 글도 썼다.
그 밖에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를 악마라고 비난하며 그가 콩고에서 저지른 학살을 비난했고, 레오폴드 2세보단 덜하긴 했지만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는데 앞장서서 자원과 영토 탈취와 원주민 노예화 등 악행을 저질렀던 세실 로즈를 반어법으로 찬양하면서 비꼰 인물이기도 하다.
– 풍자
정치적으론 굉장히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저서 《도금 시대》 (Gilded Age)에선 미국 정치인을 싸잡아 더럽다고 풍자했으며 정치적 비리와 선거에 대한 여러 일화를 콕 짚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 비난도 많이 받았으며 교회에서도 그를 사탄이라고 많이 비난했다고 한다.
이에 사과문 (몬티 파이선 스케치)도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작성해 종교계와 정치계를 통렬히 풍자했다.
– 기독교인 마크 트웨인의 기독교 근본주의 비판
또한, 그의 말년에는 <지구로부터의 편지>를 출판했으며, 당시 미국내에서 형성되고 영향을 주던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마크 트웨인은 진보적인 장로교 신자였지만, 《마크 트웨인 자서전》에서도 보수적 개신교 입장을 비판하였다.
자서전에서 마크 트웨인은 “노예제도가 하나님이 인정한 신성한 제도라 가르쳤고 의심이 들어 확신하고 싶다면 성서를 들여다보라고 말하면서, 해당 구절을 큰 소리로 읽어 주곤 했던 개신교 성직자들을” 언급함으로써 부당한 사회현상을 논박하기보다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문자주의로써 정당화하고 유지하려는 극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의 잘못을 비판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여 반기독교인으로 오인하나, 도리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활동 중에서 많은 부분이 반기독교적이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에서 진보적인 개신교회인 장로교의 성실한 신자였다.
○ 작품들
캘리베러스군 (郡)의 명물 뛰어오르는 개구리 : The Celebrated Jumping Frog of Calaveras County (1867)
철부지의 해외 여행기 The Innocents Abroad (1869)
톰소여의 모험 : The Adventures of Tom Sawyer (1876)
미시시피강의 생활 : Life on the Mississippi (1883)
허클베리 핀의 모험 :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도금시대(1873)
왕자와 거지(1881)
아서 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1889)
불가사의한 이방인
전쟁을 위한 기도
지구로부터의 편지
고난을 넘어
도보 여행기
적도를 따라서
바보 윌슨의 비극
인간이란 무엇인가?
○ 평가
한국에서는 아동소설 작가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미국 풍자 문학, 나아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부터 나왔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ㅡ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 문학의 아버지. ㅡ 윌리엄 포크너
○ 어록
“예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그 분께서는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 트웨인의 발언은 근대 기독교의 전교 또는 선교활동과 식민주의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나온 것이다.
“한 개인의 기질은 불굴의 법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찬성하지 않더라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어떤 인간에게는 사악한 특징이 얼마 없어서 감지되지 않는 반면에 고귀한 특징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그 훌륭한 특징을 가지고 그 사람을 칭찬한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특징을 만들어 내지 않았고 자기 속에 스스로 쌓지도 않았다. 그 특징은 신이 그에게 부여한 법칙이기 때문에 발버둥쳐도 결국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 타고난 살인자나 악당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온갖 비난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복종했을 뿐이다. 설사 거역하려 애썼더라도 실패했을 것이다. 인간 종족은 무자비한 말과 쓰디쓴 비난을 받기에 적절한 표적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에게 적합한 가장 정당한 감정은 동정이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인간은 자신의 약하고 어리석은 특징을 스스로 만들지도 않았고 계획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